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장비 깎던 썬창>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대독일에 내려가 살 때다. 베를린 왔다 가는 길에, 1만 미터 위로 가기 위해 행거에서 일단 Me-264를 내려야 했다. 행거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조립 장비를 깎아 파는 썬창이 있었다. 조립 장비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조립장비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썬창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폭좆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썬창, 런장이시구먼. 폭격시간이 없다니까요."

썬창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폭격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행거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상자깡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조립 장비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조립장비다.


폭격을 놓치고 다음 베이스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썬창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썬창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행거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썬창다워 보였다. 올드 가드 칭호와 옛날 프사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썬창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조립 장비를 내놨더니 코-파일럿은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행거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부기장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땅치기를 잘 당하고 같은 엔진이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부각이 안 나오고 손에 헤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썬창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拯九暴)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조립 장비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썬창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썬창이 나 같은 썬린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썬창을 찾아가서 독뽕에 편대플레이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썬창을 찾았다. 그러나 그 썬창이 앉았던 자리에 썬창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썬창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행거의 BF-109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BF-109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썬창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조립장비를 깎다가 유연히 백구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썬창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독일(悠然見독일)!" 힛총통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부기장이 경전차를 뜯고 있었다. 전에 경전차를 조립 장비로 쿵쿵 두들겨서 따먹던 생각이 난다. 조립 장비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조립질 하는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엔진성(萬戶擣엔진聲)이니 위군추야도엔진성(爲君秋夜擣엔진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조립 장비 깎던 썬창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실 재한 추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