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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나날들이 뒤따르며 순양전함들은 200명의 병사와 수병들로, 전함은 175명으로, 경순양함들은 60명으로, 구축함들은 20명으로 승조원이 줄어들었다. 이들은 정기선을 이용해 독일로 보내겼다. 남아있는 피골이 상접한 승조원들은 함의 상태를 만전으로 유지하고, 비상시 증기를 끌어 올리고, 10노트로 항해하게 하는데에는 충분했다. 우리는 우리가 독일에서 들은대로 평화협정에 따라 경비부대가 우리에게 남아있기를 바랬고, 이들을 다시 독일로 데려오고 싶었다. 어쨌건 우리는 우리의 훌륭한 배들을 사랑했으며 이들를 통해 세상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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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측은 우리에게 식량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것들은 빌헬름스하펜에서 공급받아야만 했는데 독일은 절반가량이 굶주렸으며 혁명군이 지배중이였고, 군인 평의회에서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매우 적은 양만이 왔다. 처음에 우리는 모든 함정에 적재된 비상식량을 배분함으로서 식량을 늘리려했고, 후에 우리는 낚시를 하거나 갈매기를 잡았다. 식량, 약간의 보급품, 우편물들은 독일 선적의 소형 정기선이나 아직 운용중인 몇 안되는 경순양함이나 구축함이 운반해주었다. 처음에는 이 선박들에서 직접 우편물들을 수령했다. 후에 이들은 검열을 위해 스케파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스케파로 되돌아와야 했으며 이는 6에서 8주가 걸렸다.


음식 다음으로 보온은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며칠 뒤 영국측에서 공급한 연료로는 우리 배 전체를 난방을 하기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고통스럽게도 알 수 있었다. 영국은 석탄을 태우는 작은 스토브를 배에 설치했으나 우리는 증기로만 난방을 했고 보일러를 계속해서 작동시켜야만 했다. 약간의 숙고와 흥정을 거친 후 보트 4척의 모든 승조원들은 B-110/112 그룹으로 이동했고 다음 부표의 B-109/111은 비웠다. 우리가 전대 전체를 위해 받은 기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보일러 하나를 계속해서 가동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때 증기와 전기가 전원이 내려가고 모두가 자러가면 "깡통"은 매우 빠르게 식었다. 아침에 우리의 다소 원시적인 난방시설의 딱딱 소리나는 관에서 다시 증기가 쉭쉭소리를 내며 올라올때까지 모두가 그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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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악기는 상태가 나쁜 축음기와 기타뿐이였고 이는 포크송과 뱃노래를 부르는데에 도움이 됐다. 드물게 맑은 봄날 저녁에 갑판에서 우리는 이것을 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발생한 몇몇 게임을 했다. 두 구축함의 상부갑판(함교와 연돌을 포함해서)에서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을 한것은 상당히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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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국이 그날 직전에 여전히 독일 소유인 함정을 점령해 사보타지 시도를 방지하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구축함에선 이 모든 것에 대한 대응책이 준비된 상태였다. 우리는 무기도 폭발물도 없는 상태였다. 해수 마개를 열어 함을 자침시킬때는 시간이 필요했으나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추정치는 30분에서 1시간 사이로 다양했다. 모든 격문은 상부갑판으로 이송되었고 구획 사이엔 문이 사라졌다. 해수마개는 상부갑판과 하부갑판에서 작동했다. 우리는 상부갑판 벨브를 때어낸 다음 갑판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고, 신호가 주어지면 즉시 보일러실과 엔진실로 내려가 해수마개를 열 준비를 할 이들을 준비했다. 또한 우리는 빠르게 침수를 진행시키기 위해 다른 수단도 준비해둔 상태였다.


구축함에 승함중인 모든 이가 이 준비에 참여했으며 단 한명도 우리의 자침 준비를 배반하지 않았다, 또 경비함들은 의사를 데려오거나, 기함이나 고향에서의 편지를 전달할때를 제외하고선 다가오지 않고서 멀리서 감시했기에 준비가 용이했다. 작은 유조선과 물공급용 바지선도 돌아다녔다. 우리의 빈 그룹 인근의 부표에 정박한 경비구축함은 유틀란트 전투 기념일을 제외하고는 냉담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날 우리는 함교와 연돌을 신호기로 장식했다. 영국 구축함 승조원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우리는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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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폰 로이허 제독은 모든 지휘관들에게 신호가 떨어지면 즉시 자신의 함을 자침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제독의 바지선으로 이를 보냈다면 너무 눈에 띌 것이였다. 영국 우편물 순회선은 훨씬 안전했고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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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조약이 1919년 6월 21일 정오에 서명될 것이라고 공지했다. 스케파에서 이 날은 북위 59도 안팎의 화창한 한여름 날씨를 대표하는 온화한 햇살과 부드러운 색이 완연한 날씨를 보여주었다. 우리 승조원들은 여유롭게 함을 청소했다. 소풍나온 학생들이 가득찬 작은 정기선이 우리 함미 인근을 지났다. 그리고 7개월만에 처음으로 우리 주변을 지키고 있던 영국 전투함대가(그곳에서는 한개 전대는 늘 "감시중이였다") 정박지를 떠나 바다로 나가면서 "감시 중" 이던 구축소함대와 합류한 상태였다. 이것은 매우 수상했고, 그들이 외부의 다른 전대 및 소함대와 합류해 여러 출입구에서 우리 함선으로 돌진해 점거할 준비를 마쳤을 수도 있었다. 사실 조약의 서명은 이틀뒤로 밀렸고, 영국 제독은 나쁜 날씨로 인해 연기되었떤 훈련을 하기 위해 바도 나간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도 독일측 제독에 이를 알리지 않았고, 따라서 정오에 연합군측이 적대행위를 재개할 것이라는 인상을 그에게 남겼다. 아직 두시간이 남아있었고, 그 사이 토요일의 일과는 여느때와 같았다. 물 보급선이 현측에 접근했다. 나는 그 당시 잘 알고 지내던 그 함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뉴스들과 함께 그는 조약 서명이 연기되었음을 알렸다. 그가 다시 떠나갔을때 나는 B-110에 있는 우리 선임장교에게 건너가 우리에겐 이틀의 유예시간이 더 있음을 알렸다. 가장 가까운 대형함인 전투순양함 자이틀리츠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을때 우리는 여전히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해 논의중이였다. 거기서 사람들이 갑판상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스케파에서 한번도 일어난적이 없는 일이였다. 안경을 통해 우리는 함대에 자침명령이 내려졌음을 알아차렸다. 불행히도 바람이 불지 않아 이것이 알려지는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기나긴 구축함열을 지나는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다.


이제 사람들이 우리의 함정들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해수마개와 콘덴서를 열었고, 우리 화부중 힘이 가장 강력한 이가 이전에 선택한 뒤 표시해둔 파이프와 관을 슬레지해머로 때려부쉈다. 새로운 깃발과 장기가 계양되었고 보트들이 내려졌다. 빈 함정에서 온 이들이 복귀해 모든 자침조치가 취해졌음을 보고했다. 15분뒤, B-112의 승조원들은 좌현으로 기울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깨끗한 속옷과 가장 좋은 제복으로 갈아입고 미리 준비해둔 짐을 마지막으로 쌀 시간은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짐을 보트에 옮겼다. B-112는 현저히 기울었다. 나는 다시한번 모든 구획을 둘러보았고 모든 구획에서 물이 졸졸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인원과 그의 물품들을 생활구획에서 빼내 보트로 옮겼다. 식당을 지나면서 모두가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햄버거 한두개를 집어들었다. B-112의 함미 갑판은 이제 물에 꽤 잠긴 상태였고 따라서 보트로 옮겨타기는 쉬웠다. 우리는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고(두명은 자리가 없어 구명땟목에 있었다), 우리의 선임장교는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며,우리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으며,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해 이를 수행했다고 짧게 이야기 했고 끝날 무렵에는 세번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출항해 0.5마일도 안되는 거리에 있던 파라 섬으로 향하는 경로를 잡았다.


신호는 1120시에 발령되었으며 수신되는데는 몇분가량이 걸렸다. 우리가 우리 보트에 탑승한 시간은 1200시를 몇분 지난 시점이였다. 1216시에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셰가 억류함대중 처음으로 해저를 향해 돌격했다. 그녀의 장교 세명은 믿을 수 없는 승조원들에게는 함을 인도하기 전에 배를 완전히 건조시키고 청소해야한다는 말 외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준비를 했다. 그후 승조원들은 기꺼이 손을 빌려 모든 수밀문과 해치를 열었다. 밤에 장교들은 다섯개의 수선하어뢰발사관의 다소 복잡한 개방 절차를 실시할 준비를 마쳤다. 모든 배에 전문가들이 있는 것이 아니였기에 차이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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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광경이였다. 광활한 만 전체에 걸쳐 다양한 침몰단계에 있는 함들이 있었다, 전경에는 구축함, 중간 거리에는 전투순양함들, 그 뒤에는 전함들과 경순양함들이 있었다. 사방의 커터, 보트, 땟목들에 사람들이 탑승중이거나 당겨지거나 멀리 떨어지고 있었다, 영국 경비 구축함들과 경비함들은 그들의 사이렌으로 경보를 울리면서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총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의 첫 관심사는 당연하게도 우리 그룹으로 향했다. 우리는 수심이 대부분의 구축함보다 깊다는 사실을 알고선 안심했다. B-112는 심각하게 기울었고 1300시 언저리에 그녀는 B-110위로 넘어갔다. 우리는 함교와 연돌이 부서지면서 낸 찢어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소용돌이 치는 하얀 물보라와 함께 그녀는 구축함중 처음으로 해저로 향했다. B-110이 곧 그 뒤를 이었고 너무 많은 배들이 가라앉아 우리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1400시 무렵에 전투순양함 몰트케와 자이틀리츠를 포함해 4 전투함대의 함정 5척 전체가 사라졌다. 폰 데어 탄이 곧 뒤를 따랐고 데어플링어가 1500시 직전에 침몰했다. 그때 카바의 뒤에 있던 마스트의 수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전투순양함중 힌덴부르크만이 약간 기운 상태로 떠있었으며 수심도 별로 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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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은 그들에게 발포함으로서 다시 함에 올라 해수마개를 다시 닫거나 부표에서 나오는 것을 돕도록 강요했다. 나중에 우리는 장교 한명(전함 마크그라프의 함장), 한명의 준위, 네명의 부사관들, 3명의 수병들, 총 9명이 사망했음을 알았고 이들 중 일부는 그들의 함에서, 다른 이들은 보트에서 사망했다. 아무도 무장하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도 저항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폰 로이허 제독의 명령에 따라 백기를 계양한 상태였다.


1700시 무렵에 우리는 영국 전함들이 보통 정박되어 있는 넓은 만으로 예인되어 갔다. 우리는 우리 구축함 일부가 여전히 떠있는 것을 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함 바덴이 예인되어가고 있었고 경순양함 뉘른베르크가 카바인근의 얕은 수역을 지나고 있었으며, 엠덴의 마스트는 여전히 눈에 보였고, 전경에는 힌덴부르크 인근에 소형함들이 달라붙어 예인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30도가량 기운 상태였다. 우리가 약 1마일 떨어진 거리를 지나갈때 우리의 시선은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갑작스럽게 기울면서 가라앉았고, 영국 함정들은 빠르게 벗어나 전방위로 도주했으며, 거대한 선체가 수면 아래로 사라짐과 동시에 그녀는 똑바로 우뚝 섰다. 마침내 그녀가 휴식을 취할때, 마스트와 연돌의 상부 부분은 여전히 눈에 보였다. 


이 인상적인 사건은 자침의 끝이였다. 전함과 전투순양함 16척중 15척이 침몰했으며 바덴만이 물에 잠긴채로 좌초되어 있었다. 후에 그녀는 인양되어 표적함이 되었다. 8척의 경순양함중 다섯척이 침몰햇으며 엠덴, 프랑크푸르트, 뉘른부르크는 좌초되었으나 침몰한 상태였다. 50척의 구축함중 32척이 침몰햇고, 14척이 좌초되었으며 4척은 부분적으로 침수된채로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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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https://www.usni.org/magazines/proceedings/1959/december/scapa-f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