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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창



장루징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다름 아닌 파운드리 업체 TSMC와 SMIC의 관계입니다.

T사는 대만, S사는 중국의 회사라 완전 별개의 회사 같지만, 사실 T사의 창업자와 S사의 창업자는 굉장히 가까운 애증의 사이입니다. 둘은 미국에 있을 때 같은 반도체 회사 (Texas Instrument)에서 오래 근무했었고, S사의 창업자 (1977-1997, TI근무, TI DRAM R&D 책임자로 퇴임)가 T사 창업자 (1958-1983, TI근무, TI 부사장으로 퇴임)밑에서 오랫동안 부하 직원 격으로 수련을 받았죠. T사 창업자는 MIT에서 학/석사 학위 이후, 스탠포드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대만인이고, S사 창업자는 애초 중국 난징 태생으로,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주할 때 부모를 따라 같이 대만으로 옮겨 간 후, 국립 대만대 기계공학과 졸업 후,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S사 창업자는 1977년부터 1997년까지 TI의 DRAM R&D 에서 업계 경력을 쌓았습니다.

TSMC는 1987년, 모리스 창 (대만명: 장중머우 (張忠謀), 1931년 생, 첫번째 첨부 사진)이 설립했고, 그는 2018년까지 T사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말그대로 대만의 반도체 신화 그 자체가 되었죠. SMIC의 창업자 리처드 장 (중국명: 장루징 (張汝京), 1948년 생, 두번째 첨부 사진)은 1997년 TI 퇴직 후, 고국 대만으로 귀국했습니다. S사 설립 이전, 그는 대만 화방뎬 (華邦電) 등의 펀딩을 받아 스다반도체 (世大半导体)라는 반도체 회사를 하나 설립했는데, 그 회사를 하필 자신의 전임 상사였던 TSMC의 장중머우가 50억 달러라는 거액으로 인수합니다 (물론 이 때의 인수는 업계 1위였던 T사가 업계 3위까지 껑충 뛰어오른 스다반도체를 더 크기 전에 죽이려는 의도가 다분했죠.). 인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던 리처드 장은 뒤통수를 맞은듯, 큰 충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지분을 고가에 처분하여 그 돈을 시드머니 삼아, 그는 2000년, SMIC (중신궈지)를 설립하면서 아예 본사를 중국 상하이로 옮깁니다. 이후 상하이실업 (上海實業), 미국 골드만삭스, 싱가포르 테마섹, 대만 한정야타이 (汉鼎亚太)와 화덩궈지 (華登國際) 등 16개 국내외 업체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유치한 후, 해외에 있던 중화권 엔지니어 수백 명 (이 때 TSMC의 기술 인력도 많이 채용했는데, 이것이 훗날 큰 화근이 됩니다.)을 대거 채용, 이후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중고 파운드리 장비를 저렴하게 인수하여, 마침내 상하이에 8인치 웨이퍼 라인 3개, 베이징에 12인치 웨이퍼 라인 2개를 공격적으로 건설하는 등, 본격적인 웨이퍼 생산에 돌입합니다 (당시에 세계 최단 기간 라인 건설이라는 기록을 세우는 등, 업계의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마침 회사 설립 초기 당시인 2000년대 초-중반은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 결과, 중소 업체들의 구조조정이 한창일 때였고, 미국도 딱히 중국의 이름 모를 저가 파운드리 업체에 대해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던 때라, S사는 여기저기 유상증자를 받고, 미국 모토로라 같은 업체의 웨이퍼 공장을 저가에 매수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와 경영 전략으로 마침내 중국 1위의 파운드리 업체로 등극합니다.

'중신궈지 (中芯國際)'라는 회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리처드 장의 경영 전략은 중국의 기술 굴기, 특히 반도체 기술의 자주 독립 철학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SMIC는 사세의 확장 과정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T사와의 차별 전략을 위해, 파운드리 뿐만 아니라, 로직 IC, 시스템 반도체, DRAM에 까지 영역을 넓혀 갔습니다. 이는 T사가 주로 파운드리에 집중했던 것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전략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S사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했던 것은 장 회장의 로비 능력과 더불어, 기술굴기를 표명했던 중국 공산당 정부의 밀어 주기, 그리고 굉장히 유리한 조건으로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던 관치 금융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호사가 있으면 다마가 있는 법이죠. 2009년, 그간 기술 유출과 특허 침해에 대해 참고 참아 오던 T사가 S사를 정식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에 10억달러 규모의 특허 침해 (그리고 사실 기술인력 수백 명 유출에 대한 괘씸죄도 있었죠.)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고,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양사는 2억 달러 규모로 손해 배상을 합의했는데, T사는 현금 대신 S사의 지분을 2억 달러만큼 인수했고, 덕분에 T사는 S사의 2대 주주로 단번에 올라서게 됩니다. 이로 인해 S사의 회장 장루징은 모든 책임을 지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정부에 로비를 하여, T사가 대주주로서의 경영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씁니다. 장루징은 중국 정부를 설득하여 3억5000만 달러 투자를 유치했고, 1대 주주가 된 중국투자는 다시 중투라는 곳에서 2억5000만 달러를 끌어들여 2대 주주가 되었는데, 이로써 S사는 사실상 국유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후 2010년대 중반, SMIC 이사회는 후임 CEO로 중국 전자공업부 전직 차관을 임명함으로써, S사는 바야흐로 중국 정부가 좌지우지하는 반도체 기업이 되었음이 확실해졌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런 전력이 있기 때문에, T사는 S사를 굉장히 견제했을 것 같지만, 속으로는 둘은 전략적 공생관계였습니다. 어차피 파운드리는 T가 월등한 퀄리티를 자랑하니, 상대적으로 저가의 제품 파운드리에 S사가 집중하면서, 대신 S사는 반도체 칩의 자체 생산과 영역 확장에서 다시 T사에 대해서는 주요 고객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세간에서는 두 장 회장의 오랜 경쟁심이 T사와 S사의 적대 관계에 깔려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둘은 그 이상으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계속 구축해 왔으니까요. S사가 중국 정부의 기업이 된 이후에도,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되기까지 장장 20여 년을 두 회사는 보이지 않는 커넥션을 만들면서 경쟁도 하고 서로 제소도 했지만, 기술 이전, 연구원 교류, 특허 교환 등의 방법으로 꽤 끈끈한 애증어린 비즈니스 관계를 다져 왔습니다. 실제로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도 다소 자신감을 보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TSMC가 우선적으로 SMIC에 파운드리 물량을 확보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T사와 S사의 관계가 일반적인 동반자 관계 이상임을 보여 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리처드 장은 SMIC 회장 퇴임 이후에도, 다시 재기, 칭다오 소재 반도체 업체인 신언그룹 (芯恩集團)을 창업하여, CIDM 반도체 (Commune IDM, 공동형 반도체) 사업을 공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습니다. '중국 반도체의 대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답게, 그는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제조 (中国制造) 2025’의 핵심 인물로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그야말로 중국 반도체 굴기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의 제재 때문에 T사가 눈치를 보며 S사와 거리를 벌리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미국의 제재가 느슨해지면 언제든 두 회사는 다시 원래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돌아 갈 수 있고, 더구나 같은 (대) 중화권의 문화적 배경, 양 사의 인적 구성을 고려하면, 더 끈끈한 결속력을 보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T사가 언제고 중국의 팹을 음으로 양으로 되살릴 수 있고, 따라서 미국의 제재는 T사에 대해 특히 더 집중하여 모니터링하는 것으로 유지될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앞으로 SMIC가 정말 중국 반도체 굴기의 한 가운데에서 중국의 존버를 가능하게 할지 여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힌트는 TSMC가 SMIC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직간접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는지를 보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행여나 SMIC가 수백 억, 수천 억 달러를 들여 TSMC를 인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중국 정부는 TSMC를 그냥 놔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TSMC의 2대 주주는 대만 정부인데, 대만 정부 입장에서도 이는 양안 관계의 핵심 이익 문제 중 하나일 것이므로, 이 문제는 단순히 반도체 업계의 기술 경쟁 문제로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정치 문제로 쉽게 발화될 수 있는 문제고, 미국 역시 이 두 회사의 관계를 더욱 눈 여겨 볼 것이라 생각합니다. T사로부터 인력과 기술 공급, 장비와 재료 수급이 어려워진 S사는, 당연히 그 다음 타자인 삼성에 대해 눈독을 들일 것이고, 특히 인력에 대한 부분에 더 공을 들이게 될텐데,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럽게 상황을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이직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 인재가 핵심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이직하는지 여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미국 AMD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1994-2011년 TSMC에서 팹 부문 R&D 책임자로 재직 후, 2009년 성균관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로 영입되었다가, 다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시스템 LSI 사업 부문 삼성전자 부사장으로 재직 후, 2017년 SMIC의 공동 CEO로 영입되었던 양몽송 (대만명: 량멍쑹 (梁孟松), 1952년 생, 세번째 첨부 사진) 같은 인물은 SMIC가 오랜 기간 굉장히 공들여 영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T사와 삼성의 이직 금지 소송에 걸려 있습니다만, 중국으로 넘어 간 이상 다 무시하고 있죠.). 양회장은 AMD는 물론,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기업 방식과 반도체 관련 기술 정보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으니, 정말 SMIC 같은 후발 주자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핵심 인재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양회장의 합류 후, SMIC는 28 nm에서 멈춰 있던 패터닝 공정이 14 nm로 갑자기 급진전되는 성과를 이룩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핵심 인재 영입은 미국의 제재 조치 하에서 상당 부분 제동이 걸리겠지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는 SMIC의 공격적인 영입 정책은 TSMC, 삼성전자, 그리고 여러 중소규모 반도체 소재/장비 업체로 확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핵심 인재로 분류되는 반도체 엔지니어들과 R&D 인력에 대한 대우 수준이 반드시 SMIC 이상으로 격상되어야 할 것이며, 기술 보안에 대해서도 지금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대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바야흐로 중국 발 반도체 굴기는 핵심 장비는 물론, 주변 국가들의 S급 핵심 인재 쟁탈전으로 번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개별 회사 차원과 더불어, 국가 차원에서도 충분히 문제를 인지하고 대응 전략을 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