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도쿄대 나왔는데 왜 프로게이머를?”

  프로게이머 “토키도”는 격겜 매니아 사이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을까. “격겜계의 수퍼 컴퓨터로 불리는 현역 도쿄대생 격겜신. 대전에 직감이나 정은 필요없다고 여긴다. 이론을 중시한다. 그 무서운 두뇌에서 이끌어 낸 철저하게 합리성을 추구하는 플레이스타일은 과연 도쿄대생답다.”(발췌: 격겜 플레이어 위키)


  대학생 시절에 쓰여진 문장으로 보이는데, 역시 이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승리 지상주의자이며, 철저히 승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객이 지루해할 시합 전개를 피하지 않는다(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과거형이다). 그 찬물을 끼얹는 듯한 분위기를 만드는 플레이 스타일 덕분에 “아이스 에이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비슷한 이유로, 플레이할 때의 표정이 마치 살인마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해설자가 “Tokido with murder face"라고 코멘트하기도 한다. 머더 페이스도 내가 얻은 별명이다. 일단 밝히자면, 살인마 같은 표정은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아니다.


  캐릭터도 주저 없이 “최강캐”로 꼽히는 캐릭터를 선택한다. 캐릭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토키도는 강캐만 써서 재미없다”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나는 최강캐를 사용해 승리를 향한 최단거리를 달리는 전략으로 상대를 쳐부수는, “이기면 관군”이라는 격언을 따르는 플레이가 최선의 플레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승리만을 추구한다.


  승리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무서울 정도로 합리적인 플레이어. 이것이 토키도의 이미지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지…”라는 접속사에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바로 그 이야기를 냉정한 마음으로, 상식을 통해 평가해주길 바란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대학원을 자퇴한 후,

  구직활동도 걷어차버리고,

  결국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디가 합리적이란 말이야”라고, 누구든 생각할 것이다. 그 추측대로 냉정침학하고 합리적인 면모는 토키도라는 플레이어의 일부일 뿐이다.


  “기껏 도쿄대 나왔는데, 왜 프로게이머를?”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프로가 되어 게임에 매진하며, 대회 우승에 열을 올리던 나는 그 의문의 정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수한 대전을 거치고, 좌절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뼈아픈 패배를 경험하는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이 책에 그 경험을 기록하고, 질문에 답하려 한다.


  먼저 약간 밝혀두자면, 프로게이머로서의 내 인생을 결정하게 만든 것은 냉정함도 합리성도 아닌 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정열이었다.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투쟁심이었다. 


  정열과 투쟁심은 예전의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마음 속의 안개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여러 경험을 거치며, 서서히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풍족한 가정에서 자라 아주 자연스럽게 도쿄대를 지망한, 안정된 삶을 위해 공무원 시험 최종면접까지 밟아 본 사람이다. 모험은 안중에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프로게이머가 된 것이다.




제 1 장

분위기는 잘 못 맞추지만 게임은 자신 있던 시절


  도쿄대를 지망하던 아버지

  “존경하는 분은 아버지입니다”


  나는 부끄럼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바램대로 도쿄대를 졸업한 아들이 꺼낸 “공무원이 될지, 프로게이머가 될지 고민이에요”라는 상담을 받고 당연하다는 듯 프로게이머의 길을 권한 사람이다.


  내가 도쿄대를 지망한 것은 아버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스스로 결정한 진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쿄대를 지망하는 것에 어떤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권한 대학이라는 이유로 어떤 의문도 없이 신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를 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서도 어린 시절의 나와 자주 놀아주었다. 캐치볼 같은 놀이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다. 도쿄대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 하게 된 것도 아버지가 만들어 준 환경 덕분인 것이다.


  유치원 시절로 기억한다. 운전하는 아버지가 낸 퀴즈를 흥미롭게 풀던 추억이 있다. “숫자를 이렇게 더해 가면 얼마가 될까? 3 더하기 5 더하기 7 더하기…”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항상 이런 분위기였다. 공부도 놀이도 아닌 즐거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도쿄대 진학을 권하던 때에도 공부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전무했다. “도쿄대를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직해라. 학원도 다니면서 공부해라”와 같은 강요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실 도쿄대는 “아버지가 바라던 대학”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5형제가 다다미 네 장짜리 방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성장하며 음악에 매료된 아버지는 로커를 꿈꾸었지만 이를 이루기엔 너무나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가장 수입이 좋은 직업인 치과의사로 진로를 바꾸었던 것이다.


  “일단 치과의사가 된 다음, 돈을 벌면 음악을 해야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장 원했던 것은 도쿄대 진학이었다. 이유는 물론 “도쿄대를 졸업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였다. 하지만 도쿄대의 벽은 높았다. 2년간의 재수 끝에 눈물을 흘리며, 도쿄대를 포기하고 치의예과가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고 한다.


  도쿄대를 향한 동경은 이후로도 아버지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도쿄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가 도쿄대를 강권한 것은 아니고, 당신의 동경의 대상인 도쿄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각인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도쿄대는 정말 대단한 곳이구나. 내가 도쿄대에 들어가면 아빠는 얼마나 기뻐할까?”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입학시험을 본 대학은 도쿄대 하나뿐이었다. 다른 대학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첫 수험을 실패하고 재수를 할 때도 그저 도쿄대 뿐이었다. 그 정도로 내게 도쿄대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꿈꾸어 온 절대적인 종착점이었다.


  패배로부터 시작된 격겜 인생

  소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서 격투 게임을 처음 접했다. 게임명은 “스트리트 파이터 2”.


  처음부터 정신없이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CPU가 조작하는 보스 캐릭터를 쓰러뜨리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의견을 주고받으며 즐기는 정도였다. 친구들보다 조금은 잘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마 거기서 거기였을 것이다. 다른 장르의 게임보다 특별히 더 재미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운명의 순간은 소학교 3학년 때 찾아왔다.


  상대는 오키나와에 살던 사촌 형. 몇 년 만에 만난 친척 형에게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격투게임으로 도전한 나는 충격적인 대패를 겪었다.


  “어차피 나도 형도 같은 사람인데, 게다가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이렇게까지 아무 것도 못하고 지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처절한 패배였던 것이다.


  친구와 하는 게임은 어떤 게임이든 볼만한 승부가 가능했다. 친구가 더 잘하는 게임이라도 대전을 계속하다보면 운 좋게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촌 형에게는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가 없었다. 이기기는커녕 뭐 하나 제대로 먹혀들어가는 게 없었다.


  사촌 형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게임을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촌이 “나보다 강한 놈들도 많다”고 할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격투 게이머”라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게임의 공략본을 쓰고, 대회에 나가는 유명인들이라고 한다.


  “격투 게임의 세계에는 굉장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구나”


  사촌이 말해준 격투 게이머의 모습은 내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깟 오락에서 겪은 패배가 내게 큰 충격을 남긴 진짜 이유는, 내가 그 시점까지 누군가에게 지는 경험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랑 같지만 나는 동년배들에 비해 뭐든 더 잘했고, 뭐든 더 많이 이겼다. 키도 크고 운동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했다. 또래들 사이에서는 리더격 존재. 넘버 원. 그런 기분으로 살아온 것이다. 아직 소학교 3학년인 주제에.


  그런 내게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 시점에서 “게임 따위 쓸모없어, 지긋지긋해”라며 거리를 두었다면 프로게이머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충격적인 패배와 동시에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느꼈다.


  사촌 형, 너무 멋지다.

  강한 적수가 있다는 건 즐거운 거구나.

  다시 만났을 땐 사촌을 이기고 싶어.


  나는 기뻤다. 노력 없이는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적으니 유치한 동기 같지만, 실제 내 게임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의대로 나는 격투 게임에 빠져들었다.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같은 인기 게임도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이런 게임은 게임 개발사가 프로그래밍한 이벤트를 하나씩 클리어해 가는 타입의 게임이다. 이벤트를 전부 체험하면 게임 클리어. “이제 끝났습니다”라는 포인트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설정되어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대전 게임은 끝이 없다. 대전 상대는 끝없이 성장해가고 나도 하면 할수록 성장을 거듭한다. 완전히 똑같은 대전을 또 하는 일도 없다. 그래서 끝없이 플레이할 수 있다. 언제까지든 즐거운 시간이 이어진다. 소학생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던 드래곤볼, 미니카에도 흥미를 잃었다.


  소학교 3학년 때 내 인생 취미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부터 오직 게임 하나 뿐이다. 마치 가속도를 붙이듯 게임에 빠져들었다. 집에 있을 땐 게임만 붙들고 있었다. 가장 기뻐한 크리스마스나 생일 선물 역시 물론 게임이었다.


  공부도 “게임을 위해” 노력했다. 무른 부모님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교활한 부모님이라 해야 할지. “공부에 지장을 준다”며 게임을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성적이 좋으면 새 게임을 사 줄게”라며 나를 유혹했다. 아버지 덕분에 공부에도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게임을 사주신다니!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참으로 단순한 소년이 아닐 수 없다.


  근시 때문에 안경을 쓰게 되었을 때는 “게임보이(역주: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를 너무 많이 한 탓이야”라며 따끔하게 한 마디 듣게 되었지만, 나는 “그럼 패미컴(역주: 닌텐도의 콘솔 게임기)을 할게요.”하며 느물거리듯 도망쳤다.


  게임을 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이 기세는 소학교 시절 내내 이어졌다. 그 덕분에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거쳐 명문 아자부 중학교(역자 주: 일본에서 손꼽히는, 고등부를 거쳐 최상위 대학들로 진학하는 학생을 많이 배출하는 명문)로 진학할 수 있었다. 아직 도쿄대 입학은 실감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 “열심히 하면 게임을 사주시니까!”라는 일념으로 성적을 끌어올린 것이다.








좋은 부모님들이시구나...

레드불 인터뷰에서 본 토키도 부모님 굉장히 선량한 인상이시던데 과연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난놈이 나오는 듯 합니다

여기까지 21%

주말엔 안 할거라서 오늘 두 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