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독일 제3제국, 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군으로 구성된 305만 대군이 소련 국경을 넘으면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인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두 국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저의를 숨겼고 실제로 최대한 전투의지를 숨겼지만


° 공존이 불가능한 사상의 대립


° 영국침공 이전에 후방을 안정화하겠다는 히틀러의 야망


° 양변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 히틀러 못지않게 정복광이었던 스탈린


등의 이유로 오래 지켜지지 못할 평화였다


물론 소련도 바보는 아니어서 스웨덴의 도청, 독일 내부의 지하 공산당의 첩보, 독일군 상층부의 공산주의 성향 장군 등이 끊임없이 침공을 경고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일군이 국경을 넘고 있던 순간까지도 독일이 침공하지 않으리라 기대했고 그 결과 소련은 개전 초기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소련군은


° 대숙청으로 인한 핵심 지휘인재풀의 소멸


° 유기적인 보전합동능력 결여


° 2년간 전쟁경험을 쌓은 독일의 유기적 전격전


° 꺼드랙데다가 직무유기한 스탈린의 멘붕


등의 문제가 엮이면서 전방 부대들의 단독적인 저항 외의 조직적인 반격 자체가 마비되었고 독일 제국군은 파도처럼 러시아 영토를 휩쓸었다



개전 몇개월만에 소련군은 200만의 전사자, 20500대의 전차, 21200대의 전투기를 상실하면서 시원스럽게 뒤로 쭉쭉 밀렸다. 스탈린과 수뇌부는 사시나무 떨듯이 와들대면서 패닉에 빠졌고 동쪽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로 도로가 가득 매워졌다


현실을 파악한 군부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후퇴하고 그 사이에 후방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는 전술을 입안했지만 스탈린은 현지를 죽어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고스란히 병력 손실로 돌아왔다

강력한 독일의 기갑군 앞에 단일 기갑제대도 없던 소련 기갑부대들은 소규모 부대 단위로 전투를 명령받았고 그들을 보조해줄 보병부대도 지원받지 못했다. 경직된 지휘체계 앞에서 소련군은 포로로 잡히기 vs 사수하다 전사하기를 강요받았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배치되면서 정작 모스크바를 공격하던 중부방면군 전면에 공백이 발생하여 그 물량의 소련군이 양분되어 각개격파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민스크에서는 4개 야전군이 소멸되면서 40만의 전사자가 나왔고 스몰렌스크에서는 방어하던 소련 서부전선군이 붕괴되면서 50만의 포로가 발생했다.

우만에서는 독일 남부방면군을 요격하던 소련군 30만이 격파당해 우크라이나로의 길이 훨쩍 열렸다


이런 복새통속에 우크라이나를 방어하던 남서전선군 80만이 키예프 방면에 고립당했고 이를 독일 남부방면군 제6군이 포위했다.



키예프의 위치에서 알수 있듯이 남쪽으로는 크림반도로 향하는 독일군을 차단할 수 있고 북으로는 벨로루시를 관통하려는 중부방면군을 위협할수 있는 전략지 요충지였다


물론 이 포위된 남부전선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완전히 포위당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거대한 규모의 적을 후방에 남겨둔다는 것은 절대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청소하자니 당시 모스크바가 목전에 있던 중부방면군의 동력이 끊기고 공세종말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히틀러가 끼어들었다. 그에 앞서 당시 독일군의 편제를 살피도록 하자


북부방면군

- 16군

- 4전차군

- 18군

- 50군단

- 23군단


중부방면군

- 2군

- 4군

- 2전차군

- 57기갑군단

- 3전차군

- 9군


남부방면군

- 17군

- 6군

- 1전차군

- 11군

- 루마니아 3,4군

- 이탈리아 군단


히틀러는 남부방면군의 절반인 6,17군, 1기갑군에게 키예프를 정리하라고 지시했지만 문제는 한창 모스크바로 잘 진격중이던 2군과 2기갑군까지 긁어모아서 키예프로 돌려버렸다


안그래도 점점 강화되는 소련군의 방어선 돌파도 힘든데 강력한 기갑부대와 정예 야전군을 빼간다고 하니 2기갑군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노발대발하며 반대했지만 당시 군부 내에서 총통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41년 8월 남부방면군 3개 야전군은 드네프르(Dneper) 강을 따라 키예프 남안에 도달했다. 소련군은 뒤늦게 독일군의 의중을 파악하고 키예프 북부의 브리얀스크 전선군을 이동시키려 했지만 북쪽에서 밀고내려온 독일 2개 야전군에게 소련군 4개 야전군이 산산조각나면서 키예프에 대한 거대한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80만이라는 물량으로 몸빵을 하면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철수를 건의하던 군관구 사령관까지 교체하면서 주먹을 꺼내기 전에 도시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전쟁은 주둥이만으로 하는법이 아닌법, 마침내 군관구 사령부 역시 키예프 포기를 결정했고 전선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전선군 사령관 키르포노스는 '서면 명령서'를 달라며 시간을 끌었다. 이는 변덕스러운 스탈린의 숙청을 피하기 위한 창구 마련을 위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서면 명령서가 내려왔을때는 이미 포위망이 완성된 후였다.


남부전선군은 드네프르 강의 동안을 따라 철수하다가 도하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독일군 2개 기갑군은 이들을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결국 사령부가 동요하는 제파 부대의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남부전선군 단어 그대로 박살났다.


80만의 소련 남부전선군 중에 10만명만이 탈출에 성공했고 스탈린의 숙청을 두려워했던 전선군 사령관 키르노소프는 전사하면서 어찌됐든 스탈린의 칼날을 피하는데는 성공했다. 소련군 제5군, 21군, 26군, 37군은 전멸했고 38군, 40군은 한동안 얼굴을 내밀지도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키예프 전역은 인류역사상 최대 규모의 포위섬멸전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 여기까지만 하면 항상 그렇듯이 소련이 소련한 전투로 끝나겠지만






문제는 2군과 2기갑군이 빠져버린 상태에서 모스크바 공방전을 수행하던 독일 중부방면군은 타격력이 줄어들면서 소련군에 대한 공세가 둔화되었다


한편 소련군은 초기에만 300만 남짓의 병력을 잃었음에도 후방에서 다시 500만의 병력을 재편성하는데 성공하면서 독일군의 발목을 악착같이 잡아끌었다. 심지어 키예프에서도 독일군은 12만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소련과 독일에게는 12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서로 달랐다.


독일 역시 소련의 지랄맞은 기후를 잘 알았기에 최대한 신속하게 전투를 끝내고자 했지만 스몰렌스크 전투의 여파와 소련의 저항으로 전투가 10월까지 끌리면서 동네 힘쌘 소련의 악천후



라스푸티차가 등판하게 된다. 결국 독일은 발목은 진흙에 빠지고 머리 위에서는 소련군의 총알이 지나가는 전투를 수행하다가 결국 크렘린을 30km 앞두고 철수하게 된다


한편 히틀러도 중부방면군의 약체화를 알았기에 북부방면군에서 4기갑군을 빼내서 중부방면군에 보탰지만


이번에는 북부방면군의 펀치력이 약해지면서



북부방면군의 원래 목표였던 레닌그라드 점령에 실패했다. 즉, 레닌그라드 봉쇄 자체가 기갑전력 이탈로 약해진 북부방면군이 대안으로 선택한 전략이다.


소련군은 이에 질새라 라도가 호수로 보급로를 뚫어 시민들에게 식량을 보급하고 병력을 충원하여 레닌그라드는 3년간 독일군 북부방면군 73만여명을 붙잡아두고 그 중에 58만여명을 전사시켜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1941년 12월 바르바로사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이는 사실상 소련에 대한 단기간 전으로 상정했던 독일 군부의 대실패를 증명했다.  독일은 모스크바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레닌그라도는 여전히 포위만 한 상태였으면 남부의 우크라이나 유전지대는 여전히 소련군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리고 국방군은 1945년 3월 히틀러가 크렘린 지하에서 가수로 전직하기 전까지 제살을 깎아먹으면서 쉐도하는 수백만의 소련군을 상대로 피튀기는 혈전을 이어가게 된다





키예프 전투 자체는 소련군의 감투정신과 거리가 멀었고 지휘관들의 보신주의 때문에 귀중한 병력을 독일군에게 던져줬다. 심지어 소련군은 이 엄청난 병력으로 독일군을 위협하거나 유의미한 수준을 타격을 입히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등장한 히틀러의 믿을 수 없을만큼 돌아버린 계획과 이를 제어하지 못한 독일 군부의 결정이 나치 독일의 대전략 자체에 빵꾸를 내버렸고 이는 결국 독일 스스로 자기를 매장한 무덤을 파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