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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강력한 범죄 조직은 항상 공권력의 위협에 그림자로 숨어들기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들켜서는 안 될 만행들이 수두룩하고,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기에 공권력을 장악하거나, 반대로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직 내에서 키워낸 암살자를 칭하는 단어이다.

늘 어둠 속에 숨어들어 신분의 노출을 꺼리지만, 때로는 환하게 밝은 대낮을 활보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많고 많은 조직들 중 하나인 'The Call'의 암살자 『도르네즈』는 충실한 개로써 맡은 바 임무를 다 하는 특출난 살인청부업자이며, 무슨 겜블이든 이길 수 있는 판의 지휘자이다.


며칠 전, 도심 속 어느 지하실의 단둘만 있는 조용한 겜블판.


"스페이드 로티플. 아무래도 이번 판은 제가 이긴 것 같네요."


깜박이는 하나의 조명 아래 남녀 한 쌍이 테이블에 모여 카드를 쥐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로 카드의 위가 보이도록 패를 던졌다. 그녀가 내민 카드는 스페이드 10, J, Q, K, A였다. 포커 게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족보이자, 왕에 군림하는 확률을 가진 카드들이다. 당연히 그녀의 맞은 편에 앉은 상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된 상태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건 말도 안 돼! 사기 치지 말라고! 저년이 분명 무슨 사기를 쳐서 나온 게 틀림없어!"

"사기라고요? 증거도 없으면서 무슨 소리세요?"


남자는 쥐고 있던 카드가 구겨지도록 세게 잡아 던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네년이 분명 밑장을 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65만 분의 1 확률을 기적적으로 뚫을 수가 없다고!"


테이블에 놓인 칩의 개수에 따라 상대에게서 돈을 가져가는 형식의 도박판, 남자가 쥐고 있던 카드는 백 스트레이트 플러쉬라고 불리는 'A, 2, 3, 4, 5'였으며, 그중 스페이드 다음으로 높다는 다이아몬드 문양이었다.

매 게임 내내 지기만 했던 여성을 상대로 승기를 굳히기 위해 칩을 모두 걸고 의기양양했던 그에게 내밀어 진 사형선고.

남성은 이 한순간의 결과로 전 재산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649,740분의 1 확률이죠. 근사치에 가까운 확률이었네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네가 유리한 판이 될 때까지 패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고."

"그럼 반대로 제가 패를 조작했다는 증거는 있나요?"

"그, 그건…."

"눈은 손보다 느린 법이에요. 설사, 사기를 쳤다고 해도 들키지 않는다면 사기가 아니에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증거나…!"

"증거는 오히려 그쪽에 있는데요?"

"뭐…?"


여성이 남성의 소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소매, 실은 특수하게 제작된 소매죠? 안쪽의 테이프로 카드를 숨길 공간을 만들어 언제든 꺼낼 수 있게 만들어져 게임을 뒤흔들어 왔잖아요?"

"무, 무슨…! 이건 모함이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그런 망발을…!"

"제가 소매 한 번 들춰볼까요?"


남성이 식은땀을 흘렸다. 다 이긴 게임을 졌다는 것도 모자라 숨기고 있던 비밀까지 들켜버린 탓에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어쨌든 이겼으니 된 거겠죠? 확률은 확률이고, 게임은 게임. 이 돈은 제가 전부…."


탕!


"?!"

"그 손 치우시지?"


남성이 권총을 꺼내 여성의 손 근처에 쐈다. 여성이 움찔 놀라며 멈칫하자, 남성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년이 가져갈 돈은 한 푼도 없다. 가진 것도 전부 내려놔."

"이런, 이런… 제가 당한 건가요?"


여성이 두 손을 들었다. 남성은 권총을 겨눈 채로 칩을 쓸어 담으려 했고,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소매에서 카드를 꺼내 권총에 날렸다.


파각.


"무슨…?"


검은 바탕에 붉은색 카드가 권총의 슬라이드를 관통해 잼이 걸리는 동시에 여성이 테이블을 올려 차 남성을 덮쳤다. 남성은 곧바로 테이블을 걷어내며 일어서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 들이밀어 진 차가운 금속에 눈을 크게 뜨고 멈추었다.


"승패가 났음에도 결과를 거부하면 안 되죠, 아저씨?"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누군지는 나랑은 상관없는데, 이번 타겟이 당신인 건 알고 있죠."

"나는 더 콜의…!!!"


타앙.


남성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도르네즈는 쓰러진 남성의 권총에서 카드를 회수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

.

.


"코드 네임 『도르네즈』를 현 시간부로 'The Call'에서 영원히 퇴출한다."


어두운 공간에서 붉은빛을 받으며 세 구역으로 나뉜 책상에 앉은 사람들이 한 여성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 짙게 깔린 목소리를 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도르네즈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명령, 조직에서의 영원한 추방이었다. 임무를 제대로 완수했음에도 달갑지 않은 보상에 도르네즈가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변하지 않았다.


"넌 우리의 중요한 인사를 게임에 불러내어 그의 재산을 갈취하려 했으며, 그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이거 말고 뭐가 있나?"


오른쪽 테이블의 안경 낀 남성이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타겟이었다고…."

"첫째, 우리는 너에게 임무를 부여한 적이 없다."

"뭐, 뭐라고요…?"


도르네즈는 분명히 상부의 암살 의뢰를 받았다. 최대한 은밀한 곳으로 유인해 암살하라는 명령이었다.


"둘째, 네가 암살한 대상은 우리 조직이 비밀리에 접선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있어야만 조직의 운영에 차질이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분명….'


도르네즈는 남성이 죽기 직전 한 말을 떠올렸다.


'나는 더 콜의…!!!'


분명하게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름을 말했었다. 그가 정말로 조직과 관련된 인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도르네즈가 더 콜에서 온 것을 알고 조직 이름을 말했었을까?


"넌 이번 일을 통해 우리 조직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렇기에 영원히 퇴출한다."

"내… 내가… 내가 그런…."


도르네즈의 손이 떨렸다. 조직을 위해 살아온 그녀가 조직에서 추방된다는 이야기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이건 무언가 잘못된 겁니다!"

"그렇다면 증명해봐라. 너에게 명령을 내린 건 누구지?"

"그, 그건…."


도르네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더 콜의 규칙 중 하나이자, 더 콜이 비밀리에 도르네즈 같은 요원을 운영하는 방식인


'의뢰인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임무만 완수하면 그만이다.'


라는 이유로 음성 변조된 테이프를 전달받아 임무를 전수받는다. 그러면 테이프는 자동으로 모든 기록을 불태워 증거 인멸을 한다.

이번 임무도 마찬가지였다. 본부 밖에서 시간을 보내던 도르네즈에게 누군가가 테이프를 전달했고, 테이프의 내용대로 겜블판에 유도해 암살했다.

분명 그럴 터였다. 누군가가 도르네즈를 거짓된 암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말해라. 누가 너에게 이번 의뢰를 하달했지?"

"그, 그건… 그러니까…!"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답하고 싶어도 정답으로 제출한 인물도, 증거도 없었다. 테이프는 불탄 그대로 현장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쓰레기통을 비우기에 찾을 수 없게 된다.

반대로 말해서 도르네즈가 제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는 것이 된다.


"벙어리가 아니라면 대답해보란 말이다, 도르네즈!"

"……."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런 이런, 다들 너무 날이 선  아닙니까?"


왼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슬쩍 들며 말했다. 덩치가 어느 정도 되는 대머리의 남성이었다.


"이 친구도 자기 암살 대상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하잖습니까? 이쯤에서 그냥 조용히 퇴출시키고, 사건을 덮읍시다."


남성의 말에 몇몇이 수긍하는 듯했다. 도르네즈는 이대로 퇴출이 확정된 상태에서 최선의 대답을 찾아 머릿속을 뒤적였다.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조직에서 의뢰한 일이 아니라고? 우리 조직에서만 사용하는 코드와 방식으로 명령을 받았어. 그렇다면… 나한테 명령을 내린 건… 내부에 적이 있다!'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한 이가 분명 이들 중 하나는 있을 것이다. 도르네즈는 붉은빛에 가려진 얼굴들을 빠른 속도로 훑어보았다. 정면의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들은 아니었다.

오른쪽 테이블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처음부터 도르네즈의 퇴출을 노래하고 있었던 만큼 이 일을 계획한 이들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 역시 화가 나 있었다. 연기는 아닐까 생각하며 도르네즈는 마지막으로 왼쪽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일어선 남성과 앉아있는 두 명의 사람,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어선 남자인 것인가?


'그래, 그렇게 있어라. 넌 여기서 끝이다.'


"…!?"


일어서서 다른 이들을 진정시키던 남성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곁눈질로 도르네즈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장난감을 바라보는 시선에 도르네즈는 소름이 돋았다.


'암살자의 감이 말하고 있어. 명령을 내린 건… 저 자다!'


"그럼 예정대로 도르네즈는 이 시각부터 영원히…."

"범인을… 범인을 알 것 같습니다!"


한순간 모든 이들의 이목이 도르네즈에게 집중되었다. 정면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가 조용히 질문했다.


"누가 범인이지?"


도르네즈는 일어서있던 남성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대답했다.


"바로 저 자입니다! 저 자가 이번 의뢰를…!"

"증거는?"

"…!"


손가락질 당한 남자가 묻자, 도르네즈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 음성 변조된 목소리의 말투는 그와 비슷했지만, 그걸로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말하던 그때의 여유 넘치는 미소조차 증거로는 불충분했다.


"증거는 있냐니까?"

"그러니까…."

"조용!"


오른쪽 테이블의 남성이 또다시 소리쳤다.


"도르네즈, 넌 중요 인사를 암살한 것도 모자라 고위 간부를 모욕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퇴출 사유가 된다!"

"……."


도르네즈는 쥐고 있던 손바닥이 손가락에 파일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왼쪽 테이블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가 금니를 들어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당신이 나한테 그자를 암살하라는 의뢰를 넣은 거잖아!"


도르네즈가 소리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소매에서 꺼낸 무기인 검은 바탕에 붉은 문양 카드가 붉은빛에 반사되었다.


"이 여자가 돌았나…?!"


순간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력과 기술을 인정받아 간부가 된 자도 있었지만, 다른 일을 통해 간부가 된 자가 더 많았다. 그들이 소리치며 겁 먹고 몸을 숨기려 했지만, 왼쪽 테이블의 남자만큼은 아니었다.


"꿇려."


남자의 명령에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들이 순식간에 도르네즈를 제압해 꿇렸다.


"날 모욕한 것도 모자라, 다른 간부들을 위협하려 했다니… 자넨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가 친히 퇴출하는 쪽으로 도와주려고 한 건데, 그런 배려를 몰라보다니 한심하군."


시가에 불을 붙여 크게 한 모금 내뱉은 남성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 도르네즈는 저에게 맡겨주시죠. 제가 여기서 그녀를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남자가 고맙다는 말을 하며 다른 간부들이 모두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방 안에 도르네즈를 제압한 인원들과 남자만이 남자, 남자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여 도르네즈에게 내밀었다.


"퉷!"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려 주려 했음에도 호의를 비난하듯 얼굴에 침이나 뱉었기 때문이다. 침을 대충 털어낸 남자는 도르네즈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커헉…!!!"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덩치에 걸맞은 커다란 손에 고개가 돌아간 도르네즈는 조직원들 손에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조용히 퇴출시키는 거로 처리하려 했건만… 네 명을 네가 재촉한 거다. 녀석을 지하로 데려가라."

"지…하?"

"그래, 지하실에서 네가 앞으로 겪을 일들을 상상하면서 평생을 네가 사랑하는 조직에 받쳐라."


도르네즈는 지하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임무에 실패한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면 보이지 않는 지하실에서 비명이 들려온다는 소문이었다.


"하! 엿이나 먹으시죠? 그깟 소문만 번지르르한…."

"소문이라고 생각했나? 자넨 너무 무르군. 자네 같은 살인청부업자들이 머무르는 장소가 지하실이라고 생각했지? 아니, 그보다 더 아래. 한층 더 아래에 지하실이 있다는 걸 몰랐나?"

"날 그런 곳에 가둬서 뭘 하겠다고?"

"곧 알게 될 거다. 적어도 입에 고기는 물리지 않으마."


남자의 말에 도르네즈는 몸을 일으켜 그를 깨물려고 했다. 이대로 잡혀갈 바에는 하나의 저항이라도 더하고 싶었다.


"으아아악!!! 이, 이 년이…?!"


남자의 손을 깨무는 데 성공한 도르네즈는 거친 발길질에 몸이 뒤로 젖혀졌다. 손에서 흐르는 피를 최대한 막고자 손수건으로 지혈을 시작한 남자는 욱씬 거리는 아픔에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년을 기절시켜.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넵, 보스!"


도르네즈가 발길질의 아픔에서 금세 회복해 조직원들을 뿌리 치려 했다. 그런 그녀의 뒤통수에 권총 손잡이가 둔기처럼 가격 됐다.


"으윽…!"


도르네즈의 의식이 점차 사라져갔다. 범인은 대머리 남성이었다. 이대로 조용히 끝나지 않을 거라며 도르네즈는 그를 저주하며 빛이 꺼진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남성의 명령에 도르네즈를 붙잡은 조직원들이 그녀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그래, 언젠간 사라졌어야 할 녀석이야. 괜히 어느 소속에도 속하지 않아 암살당할 바에야 이렇게 손아귀에서 다룰 수 있으면 안전하니까.'


남성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시가를 한 입 크게 빨아들였다.


.

.

.


똑, 똑.

규칙적인 물소리가 어두운 지하실의 고요함을 깨웠다.


"으…음."


도르네즈가 깜박이는 단 하나의 조명 아래에서 눈을 떴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그녀를 속박했다. 흐릿한 눈동자로 자신을 속박한 것이 무엇인지 둘러본 도르네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강철 구속구?'


마치 고문용 의자처럼 생긴 좌석에 앉아 팔과 다리가 구속된 상태에 도르네즈는 당황스러웠다.


'비밀리에 실험하고 있다는 게 진짜였어? 뭐 때문에…?'


가끔 유통용 마약을 제조하기 위한 시설이 있는 조직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실험만을 위해 준비된 곳은 처음 보았다.

도르네즈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려고 시도했지만, 덜그럭 소리만 날뿐,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틀렸어. 도저히 힘으로는 풀 수가 없겠어.'


왜 자신을 이곳에 묵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찾아온 이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깨어났군. 진행해."

"예, 1번 샘플 투여하겠습니다."


검은 문과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밀실의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세 명의 의사로 보이는 이들이 플라스틱 쟁반에 약물이 든 주사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은 주사기의 상태를 확인하곤 곧바로 도르네즈에게 다가왔다.


"머, 멈춰!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허튼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움직이면 괜히 멍만 든다."

"자, 잠깐 멈… 윽!"


시퍼런 강철 바늘이 살점을 뚫고 들어갔다. 팔을 통해 약물이 천천히 주사되는 걸 느끼면서 도르네즈가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약물을 모두 주사했다.


"힘 빼. 안 빼면 괜히 바늘만 남아서 더 고통스러울 거다."

"으으으윽……!!"


그들의 말대로였다. 도르네즈가 힘을 너무 세게 준 나머지 혈관이 튀어나와 주사기가 단단히 고정되어 뽑기도 힘들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도르네즈의 팔에서 힘이 빠지면서 주사기가 빠져나왔다.


'뭐… 뭘 넣은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너희… 나한테 뭘 주사한 거야?"

"곧 알게 될 거다. 실험의 경과를 위해 이만 나가도록 하지."

"예."


도르네즈가 소리를 질러대며 그들을 비난했지만, 익숙하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도르네즈는 팔을 타고 서서히 몸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상한 기분에 생각이 많아졌다.


'이, 이게 뭐야…? 뭐가 자꾸 타고 올라와서… 목이 매스꺼워. 팔이 뜨거워! 힘이… 힘이 안 들어가….'


이상한 기분은 한순간 심장을 부여잡는 고통을 느끼게 했고, 거친 호흡을 내뱉은 도르네즈는 흐릿해지는 시야로 검은 문만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


"…이번이 4번 샘플입니다."

"지난번 결과는 어땠지?"

"3번 샘플의 결과는 약간의 부작용과 함께 각성 상태에 도달한 나머지 목과 배에 추가로 고정해야 했습니다."

"4번 샘플 진행하고, 경과 보고하도록."

"예."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벌써 4번째 약물 실험이었다. 도르네즈의 팔에는 수액 바늘이 꽂혀있었다.


'지금이… 몇 번 째라고…?'


멍한 의식으로 도르네즈는 4번째 약물이 투여되는 걸 몽롱한 몸으로 받아들였다.


'피부를 관통하는 느낌이… 안 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약물은 모두 주사되었고, 또 한 번 감았다 떴을 때는 그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아… 또 느껴져. 목이 타고, 속이 아프고, 곧….'


심장이 일순 정지했다.


"8번 샘플입니다."


"……."


도르네즈의 의식이 다시 돌아왔다. 전원이 나갔다 들어온 것처럼 암전되었던 시야가 천천히 밝은 조명으로 변해 눈앞의 이들을 확인했다.


"지난번의 호흡곤란이 빠르게 잦아들은 것이 확인됩니다. 8번 샘플에는 7번 샘플의 약 효과를 절반 이상 추가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마도 상태가 호전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부터는 아마도라는 단어를 쓰지 마라."

"…예."


또 그들이었다. 도르네즈는 자신의 팔에 꽂힌 바늘을 보았다. 주사기와 연결하기 쉽게 일부러 꽂아둔 두꺼운 고무호스였다. 고무호스에 주사기 바늘을 꽂아 혈액이 응고되지 않은 상태로 쉽게 전신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지독하리만치 악랄한 그들의 태세에도 도르네즈는 팔에 감각이 없었다.


"투여 끝났으면 나가지."

"예."


이번에는 주사기를 뽑은 후에 수액을 꽂고 나갔다. 아니, 어쩌면 이번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처음부터 그렇게 진행했을 것이다.

의식을 몇 번이나 잃은 것일까?

몇 번이나 깨어나서 몸부림쳤을까?

단 한 번도 아니었을까?


"……."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몇 번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도르네즈는 또다시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되새겼다.


"하아… 몸이 이젠 안 뜨거워."


어느새 의식이 회복된 도르네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오랜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언제 잠들지 몰라. …깨어 있어야 해."


다시 잠들게 될 거 같다면 그때는 혀를 깨물어서라도 깨어 있겠다며 다짐한 도르네즈는 검은 문 너머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또 실험인가? 지긋지긋해….'


의식이 없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갈 때에는 몇 번 꾸긴 했지만, 지금처럼 어떤 꿈도 꾸지 않은 적은 없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후우… 이젠 지치지도 않네. 이상할 정도로 멀정해. 이것도 실험의 산물인가?"


도르네즈가 작게 속삭이듯 자신에게 물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검은 문이 열리는 음침한 쇳소리뿐이었다.


"이야~ 이거 정말 반가운 얼굴이군요, 도르네즈 양. 지금쯤 얼굴이 퉁퉁 부어서 그 예쁜 미모를 잃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습니다."

"잭… 날 조롱하러 온 왔나?"


도르네즈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더 콜의 간부 『잭』이었다. 금발을 뒤로 넘긴 잘생긴 얼굴에 화상 자국이 난 느끼한 남자, 잭. 그는 능글맞은 미소로 두 팔을 벌려 말했다.


"오랜 친구가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에 이렇게 찾아왔건만, 정말 너무하는군요."

"그럼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별거 아닙니다. 상부에서는 당신에게서 몇 가지 정보를 빼내라고 해서요."

"……."


잭은 자신과 함께 온 부하들을 대등한 덕에 도르네즈가 노려본다 해도 움추려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기세 좋게 웃으며 물었다.


"당신에게 명령을 내린 건 누구입니까?"

"모른다."

"당신은 왜 명령을 따른 겁니까?"

"상부의 명령이니까."

"당신이 죽인 자… 그가 조직과 연관 있다는 걸 알았습니까?"

"모른다."

"당신 때문에 조직이 위험해질 걸 알고 있었습니까?"

"모른다."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한결같이 '모른다'로 일괄되었다. 잭은 흥미롭다는 듯 다시 질문했다.


"지금 몸에 주사된 약물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모른다."

"당신에게 주사된 약물은 일종의 각성제입니다. 신체 내 세포를 하나하나 각성시키는 특이한 효과가 있다더군요."

"세포를 하나하나…?"

"네, 세포를 하나하나요."


잭의 말대로라면 몸을 구성하는 세포 전체가 각성해 날뛴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도르네즈 자신이 어째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단순히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도르네즈는 실패작이었다.


"지금 당신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감각이 없어."

"어디에요?"

"팔에."

"실은 감각이 미쳐 날뛰는 건 아닌가요?"

"……."


주먹을 쥐어 보였다. 감각이 없던 팔의 혈관들이 갑자기 뜨겁게 반응하며 팔 전체가 들끓는 느낌이 들었다. 발가락을 오므려보았다. 발목이 뜨거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발이 오므려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감각은 죽지 않았습니다, 도르네즈 양."

"……뭘 원하는 거야?"

"당신이 접선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글쎄, 모른다니까?"

"이런 이런… 자꾸 모른다고 하시다니, 제가 카운터에 문의하는 게 이것보단 많은 대답을 들었을 겁니다."


잭은 한숨 쉬며 마지막 질문이라고 말했다.


"당신을 이곳으로 보낸 자는 누구입니까?"

"나를 이곳으로 보낸…."


며칠이나 지났을까?

얼마나 의식이 없었을까?

그동안 자신을 비웃었을 자를,

이곳으로, 나락으로 떨군 자는 누구인가?

대머리에 금니를 한 덩치가 큰 사내.

자신을 발로 걷어차고, 담배를 물리려고 했던 남자.

조용히 퇴출을 권유하던

시가 냄새를 풍기던 고위 간부….


"나를 이곳으로 보낸 녀석은…."


그의 이름은 모른다.

그저 심각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비웃으며 느긋하게 정리하려던

그자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대머리 간부."

"그렇군요."


잭은 도르네즈의 대답에 능글맞던 미소를 서서히 지웠다. 뜬 건지 감은 건지 구분이 안 가던 눈은 조금씩 떠지면서 그의 사람을 죽일 듯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얻을 정보는 모두 얻었습니다, 도르네즈 양. 이제 편히 죽어주십시오."

"…뭐?!"


도르네즈는 잭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깜짝 놀라 반항하려던 순간,

순식간에 잭의 부하들이 보초들의 목을 꺾었다. 입구를 지키던 2명의 보초가 조용히 바닥에 쓰러졌다.


"안심하시지요, 오랜 전우여.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잠시 후, 도르네즈는 잭이 가져왔던 열쇠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처음 의자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는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지만, 몇 초 만에 몸의 감각이 쥐가 난 것처럼 돌아와 일어설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몸은?"

"……신기해. 뛸 수도 있겠어."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도 신기할 정도로 몸이 멀정했다. 몇 날 며칠을 감금된 채로 실험 당했을 텐데도 몸은 건강하게 깨어난 것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팔에 꽂혀있던 바늘 자국만 빼면 상처도 아물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일종의 스팀팩입니다. 아까 말했잖습니까? 당신의 몸은, 신체 내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각성했다고요."

"…이상한 실험이나 할 줄은 몰랐는데."


제자리에서 몇 번을 뛰어봐도 몸이 멀정했다. 도르네즈는 신기한 감각에 몸이 뜨거웠던 이유는 단지 움직이지 못해서 뜨거웠던 거였다고 판단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죠."


잭의 도움으로 풀려난 도르네즈는 잭을 따라 이동했다. 그가 어째서 자신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덕분에 무기로 사용할 수는 있었다.


"큭…."


실험실을 탈출하면서 마주친 연구원들을 조용히 쓰러트렸다. 실험실을 지키는 보초도, 연구원도 적었던 덕에 비교적 쉽게 빠져나갔다. 그들은 실험 폐기물을 버리기 위해 연결된 지하수로로 향하는 비밀 문 앞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뒤를 맡기겠습니다."


잭은 작별을 고하며 지하수로로 통하는 문을 닫았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기 바랐다.

둘은 어두운 지하수로를 권총에 달린 라이트에 의지해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수를 따라 이동했다.


"여기서부터는 뛰도록 하죠. 쉬지 않고 이동한다면 빠르면 20분 이내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잭의 지시대로 도르네즈는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의자에 앉아있었던 것치고는 생생할 정도로 기운이 넘쳐 땅을 밟을 때마다 박차고 나갈 힘이 새롭게 솟아났다.


"제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실험을 통한 강화 인간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며칠간 겪은 실험이죠."

"강화 인간이라고? 그런 게 가능은 한 거야?"

"글쎄요… 아직까지 성공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도르네즈는 잭이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아냈는지 살짝 미심쩍었지만, 자신과 함께 임무에 나갈 때 정보통 역할을 했던 걸 떠올리며 일단은 그를 믿기로 했다.


"이 앞에 작은 통로가 있습니다. 지하수로와 지하수로를 잇기 위해 만들어진 통로죠. 다행히 안에는 물이 흐르지 않으니 지금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을 겁니다."


둘은 지하수로를 달리는 내내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달렸다. 감금되기 전부터 신고 있었던 신발은 물에 젖어 무겁고, 기분이 나빴다. 도르네즈는 몸에 튄 오물을 닦을 시간도 없었기에 기분이 나빠도 달렸다.


"저기 보이는군요. 저 통로로 들어가면 더 콜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을 겁니다."


.

.

.


"……너희 때문에 내 형이 죽었어. 이젠 나도 죽일 건가?"


탕!


지하수로를 봉하고 도망치던 잭의 부하들이 그가 보낸 추적자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행방을 물었지만, 잭의 부하들은 대답해주지 않았고, 지하수로로 통하는 길을 발견하자 말없이 부하들을 죽였다.


"지하로 도망쳤군. 지하수로로 이동한다. 사냥감을 쫓는다."


온통 검은색 양복을 입은 세 사람이 지하수로로 향했다. 마치 사냥감이 흘린 피 냄새를 따라가는 늑대들처럼.


.

.

.


"이제부터 길이 복잡해질 겁니다. 허리까지 물이 차 있는 곳도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물론 피해서 갈 거지만요."


잭의 말을 따라 긴 통로를 지나 다른 지하수로로 들어선 도르네즈는 허리까지 물이 찬다는 말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미인계 히트맨이지, 이런 시궁창에 잠입하는 시궁쥐가 아니라며 신세를 한탄했다.


"빨리 어디 안전한 곳에 가서 샤워하고 싶어. 여긴 너무 더럽잖아."

"저도 동감입니다. 무사히 빠져나가게 된다면, 신분 세탁 후에 모히또 한 잔 마시고 싶어졌거든요."

"그건 사망 플래그 아니야?"

"제가 당신보단 오래 살아남을걸요?"


유쾌하지 않은 대화를 하며 둘은 다음 구역으로 들어섰다. 잭의 말대로 복잡해 보이는 구역이었다. 바닥은 물이 차 있고, 천장은 낮았으며, 많은 기둥 때문에 방향감을 상실할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서는 빠르게 이동하기도 힘들어 괜히 스트레스만 유발했다.


'와이어만 있었더라면 추적자들이 오더라도 모두 함정에 빠트릴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건 아쉬운 거라며 도르네즈는 천천히 걸어가는 잭의 뒤를 따라갔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라 빠르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도르네즈는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카드를 매만지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이렇게 조용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네. 난… 조직에 버림받은 건가? 대체 왜? 열정적으로 조직에 임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죽였던 인물 때문에 모든 게 꼬여버렸다. 아니, 어쩌면 훨씬도 전에 꼬여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능구렁이 같은 그를 처음 본 건 퇴출을 명받았던 그 장소에서였다. 그 이전까지는 그들의 부하를 통해서 명령을 받아왔었기에 그들의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모습을 감추는 그들이 어째서 자신을 퇴출시킬 때에 얼굴을 드러낸 것인지, 도르네즈는 생각할수록 아리송해져 기분만 복잡해졌다.


"저건… 문인가?"


어두운 공간 속, 라이트 너머로 비친 공간을 가르는 벽과 그 아래의 쇠창살 문에 둘은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녹슬어 열쇠가 있어도 열릴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철문이었다.


"아마도 물길에 쓰레기가 뒤엉키는 걸 막기 위해 설치한 것 같습니다만… 이대로는 열 수가 없겠네요. 뭔가 근처에 문을 열 방법이…."

"꼭 여기로 지나가야 해? 이 쇠창살, 깊게 박혀서 부수는 거 말고는 답이 없겠는데?"

"흠…."


잭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살이 찌부러지면서 잘생긴 얼굴에 금이 갔다. 도르네즈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면 다른 길은? 설마 길이 여기뿐이야?"

"그건 아닙니다만… 이곳이 지름길이기 때문에… 제힘으로는 문을 부술 수도 없고, 폭탄 같은 것도 없으니…."


쾅!


도르네즈가 갑자기 철창을 발로 찼다. 낡았지만 두꺼워 그녀의 발길질로는 휘게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낡은 부분 안쪽에 아직 낡지 않은 쇠가 있었다.


"역시 무리였나요."


잭은 아쉬운 표정으로 쇠창살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쪽도 자신들이 서 있는 곳과 같은 형태였지만, 조금만 더 가면 물이 없는 곳이 나오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향하죠."

"그래."


도르네즈는 벽을 따라 걸었다. 이끼가 잔뜩 자라 지하수로가 오래되었음을 알려왔다. 금이 간 곳도 있고, 멀정한 곳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축축한 느낌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잭이 말한 20분은 훌쩍 지난 기분이었다. 한참을 달리면서 지쳤다고 생각했을 때는 빠르게 회복되는 몸에 놀랐지만, 오랜만에 달려서 그런 거라 여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가르며 걷다 보니 힘이 많이 들었지만, 잠깐 멈추면 금세 회복되어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이것도 실험의 부작용인 걸까? 내 몸은… 어떻게 된 거야?'


일시적인 부작용일 수도, 영구적인 부작용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지금은 빠르게 회복되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둘이 5분 정도를 더 걸었을 때, 잭이 멈춰섰다.


"여기는 문이 열려있군요. 저희처럼 도망쳤던 자가 있었나 봅니다. 아마도 조직 내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던 자들 중 누군가겠지만요."

"그러게. 여기 이 문, 강제로 연 거야. 총으로 쏴서 부순 거 같아."


그가 무슨 총으로 부쉈는진 알 수 없었다. 여러 발의 총상으로 부서진 문고리와 행방을 찾을 수 없는 탄피 때문이었다.


"이쪽 길로 나간다면… 이제 계속 직진하면 됩니다. 그러면 지하수로 밖으로 나가는 하수구가 나올 겁니다."

"윽… 하수구라니… 지하수로도 갑갑한데…."


이젠 지하라면 질색이라며 도르네즈가 투덜거렸다. 잭은 웃음으로 맞장구쳐주며 도르네즈를 데리고 이동했다.

두 사람이 더는 물이 아닌 곳으로 올라와 천장이 높아진 지하수로를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지만, 잭은 조금 지쳐 있었고, 도르네즈가 그에게 발걸음을 맞춰서였다.


"그런데, 잭. 너는 왜 날 구출한 거야?"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도르네즈 양."


잭이 어이가 없다며 웃더니, 순식간에 웃음기를 빼고 말했다.


"당신을 실험실에 가두었던 고위 관직자, 스파이크… 저는 그의 열혈한 부하였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타락하고, 더 콜을 구덩이에 빠트리려 하는지를요."


잭은 더 콜에는 3종류의 세력이 있고, 그중 하나에 속해있었다. 스파이크라는 자의 부하였으며, 곧 있으면 중간 관리자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와 연관되면서 그가 얼마나 썩어빠졌는지 직접 깨달았다.


"처음엔 소문이었습니다. 스파이크의 부하가 저에게 그의 아래로 들어오라는 말에 승진할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도르네즈 양도 저와 같은 간부였으니 알 겁니다. 간부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중간 관리자뿐이고, 그 위의 사람들은 만날 기회가 적다는 걸요. 저는 만날 수만 있다면 중간 관리자로 빠르게 올라갈 거라 믿었습니다."


잭이 신세 한탄하듯 말했다. 도르네즈와 콤비로 몇 번의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던 잭은 그녀의 오랜 친구나 다름없었다. 간부가 되기 이전부터 함께 해왔던 임무들을 떠올리며 잭이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콜에 실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도르네즈 양, 당신이 스파이크의 제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는 당신을 조용히 퇴출시키려 했습니다. 어느 소속에도 들어가지 않은 당신이 언제 누군가의 임무로 자신을 칠 지도 몰느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고위 관직자를 암살할지도 몰랐다고…?"

"네. 그래서 스파이크는 음성 변조를 통한 임무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렸던 겁니다."


도르네즈는 그제야 앞뒤가 맞아떨어진다며 수긍했다.


'어쩐지 일이 쉬웠어.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쉽게 밀실로 따라왔던 멍청이나, 복귀했더니 자신 혼자 웃고 있던 상황까지… 범인을 알았다는 이유로 입막음을 위해 나를 실험장에 가뒀던 거고.'


도르네즈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쓰고 버릴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 걸 알려주는 거야?"

"왜냐면… 당신은 제 오랜 친우니까요."


잭이 멋쩍게 웃었다. 도르네즈는 그게 뭐냐며 웃으려던 그때, 도르네즈가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우고 라이트를 껐다.


"도르네즈 양?"

"쉿…."


조용히 권총을 꺼내 장전한 그녀는 잭에게 손짓으로 기둥 뒤에 숨으라고 지시했다.


'보이지 않지만, 들려. 이상할 정도로 잘 들려서 신기할 정도야.'


타닥, 타닥!


누군가가 달려서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 사람? 아니, 둘… 셋인가?'


물에 젖은 신발이 지하수로 바닥을 밟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가까워져 왔다.


'싸울 수밖에 없나? 혹시라도 똑같이 탈출하는 사람이라면….'


도르네즈는 조용히 손을 움직여 잭에게 사인을 보냈다.


'셋, 추적자. 그렇군요. 갑자기 숨으라고 했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들이 당한 거군요.'


잭은 부하들의 죽음에 씁쓸해졌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기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앞으로 22m… 어둠이 눈에 익어서 이제 보일 때가 됐어.'


도르네즈는 권총을 파지해 발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준했다. 한 손에는 잭이 줬던 칼을 역수로 쥐어 권총이 흔들리지 않게 한 도르네즈는 조용히 숫자를 셌다.


'앞으로 5m… 3m….'


보통 권총의 유효 사거리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임에도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 남성용 구두가 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마침내 익숙해진 어둠 속으로 추적자의 다리가 드러났다.


'지금이다!'


타타탕!


그들이 유효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재빠르게 총알을 발사한 그때, 쏠 걸 알고 있었다 듯이 추적자들이 공격을 피하고 어둠 속으로 숨었다.


'칫…!'


추적자들이 모습을 감추자 지하수로에서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어둠에 동화되듯 침묵했다.


'이럴 때 와이어가 있었다면….'


함정을 설치해둘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며 도르네즈는 슬쩍 기둥 너머를 훔쳐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라이트를 켰다간 위치만 들킬 테고. 방법이… 뭔가 방법이 없을까?'


잭은 도르네즈의 건너편 기둥에 숨어 똑같이 어둠 속을 훔쳐보고 있었다. 언제 튀어나와 기습해올지 모르는 상황에 먼저 나섰다간 총알 세례를 맞고 개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렇기에 도르네즈는 조용히 카드를 꺼냈다.


'소리가 없지는 않지만, 총알보다는 위치를 알기 어렵겠지.'


도르네즈가 카드를 천장을 향하게 날렸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면서 천장으로 날아간 카드는 갑작스런 총격에 찢어졌다.


'저기다!'


소리가 난 곳으로 잭과 동시에 사격했지만, 어둠 속에서 기둥에 부딪힌 총알이 불을 내며 사라질 뿐이었다. 놈은 쏜 직후 모습을 숨긴 것이다.


'유도를 몇 번 더 해볼까?'


카드를 몇 개 더 날렸지만, 역시나 모두 격추되었다. 어디서 올지 아는 것처럼 반응하는 모습에 잭도, 도르네즈도 기가 찼다.


'조용히 숨어서 쏘기만 하겠다라… 말려 죽일 셈인가?'


도르네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늘 먼저 달려드는 이들을 상대해왔는지라 이렇게 숨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저격수도 아닌 그녀가 오래도록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다며 잭에게 사인을 보냈다.


'다른 수는 없냐고요? 흠… 뭐가 좋을까요.'


잭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일방통행의 지하수로 안에서 아무것도 없는 그가 가진 거라곤 도끼뿐이었다. 도끼로 뭔가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봐도 그걸 던져서 맞출 거리도 아니었다. 천장에서 계속해서 이상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게 뭔지 알 수도 없었다. 지하수로에 하수도까지 있는 곳이니 이상한 냄새가 날만 하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부술 수가 있다면 시선을 분산시키기라도….'


그때, 깡통 하나가 몇 번 튕겨져 잭의 앞으로 굴러 왔다.


'이건…?!'


"도르네즈! 눈을 가려요!"

"뭐…?!"


강렬한 섬광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주변을 한순간 눈부시게 만들었다. 섬광탄이었다. 잭과 도르네즈가 섬광탄을 피하려고 몸을 돌린 순간, 추적자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젠장…! 섬광 때문에 어둠이 안 보여…!"


잭이 눈을 찌르는 빛 때문에 권총을 발사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다. 섬광탄을 뚫고 달려온 추적자들은 그대로 몸으로 밀치려 했지만, 누군가의 손에 목덜미가 잡아채져 뒤로 끌려갔다.


"도르네즈 양?!"

"금방 익숙해지더라고. 신기한데?"


추적자들은 섬광탄을 맞고도 잭을 데려가는 도르네즈에게 감탄을 보냈다.


"쏴라!"


추적자 중 누군가의 외침에 일제히 사격했다. 일방통행인 통로에서 도망쳐봐야 직선으로밖에 못 도망치기에 사격했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총알은 빗나갔다.


"쫓아! 놈들을 놓쳐선 안 된다!"


도르네즈는 일방통행이 끝나는 코너까지 빠르게 달렸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지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솟아나 잭을 한 손에 끌고도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으으… 보, 보입니다!"


잭은 흔들리는 권총을 두 손으로 잡고 총을 쏘며 달려오는 추적자를 향해 격발했다.


타앙! 탕!


서로의 총알이 몇 번이고 빗나갔다. 애꿎은 벽과 바닥에 탄흔이 남으면서 파였다.


'이제 제대로 보이는군요. 흔들리긴 하지만… 지금…!'


도르네즈가 코너로 돌기 직전, 잭이 쏜 총알에 추적자 하나가 쓰러졌다. 드디어 맞췄다는 기쁨도 잠시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잭은 몸을 일으켜 도르네즈와 같이 달렸다.


"저들의 무기는 권총뿐입니다! 유효 사거리도 짧기에 저희가 먼저…!!"


타앙 - !


격발음이 들리더니 도르네즈의 옆에서 달리던 잭이 갑자기 고꾸라졌다. 도르네즈가 깜짝 놀라 발을 멈추었다.


"잭…!!!"

"멈추지 말고 달려요!"


잭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도르네즈의 부축을 받으며 달렸다.


"……."


추적자 리더는 정확한 사격을 위해 코너를 돌자마자 정조준했었기에 쫓아가기엔 늦어버렸다.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살아남은 추적자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추적을 재개했다.


"잭!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뭘 하시겠… 다는 겁니까? 하하… 윽! 괜찮습니다. 총알이… 폐 아래를 지나가서 그나마… 숨은 쉴 수 있으니까요."


잭은 오른쪽 배를 움켜쥐며 도르네즈에게 앞으로 남은 길을 알려주었다.


"이대로 달려서 왼쪽, 왼쪽, 오른쪽, 직진… 하세요."

"너는…?"

"글쎄…요?"


잭은 추적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들었다. 도르네즈가 자신 때문에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곤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


"…잭?"

"당신은 정말 걸리적거립니다! 그런 성격이니 남자가 안 꼬이는 거잖아요! 외웠으면 빨리 가세요! 꺼지란 말입니다!"

"……알았어."


도르네즈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으며 잭을 두고 달렸다.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코너를 돌기 위해 계속해서 달렸다.

홀로 남겨진 잭은 구멍 난 배를 움켜잡으며 그녀가 간 방향과는 반대로 향했다.


"찾았다. 코드네임, 잭."


추적자들은 금세 잭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흘린 피를 따라온 것이다. 잭은 천장이 낮아진 통로의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를 찾아낸 추적자 하나가 다가와 권총으로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잭, 더 콜로 돌아와 정당한 심판을 받아라. 그러면 너는 살 것이고,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하… 하하… 저더러 스파이크의 노리개로 돌아가라… 그 말인가요?"

"……."


잭이 갑자기 실성한 듯 웃었다. 죽음의 상황에 직면한 나머지 미친 거라 여겼다.


"당신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더 콜은… 이미 오래전부터 겉과 속이 바뀌었다는 것을…."

"……."

"당신 같은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지난달에 임무를 나갔던 부하도 실험이라는 이름 하에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우리가 그나마 동료애로 묶여있었는데, 그마저 도구로 써버리는 더 콜에 충성을 하란 말입니까!!!"

"…그래."


잭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의 자랑스러운 금발이 흘러내려 손으로 쓸어올렸다. 권총이 눈앞에 겨누어져도 두려움 따윈 없는 모습이었다.


"…도르네즈는 이미 탈출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유언인가?"

"유언…? 아아… 유언이 있습니다."

"말해라, 우린 전달할 권리가 있다."


잭이 허탈하게 웃으며 언제부터 손에 쥐고 있었는지 모를 도끼를 버리곤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이 담배, 실은 도르네즈 양이 싫어해서 그간 피지 못했습니다만, 오랜만에… 편안해지는군요."

"그게 마지막 유언인가?"

"유언을 말하라… 였죠? 제 유언은 이겁니다. 당신들은 도르네즈를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뭣…?!"


잭이 불이 켜진 라이터를 위로 들었다.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긴 권총을 든 추적자가 곧바로 사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긴… 유독가스가 흐르는 지하거든요…."

"이 미친 새끼가…!!!"


그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퍼어어엉!!!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점차 지하수로 전체로 퍼져갔다. 도르네즈는 잭이 알려주었던 마지막 길에서 등 뒤로 다가오는 폭발에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달렸다. 조금만 더 달리면 분명히 길이 나올 것이다.


"조금만 더…!!"


지하수로의 끝, 하수도관이 나타났고,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르네즈는 그대로 몸을 날려 물속에 몸을 잠기도록 납작 엎드렸다. 곧이어 그녀의 등 뒤로 불꽃이 지나가면서 머리카락 일부를 태워버렸다.


"……푸하! 하아… 하아… 뭐, 뭐야? 왜 폭발이…? 설마, 잭…."


도르네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불꽃이 휩쓸고 간 뒤를 쳐다보았다. 어둡기만 한 그을린 지하수로뿐이었다.


"큭…!"


도르네즈는 다시 달렸다. 하수도의 끝을 향해 달렸다. 얕게 흐르던 물은 어느덧 다른 통로에서 연결된 물과 만나 수위가 높아졌다. 발목까지 오르던 물이 허벅지까지 올라 몸을 가누지 못한 도르네즈는 그대로 물에 휩쓸려 하수도 밖으로 내뿜어졌다.


'잭…!'


잭의 희생을 뒤로하고 도르네즈는 하수도 밖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폐수가 방출되어 하천으로 이어지는 강으로 떨어졌다는 걸 알고 오물을 밟으며 달렸다. 달리고 달려 하천 근처의 선착장까지 조용히 도착한 도르네즈는 엔진이 켜진 배 한 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장 하나가 운전석에서 고개를 내밀어 말했다.


"…타십시오. 기다렸습니다."


잭의 다른 부하가 도르네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도르네즈는 배에 올라탔고, 배는 하천을 떠나 바다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딘가…에는 당신이 머물 곳이 있을 곳으로요. 그런데 대장님은…?"


도르네즈가 고개를 떨구자 부하는 조용히 모자를 내렸다.

배가 떠나버린 후였기에, 선착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놓쳤…군."


살아남은 추적자 하나가 다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아무도 남지 않은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다음 뉴스입니다. 어젯밤, 인근 부두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은 폭발이 하수도에서 났기에 근처의 공장을 조사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다음으로….』


.

.

.


몇 달 후의 이름 모를 유명 카지노.


"올인."

"…이, 이 미친년이! 가진 칩이라곤 빨간 거 3개 뿐인 게 사람을 놀려!?"

"쫄린가봐?"

"……넌 지금 날 건드린 거다! 올인! 내가 이기면 네년을 이 돈으로 사서 평생 노리개로 써줄 테다!"


올빼미 가면을 쓴 대머리 남성이 여우 가면을 쓴 여자의 도발에 발끈해 자신의 모든 칩을 걸었다. 여우 가면 여성은 웃으며 패를 던졌다.


"마, 말도 안 돼…! 스트레이트 플러쉬라고…?!!"


올빼미 가면 남성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자빠졌다. 그가 가지고 있던 패도 스트레이트 플러쉬였지만, 여성이 낸 카드가 더 높은 패였다. 스페이드 9, 10, J, Q, K의 패를 던진 여우 가면 여성이 고맙다며 칩을 챙기려 했지만, 올빼미 가면 남성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올리며 외쳤다.


"이건 명백한 사기다! 사기 치지 말라고, 이 년아! 나, 스파이크의 눈썰미를 속이려 들어? 네년의 카드에는 구겨진 흔적이 있어! 그걸로 사인을 보내서 올인할 기회로 삼은 거겠지! 감히 나를 조롱하고, 속이려 들어?!!!"

"이게 당신의 본 모습이군… 정말 추잡해."

"뭐…? 커허억……!?!!"


남성이 여성을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아니, 힘이 빠져 놓친 것이다. 남성의 목에 검은 바탕에 파란색 문양 카드가 깊게 박혀 있었다.


"그럼 난 이만… 교환을 해야 해서."


여성은 사랑스러운 포니테일을 흔들며 카지노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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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일 길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