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소금 장수로
㉠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 고은, 성묘 -
(나)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
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
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
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
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
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 눈 안에 선지가 생길 : 눈에 핏발이 설.
* 서도 :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문제
<보기>를 참고하여 (가)의 ㉠~㉢을 감상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 기>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장소는 사람과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성묘 에서도 ‘이 땅’은 실제
로는 같은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배경이 변함에 따라 그것의 의미는 다양하게 드러난다.
①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도신’ 아버지의 삶을 화자가 떠올리
고 있다는 점에서 ㉠은 화자에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② 화자가 ㉠과 관련하여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 저문 압
록강의 붉은 물빛’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자에게 ㉠은
복원된 민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장소이다.
③ ‘젊은 아버지의 추억’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에서 ㉡은 화자가
세대교체를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④ 아버지가 ‘소금 장수’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모습을 통해
㉢은 화자가 가업을 이어 아버지의 꿈을 실현하려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⑤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라는 표현을 통해 ㉢은
화자가 자신의 바람이 현실화되기를 희망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대답해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