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작업복의 소매로 닦아냈다. 몸 속에 있던 울분이 빠져나오자,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판단할 수 있었다.
 우선 나는 한 여자 위에 올라타 있다. 그녀는 저항해봐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내 울음에 동정심을 느꼈는지 몰라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고개를 들자 선생님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마 이미 숨을 거둔 뒤인 것처럼 보였다.
 이 사무소의 학생들이 함께 웃고 떠들며 배운 노동조합에 관련된 내용이 칠판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그 위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겁을 먹은건지, 아니면 미안한건지 당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부에서 보낸거, 맞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죽인 겁니까? 이 분.. 저나 다른 사람들처럼 낮은 임금에, 하루에 18시간동안 일하고, 작업 환경도 위험한데, 다치면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고.. 그런 사람들을 구하자고 노조 만들려 한 겁니다. 근데 그걸 왜! 최소한의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겁니까.. 우리가 기계입니까?"
 또 눈물이 흘렀다. 억울해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내려와 그녀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합니다."
 "뭐라고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살인까지 저지릅니까? 당신은 국가가 준 넓고 편안한 집에서 살아가고, 우리가 수십년을 모은 돈보다 수십배는 더 많은 임금을 매달 받으며 살았을 것 아닙니까?"
 "국가가.. 저한테 준 것은 이 상처들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소매를 걷어올렸다.
 그녀의 팔에는 무수히 많은 상처가 있었다. 그 상처들을 보자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소월..?"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소월. 모를 리가 없었다. 공산 반란의 지도부였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다. 그런데, 감옥에 있어야할 그녀가 왜 지금 여기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힘이 스르르 풀리며 그녀 위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벽에 기대어 쓰러지듯 앉았다.
 "명령이.. 있었어요.. 국정원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는 임무를 맡으라고.. 만약.. 하지 않으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려하자, 내가 말을 이어갔다.
 "더 가혹한 고문을 하겠다.. 뭐 그런 겁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였다. 정부와 황가 모두 그녀가 고문을 받은 사실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문을 당한 것이 확실했다. 
 그녀의 상처와 울음을 보고, 그녀의 사과를 듣자 나는 좀 누그러진 마음으로 말했다.
 "정부도 신뢰할 수 없겠네요. 고문 받으면서 협박까지 당해 살인을 저지르게 해놓고서 거짓말을 하고.. 어쩌면 제가 보낸 편지도 이미 불태워진지 오랜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러니하네요. 돌아가신 선생님께선 정소월 대표님을 '급진적이였으나 노동자를 위해 싸운 최후의 사람.'으로 평가하셨는데.."
 그러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저.. 저를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허탈한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제가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네요.. 전 그것도 모르고 절 외톨이라 생각하고.. 또.. 그런 사람을 죽이고.."
 내가 뭐라고 위로 하기도 전에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나처럼 모든 울분을 쏟아내 듯, 끅끅거리며 오열했다.
 그녀의 울음이 그치고, 그녀는 불현듯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줍더니 나에게 던졌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총을 받자 그녀는 모든걸 체념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머리를 노려주세요. 아픈건 싫어서요.. 할 수 있으시죠?"
 "제가 정소월 대표님을 살해하란 말씀이십니까?"
 "돌아가봐야 전 또 고문을 받고 살아가겠죠. 전 더이상 그 고통을 참고 견딜 자신이 없어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녀는 망설이는 나에게 말했다.
 "사람이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으 쓰는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당연한 이치에요. 감정을 숨기고 누르는게 능사는 아닌거죠. 저도 그런 의미에서 부탁드리는거에요.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대표님, 그럼 제가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요?"
 나는 말 없이 일어나 사무소의 창고로 가 휘발유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잘린 그 순간부터 고민한 말을 꺼냈다.
 "대표님이 제게 불을 붙여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