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 ㅈㅅ

Rear Admiral Donald P. Moon, USN, circa 1944 (80-G-302423).


H-Gram 029, Attachment 1

Samuel J. Cox, Director NHHC

April 2019


연합군의 북부 프랑스에 대한 상륙은 1944년 늦봄에 마침내 시작되었으며 미국 합참의 많은 자극과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가한 압력덕에 그 시점에서 침공을 꺼리고 있던 연합군이 침공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이켜보았을때 영국이 취한 입장은 이해할 수 없으나 1차대전중 서부전선에서의 미군의 경험은 영국군이 겪어야했던 공포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즉, 솜 전투 첫날의 기억(겨우 몇야드 전진하는것을 대가로 2만명의 영국군이 사망해야만 했다.)이 영국의 영혼에 깊이 남아있던 것이였다. (이것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소련군간에 벌어지는 혈전에는 비교할 수 없었으며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제2전선을 여는 것이 지연되는것에 분노한 이유다. 죽음과 붕괴된 군과 사단의 측면에서 보았을때 노르망디와 서부전선은 동부전선에 비하면 막간극에 불과했다.)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전선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영국 장성 버나드 몽고메리 경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 해안에 상륙하는 연합군의 작전안 대부분을 담당했다. 영국과 캐나다 사단 3개가 미국 해변 동쪽에 위치한 골드,주노,소드 해변에 상륙할 예정이였으나 약간 뒤늦게도 몽고메리는 두번째 미군 사단이 이미 계획된 곳 외의 해변(유타 해변)에 상륙할 필요가 있다고 요구안에 적었다. 그 결과 "U 상륙부대"가 미 제4보병사단을 오마하 해변에서 서쪽에 있으며 영국/캐나다 해변의 서쪽에 위치한 유타해변으로 수송하고 상륙시키기 위해 서둘러서 만들어졌다. 


돈 P. 문 소장은 U 상륙부대 (TF-125)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문은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자신의 반 1위에 가까웠으며(일부 기록에서는 1위로 언급하나 4위) 평판이 좋으며 특히 포술분야에서는 수많은 혁신과 기술적 발전을 이끌어냈다. 그는 또한 하루에 4시간만 잘정도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넣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전초에 무르만스크 수송작전과 북아프리카 전투에 참전해 전쟁 경험을 쌓았으며 해군참모총장 어네스트 J. 킹의 참모로 근무하면서 충분히 경험을 쌓은 뒤 소장으로 진급한뒤 U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프랑스 북부 해안 지역에 계획된 연합군의 상륙은 실행 날짜와 위치를 숨기는데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으나 미영군이 영국 해안에 상륙 준비를 위해 수많은 대규모 모의상륙을 진행하는것은 독일에게 있어 비밀이 아니였다. 이 준비는 빠르면 1944년 1월 초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U 부대는 뒤늦은 창설로 인해 상륙을 위한 전력 곡선 뒤에 있었으나 4월 말에는 대규모 리허설을 진행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실행장소는 해협 반대편의 유타 해변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선발된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라임만에 위치한 슬랩턴 해안이였다.


티거 작전은 유타해변 상륙을 위한 전면 리허설이였으며 1944년 4월 22일에서 30일로 일정이 잡히게 되었다. 첫 5일은 적재과정, 승선에 할당되었으며 4월 27일에 첫 부대(공격병력과 함께)가 상륙하였고 28일에는 두번째 부대(지원 병력과 함께)가 상륙하기로 예정된 상태였고 다른 부대들이 뒤따르기로 결정되었다. 문 소장은 베이필드(APA-33)에 탑승하여 U 부대를 지휘하였고,그의 지휘하에 탑승한 병력과 장비들은 훈련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실제와 비슷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뱃멀미와 다른것들을 모두-해협을 건너는 항해를 병력들에게 경험하게 함으로서 길어진 이동과정을 지나야만 했다. 함선들은 완전히 적재를 마쳤으며 함에 탑승한 장비들도 연료와 탄약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훈련에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았으나 다시한번 말하지만 실전과 최대한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였다). 한편 기함 베이필드의 소화기병 피터 베라는 나중에 전설적인 뉴욕 양키스 매니저로 알려지게 된 "요기" 베라였다.


거의 모든 U 부대가 참가했고 21척의 전차상륙함(LST)과 28척의 대형다용도상륙정(LCU[L]),65척의 전차상륙정(LCT)과 100척가까운 소형함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군이였으나 영국군과 다른 연합군 함들도 여기에 참가한 상태였다. 해군참모총장 킹과 다른 미해군 선임지휘관들은 미 해군과 다른 해군들이 섞여있다는 함대의 특성(그리고 다른 디데이 부대들)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문제와 다른 문제들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 예상했다(그리고 그들이 옳았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디데이 상륙의 연합군 해군 최고사령관인 영국 제독 버트램 램지 경에 의해 거부되었다. 


첫 부대의 상륙은 4월 27일에 실시되었으며 상당한 혼란과 지연으로 두드러졌다. 상륙은 가능한 한 현실적인 훈련을 위해 연합군 함선들이 해변을 포격할때 실탄으로 사격했으나 지연과 통신문제로 인하여 일부 병력들이 사격도중 상륙했고 사망했다. "아군 오사"로 인한 사망자 수는 오늘날까지 불확실한데 일부 자료에서는 45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지역민들의 추후 회상을 기반으로 한것으로 보이며 그날 밤 바다에서 벌어진 재앙에서 비롯된 사망자수로 추정된다. 미 육군 기록에 의하면 이 숫자와 유사한 상륙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몇몇 저자들은 이것이 "은폐되었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문 소장이 실행 5분전에 1시간 지연을 명령했으나 많은 부대들이 놀랍게도 이 명령을 수신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 훈련의 옵저버였고 그의 평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참모진은 이 결과에 우울함과 환멸감을 느꼈다고 보고하였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는 중 이였다.


2차 상륙부대의 병력들은 영국 항구를 떠나 28일 아침의 상륙을 위해 야간에 이동하였다. 여기에는 플리머스,브릭스엄,포츠머스에서 출항한 미 해군 버나드 스카힐 중령의 지휘를 받는 T-4 호송선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선단은 특히 8척의 미군 LST가 영국군 구축함 HMS 시미터와 영국군 코르벳 HMS 아젤리아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미터와 다른 함선(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 선단에는 LST 9척이 있었다고 한다)이 충돌했으며 항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스카힐은 시미터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향하는것을 보았으나 무선 침묵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미군 호송선단이 공포에 질려(킹으로부터 비롯된) 영국군 무선 주파수를 맞춘 상태가 아니였으며 이 두 사실은 스카힐이 그의 가장 유용한 호위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태로 이어졌다. (아젤리아는 1차대전기의 오래된 코르벳으로 제한된 속도와 무장을 갖추었으나 LST가 더 느렸다.) 구축함 HMS 살라딘은 시미터를 대체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스카힐은 이를 알지 못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너무 늦게왔다. 더 최악은 다른 주파수를 맞춰둔 상태였기에 미군 호송선단은 영국군 레이다가 독일 S 보트(고속 어뢰정) 부대가 쉘부르에서 출항해 영국 해안으로 접근중이라는 경고방송을 수신하지 못했다.


9척의 독일 S 보트 부대는 베나드 클루그 소령늬 지휘를 받으며 영불해협의 목표를 찾기 위해 쉘부르에서 출항했으며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확실히 포착되었다. S보트들은(슈넬보트-"고속보트") 연합군에서는 E 보트("적" 보트)로 불렀다. 이들은 미군 PT 보트와 비슷했으나 더 크고 더 길고 더 견고하게 건조되었으며 인화성이 낮은 연료 (가솔린 대신 디젤)를 사용하는 것이 달랐다, 또 독일 어뢰들은 심술을 부리기도 했으나 미군의 것보다는 신뢰성이 높았다. PT 보트의 어뢰들은 보통 오래된 초기 항공어뢰들을 넘겨받았으나 각각의 S 보트들은 4발의 21인치 어뢰로(재장전 가능한 두개의 발사관이 있었다) 무장했으며 보통 37mm 기관포(혹은 40mm 보포스)와 3문의 20mm 기관포(쌍열포 하나와 단장포 하나)가 추가로 탑재된 상태였다. S 보트의 작전상의 가장 큰 문제는 독일이 그것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이였다.


독일 S 보트들은 아젤리아가 지그재그 없이 일자로 항해하며 이끄는 중인 T-4 호송선단을 찾아냈다(LST의 느린 속도로 인해 지그재그 항해를 했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S 보트들은 호송선단을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주변을 빙빙 돌았으나 아젤리아나 LST에 탐지되지 않았다. 


문제가 있음을 나타낸 첫 신호는 0100시를 지나자마자 LST-507의 하부에서 긁히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였다-아마도 독일군 어뢰가 얕은 흘수를 가진 상륙함의 하부를 지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LST-507의 함장은 총원 전투배치를 발령하고 예광탄 사격을 지시했으나(함에 명중하지 않음) 이것이 실전같은 훈련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든 독일군이 재공격하기까지는 한시간가까이 걸렸는데 아마도 첫 공격에서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해서 일것이다(어뢰가 다른 LST의 하단을 지나갔으나 발견되지 않았을 수 있음).


0207시에 독일 어뢰가 LST-507의 중앙부에 위치한 보조엔진실을 강타했으며 통신장비가 고장나고 전원이 나가버렸다. 타격은 재앙과도 같았는데 주 화물실이 가솔린이 가득 채워진 차량들로 가득했기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함내에서 용광로 효과가 일어났다. 함에 탑승중이였던 육군 병력 400명 이상이 화염속에서 타죽었으며 두번째 어뢰가 함에 직격하자 함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11분뒤에 두개의 어뢰가 연속해서 LST-531을 강타했으며 더 자비롭게도 그녀는 6분만에 해저로 가라앉았다.


LST-289의 함장 헨리 A. 매틀러 대위는 접근하는 어뢰를 발견했고 키를 전타해 회피할 시간이 있었기에 현측에 피격당하는 것은 막았다. 어뢰 한발이 함미 승조원 거주구획에 명중했고 불타는 함미는 떨어져나가 침몰했으나 LST의 주요 부위는 살아남아 승조원들은 LST의 전방부가 침몰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고 수백명의 병사들이 물에 빠지는 일은 막아냈다. 그러나 이시점에서 혼란이 함대 전체를 집어 삼켰다. LST들은 어둠속에서 서로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고 최소 한척이 피격당했다. 스카힐은 호송선단에 함대 분산과 항구로의 귀환을 명령했다. 아젤리아는 LST들의 꼬리가 피격되기 시작했을때 침로를 되돌렸으나 그녀의 승조원들은 어디서 공격이 오는지도 알수 없었다.그리고 이와중 LST들과의 교신은 불가능해 도움을 줄수도 없는 상태였다. 아젤리아의 함장 조지 C. 제디스 영국 해군 중령은 나머지 호송선단 전체의 실루엣을 드러내 독일군의 공격에 도움을 줄 것에 겁을 먹고 조명탄을 발사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아젤리아는 포를 사격할 기회가 없었고 S 보트를 추적할 희망조차 없었다. LST에 탑승해 함께 침몰한 병사들은 제557 철도 종점 보급중대와 제 3206 보급지원중대였으며 이들은 최전선 전투에 투입될것을 예상하지도 못한 지원부대원들이였다. 그들은 해군 카포크 구명조끼 대신 충분히 훈련받지도 못한 상태로 내부 튜브 장치를 지급 받았고 이것은 잘못 착용했을시 병사를 뒤집어버려 익사시킬수 있는 물건이였다. 많은 병사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기도 전에 바로 이 이유로 사망하였다. 

LST-289 enters Dartmouth Harbor, England, after being torpedoed by German S-boats during invasion rehearsal operations off Slapton Sands, England, on 28 April 1944. Note LCVPs still on the ship's davits (80-G-283501)


이런 사태가 발생할시의 표준 절차대로 호송선단이 흩어지면서 처음에는 생존자 구조시도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구조를 시도할 시 더 많은 배가 어뢰에 침몰하기에 이는 표준절차로 지정된 것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힐의 기함 LST-515가 현장에서 이탈하면서 함상반란에 가까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LST-515의 함장 존 도일 대위는 현장으로 돌아가서 구조를 하는것을 두고 스카힐과 말다툼을 벌였는데 이는 물속에 빠진 사람이 추위로 인해 사망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주장한 것 이였다. 스카힐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존이 승조원들에게 "목소리 투표"를 요청하였고 승조원들은 이에 동의했다. 스카힐은 이를 받아들였고 LST-515는 HMS 살라딘과 함께 현장으로 돌아가 수백명의 선원과 병사들을 구조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더 다수는 저체온증에 시달렸다. 


그날밤 얼마나 많은 미군 병사들과 선원들이 실종되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처음에는 "비곳" 허가를 받은 10명의 장교(디데이 상륙의 세부사항을 알고 있는 이)를 포함해 100명 이상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10명이 모두 사망한것이 확인될때까지 광범위한 수색이 이루어졌다. 미 해군 사망자 수는 198명으로 1944년 6월 6일 디데이에서의 상륙 당일 사망자보다 더 많은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자료는 육군 사망자 수를 441명으로 추정하며 다른 자료는 441명 사망에 더해 추가로 110명이 실종되어 551명이 사라졌다고 추정했으며 총 749명의 미군 병사들이 사망했다(이는 참사에 대해 영국 웨이머스에 건설된 추모비에 적힌 숫자이기도 하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749명은 육군만을 계산한 것으로 해군 사망자 수를 더하면 947명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사건이후 엄청난 은폐가 있었기에 이러한 모든 숫자는 과소계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인터넷에서 나오는 모든것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독일이 어떤 전과를 거두었는지 알 수 없도록 즉시 검열과 기밀 처리를 통해 덮으려는 시도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7월에는 이미 이에 대한 설명이 스타스 엔 스트라잎스에 나왔기에 이 일을 은폐하려는 대규모 시도가 있었다는 음모는 그럴듯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문 소장은 알란 G. 커크의 기함 어거스타(CA-31)에 탑승해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커크는 디데이 상륙에 참가하는 미 해군의 사령관이자 서부 해군 테스크포스의 사령관으로 유타 해변에 상륙하는 U 부대(TF 125)와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O 상륙부대(TF 124)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이들은 모두 해군 총사령관인 영국군 램시제독의 지휘하에 있었다.) 커크가 문을 응대할때는 싸늘한 분위기였고 커크의 참모장 아서 스트러블 소장은 문이 그의 의무를 소홀히 했음을 돌려 말했다. U 부대의 사령관으로서 문은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졌으나 그날밤에는 적군이 결정권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디데이 상륙 이전에 신속하게 수많은 그날의 교훈들을 적용했다(예:병사들이 구명대 사용에 대해 충분히 교육받았는지 확인했다.). U 부대는 실제 상륙당시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고 문은 부대를 능숙히 지휘했다. 유타해변에서의 독일군의 저항이 오마하와 비교했을때 매우 약하긴 했으나 매우 강하게 저항하였고 문은 이를 극복한것에 대해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야만 했다.


완벽주의자였던 문은 리허설과 전투에서 피할 수 없었던 수많은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의 지휘하에 있던 이들을 너무 많이 잃은 것이 그를 매우 괴롭게 했을수도 있다. 일부 해군 고위 장교들이 그를 조사법정이나 군법재판에 회부하려 했으나 그의 심리상태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수면부족은 잘 알려져있다. 문이 1944년 8월 5일 남부 프랑스 상륙 전날 나폴리 인근에 정박한 기함 베이필드의 그의 개인실에서 45구경 권총으로 자살한것도 이 모든것이 원인이였을 수 있다. 나는 베이필드의 승조원들에게 그가 어두운 배에서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어 지속적이고 심각한 두통을 겪었다는 보고를 믿을 수 있다. 그의 유서에는 "이젠 정신이 없다. 나는 아프다,나는 아프다"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상륙도중 중요한 시기에 그가 기절하거나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바쳐야만 했다는 두려움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교체를 요청하는 대신 아내와 네 자녀,비탄에 잠긴 수많은 함의 동료들을 남겨두고 자살했다.



Sources: There are a number of articles on Exercise Tiger, some with wildly conflicting casualty estimates and some hyping the “cover-up” of the debacle. The one I think is best is “Exercise in Tragedy: Practice for the D-Day Landings” by Craig Symonds, in World War II Magazine, 15 February 2017. Another good one is “We’re Gonna Die!” by Joseph Balkoski, 28 April 2014 (http://liberationtrilogy.com/the-road-to-d-day/were-gonna-die/). For background on Rear Admiral Moon, see Stephen Sussna, Defeat and Triumph: The Story of a Controversial Allied Invasion and French Re-birth (2008), and, of course, Rear Admiral Samuel Eliot Morison, History of U.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 XI: The Invasion of France and Germany (1957).


원문:https://www.history.navy.mil/about-us/leadership/director/directors-corner/h-grams/h-gram-029/h-02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