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6.25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초기에는 부대 편제가 거의 무너지고 재편성 되는 일이 잦았다. 
1950년 8월 27일 당시에 황규만 장군은 소위 계급이었는데, 아침 8시경에 연락병이 말하길,

"소대장님, 어떤 부대가 저 아래 골짜기에서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어유. 좀 보셔유." 

그래서 내려다 보니 선두에 소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을 필두로 한 무리의 아군이 올라오고 있었다. 
황소위는 그 인솔자에게 물었다.  


"수고하십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1연대에서 왔습니다. 당신네 부대가 공격을 못 하고 있으니 지원을 해 주라는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난, 황소위라고 하는데,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소위라고 합니다. 갑종 1기 출신입니다."

그는 약간의 이북 출신 말투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 20세이던 황소위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때 황소위는 장교는 모두 태릉 육사에서만 배출되는줄 알고 있었는데, 
갑종 1기라고 하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가우뚱 하기도 했다. 
6.25 전쟁 초반이라 모든 것이 어수선하던 때였다.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 높은 고지와 저 옆으로 뻗은 능선 일대에 있습니다." 

 황규만 소위도 이곳에 배치된 지 3-4일밖에 되지 않아 확실한 적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그저 중대장이 소대원을 데리고 어디로 가라고 해서 위치한 것일 뿐.   
김소위는 황소위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후에, 직접 지형정찰을 해야겠다며 포복으로 10m 가량 능선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켰는데, 순간 적의 기관총 공격이 시작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황소위는 개인호에서 기어나와 김소위의 곁으로 기어갔고, 두 발목을 잡고 능선 아래로 잡아 당겼다. 이미 총탄에 절명한 상태.
연락병과 김소위의 병사 2-3명을 데리고 M1 소총 대검으로 땅을 파 임시 매장했다. 그리고 표식을 위해 큰 돌 하나를 주어다 머리맡에 놓아 두었고, 마침 소나무가 잘린 나무 등결이 있어 그것을 표식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서너시간 후에 적의 역습이 시작되어, 그만 그 위치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황규만 장군의 동기생 262명 중에 6.25 때 전사한 인원이 113명이라고 하니, 김소위의 전사도 당시 전선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1963년 4월에 황규만 당시 대령은 OO 소재 제1군사령부 비서실장으로 보직되었는데, 
그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안강-기계 북방의 어느 고지에 
임시 매장하였던 김소위의 시신을 찾을 기회가 왔다는 것이었다.


경주시 변두리의 간이 활주로에 착륙한 황대령은 준비된 앰블런스를 타고 안강 지구로 향했다.
그러나 전후 10여 년의 세월은 지형을 변하게 했고 나무를 울창하게 했으며,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하게 만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찾기를 수 시간, 그는 마침내 도음산 인근에서 표식으로 찍어 두었던 나무 등결과 돌을 찾았다.
김소위의 무릎뼈와 발뼈 부분은 아래로 흩어져 내렸으나, 그 자취는 여전했던 것이다.

 황대령이 유골을 최대한 수습하여 하산한 시각은 오후 4시,
대구 비행장을 거쳐 강원도 OO에 있는 제1군 영현중대에 유골을 안치한 것은 다음날 오전 10시였다. 
일요일에 화장을 시키고, 다음주에 육군 참모총장에게 청원 절차를 밟았다.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서였다.

 1964년 5월 29일에, 전사한 날로부터 14년이 지나 마침내 국립묘지에 안장되니, 
묘역은 '동 제2묘역', 묘번은 '1659', 비명은 '육군소위 김    의 묘'이다.

이 이야기는 그해 6월 16일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나중에 국어 교과서에 언급되기까지 한다.

황규만 대령은 곧 미국 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주일대사관 무관, 제12연대장 등을 거쳤다. 수기는 이후 황규만 장군의 군생활과 예편 이후 경험을 더듬는다. 간간히 김소위의 신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언급되면서 황규만 장군은 국립묘지의 김소위 묘비 앞에 추모비를 세우고 김소위가 전사했던 장소에 전적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몇년뒤 드디어 김소위의 신원을 확인하니 김소위의 이름은 김수영 소위였다.



이에 육군 소위 김 의 묘를 김수영의 묘로 바꾸려 생각도 했으나,
국방부는 유족들과 협의 후에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려는 의미로 이 묘비를 그대로 두기로 한다.

그리고 황규만 장군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수기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면,
'그렇지 참, 내가 죽으면 저 장군 묘역으로 갈 것이 아니라, 이 통로 빈 자리로 와서 김소위하고 나란히 묻혀야지. 그래야 후일 자식들이라고 나를 찾아올 때 김소위도 함께 돌봐 줄 것이 아닌가. 
나만 혼자 장군 묘역으로 가버리면 누가 계속 김소위의 묘를 돌봐 줄 것인가. 내 비석도 김소위 것과 크기도 똑같이 해달라고 해야지. 죽기 전 청원을 내면 내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나.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얼마전 돌아가신 황규만 장군은 이 결심을 그대로 지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