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를 내준 프린트를 집으로 가져온다 해서 도인이 그것을 열심히 푼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어른들 눈에 부정적인 쪽으로 튀는 걸 싫어하는 그의 성격상 사소한 숙제도 어지간하면 모두 끝마치긴 하지만, 그것을 집에 가자마자 해야한다던가 하는 성실한 의무감 까지 갖고있지는 않았다.

 

격투게임이라”

 

이전까지는 딱히 그런 장르에 관심을 갖고있지는 않았다. 게임을 많이, 그리고 스팀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패키지게임이 확장한다고는 해도, 리그오브레전드를 위시한 10가지의 게임이 아직도 점유율의 90%를 먹는 현재 한국의 갈라파고스 게임판에서, 그나마 여러 게임을 사서 해보기는 했지만, 결국 손가락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기에 그는 마이너한 턴제나 전략게임, 스토리 위주의 액션게임을 주로 했었다.

애초에 격투게임이라 해봐야 인터넷 방송에서나 본 것이 전부였다. 그 마저도 어릴적에 했던 킹오브파이터즈98 같은 예전 게임이나 철권7 정도가 끝이었다. 아침에 다희가 교실에서 했던 스트리트 파이터는 정말로 살면서 처음 본 게임이었다.

사실 많은 게이머가 그렇듯 도인의 생각 속에서도 격투게임은 고인물들이 신규 유저들을 절단하고, 무식하게 어렵고, 유저들도 타인을 배척하는데다 철권말고는 다 뒤진 정도의, 그런 인식을 갖고있는 장르였다. 그러니 도인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분명 오늘 낮 까지는 그랬었다.

고다희, 그녀의 첫 인상은 그랬다. 어느 반에나 있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여자애, 키는 고등학생이라 하기엔 좀 작았고, 얼굴 역시 꽤 어려보였다. 오히려 요즘 꾸미고 다니는 고학년 초등학생 중에 키가 큰 아이랑 두면 더 어려보일 정도였다. 조용한데다 한창 성숙한 걸 좋아하는 남녀 고등학생들이 선호하는 섹시한 이미지는 아닌지라 주목을 못받아서 그렇지 도인의 눈에는 꽤 귀여운 편이었다. 어깨선 보다 조금 긴 머리를 목 부근에서 양갈래로 묶은 머리 또한 그런 이미지를 한 층 강화했다.

그런 애가 낮에 몰래 학교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깔아놓고 하고 있는 게임이라니, 선입견이 조금, 아주 조금은 사라지는 듯 했다.

집에 오는 동안, 그리고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있는 지금도 아까 했던 게임의 감각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컴퓨터나 조금 팬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 만으로도 무언가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있던 도인이 몸을 홱 일으킨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대충 눌러놓고 입은 옷 그대로 지갑만 든 채 집 밖으로 나간다.

주말에 무언가를 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다, 그 몇 없는 친구들도 자기처럼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다보니 보통은 집에서 노는게 그의 주말 패턴이었다.

그래도 용돈은 조금 남겨놓는 편이라 스트리트 파이터5를 지금 할 수 있으면 사서 하겠지만, 그렇다고 중고 플레이스테이션4 까지 살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pc플랫폼인 스팀에도 있는 게임이지만, 도인이 격투게임이란게 당연히 콘솔에만 있는 마이너한 장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연한 노을을 맞으며 5분정도 기다렸을까, 사거리의 신호가 떨어지자 파란색 시내버스가 다가온다. 부평구에서 18년을 살았는데, 부평 문화의거리까지 가는 버스노선을 방금 검색해서 알아냈다.

중학생때 어렴풋이 친구들을 따라서 부평의 오락실에서 철권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차피 스트리트 파이터에 큰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니, 사실 격투게임이면 뭐든 상관 없었다.

초등학생때 지하상가로 쇼핑가던 엄마를 따라 버스타고 갔을 때 빼고, 자기가 놀러 가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새삼 자신이 정말 집 밖으로 안나가는구나 하고 느낀다.

버스가 매 정류장마다 멈춰도 10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이 지나자 금새 번화가에 도착한다. 자기 또래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성인도 적지 않았다.

 

어, 뭐야”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 횡단보도에 섰는데, 원래 오락실이 있던 매장 안에 행거와 옷가지들이 걸린 것이 보인다. 마침 주변 사람들이 횡단보도의 줄무늬를 걷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발에 맞추어 꽤 긴 횡단보도를 건너자, 그제서야 확실히 옷가게로 변한 오락실의 모습이 보인다. 창고정리라도 한 듯, 밖에서만 봐도 수 많은 옷가지들을 빽빽하게 채워놓은 모습이 보인다. 기껏 몇 년 만에 밖으로 놀러나왔는데 김이 팍 샌다.

 

다른 오락실은…”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다. 물론 검색을 하면서도 없을거라 생각해, 나온 김에 밥이나 먹고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인터넷은 언제나 답을 내놓곤 했다.

 

있네?”

 

그것도 자기가 버스에서 내린 정류장 바로 코 앞이었다. 마침 뒤를 돌아보니 다시 신호는 초록색으로 변해있었다.

급하게 신호를 건넌 도인이 도로에서 안쪽 거리로 빠져나간다. 카페며 노점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거리두기가 풀려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랬는지는 도인으로써 알 턱이 없었다. 정말로 안쪽 거리 바로 앞의 모퉁이에 주황색으로 도색한 꽤 화려한 건물이 보인다. 4층짜리 건물의 1층에는 희한한 모양을 가진 인형뽑기 기계들과 커다란 태고의 달인 게임기, 그리고 그걸 즐기는 남녀 커플이 한가득이었다.

자신은 일평생 경험해 본 적 없는 달달한 분위기를 피해 2층, 그리고 3층까지 올라온다. 저 멀리 커다란 펌프기계 비슷한 게임기에선 한껏 꾸민 아가씨들과 남성들이 다리를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익숙한 모습의 게임기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색 캐비닛의 게임기 액정에선 인터넷에서 많이 본 철권 로고가 비춰지고 있었다.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5000원 지폐 하나를 꺼낸다.

계단 바로 옆의 동전교환기는 지폐를 먹자 요란한 빛을 낸다. 게임소리에 짤랑짤랑하는 묵직한 500원짜리 동전의 소리는 묻히고만다. 10개의 500원 동전을 손에 쥐니 꽤나 묵직하다.

기계에 동전을 넣자 쩔컹하는 무거운 쇳소리가 들린다. 앉아서 게임기 소리를 듣고있자니 생각보다 훨씬 요란하다.

 

누구를 해볼까…”

 

몇 번 버튼을 깔짝이다보니 어느순간 캐릭터 선택창으로 넘어와있었다. 오타쿠적 기질이 다분한 그였기에 유독 캐릭터를 깐깐하게 따지고 있었다. 물론 격겜의 기역자도 모르는 그가 캐릭터의 특성따위는 몰랐으니, 당연히 외관을 따지고 드는 것이었다.

레버를 쭉쭉 땡기며 캐릭터를 하나씩 감상하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흐른다. 평소에 좋아하는 단발을 하고있는데다 얼굴에서부터 건강미가 넘치는 아스카, 금발에 도도해보이는 표정이 인상적인 리리, 도인 취향의 성숙미가 돋보이는 카즈미 정도가 그의 물망에 올랐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캐릭터를 셀렉트한다. 어차피 바꾼 동전은 다 쓰고 가겠단 심산이니 고민할 필요가 애초에 없었다.

카즈미를 고르고 버튼을 눌러보니 주먹이 나가는 것 부터가 신기하다. 1단계이니 만큼 컴퓨터도 설렁설렁 기다려주듯 움직인다.

 

필살기 같은거 없나?”

 

낮에 다희에게 배운대로 236과 같은 클래식한 조작법을 넣어본다. 물론 그가 생각한 장풍 같은 것이 나갈 턱이 없었다. 다행히 손발만 열심히 눌러도 컴퓨터를 잡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격투게임 하면 생각나는 화려한 콤보 같은 것도 욕심이 나긴 했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봐야 택도 없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2단계에서 빠른 탈락, 못해도 5단계보단 길텐데 2단계에서 나가떨어지니 생각보다 오기가 든다.

2단계, 3단계, 2단계, 3단계, 2500원을 넣었는데도 4단계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카, 리리, 카즈미를 돌려가며 쓰지만 무언가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손에 가장 잘 맞는 것 같은 카즈미를 다시 고른다.

1단계, 2단계, 그리고 번번히 자신을 좌절시켰던 3단계까지 올라온다.

 

후”

 

짧은 숨을 내쉬고 다시금 레버를 쥔다. 물론 그래봐야 아는 것 하나도 없는 도인이 무언가 전략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마음만은 진지했다. 틀어쥔 레버를 잽싸게 놀리기 시작한다.

컴퓨터와의 치열한 사투, 사실 격투게임을 조금 해보았다 하면 다른 사람과 하기 전에 손 푸는 정도의 난이도였지만 도인에게는 지금 어지간한 게임을 상회하는 난이도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지막 세트포인트까지 끌고 온 순간이었다.

 

뜨아아!”

 

시끌벅적한 소리가 한가득인 오락실 안에서 그의 짧은 탄성이 울린다. 처음으로 4단계를 찍게 된 도인에게 찬 환희, 정복감, 그 외의 수 많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힌 외마디 탄성이었다.

얼마나 레버를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습기가 찬 것이 느껴진다. 후우 하고 숨을 깊게 내쉰다. 설마 5단계까지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듬뿍 담긴다.

 

에이 씨”

 

결과는 패배, 그것도 개같이 털렸다. 이후로도 남은 동전을 털어보았지만 4단계까진 가지 못했다. 가장 손에 맞는 주캐만 찾고 남은 동전 하나를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겟 레디 포 더 넥스트 배틀”

 

처음보는 화면, 그리고 다시 캐릭터 선택창으로 넘어간다.

 

오빠, 이거 잘해?”

나 어릴 때 동네에서 제일 잘했어”

 

이제보니 앞자리 앉은 사람이 자신이 있는 줄 모르고 이어버린 듯 했다. 물론 그나마도 아 앞에 앉은 사람이랑 붙는 시스템이구나 하는 추측이었다. 동네에서 제일 잘했다니, 왜 또 마지막 판에 저런 사람이 오는건가 하는 원망과 혹시모를 운을 기대하며 캐릭터를 고른다. 자신의 캐릭터는 카즈미, 그리고 상대는 인터넷에서 자주 본 카즈야였다.

 

어?”

 

할만하다.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한 말은 허세였는지, 자신과 별 다를바 없는 실력인 듯 했다. 물론 첫 세트는 헌납했지만, 생각만큼 어려울 것도 없을 듯 했다.

 

후우”

오빠 잘 못하는데? 킥킥”

아니 기다려봐”

 

2세트를 따내자 건너편에서 장난스레 남자친구를 놀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3세트와 4세트를 다시 번갈아서 따낸 두 사람의 승부는 결국 5세트 파이널 라운드까지 찾아왔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보면 초보자 두 명이 노는 수준으로 보이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진지한 순간이었다.

수준 낮지만 치열한 싸움이 끝나고 모든 것을 불태운 두 사람은 원형의자에 탈진한 듯 걸터앉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도인이었다.

 

우리 오빠가 이거 되게 잘하는데”

아냐 손이 덜 풀려서 그래”

 

티격태격하는 커플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도인은 오락실 밖으로 걸어나간다. 스팀에도 철권이 있단 것 정도는 알고있던 그는 은행어플을 켜며 자신의 잔고를 확인한다.


참고로 나는 철권 아케에서 1라에 뒤진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