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온 공단에 점심 식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줄 가까이 다가가자, 나를 알아챈 몇몇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X. 휘발유는 왜 들고 온거야? 여기 불지르려고?"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휘발유를 머리 위에서 부웠다. 기름 냄새가 전신에 났으며, 머리와 작업복은 축축하게 젖었다.
 내 행동에 동요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정소월 대표가 덜덜 떨면서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내가 어서 하라는 몸짓을 취하자, 그녀는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불에 타 죽는거라고요.. 세상 어느 죽음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전 괜찮습니다. 제가 이 직장에서 잘린 이후 계속 생각했던 일인데, 전 겁쟁이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제 전.. 제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겁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보더니, 라이터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나는 그녀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정 해주십시오. 제가 불에 타고 있을 때, 죽기를 원하신다면 저에게 달려드시고, 아니면 살아주십시오.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러곤 그녀가 쥐고 있는 라이터를 빼앗아 들었다.
 그녀가 놀라며 나에게서 라이터를 빼앗으려고 하기 전에, 나는 라이터의 불을 켰다.
 
 온 몸이 뜨거웠다. 무더운 공장에서 일할때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감쌌다.
 내 시야에는 새빨간 불과 불타는 나를 보고 놀라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타다닥 타다닥 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억울함 때문일까, 아니면 통쾌함 때문일까?
 나는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을 쏟아내며, 사람의 소리도 아닌 괴성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내뱉은 이 마지막 말은,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혀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말이 끝나자마자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듯 힘이 풀리고, 고통이 찾아왔다.
 내가 공장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자, 누군가 물을 끼얹었다.
 온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 사이로 울고 있는 정소월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나는 웃음을 지으려 애를 쓰며 그녀에게 말했다.
 "잘.. 잘 하셨습니다.. 사는게 이기는겁니다. 살아야 언젠가 이길 수 있는 겁니다.."
 그녀는 까맣게 타버린 내 손을 부여잡고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달려온 동료들에게 업혀졌다. 그들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왔다.
 "바보 같은놈.. 왜.. 왜.."
 남에게 업히는 것이 이렇게 편한지 몰랐다.
 
 "지금 사람이 죽는다고, 사람이!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딴 소리가 나와?"
 "환자 받아들였다가 병원비 못 내고 도망가면 어떡합니까?"
 "이 자식이 진짜!"
 동료들의 의사의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병원 계단에 뉘어진 채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당황한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명희야? 여기 오지 마라! 가라 가! 네가 볼 게 못 된다!"
 몇몇 동료들이 달려나가 여동생을 뜯어말렸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 그 소음들이 모두 먹먹해진 귀로 들려왔다.
 소란이 벌어지는 와중에 또 한 동료가 나를 업고 말했다.
 "WHO인가 뭔가.. 거기로 가자. 거긴 받아주겠지."

 나를 보며 의사는 말했다.
 "가망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것 만으로도 기적입니다. 저희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건 고통을 최대한 줄이는 것일 뿐입니다."
 나는 처음 누워보는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다들 비통한 표정으로 내 침대에 모여있었다.
 나는 목이 쉬어 나는 쇳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말했다.
 "다들 와줘서 고맙고.. 내가 못 다 이룬 일.. 꼭 다 이뤄주면 좋겠다.."
 그 때, 옆으로 동생 명희가 다가왔다. 작업복 차림에, 긴머리를 뒤로 묶은 것으로 보니 공장 일을 하다가 내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것 같았다.
 나는 동생의 두 손을 잡고 더듬더듬 말했다.
 "미안하다.. 학교는 보내줬어야 했는데.. 또.. 혼자 남겨둬서 미안하다.."
 동생이 무어라 말을 했지만, 울음에 묻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배가 고프다.. 명희야.. 배가 고프다.."

 그 말을 남긴 채 온 몸이 불에 탄 이 청년 노동자는 숨을 거뒀다. 울음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 접수실로 향했다.
 "저 환자 동생 말이야.."
 접수원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자 나는 말을 이어갔다.
 "저 환자 동생에게 나중에 내 전화번호 알려주게. 내가 저 동생 학비와 생활비 모두 성인때까지 주겠다고."
 접수원이 놀라며 진심이냐고 묻자,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냥 하라면 하게! 왠 말이 그렇게 많나?"
 그러면서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벗고 병실로 다시 돌아갔다.
 뭐라 위로라도 하려 했으나,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저 아이에게 할 말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의 불을 붙였다.
 시내 한복판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지만, 세상은 멀쩡히 잘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채 끄지 못한 담배를 던져버렸다. 길가에 가로수에 떨어진 담배는 가로수를 불태웠고, 나는 세상에 대한 나의 공격에 만족해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활활 타라.. 활활.. 봉화처럼 불을 옮겨서 소식을 전해라.. 세상에 남은 유일한 청년이 방금 숨을 거두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