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겜 짱깨 프리미엄 땅쿠인 T-34-85 215번 차량은 일단 중국 국방부 피셜론 한국전쟁 후반부에 전선에서 공을 세웠다고 함


아래는 나무에 써진 해당 내용 전문


1953년 7월 중국인민지원군은 여름 반격을 개시했고 우리 전차 2사단 4연대 2중대는 미 육군 스옌동의 베이산 진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는 중대의 평범한 병사로서 215호번차의 영웅적인 위업을 목격했다. 당시 215번은 의용병 67사단 200연대에 미리 배속되어 베이산 스옌동 남쪽으로 몰래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6일 공격 명령을 받은 215번 전차는 먼저 벙커에서 뛰어 나와 스옌동의 베이산을 향해 돌진했다. 적군은 215번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사용했다. 장마철이라 땅이 진흙 투성이였는데 아쉽게도 215번 전차가 분화구에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흙먼지가 배플을 넘었다. 적의 위치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어 숨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해 전차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싸울 것인가? "양아루" 전차장과 그의 동료들은 탱크와 공존하고 죽는 것을 선택했다. 적의 집중 포격, 폭우 속에서 차량 전체의 지휘관들은 야간 엄폐물과 지형을 결합하여 215번을 작은 고분으로 위장하고 적의 코 밑에 그대로 숨었다.

둘째 날 저녁, 8자구대전법[72]을 펼치려던 찰나, 346.6 고지대에 갑자기 적 전차 3대가 나타났다. 즉시 제거하지 않으면 베이샨을 방어하는 보병들이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었다. 포수 "쑤즈창"은 신속하게 적 탱크의 위치에 맞춰 포를 조준했고 전차장 "양아루"가 명령을 내렸다. "쏴!". 적의 포병이 재빨리 나에게 반격하자 215호가 완강하게 대응했고, 또 한 발의 포격이 있었고, 적의 두번째 전차에도 불이 붙었다.

나머지 탱크들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급히 벙커에 숨어있던 215호가 10발 이상을 연이어 폭파해 벙커를 산산조각냈고, 적 탱크의 몸통도 두 갈래로 쪼개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215번 전차가 완전히 노출되자 적군은 215번을 향한 광란의 반격을 시작했다. 속담에 군인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조종수였던 "첸웬쿠이"는 밤이라 시야가 어두운 것을 이용해, 그 자리에서 탱크에 시동을 걸고 스로틀을 세게 높인 다음 천천히 스로틀을 낮춰서 엔진 소음이 커졌다가 작아지게 하였고 적들은 우리 전차가 이미 퇴각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215번호차의 후퇴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집중 사격을 했다. 215번호차는 탈출에 성공했다.

7월 9일 상급 명령이 철회되었다. 수렁에 빠진 215번을 빨리 구출하기 위해 전우들은 잡초와 진흙을 스스로 묶고 적의 소이탄에 그을린 산비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쓸만한 통나무를 찾아 끌고 갔다. 산허리에서 다양한 두께의 통나무가 하루에 70개 이상 수집되었고, 연대 공병중대 8분대의 협력으로 마침내 215번 전차가 깊은 진흙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전장에서 성공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침략전쟁과 한국원조를 위한 전쟁[73]에서 215번 전차는 적 중전차 5대 파괴, 차량 1대 부상, 적 박격포 9대, 차량 1대 파괴, 적 벙커 26개, 터널 1개, 지휘소 1개 파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보병 전투 임무로 7회. 그의 뛰어난 군사 공적을 인정하여 중국 인민의용군 사령부는 215번 전차에 "인민영웅전차"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

오늘날, 영광스럽게 퇴역한 215번 전차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중국 인민 혁명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단 기록상 저 일자에서 전차까지 투입될 정도의 대규모 전투는 딱 하나, 1953년 7월 연천 근처에서 벌어진 2차 폭찹힐 전투밖에 없을거임


53년 7월 전투 당시 해당 지역 중공군은 67보병사단이었고 그 상대는 미군 제7보병사단이었는데, 여기서 미군측 기갑전력으로 볼 수 있는건 사단 직할 전차대대 소속 M4A3E8/M46 및 기타 병력수송장갑차 등의 차량이었을 거임


각설하고, 2차 전투는 저 일화에서 나온것처럼 비가 존나게 내리던 7월 6일 중공군의 야간 공격으로 시작됨


고지에 알박고 있던 미군은 중공군이랑 주먹질까지 벌일 정도로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가뜩이나 폭우때문에 길도 죄다 개떡이 되버려서 중공군은 8일까지 어떻게든 뚫어보려다 결국 못 뚫었음


여기서 미군측은 최소한 8일까지는 방어에만 전념했고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한건 9일 이후부터임


그런데 여기서 미군측의 기갑전력 투입은 잘 쳐줘도 영어 위키백과에서 '병력수송장갑차를 부상자 후송 등에 써먹었다'라고 하는 언급밖에 없음


그렇다면 저기 전차 3대를 발견하고 전부 격파했다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일단 내 추측으론 부상자 후송하려고 온 장갑차를 전차로 오인한것 같음. 저 기록을 보면 전차와 교전했다는 시간대는 저녁에서 한밤중으로 추정되는데 마침 당시엔 비도 많이 오고 했으니 더욱 분간을 못했을거임


그래서 그걸 쏜다음 전차를 격파했다고 보고서를 쓰고 그게 위까지 전달된거지


뭐 장마철에 42톤짜리 파오후를 길도 제대로 안 닦인 진흙투성이 산골짜기로 올려보내서 고지 방어를 지원하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건 현장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거나 하는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아끼겠음



그리고 한때 해외쪽 월탱 유명인이었던 SilentStalker는 해당 일화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음

http://ftr.wot-news.com/2014/05/27/chinese-stars/


해당 일화에 대한 SS의 평가는 대충 '아 이거 앞뒤 안맞는데 그래도 웃기니 됐다 ㅋㅋ'이런 뉘앙스임


비록 위키지만 Tanks Encyclopedia에서도 215번의 전과에 대해선 허구적인 성격이 짙다고 언급하고 있고 외국에선 대체적으로 215번의 일화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의견이 중론인것 같음



아무튼 폭찹힐 전투 당시 상세한 미군측 투입전력이나 전투 결과문서 가지고 있는사람이 판단해주면 좋겠음 


난 이거 자료 일주일동안 찾다가 현타와서 집어던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