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군의 자랑스러운 첫 전투함이자 대한해협 해전의 주역 PC701 백두산함.


대한해협 해전, 승조원 최소 600명이 타고있는 대형 선박을 격침했고, 대한민국 해군의 첫 승리이자 낙동강 방어선 형성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해전으로 흔히들 알고있다.


그런데 과연 진짜일까?



러시아측의 자료 따르면, 1950년 6월 26일 대한해협에서 백두산함과 교전을 치른 함은 북한 해군이 아니라 소련 태평양 함대 소속의 소해함이자 해저케이블 부설함, 플라스툰호 라고한다.

(위 사진 오른쪽 배)


원래는 트롤 어선이었지만 징발된 이후로 이런저런 임무를 담당했었고, 보유하고있던 무장은 45mm 2문과 중기관총이 있었다.


이하는 러시아측에서 주장한 전투의 내용이다.


"6월 25일 20시 47분, 좌표 위도 35도 25'2, 경도 129도 41'0(한국 해안에서 대략 12.5마일 거리)에서, 플라스툰의 신호수가 한국 해안에서 접근해오는 미확인 함선의 항해등을 발견했다. 21시 30분 미확인 함선은 1-2 каб 거리까지 접근하여 탐조등으로 플라스툰을 비추고 정지할 것을 요구했다. 21시 45분 한국 해안에서 3개의 미확인 선박의 불빛이 10-15 каб 거리에서 접근해오는 것이 발견되었다. 6월 26일 0시 15분 해당 선박들은 10 каб까지 거리를 좁혔고, 그중 하나는 왼쪽으로 접근하며 대략 5 каб 거리에서 3발의 포를 사격했다. 


포탄은 배 위를 통과했다. 플라스툰에 대한 첫 포격 이후 전투경보가 발령되었다. 함장의 명령 아래 5함대 작전장교에게 포격을 알리는 암호가 전달되었다. 


동시에, 함장은 신호수로 하여금 포탄을 발사한 배에게 선박의 국적과 탑승객 존재 사실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0시 30분 이에 응답하여 701이라는 숫자가 써진 함정이 1 каб까지 접근하여 발포하였다. 적은 플라스툰에 몇 발을 명중시켰다. 다른 두 함정은 중기관총을 발사했다. 플라스툰은 반격하지 않았다. 


1시 15분 경, 포탄 한 발이 함교에서 폭발하며 함장 콜레스니코프 중령에게 파편상을 입혔다. 부장 코발레프 대위와 조타수, 신호수 또한 부상을 입었다. 지휘권은 부상당한 부장에게 넘어갔으며, 코발레프 대위는 전속 전진을 명령했다. 우현의 45mm 포 또한 발포하였다. 


플라스툰의 포대원들은 포탄 몇 발이 701 함정에 명중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후 함정은 사격을 중단하고 옆으로 빠졌다. 


1시 21분 부장은 복귀항로로 갈 것을 지시했다. 1시 50분, 플라스툰의 시야에서 함정 3척이 사라졌다. 총함 60여발이 넘는 포탄이 플라스툰에 발포되었고, 플라스툰은 45mm 포탄 12발을 701 함정에 발포했으며, DShK 180발 또한 발사했다. 플라스툰에 가해진 포격으로 갑판, 상부구조물, 선박 재산, 화물과 개인 소지품 등이 손상을 입었다.  


3명이 교전으로 사망했다. 함장 필리프 바실레예프 콜레스니코프, 신호수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투르킨, 2등 기관사? 콘스탄틴 세묘노비치 에레미프이다. 1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중 4명은 중상이었다. "


자료 출처) https://m.blog.naver.com/joo99416/222405222769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우리는 북한의 대규모 후방 침투 병력과 그 수송선을 격침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북한군도, 수송선 격침도 없었다는 것인가?


이상한 부분은 대한해협 해전 이전의 옥계와 주문진 해전에서 북한군의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옥계와 주문진에서 북한 해군은 우리측이 정선 및 국적 문의를 하자마자 선제적으로 사격하며 해전을 시작했다. 대한해협의 괴선박이 북한 해군이었다면, 아마 동일하게 선제적으로 포격을 가하며 기선제압을 시도했을 확률이 높다. 더욱이 여태까지의 북한군의 상륙 작전을 고려하면, 저 괴선박에는 여지껏 그랬듯 최소한의 호위가 붙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한해협 해전에서 상대 선박은 호위는 커녕 백두산함의 접근을 허용하고 대놓고 탐조등을 켜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다시 상기시키자면 저건 대규모 후방 침투부대였음) 괴선박의 승조원들은 오히려 갑판에서 백두산함을 구경하거나 혹은 저녁 식사를 하는 등 여유로운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


뭔가 점점 이상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개전 당시 북한군 병력들을 살펴보자. 과연 침투부대가 실존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북한군으로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


최소 3,000명 이상의 병력이 강원도 일대에 상륙했고, 이는 8사단의 교전 기록과도 일치한다. 당시 8사단은 상륙해온 북한군 육전대와 격전을 치르며,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지지도 않은' 상태로 진격을 막고 있었다.


(중략)


또한 북한 해군 육전대의 전력 대부분은 앞서 말했듯 강원도 일대에 집중 상륙하여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한국 해군 측의 공간사에 의거해 600명의 병력을 빼내어 부산 상륙을 시도했다가 격침당해 궤멸했다면, 북한군이 조성한 전선 어딘가에 공백이 남아 있어야 맞다. 


이들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제766독립보병연대라고 보는 측면도 있으나 전쟁 기간 동안 이들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어 한국군과 자주 격전을 치뤘다. 작전 기록 또한 거리가 멀다. 1,000여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766부대는 삼척 남방의 임원진에 상륙했고, 이후 12사단과 함께 포항에 입성하여 한국군 8사단과 3사단의 상대가 되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전멸했다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어디로인가 사라졌어야 했지만, 오히려 삼척에 상륙해서 8사단의 후방을 치고, 이후 포항으로 진격해 3사단의 전선을 심각하게 위협했던 편제로 많은 한국군 지휘관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이 왔던 것은 아니다.


다른 부대로는 제945육전부대가 투입되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25일 03시 강원도 정동진에 기습상륙을 했고 이후 8사단의 저항에 막혀 지지부진한 전선을 유지했다가 7월 영덕으로 진격하여 끈질지게 저항하던 한국군 3사단 제23연대를 격퇴시키는 등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외에 북한군이 동원할 수 있는 부대를 모두 조회해도 너무 명확하게 장소와 시간이 드러나 있다. 궤멸적 타격을 초기에 입었다고 보기에도 너무나 당연하게 강한 전투력을 보이며 한국군에 압박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부대가 대한해협 해전 당시 상륙을 준비한 것인가?


자료 출처)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2405001592


위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개전 시점에 북한군이 후방에 투입할만한 유의미한 규모의 부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정황들을 조합해보면 백두산함과 교전한 선박은 북한군이 아닐 확률이 지극히 높다.


그렇다면 플라스툰함이 진짜 상대였다면, 대체 왜 소련은 침묵했는가?


"1950년 7월 14일 5해군사령관 쿠즈네초프 소장은 해군성 장관에게 남한 해군의 초계선의 공격을 격퇴하며 용맹을 보인 장병들의 서훈을 요청했다. 해군사령관은 해당 함정의 승조원과 탑승인원이 규율있고 명확하며 용감하게 조국에 대한 애국적인 행동의 예가 되었다고 제시했다. 


8월 상훈 서류는 해군성으로 갔다. 해군 인사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고하기 위한 해군성 장관의 보고서와 플라스툰의 장교, 수병 그리고 탑승인원에 대한 서훈을 작성했다. 


소련 해군 인사처가 작성한 이 초안은 5해군사령관의 서훈 요청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5명의 승조원의 서훈이 훈장으로 바뀌었고, 몇몇 승조원에 대한 서훈 종류가 변경되었다.


그러나 해군성 장관 유마셰프 제독은 서훈을 보류하기로 결정하였고, 상훈이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내부적으로 플라스툰함의 승조원들에게 수훈을 요청했고 실제로 수훈 직전까지 갔으나, 높으신 분들이 컷했다는걸 알수있다.

아마 직접적인 소련의 개입을 막으려는 의도였을수도 있다.


결론 3줄 요약


-대한해협에서의 교전은 있었다.

-당시 동일 위치에서 백두산함일 확률이 지극히 높은 배과 교전한 소련 배가 있다.

-당시 북한군은 대한해협쪽에 차출할만한 유의미한 규모의 부대나 선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