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부에서


1.

동아리방의 긴 책상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대명고등학교 연극부가 창설될 무렵, 새 가구를 살 돈이 없어 마침 개축 중이던 도서관에서 남는 물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게 약 20년 정도 전이다.

그때는 제법 쓸만했을지 모를 책상은 이젠 아예 못써먹을 정도가 됐다. 다리는 후들거려 평형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데다가, 이곳저곳에 가시가 일어나 팔이라도 잘못 걸치면 장미 덤불처럼 피부를 찔러왔다.

이제 학교에는 돈이 제법 있다. 많지는 않아도 동아리에 제대로 된 책상 하나 사줄 정도로는 충분하다. 나는 행정실에 문의해 제대로 된 견적서를 가져오면 당장이라도 책상을 바꿔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냈었으나, 빌어먹을 동아리 고문 선생의 탓으로 무산되었다. 어머, 얘들아. 이게 다 전통이고 낭만인 거야. 나는 오십 년 뒤까지 이 책상으로 계속 썼으면 좋겠는데.

동아리 고문 선생은 30대 중반의 여성으로, 국어 교사다. 미혼에 독신이며 시험을 더럽게 깐깐하게 내기로 유명하다. 겉으로는 사근사근하고 논리정연하게 말하기에 학기 초에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지만,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쯤 되면 모두 이 작자의 본성을 깨닫는다. 같은 문과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머리 텅텅 빈 문과충의 전형적인 예시라고 하면 비유가 편하겠다.

책상 사건이 있던 후로 나는 고문 선생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애초에 고등학교 동아리 담당 교사라는건 그런 자리다. 있는 듯, 없는 듯 행정상으로만 처리되는 것.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가는데 왜 자꾸 뭘 해서 일을 망쳐놓는지 모르겠다. 야망이나 능력이 있다면 또 모르겠으나 아무리 봐도 이번 선생이 그런 타입 같지는 않았다. 왜 연극부 교사에 지원한 걸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나름 간절한 바램이었으나, 이런 바램은 언제나 반대로 이뤄지는 법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첫 동아리 활동 날, 고문은 대형 폭탄을 터트렸다.

"세상이 바뀌었어. 솔직히 우리가 대단한 연극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않겠니? 문화라는 건 원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만들어지는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나온 대본들 전부 별로였다. 새로움도 없는데다 비도덕적이기까지 하지."

고문은 책상 위에 쌓인 대본 더미를 한쪽으로 밀어서 치웠다.

연극부의 목표는 학기당 극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2학기가 막 시작되었으니 지금은 어떤 극을 준비할지 논의하는 단계였고.

방학 동안 이미 메신저를 이용해 각자 마음에 드는 대본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연락을 돌려놓은 상태였다. 이상할 건 없었다. 저번 학기에도, 작년에도, 심지어 내가 대명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도 쭉 연극부는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 말 없이 연극부 회의에 참가한 고문이었다. 저 또라이는 회의 내내 아무 말 없이 뒤에 앉아 있다가, 투표까지 전부 마치고 대본을 확정지으려는 찰나에 나타나 저런 폭탄 발언을 던지고 말았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허락 못 하겠다는 뜻이야. 다른 대본으로 하는 건 어떨까?"

연극부 부원 한 명이 묻자 고문은 아예 못을 박아 버렸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건 질문의 탈을 쓴 요구에 가까웠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위계질서를 뒷배로 쓴 협박.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싸늘해졌다. 지금까지 회의한 내용을 혼자서 전부 부정하고 앉아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부원들은 하나같이 눈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아무도 직접 내뱉진 못했다. 아무리 짜증나도 선생이고 고문이었다.

점차 부원들의 시선은 하나둘씩 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럴 때만 부장을 찾는다 이거지. 한숨이 나왔지만 이러라고 있는 부장 자리가 맞긴 하다.     

"선생님, 그럼 어떤 대본으로 하면 좋을까요? 지금까지 나온 건 전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나도 생활기록부의 노예인 건 똑같았기에 대놓고 막나갈 수는 없다. 그나마 되도 않는 생트집이길 바래보며 역으로 질문을 던져봤지만, 결과적으로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고문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핸드백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음, 내가 가지고 다니던 대본이 있는데. 이건 어떨까?"

미소를 보자마자 내가 잘못된 질문을 던졌단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고문은 처음부터 학생들의 의견 따윌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기가 정한 대본으로 밀고 나가려고 했지.

반격이랍시고 내뱉은 말이 상대에게 판을 깔아주고 말았다.

"외국 대본의 번역본인데, 정식으로 무대에 오른 적은 없어. 그런데 내가 읽어보니까 내용도 굉장히 괜찮고 인원수도 딱 우리 연극부가 할 수 있을 정도더라고. 특히 좋은 점은 주인공 두 명이 여자라는 거야. 굉장히 평등하지 않니?"

그럼 남자 주인공 역은 없다는 거 아닌가. 뭐가 평등하단 건데? 연극부 내 남자 배우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모습을 봤지만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평소에는 항상 뚱해있던 고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진심으로 자신의 대본이 지금까지 나온 무엇보다 훌륭하다고 믿는 태도였다.

면전에서 그 대본 별로라고, 하기 싫다고 반항했다간 그 후에 어떤 피바람이 불지 감히 추측도 할 수 없다. 진짜 훌륭한 부장이라면 여기서 눈을 까뒤집고 들이받아야 하겠다만, 나도 대학교는 제대로 된 곳으로 가고 싶고.

"……어, 그럼 일단 다음 회의까지 읽어 보고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저희도 다른 대본 후보들을 찾아 보는 걸로 하고요. 한 번도 안 읽어본 대본을 가지고 의견을 낼 수는 없는 거니까요."

이게 내 최선이었다. 다음 주로 기한을 미루기.

회의가 끝난 후, 고문은 하교하는 부원들에게 대본의 복사본을 나눠줬다. 집에 가서 읽어보니 왜 지금까지 정식 극장에 올라간 적이 없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고문이 제외된 연극부 단톡방을 새로 파고 메시지를 보냈다.

[2학기 연극 망하게 생겼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까 대본 후보 찾아보자.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부원들은 앞다퉈 대본 후보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량 공세. 이 중에 하나는 고문의 마음에 들겠지, 하고 생각하며. 

그리고 다음 주 동아리 활동 날.

"음, 그래도 내가 가져온 대본이 가장 낫지 않아?"

고문의 고집은 대단했다. 우리는 꼼짝없이 그 대본으로 연습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 나는 일이었다.



2.

고문이 가져온 대본의 제목은 <거리의 댄서들>이었다.

배경은 20세기의 미국, 그 안에서도 스트리트 댄서들이 주로 활동하는 골목이다.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굳이 거리에서 춤을 추길 선택하는 스트릿 댄서들의 삶을 그림과 동시에, 그 당시 만연했던 소수자 차별을 지적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전자만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굳이 후자를 어거지로 끼워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소수자 차별, 당연히 나쁜 거다. 그걸 꼬집는 건 좋은데, 왜 그걸 학교 동아리 연극에서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대명고등학교 학생들이 과연 흑인 댄서가 당하는 차별에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 학교에는 외국인 학생조차 없는데?

고문 선생의 높은 인권의식은 잘 알겠지만, 그 표현을 우리에게 맡기지 말아줬음 한다는 말이었다. 이걸 면전에서 말하지 못하는 나도 참 한심하다.

우리는 배역을 나누고, 고문 선생의 입회 아래 리딩을 마쳤다.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활동은 해야만 한다. 그래야 생기부에 한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교 준비를 하는 내내 인상을 써서 그런지 눈가가 아파올 때였다. 누군가 옆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부장, 왜 그렇게 죽상이야?"

사정을 뻔히 다 알면서 얄궂게 물어보는 여자아이의 이름은 소안이었다. 연극부의 몇 없는 귀중한 배우 중 하나였고, 동시에 이번 연극에서 나와 짝을 맞출 주인공이기도 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가?"

소안의 생글생글 웃는 표정에는 천진난만한 장난기가 가득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분명.

연습에도 성실하게 참여하고, 동시에 다른 부원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소안은 부장으로서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장난기는 가끔씩 대응하기 곤란한 면도 있었다. 

<거리의 댄서들>이 20세기 미국의 소수자 차별을 다룬다고 했었던가.

어떤 주제의식을 다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대본의 작가는 가장 편리하고 일차원적인 것을 사용했다. 옹호하고 싶은 쪽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 반대편을 삼류 악역으로 만들어 권선징악 구도를 그리는 것.

고문의 말대로 <거리의 댄서들>에는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트릿 댄서이고, 동시에 라티노와 흑인이며, 레즈비언 커플이다. 당연히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외부 세력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들이란 건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어쩌다가…….'

부장이자 연극부의 배우인 나는 여성 주인공 중 한 명을 맡아 연기하게 되었다. 곤란하다는 건 이 부분이다. 몸치, 동양인, 이성애자, 모태솔로인 내가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해야만 했으니까.

낯선 속성이 너무 많아 연기하기 까다롭고, 극을 주도하는 주인공 역할의 부담감도 있는 데다가, 고문이 대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만큼 사사건건 연기에 태클을 걸 게 분명한 자리다. 부원 모두 기피하기 역력한 태도였고, 결국 부장이 짬처리를 당했다, 이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놀리는 소안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너도 주인공 역인거 안 까먹었지?"
"응. 당연하지."
"……그런데 왜 놀리는 거야?"
"재밌으니까?"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 자리.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당첨된 두 명. 우리는 똑같은 처지의 피해자나 다름 없건만, 눈앞의 이 당돌한 여자애는 아는지 모르는지 동지를 두고 깔깔대며 비웃고 있다.

과도한 장난기라 함은 이런 의미였다. 남에게 무작정 물을 뿌려대며 자기가 젖든 말든 낄낄거리는 꼬마애와 같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게 들릴 정도로, 소안은 세상은 낙담할 일이라곤 전혀 없는 놀이터 같은 곳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자기가 불이익을 당하는 걸 술래잡기에서 술래 역에 당첨되는 것쯤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부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 불쾌하진 않은데. 나도 졸업 전에 한 번쯤은 주인공 해보고 싶었거든."
"그 마음은 알지."

이해한다.

고등학교 동아리 연극이다. 부원들 중에서 정말 연극으로 밥을 벌어먹을 사람은 기껏해야 한두명. 어쩌면 아무도 없을 수도 있겠지. 학창시절이기에 허락되는 간단한 놀이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번 무대에 올라 박수갈채를 받아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아마추어나 프로에 관계 없는 뜨거운 복받힘.

조연이 아닌 극의 주인공으로 그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건, 한 명의 배우로서 너무나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때가 너무 좋지 않아서 그렇지.

"아는데,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잖아. 내년에 해도 되지 않나. 그땐 고문도 바뀔 거고, 대본도 지금보단 괜찮을 거고."
"부장은 3학년 올라가도 계속 동아리 하려고?"
"그건 힘들지. 수능 준비도 있으니까."
"나도야. 일학년 때 노는 바람에 내신이 망가져서. 정시 아니면 답도 없어. 사실은 지금도 집에선 엄청 쪼아대는데."

삼학년이 되고 입시의 라스트 스퍼트 타이밍이 오면 지금처럼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힘들다는 소리였다. 2학년인 내가 동아리 부장직을 맡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기에 나는 더이상 이 주제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이 마지막 극인 건 피차일반이었다.

"음, 그리고."
"응?"
"나는 대본 그렇게까지 나쁘게 생각 안 해. 아, 물론 처음에 회의로 정한 대본이 열 배는 더 좋긴 한데. 이것도 나름 재밌지 않나? 여자 커플 주인공 연기를 살면서 언제 또 해보겠어."
"긍정적이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원래 이런 건 본인은 모르는 법이다.

<거리의 댄서들>은 소수자 인권 옹호라는 주제에 걸맞게 주인공 커플의 거침없는 애정 행각도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짙은 거부감을 표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소안에게는 그저 재밌게만 느껴졌나 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기 내용으로 고민하던 나였지만 소안과 대화하다 보니 이상하게 머리가 가벼워졌다.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짐으로 여기지 않는 소안의 태도가 조금 옮았을지도 모른다.

"무대에서는 언제 처음 해보더라?"
"다다음 주? 학기말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천천히 하면 돼. 첫 연습부터 끝까지 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말해놓고 부장은 끝까지 다 연습해서 오잖아. 이제 안 속아."
"뭐라니."

손을 흔들며 소안과 헤어졌다.

하교길을 걸으며 집으로 가던 도중 문득 떠올랐다. 저번 무대 때 소안이 나랑 합을 맞춰본 적이 있던가?


3.


막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들을 한데 불러모은 고문은 느닷없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너희, 연극 하고 싶은 건 맞아?"

첫 무대 연습이 끝나고 각자 이것저것 떠들던 중이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연극부 활동이 시작됐다는 흥분, 첫 연습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아쉬움, 생각보다 잘 표현된 부분에 대한 뿌듯함.

그 감정들을 전부 날려버릴 정도로 뜬금없는 집합이었다. 첫 연습에 내뱉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대자 고문은 한숨을 푹 내뱉었다. 말 안듣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눈빛이었다.

"그래. 첫 연습이니까. 버벅이는 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 의욕이 보이면 내가 이렇게 불러서까지 잔소리를 하겠니?"

혼내는 것도 내용 나름이다.

정말로 부족한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을 꼬집는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태도를 걸고 넘어지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프다. 고치고 싶어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자기가 상상했던 광경보다 훨씬 수준 미달이라 화가 난다고.

고문은 들을 가치 없는 훈계를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십 분쯤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는지, 동아리 활동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따위를 설명하더니 느닷없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까딱까딱 손을 휘둘렀다.

"특히 너희. 부장하고 소안이 이리로 와봐."
"네."

갑자기 왜 불똥이 여기로 튈까. 불렀으니 대답은 했다. 고문은 눈을 찡그리고서 삿대질을 했다.

"사실 너희가 제일 문제야. 대본은 다 읽었어? 사실대로 말해."
"읽었어요."
"읽었는데 연기를 그렇게 해?"

아니, 그럼 뭘 어쩌란 거야.

"대본 제목부터 <거리의 댄서들> 이잖아. 춤을 전혀 못 추는 건......그래. 오늘이 첫 번째 연습이니까 그렇다고 쳐. 그런데 감정선은 아니지. 전혀 갈피도 못 잡고 있던데 이래서 연습이 될까? 응?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피드백이 되겠어?"

나는 힐끔 옆을 바라봤다. 소안은 드물게 경직된 표정이었다. 그게 상황에 맞춘 거짓된 표정인지, 아니면 첫 연습부터 트집을 잡혀 혼나는 것에 대한 억울함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부장으로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뭔데?"
"어느 부분을 지적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들어 고문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쩌면 정말 연기에 부족한 점이 있을 지도 모른다. 고문이 스스로 고른 대본이니 무언가 보고 싶은 그림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혼나봤자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고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혼난다면 기분이 덜 나쁜 방법을 고르고 싶었다. 소안을 비롯한 부원 모두에게. 덤으로 노린 효과도 하나 있긴 하다.

"그래? 말하면 네가 고칠 수는 있고?"
"네. 할 수 있어요."

고문은 언젠가부터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대본 설명할 때 뭐라고 했었지?"
"소수자 인권에 대한 내용이 특히나 중요하다고 하셨었죠."
"……그래. 그럼 대본에서 그걸 나타내는 부분이 어디일까?"
"두 주인공의 로맨스가 아닐까요? 사회에서 고립된 두 명이 서로 연대하며 주변인들의 시선을 이겨내는 이야기니까요."
"그래. 머리로는 잘 알고 있네. 근데 왜 몸으로는 연기를 그렇게 하니?"
"고칠게요. 어디가 문제인데요?"
"전부 다. 소안이랑 너랑 연애하는 느낌이 하나도 안 나잖아. 관객들이 너희 둘의 관계에 몰입해야 메시지가 전달이 될 거 아냐."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지만 고문은 뜬구름잡는 소리만 계속 해댔다. 그래서 어디를 뭘 어떻게 고치라는 건데? 프로 배우라면 몰라도 우린 아마추어 취미반이다. 어느 수준까지 원하길래 이렇게 사람을 달달 볶는 걸까.

말을 섞다 보니 머리에 열이 올랐다.

고문이랍시고 앉아서 이리저리 삿대질을 할 거면 똑바로 해줬으면 좋겠다. 학생 배우들에게 책임만 전부 떠넘기지 말고.

"그럼 그 부분만 고치면 되겠죠? 다른 부분은 더 말씀하실 거 없으시죠?"
"말투가 왜 그러니?"
"첫 연습 피드백이잖아요. 확실하게 해서 다음 시간에는 칭찬이라도 한 마디 받아보고 싶어서 그러죠."
"……다음 연습까지 고쳐오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아까 전에."

침묵이 흘렀다. 고문은 더 할 말이 없어 보였기에 나는 몸을 돌려 부원들을 바라봤다.

"고문 선생님 말씀 다 들었지? 오늘 해주셨던 피드백 다들 기억해서 최대한 고쳐 보자. 연습 고생했고 오늘은 끝! 내가 문 잠글 테니까 먼저 나가도 돼. 아,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문에게 먼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소안도 냉큼 큰 소리로 인사했다. 눈치도 빠르다. 이러니 미워할 수가 있나.

슬슬 눈치를 보던 다른 부원들도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고문은 어느새 해산하는 분위기가 된 아이들을 보며 몇 번 망설이다 이내 자신도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나를 바라보는 고문의 시선이 매서웠으나 애써 무시했다.

'……이제 어떡하지?'

무대 뒷정리를 하고 문을 잠그면서도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다음 연습까지 연기를 고쳐오라고? 고작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어느 부분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도 잘 모르면서?

홧김에 기세 싸움을 하다가 무작정 내뱉은 허세다. 지킬 능력이 있었으면 애초에 지적도 당하지 않았을 터다. 일반적인 연애 연기라면 기본은 할 자신이 있었으나, 고문이 원하는 건 그 이상이 분명했다. 소수자의 연애.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분야.

'어디서 배우란 건데.'

본 적도, 해본 적도 없다. 학생에게 이딴 걸 시키면서 잘하기까지 기대하는 선생이 어디에 있나. 여기가 무슨 연기 학원도 아니고.

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감각에 그만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하교하지 않고 정리를 도와주던 소안이 말을 걸어온 건.

"도와줄까?"
"응?"
"연기 연습. 우리 같이 합 맞춰야 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새빨갰다.


  4.


어떻게,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야, 지금 우리가 하는 연기는 연애였다. 도와주겠다는 말을 굳이 하는 걸로 보아 지금까지처럼 대본을 같이 읽어준다던가 하는 건 아닐 테고.

좋은 연기는 경험에서 나온다는 말을 믿는 나로서는 소안의 말을 해석해서 되묻는다는 행동이, 뭐랄까.

'발칙……하지 않나?'

고등학생 여자애가 같은 나이 소녀에게 할 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소안이 어떤 의도로 말한 건지는 모르겠어도.

"혼자 노력한다고 나아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고문 선생님이 지적하신 부분은 우리 둘이서 같이 연기하는 부분이니까."
"그렇긴 하지?"
"연기에 문제가 있으면 그건 내 책임도 있을 거야. 아니, 분명히 있어. 그러니까 이건 내가 꼭 도와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열띤 어조로 말을 이어가던 소안은 끝을 얼버무렸다.

"어쨌든. 다음 연습까지 연기 수정하려면 부장 혼자서는 안 되잖아. 할 수 있다고 해도 정작 호흡을 맞추는 내가 수정 방향을 모르면 보기에 이상할 거야. 돕게 해줘.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해."
"아, 응……고마워."

소안의 말 중 틀린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듣고 보니 소안이 나를 돕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조급한 어조가 마음에 걸렸다. 얼떨떨한 기분에 반사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내뱉고도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깨닫고 말았다. 소안은 날 도와야 할 이유가 있어서 돕는 게 아니라, 도와야 하기에 이유를 만든 것이다.

따지고보면 괜히 내가 고문에게 대들어 일거리를 늘린 셈인데도 그렇다.

"고마워, 정말로. 덕분에 좀 진정이 된다."

쿵쿵대던 심장소리는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

소안의 매사에 긍정적이고 웃음을 잃지 않는 태도는 큰 장점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소를 전염시키는 힘.

이번에는 나도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연습은 어떻게 할 거야? 따로 방과 후에 시간이라도 뺄까? 주말도 시간대를 미리 말해주면 괜찮은데."
"아, 응. 그걸 말 안했었구나. 연습 시간을 따로 만들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도 학원이 좀 있어서."
"그러면?"
"경험이 부족하면 연습량으로 메울 필요가 있잖아? 이번에는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연습량이 부족하면 경험으로 메운다. 말은 그렇듯하게 들렸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럼 아까 발칙하단 느낌이 들었단 것도, 설마.

소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서로 첫사랑이나 시작해볼까."

미치도록 달콤한 대사였다. 내가 연애 경험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5.


<거리의 댄서들>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흑인 댄서 가넷과 라티노 댄서 루이. 둘은 각자의 박복한 삶을 살아오다 운명처럼 길거리 아스팔트 위의 춤판에서 마주친다. 서로의 춤을 보고 매혹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거운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두 사람이 연인으로 다시 태어난 길거리 춤판은, 사회의 귀찮은 예의범절이나 눈치 따위는 없는 자유의 공간이다. 백주대낮에 술을 진탕 들이키고 막춤을 춰도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는 곳.

가넷과 루이도 그날 밤 춤판에서는 잔뜩 취해 있었고, 그렇기에 서로의 고백을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랑은 진짜지만 과연 상대방도 그랬을까 의심한다. 술에 취해 거짓 사랑을 속삭이는 건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

하룻밤의 꿈인가, 아니면 운명적으로 만난 사랑인가. 고민하며 숙취에 지끈거리는 몸을 이끌고 문 밖으로 나간 가넷은, 자신의 집 앞에서 서성이던 루이와 마주치게 된다. 서로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다가 루이는 대뜸 내뱉는다.

「하, 드디어 만났네요.」
"하, 드디어 만났네요."

어젯밤 가넷이 루이에게 알려 줬던 집주소는 거짓이 아니었다. 소수자로서 이해해주는 이 없이 세상을 떠돌던 루이가 드디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이 한 줄의 대사는 가넷이 가지고 있던 불안을 말끔히 날려버림과 동시에, 두 명이 떼어놓을 수 없는 연인 관계가 되었음을 관객들에게 확인시키는 말이 된다.

아침 등교 시간, 현관을 나선 나는 벽에 기대어 선 소안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대낮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래?

"……뭐 해?"
"하, 드디어 만났네요."
"……."
"하, 드디어 만났네요……왜 대사 안 받아줘? 대본 다 안 외웠구나."

다 외웠다. 그래서 지금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거고.

그러니까, 지금 소안은 현실에서 루이의 대사를 치고 있었다. 저렇게 부끄러운 짓을 천연덕스럽게 저질러 놓고선, 호응이 없다고 날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꼴을 봐라. 이게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분간을 못 할 정도다.

  어제 소안이 나에게 했던, 첫사랑을 시작해보자는 말.

그건 연인 연기를 위해 실제로 연인 흉내를 내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거리의 댄서들> 속 가넷과 루이가 서로에게 있어 첫 번째 사랑임을 내포한 말장난이었다. 그야말로 소안다운 대사라고밖에 할 수 없어, 집에 와서 깨닫고는 무심코 웃었었다. 

고문이 지적한 내용은 무대 위의 가넷과 루이가 연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다. 쓰레기같은 연기는 하지 않았어도, 여성끼리의 연애라는 점이 낯설어 관객석에서 보기엔 어색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안은 말했다.

'우리가 친해지면 괜찮지 않을까. 두 주인공은 서로 연인이기도 하지만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기도 하잖아. 전자에 무게를 두기 어렵다면 후자에 집중해도 될 거야. 성(姓)이 사랑의 본질은 아닐 테니까. 중요한 건 유대감이지.'

그래서 우리는 연인이 되기로 했다. 대본 속 두 댄서와 같이, 서로를 알고 나서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사이가.

무대 바깥의 친밀도가 무대에 영향을 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맡은 배역 상 서로를 미칠 듯이 증오해야만 한다거나 할 때는 부정적 영향을 끼치겠지만, 다행히 우리는 연인이었다. 눈빛에 친밀감이 조금 감돌더라도 뭐라할 사람은 없다.

'돕는 쪽은 나니까, 부장은 일단 들어가서 쉬어. 아까 전도 그렇고, 무대 뒷정리도 그렇고 고생 많이 했잖아. 구체적인 방법은 내가 내일 알려 줄게.'

그렇게 말하기에 철썩같이 믿고 푹 잤다. 구체적인 방법이 이런 건지는 전혀 몰랐다.

"여자친구 하기로 했었잖아. 연인 사이에 이런 장난도 못 받으니까 연기에 지적이 들어오지."
"아니, 그거랑 이건……."
"됐어. 일단 손이나 줘 봐. 얼른."
"응? 어, 어."

단호한 어조에 손을 내밀었더니 소안은 그대로 붙잡아 깍지를 꼈다. 뭐 줄 거라도 있나, 하고 생각하던 나는 뒤늦게 이것마저도 연인 행동의 일부란 걸 깨닫고 경악했다.

진짜로, 농담 하지 말라고 해. 설마.

"학교 가자, 부장."
"제발."

적어도 비밀 연애라는 선택지는 없었을까.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손아귀를 꼼지락대며,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등교로를 걸어야 했다.

소안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교문을 통과하고 교실로 이르기까지 쭉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반대로 나는 수치심에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저 느낌일 뿐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옆을 스치는 다른 학생들이 모두 나와 소안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는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면 그만 눈을 감고 싶어졌다.

2학년 교실이 있는 층에 다다랐을 때에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인생에서 최고로 긴장되는 등교길이었다.

어제는 두근거리던 심장을 멈추게 하고, 오늘은 다시 뛰게 하다니. 살면서 이토록 남에게 감정을 헤집어진 적이 있을까. 맹세컨데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쭉 없을 것이다.

"이, 이제 놔 줘. 반 들어가야 하잖아."
"응."

다행스럽게도 나와 소안은 다른 반이다. 순순히 손을 흔들며 제 교실로 향하는 소안을 보며 조금 얼떨떨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이 두 쪽나도 놔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만.

나는 긴장으로 땀이 찬 손바닥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아, 등교만 같이 하는 건가? 하긴, 이걸로도 차고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렸다. 나는 소안이 특별한 작별 인사 없이 떠났다는 점을 유념했어야 했다. 떠올려보면 연극부에서도 시작 인사, 끝 인사를 철저하게 하던 소안이었는데 말이다.

"부장!"

소안은 쉬는 시간에도 찾아왔다.

"부장!"

점심 시간에도 굳이 내 자리를 찾아 옆에 앉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어지는 5교시 수업. 종료 종이 울리자마자 득달같이 열리는 교실 뒷문에 나는 어딘가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뒷문 근처에 있는 동급생은 '또 너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젠 별 관심도 표시하지 않았다.

"부장, 나 왔어!"

단순히 찾아오는 것뿐만이 아니다. 소안은 한번 오면 쉬는 시간 10분이 끝날 때까지 내 자리 주위에서 맴돌며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십 년 지기 친구마냥 대하는데, 나로서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오전 시간 내내 시달렸는데 오후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점심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쑥덕대는 소리를 엿들었단 말이다.

원래 둘이 저렇게 친했냐느니, 그러고 보면 같은 동아리라느니, 지금까지는 왜 눈치를 못 챘을까, 어쩌구 저쩌구. 살다 살다 파파라치에게 쫓기는 셀럽 기분에 공감하기는 처음이었다.

"너, 너……이리로 와."

연극부에서 고문에게 혼나기 전에, 이대로면 내가 수치스러워서 학교를 다닐 수 없다. 나는 근처로 다가온 소안의 손목을 붙잡고는 다짜고짜 복도 계단으로 끌고 갔다.

소안은 당황하지도, 잡힌 손목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얌전한 표정으로  졸졸 따라오더니 순진한 표정으로 물을 뿐.    

"왜?"
"몰라서 물어?"
"음, 아닐지도. 사실 알지."
"뚫린 입이라고……!"

잠시 까먹어 버렸다. 소안은 원래 이런 성격이였다.

내가 오전 내내 부끄러움에 정신을 못 차렸단 것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도 전부 알면서 그 위로 놀고 있단 소리다. 나쁜 애는 아니니까 악의는 없겠지. 저번에 도와준다는 것도 진심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재미까지 느낄 수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장이 왜 고문 선생님에게 혼났는지 알 것 같아."
"뭐라고?"
"나쁜 뜻은 아닌데, 청학동에서 방금 나온 사람 같아. 남들 사이에서 튀는 걸 너무 싫어해. 그래서 밖에서 보면 어색해 보이는 게 아닐까? 가넷과 루이의 관계도 별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음, 부장은 연인이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난 잘 모르겠어. 오늘 오전에 내가 조금 치근덕대긴 했지. 그건 맞아. 그래야 연인 연습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남들이 보기엔 그냥 친한 친구였을걸? 붙어 있는 거 빼고 한 건 없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말을 많이 걸어오는 것도, 농담을 하며 가볍게 손등을 때리는 것도,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것도, 점심을 같이 먹는 것도. 연인의 행동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연인만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건……."

부끄러움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소안은 그냥 친한 친구 사이에서 용납될 행동을 했을 뿐인데, 나 혼자 바보같이 확대해석해서, 혼자서 부끄러워하고, 혼자서 창피해하고, 혼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렇게 손목까지 붙잡고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는 거.

"아, 그런데 연인끼리 하는 행동이 하나 있긴 했어. 방금 전에 손목 붙잡은 거. 드라마에서 꼭 이런 식으로 구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맺어지더라. 무대에서도 해볼까?"
"그만해……."

소안은 깔깔대며 웃었다.

"부에서는 멋진 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귀여운 모습도 있구나. 괜찮아. 부끄러운 만큼 무대에선 더 나아질 거야. 내가 장담할게."

6.


「잘 가, 루이. 내일 11시에 나오는 거 잊지 말고.」
「늦으면 데리러 나와줄 거야?」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루이는 가넷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만에 하나라도 루이가 늦을 일은 없지만, 만약 늦는다면 가넷은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오리라. 방금 전의 퉁명스러운 말과는 정반대로. 두 명은 다시 거리에서 만날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만났던 날처럼 춤을 출 거였다. 아무도 약속이 깨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게 이 춤꾼들의 승리 비결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 내일 11시에.」

루이의 집 현관이 닫혔다.

가넷은 닫힌 현관문을 뒤로 경쾌한 걸음을 한 채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분명히 존재할 시련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극복할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걸음은 무엇보다 자유롭다.

걸음은 이윽고 무대 뒤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한발 빨리 퇴장한 소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루이의 옷을 입고 있는 소안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여운을 주기 위해 일부러 끊지 않은 배경음악이 잔잔하게 흘렀다.

"됐어."
"그렇지?"

소안의 밝은 표정은 방금 내 연기가 어땠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오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목소리도, 행동도 이전에 비해 훨씬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감각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길거리 춤꾼이라면 필시 이런 연애를 하리라. 머릿 속 상상과 대본 속 이미지가 완벽하게 맞아들고, 그걸 손가락과 발끝으로 무대 위에 구현했다는 확신이 들 때, 배우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직업적 충족감을 느낀다. 아마추어라도 그건 다르지 않다.

음악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기까지 무대는 계속된다. 우리는 혹시라도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숨죽여 기뻐했다. 소안과 함께한 일주일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첫날에 했던 말은 지켜졌다.

그러나 소안은 갑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될까?"
"그건 알 수 없지."

언제나 제 3자의 시선은 잔혹하다. 무대 위에선 완벽하게 맞물렸다고 생각한 톱니바퀴도 관객석에서 보면 형편없이 헛도는 모양새일수도 있다. 우리의 평가관은 언제나 무대의 정면에 있다.

"그래도 믿어. 잘 될 거라고. 나는 우리가 최선이 아니라 최고의 결과를 냈다고 생각해. 이래도 안 되면......깔끔하게 단념해야지. 좀 혼나면 어때? 이런 기분을 느꼈는데."
"기분?"
"주인공을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저번에는 대차게 까였으니 예외로 치고, 오늘이 성공적인 첫 무대 연습 아냐?"

연기는 곧 상호작용이다.

저번에는 연인 역할인 내가 반푼이였으니 소안도 만족스럽게 연기를 끝마치지 못했었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가능하다면 내가 느꼈던 그 충족감을 소안도 느꼈으면 한다. 도움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도록.

소안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좋았어."
"다행이다."

노래가 꺼지고, 마지막 무대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진짜 실전이었다면 무대 인사를 했겠지만, 그 대신 배우들은 일자로 늘어서서 고문의 평가를 기다렸다. 저번 주에 혼났던 바로 후라 다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고문은 짜내듯 겨우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할 수 있는데 왜 저번에는 이렇게 안 했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기싸움의 당사자인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말이 정말 단어를 고르고 골라, 하기 싫은 칭찬을 꾸역꾸역 퉁명스럽게 꾸며낸 극찬임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거다.

다른 부원들도 칭찬이라는 뉘앙스는 느낀 듯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와 소안만큼 다른 부원들도 지난 일주일동안 각자의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얻어낸 성과는 특별히 마음에 와닿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늘 연습이 괜찮았다고 긴장 놓으면 안 돼. 연습 초기라고 세부 디테일은 빼고 했고, 실제 무대에서 실수가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저번처럼 실망시키는 연습이 나오는지 아닌지 내가 계속 볼 거야. 알겠어?"

뒤늦게 분위기를 잡아 보려고 이런저런 말을 내뱉는 고문이지만, 내가 보기엔 하등 쓸데없는 짓이였다.

"선생님. 어때요? 일주일동안 열심히 연습했는데요."

저번 연습때 한 내기에서 나는 이겼고, 고문은 졌다. 능력을 증명한 쪽이 권위도 가져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학기 시작 때 자기 마음에 드는 대본을 억지로 통과시키는 것 같은 일은 더이상 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부원들도 저번처럼 가만히 입 다물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

쾅, 거세게 문이 닫혔다.  

고문은 아무런 대꾸 없이 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신경질적인 퇴장에 나는 드디어 마음을 놓고 기뻐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이겼다. 소안의 덕이 크다.

소안은 다른 연극부원들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중이었다.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뚜벅뚜벅 소안을 향해 다가갔다. 거침없는 기색에 소안이 막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 순간, 나는 양팔을 벌리고 소안을 꽉 껴안았다.

"고마워! 덕분에......."

감사의 말도, 혼자였으면 할 수 없었다는 말도 이미 전했다. 그러나 정말로 승리했다는 확신이 들자 다시금 감정이 복받혔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안고 싶을 만큼 소안에게는 고마운 감정 뿐이었다.

소안은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라는 조언도 하지 않았던가. 무대 위에서 한 번 유용하게 써먹었으니 이번에는 무대 아래에서 써먹을 차례였다.

팍, 하고 소안은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떨어져 지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당연히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틀어지니 당황이 몰려왔다.

주위 연극부원들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소안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 보는 시선이었다. 제출한 OMR카드의 마킹이 밀려 있었다는 사실을 막 전해 들은 학생처럼 소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 미안해. 그게, 아......."

소안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본 적 있는 표정이었다. 연인 연기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했을 때의 너였다. 얼굴이 붉어질 일은 세상에 많지 않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거나, 제정신을 못 차릴 때까지 술을 먹거나, 그게 아니라면.

소안은 도망쳤다.


  7.


「지금까지 사귄 사람은 있어?」
「없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흔한가. 만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없는 거나 똑같지. 첫눈에 반해도 어디 말이나 걸 수 있나? 차라리 보호 장비 없이 번지점프를 뛰는 게 덜 무섭지.」
「나한테는 잘만 작업 걸었으면서?」
「직업이 같으니까? 공통점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의도를 위장할 수 있잖아. 음습해 보일 수 있어도 나에겐 이게 최선이었어.」

나는 대본 페이지를 넘겼다. 방의 침대에 불량한 자세로 누운 채였다.

대본 속 가넷은 맥주 캔을 기울이며 루이에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건 실연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난 그렇게 받아들였다. 반만 맞았다. 이건 삶에 대한 말이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내뱉는 푸념이다.

고문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본을 학생 동아리에 가져왔던 걸까? 다시 떠올려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배우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여러모로 망한 대본이었다. 성공적인 연습으로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다.

소안이 자리를 피한 뒤, 뒷수습은 내가 도맡아 했다. 연극의 두 주인공 배우 사이에 불화라도 있단 소문이 퍼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다. 헛소문으로 쑥덕거리는 건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인 데다가, 극 퀄리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고문이 다시 기세등등해져 삿대질을 하고 다닐 터다.

실제 공연까지 몇 번의 연습이 남았을까. 중간고사 기간에는 동아리 활동이 중지된다. 극을 선보일 학예회는 기말고사 전에 있다. 그 전까지 소안은 돌아올까? 성실한 성격이니 연습을 빼먹지 않을 거라 믿고 싶지만, 저런 상황이면 나라도 도망치고 싶을 거다.

"뭐래. 지금 당장 내가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대본을 벽에 던지고 대신 배게를 껴안았다.

나는 부장이다. 부원이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찾아가는 쪽이 되어야 했다. 찾아가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면 된다. 적어도 이야기에선 그렇게 한다.

아니, 애초에 소안은 왜 나를 밀친 걸까. 나는 소안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있을까? 완벽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대본 속 가넷도 방금 읽자 새로운 해석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물며 살아있는 인간은 어떨까. 나는 직관으로 그날 상황을 느꼈을 뿐이다.

이해할 수 있을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지기는 하나. 공감의 끝에는 그로 인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 나는 소안이 바라는 행동을 해줄 수 있을까? 

모른다. 그래서 생각은 항상 여기서 멈춘다. 처음으로 돌아가 아까 던졌던 대본을 집어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답이 여기에 있을 것만 같아서.

「가넷, 우리의 잘못이야?」
「루이.」
「나는 너와 춤을 추며 쾌락을 느껴. 네가 내 손을 강하게 붙잡고, 등을 받쳐줄 때......그리고 내가 허리를 뒤로 크게 젖혀 동작을 완성할 때. 피부가 맞닿는 쾌감과 춤의 즐거움은 둘이 아니야. 하지만, 사람들은 몰라. 너도 기사를 봤잖아.」
「봤지. '히스패닉 여성과 흑인 여성이 무대에서 애정 행위를 하다!' 기가 막힌 제목이던걸. 신문사 앞 우체통은 지금쯤 동전으로 배가 터졌을 것 같던데.」
「장난칠 기분 아니야.」
「멍청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일일히 신경쓰지 마.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나, 춤을 못 추겠어. 그 기사를 읽고 난 뒤로 쭉 그래. 너와 살이 맞닿을 때마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어. 그럼 난 뭐지? 손발에 족쇄를 단 기분이야. 자유를 찾아 여기에 왔고, 너를 만났는데, 그런데 난 지금.」

가넷과 루이가 다투는 장면이다.

둘은 팀을 짜 오디션에 도전한다. 그러나 둘의 자유로운 스트릿 댄스는 오디션이 원하는 춤이 아니었고, 가넷과 루이는 심사원단에게 모멸적인 폭언을 들으며 쫓겨난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날 신문 기사에는 둘의 오디션 사진이 1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시련에 부딪혔다. 대중들은 가넷과 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루이는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죄인이 된 기분이다. 자유로워야 할 스트릿 댄서는 팔다리가 꽁꽁 묶여 깊은 슬럼프에 빠져든다.

그리고 가넷은 루이에게 말한다.

「우린 계속 춤을 춰야 해. 내 손을 잡아.」

고문은 세부 디테일에 주의하라고 경고했고, <거리의 댄서들>에는 춤추는 장면이 있다. 나는 몸치에 춤이라곤 배워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와 소안은 춤을 춰야 했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내일 방과 후에 일정 비워 놔. 연습 할 거니까.]

8.


다른 학급의 문을 무작정 열고 들어갈 정도로 나는 친화력이 좋지 않다. 따라서 근처에 있는 학생의 도움을 받았다. 소안을 불러 달라고 하자 순순히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잠깐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토록 긴장될 줄은 미처 몰랐다.

"부장."

학교를 아예 결석했으면 어떻게 하나. 만약 나오기 싫어한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온갖 걱정은 다 한 내가 무색하게 소안은 얌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문자 봤어. 방과 후라고 해놓고선."
"도망칠까봐 미리 왔지."

변명할 거라 생각했는데 소안은 조용히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진짜 도망치려고 했던 거구나.

"아무도 없을 거야. 우리 둘만 하는 연습이니까."
"그래서 더 싫다고 하면 이상하지?"
"괜히 의식하지 말라고 나한테 그랬었잖아. 맞지?"
"......응."
"부끄러운 만큼 무대에서 더 나아질 거라고도 했었어. 저번처럼 손목을 잡진 않아도, 꼭 와야 해. 기다릴게."


9.


소안은 어렵사리 내 허리에 손을 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터치다. 만약 내가 댄서라면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더 세게 잡아. 그렇게 잡으면 중간에 놓칠 거야.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추는 왈츠가 아니잖아? 과격한 동작에서 파트너를 지지해주려면 힘을 제대로 줘야 해."
"응."
"지금은 교복이라 불편할 수 있어. 무대의상은 이것보다 얇다는 건 염두에 둬야 하는데, 그래도 크게 다른 건 없을 거야. 오히려 잡을 부위가 눈에 보여서 편할 수도 있고."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나는 이 정도 세기면 괜찮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유튜브에서 검색한 페어 댄스 영상을 틀었다. 소안과 나는 서로를 붙잡고 한참이나 춤을 췄다. 돌고, 위치를 바꾸고, 다시 돌고. 포인트를 잘 잡는 게 중요했다. 실제 직업 종사자가 보면 코웃음을 칠 정도라도 상관 없다. 한 순간의 디테일만 살리면 그 후의 인상은 조작할 수 있다.

"부장."

소안은 춤을 추는 중간에 몇 번이나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절부절 못하던 소안도 시간이 지날 수록 연습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몸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지옥 같은 연습이었다.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부러 동작이 큰 춤으로 영상을 찾아왔는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난 유연성을 요구했다.

신체 말단까지 사용하는 섬세함은 배우 또한 가져야 할 덕목이었으나, 처음부터 인간 육체의 한계를 100% 사용하는 춤과는 결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다리를 벌렸으면 고관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영상을 다 따라하지도 못하고 나는 바닥에 누워 숨을 골라야 했다. 소안은 그런 내 옆에 앉아 바닥만 봤다.

"네가 왜 날 밀쳤는지 알아."

대뜸 던진 말에 소안이 크게 어깨를 떨었다.

"아니, 어쩌면 모를 수도 있어. 내가 대본 속 가넷이었으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가넷 마음도 잘 모르겠더라. 정확히 하면 조금 다르긴 하지. 지금은 가넷을 이해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장 내일이 되면, 모레가 되면 어떨까? 근본적인 거야. 우물 안 개구리에게 아무리 바다를 설명해도, 개구리의 바다와 나의 바다는 같을 수 없어. 같다는 걸 증명할 수 없겠지."

그래서 고문의 대본 선택은 실수다. 아마 나는 백 년을 연습해도 완벽한 가넷이 될 수 없으리라.

"그럼 연기같은 건 처음부터 할 필요 없는 거잖아."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없다면 배우는 뭘 위해 타인을 연기하는가. 실존 인물이라면 몰라도 창작물 속 캐릭터는? 볼 수 없다. 만질 수 없다. 같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도 없다. 만들어진 순간 캐릭터는 창조자의 손조차 떠나가 하늘 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기를 해야 해. 될 수 없는 타인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넷과 루이는 한 번 실패했다.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직업은 추잡하고 더러운 것으로 왜곡되어 신문에 실리고, 사람들은 두 명을 거세게 비난했으니. 그렇지만 결국 가넷과 루이는 춤을 춘다. 자유로운 몸짓으로 둘의 사랑을 이해시킨다. 평생 같은 성별을 사랑해본 적 없고, 없을 사람들에게도.

"그게 이번 연극 목표야. 재수 없는 고문이 정한 대본이라 별 생각 없었는데, 어젯 밤에 정했어. 그래서 넌 계속 연습해야 해. 난 네 연기가 보고 싶어."
"난......부장 생각만큼 연기에 순수하지 않아. 밀쳤던 것도 그래서였어. 내가 순수하지 않아서. 이번 연기 주인공에 자원했던 것도 똑같아."

소안은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대본을 제대로 안 읽었구나."
"어?"
"집에 가서 다시 읽고 와."


10.


무대 앞에는 수많은 학생이 관객으로 있었다. 연극부의 2학기 공연은 어쨌거나 그럭저럭 많은 관객을 불렀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케팅을 담당한 스태프 부원들이 기를 쓰고 대본의 정체를 숨겼으니까.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했지만, 연습할 수록 알게 된 건 이번 무대가 망했다는 것뿐이였다. 같이 연습하는 배우나 스태프들은 대본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캐릭터 해석과 대본의 의도를 이미 아는 상태로 보는 무대로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완전 처음 보는 학생들이라면 어떨까.

"부장. 옷 다 입었어?"
"거의."

소안은 반쯤 걸친 무대의상을 보고 눈을 빛냈다.

"되게 예쁘게 나왔다. 어제도 말하던 건데 우리 옷 바꾸면 안 돼?"
"사이즈가 다른데 하루만에 어떻게 바꿔?"
"에이, 그냥 해보는 말이지. 그만큼 잘 어울린다고."
"소안아."
"응?"
"무대 잘 될까?"

소안은 남에게 험한 말을 잘 하지 못한다. 불길한 미래를 알려주는 것조차도. 할 말이 애매해 짓는 웃음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 부장은 어쩌면 더 적어진 예산을 굴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 미리 미안하단 말을 전해야 하겠군.

연극이 시작됐다.

무대 위로 오른 소안과 나는 가넷과 루이가 되어 연극을 펼쳤다.

둘은 길거리 춤판에서 우연히 만나 춤을 추고, 집 앞에서 바보같은 재회를 하며 연인이 됐다. 실력으로 명성을 쌓다가 오디션에 출연하고, 세상의 거친 비난에 한 차례 꺾였다. 그래도 거리의 댄서들은 춤추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노력에 점차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루이, 두렵진 않아?」
「당연히 무섭지. 그래도 하고 싶어.」

두 명은 다시 한번 오디션에 나간다. 이전보다 훨씬 큰 유명한 오디션이다. 조력자의 도움으로 도시에서 가장 큰 오디션에 나갈 기회를 얻었다. 이전에 나왔던 신문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관객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사람들은 편견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춤을 춘다. 가넷은 속삭인다.

「내가 뭐라고 했었더라?」
「욕망 없는 춤은 시체라고.」

루이는 가넷의 한쪽 손을 잡고 동시에 허리를 단단히 지지했다. 가넷은 몸을 크게 젖히며 자세를 완성했다. 탱고 딥. 계획됐던 춤의 마지막 동작. 그러나 루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상체를 숙여 가넷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꺄아아아아악!"

난데없는 키스신에 관객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무대 뒤편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교사들의 경악스러운 눈빛이 시야 가장자리에 비쳤다. 연기 중에는 사적인 생각을 배제해야 하는데도 나는 그만 미소짓고 말았다.


11.


고문은 잘렸다. 학생 연극에 키스씬이 있는 대본을 준비한 게 말이 되냐는 이유에서였다. 아예 교사에서 잘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연극부에서 볼 일은 없을 거다. 다음 부장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기를 바란다.

"고문은 진짜 돌팔이였구나."
"네가 선생님이라는 말 안 붙이는 거 처음 봐."

소안의 말에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항상 뒤엣말을 생략하고 고문으로만 부르긴 했어도, 소안까지 그렇게 부르니 느낌이 이상하다. 우등생에게 나쁜 물을 들였달까?

"음, 연극이 망했잖아. 부를 실패로 이끈 고문을 이제 굳이 존경해야 할까 싶어서."

연극에서 유일하게 호응을 이끌어낸 부분이 가넷과 루이의 키스 장면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 외의 장면은 아무런 호응도 없었다는 뜻이고. 춤추는 건 노력한 티가 난다는 말을 좀 들었다. 뿌듯했다.

"그래도 목적은 달성한 것 같아. 연기로 하지는 못했지만."
"응? 왜?"
"가넷과 루이의 사랑 이야기는 공감된다는 평가가 많더라고. 물론 공감할 수 있다는 것과 재미있다는 다른 거라는 걸 명심해. 어디까지나 이해는 할 수 있다, 였어."
"그래서 실패야?"
"그것도 있고."

나는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연기가 아니라 네가 한 거였잖아. 이거 하기 전부터."
"......티 많이 났어?"
"연습할 때랑은 확 다르던데. 연기를 안 하면 공연이라고 부르긴 어렵지 않을까. 반만 성공한 걸로 하자. 기분은 어때?"
"뭐가?"
"첫사랑하고 키스한 기분."

소안은 얼굴을 붉히며 내 등을 때렸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고 난 뒤에야 진정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쭉 연기였잖아. 나는 가넷하고 키스한 거라고 생각해. 무대 위가 아니었으면 안 받아줬을 거고."
"응."
"그러니까 부장은 내 첫키스만 가져간 거야. 첫사랑은 어디다가 똑 떼어 버려놓고. 나쁜 사람이네."
"그래서?"
"......나는 연극이 재미있나 봐. 3학년 올라가도 계속 부에 남으려고."

보통 3학년은 이름만 올리고 있는 유령 회원이 된다. 생활기록부에 뭐라도 적기 위해서는 소속이 되어 있어야 하니까. 거기서 활동만 제대로 하겠다는 것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럴 줄 알았어. 너 연기 좋아하는 건 내가 잘 아는데."

말로는 연기에 순수하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연극부를 끝내기 전에 주인공 역할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말에 담긴 감정을. 나를 향한 마음도 분명 그 속에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니까.

"부장은?"
"어렵지."

부장 자리는 할 게 너무 많다. 예산도 신경써야 하고, 부원들 사이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선생님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나부터 찾고, 그것 말고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한가득이라 도저히 수능 공부와 병행해서 할 건 못 된다.

"그렇구나. 알겠어."

소안은 덤덤한 반응이었다.

"벌써 마음은 다 정리한 거야?"
"아직도 부장을 좋아해. 그래도."

처음 봤을 때보다 소안은 훨씬 더 성숙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과거에도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까지 더해져 배는 더 매력적이였다.

"유대감이 중요한 거니까. 이번 연극 동안 부장과 나는 서로 사랑했어.  내가 부장에게 향하는 마음과, 부장이 나를 향한 마음은 서로 다르겠지만......그래도 사랑이야. 한 번 했으니 만족할 수 있어. 첫사랑은 다 이런 법이래."
"그렇구나."

나는 소안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나는 소안이 내 어떤 면을 보고 반했는지 완벽히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어떤 사랑을 나에게 보내는지도. 마찬가지로 소안도 내가 소안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 소안에게 나는 평생에 걸친 연인 후보생이며 그냥 동성 친구로는 될 수 없을 테다.

"응. 그런 것 같아."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반쪽짜리 사랑을 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만 잠시 이어진 불완전한 관계.

하지만 소안은 그걸로도 괜찮다고 말했다. 결국 같은 것이라고.

"오늘 고생했어.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 또 봐."

그렇다면, 나도 소안과 똑같이 할 수 있을 거다. 우리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확신을 가지기로 했다. 메신저 앱을 키고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2학년 연극부 부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3학년 진급 후 부활동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문자 드립니다. 혹시.......]



  0.



2학년 1학기가 시작됐다. 소안은 연극부 부실에 들어와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걸까. 빈 자리 중에 하나를 골라 앉고 가방에서 가져온 대본을 꺼냈다. 겨울방학 내내 틈틈히 조사해서 고른 거다. 기준은 주인공 역할에 소안이 얼마나 어울리는가.

1학년 때는 줄곧 조연만 맡았다. 물론 재미있었고, 신기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소안은 역시 자신도 무대 정중앙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허접했던 연기 실력도 열심히 연습했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 번이라도 더 훑어야 해.'

매 학기 첫 시간에는 이번 학기에 어떤 대본을 가지고 공연할지 정하는 회의가 있다.

오늘 소안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가져온 대본을 통과시키는 것. 두 번째는 대본 설명 시간때 유능한 모습을 보여 다른 부원들 마음속에 강렬한 인상을 새기는 것. 그래야 주연 투표때 확률이 올라간다.

"아야!"

자세를 잡고 막 대본을 읽으려는 찰나, 손가락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신음을 삼키며 살펴보니 낡은 책상에 일어난 가시가 손톱 밑에 박힌 거였다. 상당히 깊은지 방울방울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며 소안은 괜히 드는 불길한 감각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 때였다. 있는 줄도 몰랐던 누군가가 잽싸게 뛰어와 손목을 낚아챈 건.

"다쳤어? 어디 봐봐."
"어? 응."
"아, 씨. 또 이 책상이구나. 진짜 바꿔달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오늘 내가 꼭 찾아간다. 가시 괜히 빼려고 하지 말고 보건실 가. 더 깊이 들어가면 덧나니까. 알겠지?"
"으응......."

소안은 어째선지 붙잡힌 손목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경우에 따라선 성가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참견쟁이가 그렇게 멋있게 느껴졌다.

"그, 누구야?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데......."
"이번에 새로 부장 됐어. 나 잠깐만 급하게 갈 곳이 있어서 그런데, 보건실은 혼자 갈 수 있지?"
"응."
"회의 늦어도 되니까 가시 꼭 빼고 와."

그렇게 정체모를 새 부장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소안은 방금 전의 감각을 되새기며 보건실로 향했다. 1층 복도를 지나는데, 평소에는 들릴 일 없던 행정실에서 왠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걸로 애들이 다친다니까요? 위험한 물건이 있으면 빨리 교체를 해 주셔야죠."

슬쩍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까 봤던 새 부장이 있었다. 어른을 상대로도 목소리를 높이며 제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에 소안은 눈을 떼지 못했다. 무척 멋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결과적으로 보건실에 늦게 간 소안은 회의에도 지각했다. 그 탓에 오늘 세웠던 목표 두개는 전부 실패하고 말았지만, 소안은 슬프지 않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