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베르살리에리 연대밖에 없지만 이탈리아 공수부대 보이스랑 사무라이 베스트로 미루어보아 사실상 폴고레 공수사단일거같아 여기저기서 퍼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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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1942년 달콤쌉싸름한 엘 알라메인에서의 유쾌한 여흥이란!


이탈리아! 그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아니 너무 허접해서 삿대질과 비웃음만으로 모든 것을 채울 것만 같은 그 이름!

사실 이탈리아군은 조금 억울한 측면이 없잖아 있다. 에티오피아 전쟁과 스페인 내전으로 국력 다 까서 쳐먹고 쉴 틈도 없이 세계대전에 참가해야 했고

결국 그들은 원치 않는 전쟁에 이끌려 사기는 사기대로 떨어지고 지원은 지원대로 제대로 받아보질 못했으니!


물론 이건 과정의 이야기일 뿐, 결국 이탈리아군은 패배했다!

그러나 약소한 이탈리아군 내에서도 용맹하기 그지없는 투지로 적들을 분쇄한 전설적인 부대가 존재했으니





그들이 바로 이탈리아 육군 소속 폴고레 공수사단이다


이탈리아어로 번개를 의미하는 그들은 그 이름대로 번개같은 분노와 열정으로 연합군에게 큰 인상을 남겨주었다
전술가로선 간악한 여우같이 연합군을 농락했지만 전략가로선 이류였던 에르빈 로멜이 독일군을 이끌면서

그들의 측면을 방어하며 로멜의 부대의 공격로를 목숨을 걸며 사수하여 초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의 우세를 이끈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연히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이탈리아 본국은 물론 동부전선에 전력을 투입시킨 독일도 북아프리카 전역에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고

결국 로멜의 부대도, 폴고레 공수사단도 뛰어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전력소모로 점점 지쳐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카운트다운은 1942년 10월, 북아프리카 전역의 판도를 결정지을 엘 알라메인을 가르키고 있었다





폴고레 공수사단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공수 사단이라는 이름이 무색케 할 정도로 전력이 피폐해져 고작 7개 대대만이 남아있었고 공수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은 폴고레 공수 사단이 맡은 방어선에만 1개 전차사단, 3개 보병사단, 총 4개 사단을 투입시켰지만

폴고레 공수사단은 항복이나 패주가 아닌 방어선 사수를 선택하고 적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폴고레 공수사단은 빈약한 전력으로 적들을 막기 위해서 무모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어선을 마련하였는데

그들은 방어선을 총 두겹으로 구성하여 무려 4개 사단을 상대로 110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3일 간 방어선을 사수하는 공적을 거뒀다


그들은 적 전차가 첫번째 라인을 통과하는 동안은 무대응으로 방치하고, 적들이 방어선 사이에 고립된 순간

적 부대를 포위하여 섬멸하는 방식으로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하였다





사실상 보병이 적 전차에 달라붙어서 상대해야하는 무모한 방식이었지만

후퇴가 아닌 사수를 선택한 그들에게 있어서 이 방법 외에는 차선책이 없었다


7개 대대로 4개 사단을 3일 간 저지해낸 폴고레 공수사단은 방어선이 와해된 이후에도

항복이 아닌 직접 튀니지까지 걸어가서 아군과 접촉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들은 제 285 폴고레 공수사단으로 재편성되어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나는 그날까지 맹렬하게 전투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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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 왕당파들은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를 숙청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려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연합군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던 나치독일은 재빨리 악세 작전(Fall Achse)을 통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여 실각한 무솔리니를 다시 옹립하고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Repubblica di Salò)을 세웠다. 한편 연합군은 자신들에게 항복한 이탈리아군들을 어떻게든 써먹으려 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공동 교전군(Esercito Cobelligerante Italiano)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며, 1945년까지 6개 사단 30만명 규모로 늘어났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신화를 잘 알고 있던 연합군 지휘부는 이들은 치안유지와 후방경계등 비전투 임무에 동원했다.


1945년 4월, 전쟁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걸 느낀 연합군은 어떻게 해서는 종전 전까지 이탈리아 전체를 손에 넣고자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가로지르는 아펜니노(Appennino) 산맥과 유일한 통로인 포 계곡(Pianura Padana)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여길 넘어야만 볼로냐,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베네치아, 베로나, 트리에스테등 이탈리아 주요 공업도시들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이에 독일군은 남부 독일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인 고딕라인(gothic line)을 구축하고 고갯길마다 장판파를 시전하는 중이었다.


영연방군 제8군 사령관이었던 리처드 맥크리(Richard McCreery) 중장은 고딕라인을 돌파하려면 독일군 후방에 사보타주와 거점타격을 가해 혼란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포 계곡의 경로를 미리 선점한다면 오스트리아와 남부독일로 철수하려는 독일군의 퇴로를 막아버리고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대대병력에 해당하는 타격부대를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는 독일군 후방에 침투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선 수송기를 통한 공수작전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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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연합군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부대는 영연방군 코만도(Commandos), 미군 레인저 연대 혹은 제101, 82 공수사단, 17공수사단 등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탈리아 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리는 지역이었고, 위에서 말한 부대들은 전부 독일 루르 지역의 지크프리트 라인(Siegfried Line)을 뚫는데 투입되고 있었다. 새로운 부대를 꾸려서 훈련 시키기에는 시간과 장비 모든것이 부족했다. 상황이 이렇자 연합군은 후방 경비나 서고 있던 이탈리아군의 어떤 부대를 눈여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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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탈리아 공동교전군에는 제184 '넴보' 공수사단(184ª Divisione paracadutisti "Nembo")제185 '폴고레' 공수사단(Brigata Paracadutisti 'Folgore')의 잔존병력이 남아있었다. 두 부대는 2차대전 이탈리아군의 얼마 되지 않던 정예부대였다. 특히 폴고레 공수사단은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의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싸웠던 바로 그 부대였다.


하지만 두 부대는 이미 지난 몇년 간 고참병들이 대부분 소모됐고, 일부는 살로 공화국 편에 붙은 상황이었다. 두 사단은 이제 연대로 축소되었고 심지어 폴고레 측은 1간부와 병사 다 합쳐 단 10명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영국군은 일부러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활약했던 주세페 이조(Giuseppe Izzo) 중령을 부임 시켜 부대를 재건하도록 했다. 이조 중령은 스페인 내전과 그리스 전역, 북아프리카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이라서 이탈리아군에서 드문 베테랑 군인이었다. 그는 포로들중에서 과거 자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 그리고 이탈리아 산마르코 해병연대에서 지원병을 받아 1년만에 자체적인 포병부대와 공병대대를 보유한 4개 연대 규모로 부대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폴고레 연대 자체는 해체되어 넴보 연대에 흡수되었으나, 네임밸류를 생각하여 이 부대는 폴고레 전투단(Gruppo di Combattimento "Folgore")으로 불렸다. 이들은 연합군으로부터 전투력을 인정받아서 위력정찰 작전등에 투입되며 실전경험을 쌓아갔다.



한시가 급했던 연합군은 카를로 프란체스코 게이(Carlo Francesco Gay) 대위를 호출왔다. 연합군 장성들은 그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이 작전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대위는 잠깐 생각하더니 '가능하다'라고 답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막중하기 그지 없었다. 해발 평균고도가 1000m가 넘는 지역에 강하한 이들은 독일군 거점타격과 교량, 도로, 제방등 주요 시설을 점령하고 폭파해야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나치에 저항하는 파르티잔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공조가 가능했으나, 노르망디와 마켓가든을 겪어 본 연합군 지휘부도 이들이 생존할 확률이 10% 정도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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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고레 전투단은 적진에 낙하할 226명의 대원들을 선발했다. 여기에 넴보 3대대에서 선발된 117명이 추가됐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은 1943년 이후로 공수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들은 급하게 수령한 영국제 낙하산을 가지고 몇 주간 속성교육을 받았다. 영국군 앨런 램지(Alan Ramsay) 소령이 끄는 SAS 교관들이 이탈리아군에게 사보타주 훈련을 가르쳤다. 영국군 측은 브렌 기관총과 스텐 기관단총, 그리고 웨블리 리볼버를 지급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들은 영국군들의 무기, 특히 스텐 기관단총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국산 베레타 MAB38 기관단총과 M1934 권총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제1 정찰대대 '폴고레' (1º Squadrone da Ricognizione "Folgore), 줄여서 F 스쿼드론(Squadrone "F")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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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19일, 고딕라인을 돌파하기 위한 청어 작전(Operation Herring)이 실행됐다. 연합군이 각 전선에서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 민병대를 밀어올리는 동안 이탈리아 공수부대원들은 로시냐노(Rosignano)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C-47 수송기에 올랐다. 원래는 공수부대 전문 수송기들이 있어야 했지만 이들은 17 공수사단(17th U.S. Airborne Division)을 베스트팔렌 주에 낙하시키기 위해 죄다 서부전선에 배속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군들을 실고 날아오를 수송기들은 공수부대 수송경험이 없는 파일럿들이 조종했다.


14대의 수송기에 나눠 탄 F스쿼드론들은 4월 20일 18:00에 비행장을 떠났다. 이탈리아군들은 고참이고 신병이고 죄다 긴장해있었다. 지휘관들은 수송기가 너무 낮은 고도에서 자신들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험이 없던 파일럿들은 독일군 대공포탄이 올라오자 기겁을 하며 바로 뛰어내리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군들은 목표지점 근방 40km에 흩뿌려졌다. 심지어 상공에서 이들을 관측해줄 램지 소령이 탄 비행기조차 대공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귀환해버렸다. 다행인 것은 이탈리아군을 태운 수송기가 단 1대도 격추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딕라인 바로 뒤쪽에 낙하한 F 스쿼드론은 2~4명 규모의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버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들은 당황하지 않고 훈련받은대로 자신들이 낙하한 지역의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하고, 지역 파르티잔들과 연합하여 독일군과 살로 공화국 민병대들을 기습했다. 게다가 대공포화 때문에 사방팔방으로 낙하했던 것이 독일군들에게 오히려 공황을 일으켰다. 그들은 최소 수천명의 연합군 공수부대가 낙하했다고 믿었다. F스쿼드론은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최종목표였던 모데나 동북쪽의 스투피오네(stuffione)와 라바리노(Ravarino)로 모여들었고, 23일 연합군 기갑부대가 올 때까지 마을을 사수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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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밤부터 23일 자정까지 이탈리아 공수부대원들은 다음과 같은 성과를 이뤄냈다.


사살 - 독일군 481명 (살로공화국 민병대는 통계에 잡지 않음)

포로 - 2,083명


교량 폭파 - 3량

탄약고 폭파 - 최소 3곳

도로확보 - 7개소

통신선 절단 - 77개소

차량파괴 - 44대



이에 반해 이탈리아군은 전사 30명, 부상 14명, 실종 10명라는 경미=한 피해에 그쳤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더이상 교전의지를 잃은 상태였고 조직적인 저항을 포기한 채 오스트리아로 후퇴하기 바빴다. 연합군은 그동안 뚫리지 않던 고딕라인을 단숨에 돌파하여 롬바르디아 평원으로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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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쿼드론이 이런 활약을 하고 있는 사이, 공수작전에서 제외된 넴보 1대대와 2대대 병력은 영국군 제8군 소속으로 육로를 통해 볼로냐 지방으로 넘어왔다. 볼로냐는 이미 4월 9일부터 현지 파르티잔들이 독일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해방구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볼로냐 인근의 카스텔 산 피에트로 테르메(Castel San Pietro Terme) 서쪽에는 중세시대 건설된 카세 그리자노(Case Grizzano)는 성채와 마을이 있었다. 사실 성채도 규모가 너무 작았고 다 허물어져가는 유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에 숲이 전무한데다 고지대에 위치해서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는 이 성채에 독일군 팔쉬름예거 1사단(1. Fallschirmjäger-Division) 4연대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대는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녹색악마(Die grünen Teufel)라는 별명을 얻은 바로 그 부대였다. 주세페 이조 중령은 넴보 2대대 소속 2개 중대가 이끌고 성채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05:30, 아군의 준비포격이 개시되자 이탈리아군은 지뢰밭을 개척하고 능선 경사면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기습을 당한 독일군 공수부대는 뒤늦게 반격을 시작했으나 이미 이탈리아군들은 남쪽 건물 일부를 점거했고 증파된 병력들의 도움을 받아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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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다른 성채 내부와 마을에서는 이탈리아 공수부대와 독일군 공수부대의 혈전이 벌어졌다. 초반에 제대로 밀린 독일군 공수부대는 증원병력을 불러와 성채를 탈환하려고 그 날 하루동안 총 5번 이상의 반격을 펼쳤다. 하지만 이탈리아군들은 물러나지 않고 총검으로 육박전까지 불사해가며 팔쉬름예거들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조 중령 역시 베레타 권총을 휘두르며 부하들을 지휘하다 중상을 입었다.


16:00에 1대대의 증원병력이 도착하였고 독일군은 마침내 탈환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이탈리아군은 전사 33명(장교 3명 포함) 부상 52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카세 그리자노 성채를 손에 넣었다. 단 하루만에 공수작전에 투입된 F 스쿼드론과 비슷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4월 27일 무솔리니가 처형 당하고 살로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북부 이탈리아는 연합군의 손에 들어왔다. 이들의 활약은 그동안 이탈리아군을 허접한 군대라고 생각하던 연합군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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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정부는 전후 폴고레 전투단의 간부와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특히 카세 그리자노 성채를 점령하는 공훈을 세운 주세페 이조 중령은 이탈리아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메달리아 도로(Medaglia d'oro al valor militare)와 함께 미군으로부터 수훈 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수여 받기도 했다. 이조 중령은 남은 평생동안 독일군, 그것도 팔쉬름예거를 상대로 승리한 이 전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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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군인은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베르살리에리는 독일 군인을 놀라게 한다."-에르빈 롬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원수







Bersaglieri (베르살리에리)

1836년대에 창설한 이탈리아 정예 경보병부대로 이탈리아 통일전쟁부터 시작해 크림전쟁, 교황청점령과 2차 세계대전까지 큰 활약을 펼쳤다

2차대전 당시 미육군 명장이였던 조지S패튼이 북아프리카전선 부대가 이탈리아군에게 박살이 났다는 보고를 듣고 길길이 날뛰다가  상대가 베르살리에리였다는 보고를 듣고 수긍을 했다는 후문이 있다하니 그 위엄이 어느정도인지 추측이 가능하다.

종전 후에는 경보병부대에서 기계화보병으로 편제 된 후 2차대전 당시 유일하게 제몫은 했던 부대인 폴고레 공수사단,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함께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베르살리에리의 가장 큰 특징은 "3보 이상 구보".부족했던 기병 전력을 메꾸기 위한 조치였는데.....

창설 당시 황제가 베르살리에리 중대 사열을 거행한 후 10km 떨어진 자신의 별장으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 부대원들이 뜀박질로 별장까지 가 먼저 대기를 타고 있어서 황제가 왜 베르살리에리 부대가 더있냐고 물어봤던 일화는 이미 유명하며





샤르데나왕국(이탈리아의 전신)의 교황청점령 당시 교황이 성문을 닫으라 지시했으나 성문이 닫히기 전에 미친듯 달려 성문을 돌파했다는 일화도 있다

여튼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계화보병으로 편제되어 평소에 이렇게 뛰댕길 필요는 없지만
전통이 이렇게 박혀버렸기 때문에 때문에 열병식을 할 때, 무조건 뜀걸음으로 이동을 해야하며 기준은 3km를 15분내에 주파해야 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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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대하면 옛날에 로마군단 빼고는 오합지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음


중세시기 내내 도시국가로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등에 휘둘리던 시절 지나


어찌저찌 통일 이후로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온갖 추태는 다 부리는 이미지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탈리아에도 정예부대는 존재하고 그 중하나가 바로 베르살리에리 부대임


베르살리에리는 이탈리아어로 명사수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들의 기원은 통일 이탈리아를


만든 사르데냐 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




이탈리아 북서부의 사르데냐 왕국은 저 이탈리아를 다 먹고 싶은데 문제가 있었음. 통일 운동을 하려면


군사력을 키워야하는데 보병은 어찌저찌 키울수 있어도 나라가 작으니 기병을 키우는게 문제였음




당시 기병은 비록 총의 발명으로 한단계 위상이 낮아지긴 했어도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인데 사르데냐는 작은 왕국이라 돈많이 먹는 기병을 양성하기가 힘들었음




이에 알레산드로 페레로 라 마르모라라는 이름의 이 장군이 꿩대신 닭이라고 기병 역할 비슷하게 해줄


경보병부대를 창설하기로 마음먹음 그는 유럽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경보병 전술에대해 공부하고


조사하며 본국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경보병부대를 만들기로 함. 그런데 막상 만들려고 보니 여러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좌절되나 했으나 1836년 당시 사르데냐 국왕이었던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군대 재편을


시도했고 알레산드로의 기획안도 통과 되어 2개중대 규모로 창설할수 있는 허가가 떨어짐


그렇게 창설된 베르살리에리 중대는 맹훈련을 거듭했고 특히 기병을 대신하는 역할을 해야했기에 뛰는것에 중점을 두었음





그렇게 검은 뇌조깃털 장식에 기본은 뛰어다니는 경보병 부대 베르살리에리가 생겨남


한편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맹훈련을 받았다는 베르살리에리 부대를 사열했는데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딱 봐도 정예부대라는 인상을 받았는지 아주 흡족해 했다고 함


알레산드로에게 수고 했다며 같이 저녁을 먹자고 초청을 함 그리하여 사르데냐왕국의 중심지 토리노에서


사열을 마친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토리노에서 10km 떨어진 왕실 별장으로 이동했고 가서 보니 


알레산드로랑 베르살리에리 부대가 또 사열준비를 하고 있었음





이에 카를로 알베르토왕 기분이 언짢아 졌는데 알레산드로를 불러다가 한마디 함




'내가 분명히 2개중대 규모만 허락했는데 누구 맘대로 이렇게 많이 뽑았음?'




'2개중대 인원 맞는데요?'




'뭔소리임 쟤네는 그럼 뭐냐?'




'자세히 봐보세요'




'!!!!'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알레산드로 말대로 자세히 봐보니 아까 전에 토리노에서 사열했던 그 대원들이었음


왕이 마차를 타고 10km 올동안 베르살리에리 부대원들이 뜀걸음으로 왕의 마차를 앞질러서 먼저 도착해있던거임


이에 감탄한 카를로 알베르토 왕이 더 많이 뽑아서 베르살리에리 부대를 크게 키우라는 명령을 내림


그후 사르데냐 왕국의 정예부대가 된 베르살리에리 부대는 크림전쟁에 사르데냐 왕국 대표로 참전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선봉에 서서 곳곳에서 전투를 치뤘으며




교황령을 점령할때는 교황령 주아브들과 격전을 치르며 로마를 점령하기도 하고




나중에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벌어졌을때 이탈리아 왕국 대표부대로 보내지기도 함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가 베르살리에리부대원)


그렇게 점차 베르살리에리 부대의 명성이 커진만큼 규모도 커져서 10개 연대 이상 되고 자전거도 타고 기계화 보병처럼 되었지만


쭉 이탈리아 최정예부대였음


특히 2차대전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다른 이탈리아군이 온갖 추태를 부리는동안 베르살리에리 연대는 아주 잘싸웠는데 그들을 


지휘했던 롬멜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함




'독일군은 세계를 놀라게하고 베르살리에리 부대는 독일군을 놀라게 함'


비록 북아프리카 전선은 독일-이탈리아 군이 영국-미국 연합군에게 박살 나긴 하지만 베르살리에리는 꾸준히 전과를


올렸다고 함 특히 이제 막 전쟁에 뛰어든 미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고 하는데 당시 이런 이야기도 전해져옴




'아오 어떤 XX들이 XX같은 이탈리아군한테 지냐? 어? 다 정신빠졌지 어?'




'저 패튼 장군님 그게 아니라...'




'아오 변명 따위 집어치우고 전부 대가리 박을 준비나 해라'




'그게 이탈리아 군이 아니라 베르살리에리 연대랑 붙은거에요'




'아 그래? 그럼 당연한거지 심한말 해서 미안'


그 욕쟁이 패튼이 사과할정도로 베르살리에리 연대의 전투력은 인정받았음. 하여간 이 베르살리에리 부대는


여전히 이탈리아군의 정예부대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특유의 뜀걸음이 인상적임.



(얘맞음)


폴고레 공수사단의 전과를 본 한 유저의 댓글이 걸작임

- 개인적인 의문: 파스타도 알보병으로 영국 전차 110대를 깨먹을 수 있었는데 대체 일본군은 왜 사람이 자폭을 해야 했는가? 



*펌글 출처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137640 (독일군과 맞서 싸운 이탈리아군 공수부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6800823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을 빛낸 전투부대)

https://www.fmkorea.com/5165312438 (이탈리아군 최고 광기 집단)

https://www.fmkorea.com/best/4025865432 (이탈리아 메이커 부대 베르살리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