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4월 22일, 지금은 북마케도니아의 영토인 도이란(Doiran) 계곡에서 불가리아군과 영국군이 전투를 벌이며 2차 도이란 전투가 시작되었다.


(도이란 계곡의 불가리아군 초소)

불가리아의 참천 후, 지지부진해진 마케도니아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협상국은 샹타이 회의에서 공세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협상국은 발칸 반도에 넓은 돌파구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동맹국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바르다르와 도이란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


한편 불가리아군은 블라디미르 바조프(1868~1945, 왼쪽에서 두번째)를 도이란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했고, 그는 도이란의 지형을 이용해 계곡을 철조망과 벙커, 포대로 도배해 요새로 만들었다.


협상국 사령부는 불가리아군의 진지가 작년보다 강화된 것을 파악하고 철저한 포격 명령과 함께 43,000명의 병력과 106문의 대포 110문의 박격포를 준비했다. 불가리아군 사령부도 바조프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증원군을 파견했고, 바조프는 최종적으로 30,000명의 병력을 갖췄다.


4월 22일


영국군이 4일간 100,000발의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이 시작되었다. 

바조프 장군은 협상국의 진지를 향해 똑같이 포격을 날릴것을 명령했고, 양측은 서로 10,000발의 포탄을 쏘아대며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영국 보병의 공격은 24~25일 밤 사이에 시작되었는데, 12개의 중대가 불가리아군 2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네레조프(Nerezov), 크냐지 보리스(Knyaz Boris), 파자르지크(Pazardzhik)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반격으로 오후 8시경 후퇴했다. 중앙과 우익 전선을 향한 공격도 살아남은 불가리아군 포병의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채 실패했다. 


25~26일까지의 전투도 불가리아군의 맹렬한 공격과 반격으로 영국은 패배를 거듭했다. 결국 4월 27일에 공세 초기 지점까지 후퇴했고 불가리아군은 탈환한 진지를 다시 보강했다. 


(영국군을 포로로 잡은 불가리아 육군 57연대)

도이란 방면의 졸전에 분노한 협상국 사령부는 영국군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라고 강요했다.

결국 5월 8일, 또한번의 대규모 포격 후,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주요 공격은 오후 9시부터 시작된 5파로 이뤄진 영국군의 공세였다.


5월 8일부터 9일까지 있던 네 차례의 공격은 영국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끝이 났다. 특히 Knyaz Boris 지점은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선 "죽음의 계곡"으로 통했다고 더 타임즈의 특파원들이 기록했다.




(도이란 근처에 있는 영국군 묘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영국군은 5월 9일 도이란에서 철수한다.

12,000명의 영국군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불가리아군은 사상자는 2,000명이었고 그 중 900명은 질병과 부상으로 사망했다.





바조프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불가리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전선은 한동안 국지전을 제외하면 평온했다. 1918년에는 영국-그리스 연합군이 다시 한번 도이란을 침공했지만, 또다시 블라디미르 바조프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2022년에는 스웨덴의 록밴드 Sabaton이 도이란 전투를 주제로 한 노래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