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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특집기사 시리즈, 'RUSSIA'S GAMBLE(러시아의 도박)'을 연재중임.


이 기사는 우크라이나/미국/유럽의 정치 및 군사 관계자 100여명을 심층 인터뷰 한 뒤 작성되었다고 함.




I.


      -  2월 24일 오전 4시 15분경, 우크라이나 국경 경비대 소속 Viktor Derevyanko는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음. 


몇 시간 전, Derevyanko는 바이든 대통령이 또 침공 경고를 하겠다며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 받았었음.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이든의 경고는 현실로 이루어졌음. 러시아 미사일이 쏟아지기 시작했음.


      - 그와 동시에,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 Denis Monastyrsky는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음. 국경 수비대장의 전화였음.


우크라이나 북동부 지역 3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수비대장은 핸드폰 너머로 보고했음.


이것은 그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의 많은 관료가 예상했던, 제한된 침공이 아니었음. 


Monastyrsky는 전화를 끊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시작되었다'고 말했음. 이에 젤렌스키는 '정확히 무엇이 시작되었냐'고 답했음. 

Monastyrsky는 여러곳에서 동시에 공격이 이뤄지고 있는 점으로 판단했을 때, 키이우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이 일어나고 있다고 재차 답했음.

      - 우크라이나의 영부인, 올레나 젤렌스카는 젤렌스키가 침대에서 일어나 노타이 차림으로 정장을 갖춰입는 것을 보게 되었음. 


영부인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고, 젤렌스키는 '시작되었다'고 답했음. 


사무실로 떠나기 전, 젤렌스키는 자녀들의 얼굴(17세와 9세)을 바라보았음. 그 순간, 젤렌스키의 머릿속에는 '내 아이들을 비롯해서,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의 모든 아이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었음.


 - 젤렌스키는 즉시 최고 고문 회의를 소집했음. 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음;


경찰/국방 책임자를 포함한 내각의 일부가 키이우에 남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 서부로 몸을 피하는 것. 그들은 북쪽의 벨라루스, 동쪽의 러시아, 남쪽의 크림반도에서 수백 대의 장갑차 및 탱크가 우크라이나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음. 체르노빌에도 러시아군이 진입했는데, 그들은 방사능 토양에 참호를 파고 인근 숲에서 오염된 사슴을 사냥해서 먹었음.


       - 아침이 되자, 젤렌스키는 바이든과 보리스 존슨 및 기타 지도자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음.


그 후, 책상에 앉아 대국민 담화를 녹화해 두었음.


군대, 정부가 일하고 있으니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가능한 침착하게 행동해 달라는게 담화의 요지였음.


       - 정부 청사 안에서, 우크라이나 정부 비서실장 안드리이 예르막(Andriy Yermak)은 크렘린의 전화를 받았음.


크렘린 비서실 부국장 Dmitry Kozak는 예르막에게 우크라이나인들의 항복을 바란다고 말했음. 예르막은 Kozak에게 욕을 난사하고 전화를 끊었음.


      - 침공 당시, 러시아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음. 



a. 젤렌스키 정부를 제거하거나,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해서 우크라이나의 방어력을 낮춘다.


b. 키이우를 점령한 뒤, 꼭두각시 정부를 설치한다.



      -  침공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충분한 무기와 탄약 및 통신 장비를 갖추지 못했음. 그러나 모두가 간과한건, 우크라이나의 저항 의지였음.


      -  지리적 요건도 우크라이나군에게 도움을 주었음. 키이우 주변의 울창한 숲, 좁은 도로, 구불구불한 강은 게릴라 전에 안성맞춤이었음.

 

      -  러시아의 오판도 우크라이나군에게 도움이 되었음. 그들은 우크라이나군의 전력, 젤렌스키 정부의 저항력을 얕잡아 보고 있었음.


      -  결국, 러시아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음.




II.


  • 키이우를 담당하는 Oleksandr Syrsky 중령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분리주의 부대와 싸운적이 있고, 모든 돌발 상황에 대비해 계획을 세워두는 사람임.

  • 러시아가 전면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군에 속해있었기에 대비를 할 수 밖에 없었음. Syrsky가 예측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음.


             - 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의 경계 주변에서 전쟁은 시작될 것.


             -  2~3개의 주요 고속도로를 따라 키이우로 진격해 올 것.


             - 젤렌스키와 내각진이 도망가면, 그 혼란을 틈타 러시아는 키이우를 장악하려 시도할 것.




  • Syrsky는 키이우를 보호하기 위해, 키이우 내/키이우 외곽에서 각각 한 개씩의 군대를 배치해 놓았음. 도심 지역을 폭격에서 보호하고, 러시아인이 키이우로 접근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한 목적이었음.

  • Syrsky는 명령 체계도 재정비했음. 이후, 전술적 결정은 현장에 있는 장교들이 즉시 내릴 수 있게 되었음. 

  • 침공 일주일 전에는, 헬리콥터와 제트기를 포함한 육군의 항공 자산을 주요 기지에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음. 이는 항공 자산을 러시아의 공습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에서였음.

  • 그럼에도, 기갑 전력은 키이우를 방어하기엔 너무나 부족했었음. 이를 보완하기 위해, Syrsky는 모든 군사 교육 센터에 특별 임시 대대를 편성한 뒤, 훈련에 사용되는 포병 시스템을 키이우에 배치해 두었음. 그 중에서도 북서쪽과 북동쪽은 러시아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방어 진지를 철저하게 구축해두라고 명령해 놓았음. 

  • 이후, Syrsky의 조치들은 키이우 전투에서 유효했던 것으로 밝혀졌음.

  • 군이 대비책을 마련해 둔 것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수뇌부 몇몇은 전면적의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음. 사실, 우크라이나 국방장관 올렉시 레즈니코프(Oleksii Reznikov)도 전면전을 믿지 못했었음.

  • 레즈니코프의 이러한 결론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음; 유럽 관리들이 전면전 가능성이 낮다고 말해왔었고, 우크라이나의 자체 첩보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전면전을 시작하기엔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었음. 2월 22일, 레즈니코프는 벨라루스의 국방장관 빅토르 크레닌(Victor Khrenin)과 전화 통화를 가졌는데, 당시 크레닌은 벨라루스의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음. 물론 거짓말이었음.

  • 침공 이틀 후, 레즈니코프는 크레닌과 다시 이야기를 나눴음. 이 때 크레닌은 러시아 국방장관 세르게이 쇼이구(Sergei Shoigu)의 말을 전했음; 우크라이나가 항복하면, 침공 행위는 멈출 것이라고.

  • 이에 레즈니코프는 답했음. ‘러시아측의 항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III.


  • 침공 직후, 안토노프 공항은 예상했던 곳보다 이른 시점에 공습을 당했음. 여기엔 FSB에 포섭된 협력자들의 역할이 컸음.

  • 러시아 군이 안토노프 공항에 공습을 가했을 때, 우크라이나 군 부 사령관 Yevhen Moisiuk 중장이 내린 명령은 다음과 같았음 : ‘침략자들을 죽여라.’

  • Serhiy Falatyuk는 당시 안토노프 공항에 있었던 25세의 방위군이었음. 그는 러시아 헬리콥터가 활주로에 도착했을 때, 소련의 Igla  맨패즈를 이용해서 헬리콥터를 격추시킬 수 있었음. 이러한 작은 승리들은 우크라이나군의 사기를 올려주곤 했음.

  •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탄약과 수적으로 열세였고, 결국 공항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음.

  • 3월 7일까지, 러시아군은 호스토멜의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였음. 이에, 우크라이나군 총 사령관 발레리 잘루즈니(Valerie Zaluzhny)는 호스토멜 전선을 유지하고 러시아군이 수도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음.

  •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이 키이우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내려가는 것을 몇 일 동안 막아낼 수 있었음.

  • 결국, 러시아군의 움직임은 좌절되었고 도시로 들어가는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밖에 없었음. 그들에게 남겨진 최상의 카드는 키이우 변두리에 위치한 Moshchun마을의 숲을 돌파하는 것이었음.



IV.


  • 침공 몇 시간 후, 젤렌스키와 내각진은 소련 시절에 지어진 낡은 벙커로 피신해있었음.

  • 벙커 안에서, 국가안보 의장 올렉시 다닐로프(Oleksiy Danilov)는 젤렌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음.

  1. 첫 날에는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과연 나라를 지킬 수 있을지 지켜볼 것이고, 많은 양의 무기가 러시아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2. 대통령 주변에 무기를 든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인지 재차 확인해 볼 것. 러시아 측에서 대통령을 죽이거나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는 믿을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3. 대피 여부는 대통령 본인에게 달려 있다.

  • 대통령실 보좌관 올렉시 아레스토비치(Oleksiy Arestovych)를 포함한 내각 대다수는, 젤렌스키에게 수도 외곽이나 우크라이나 서부로 이전할 것을 조언했음. 당시에는, 우크라이나 군이 수도를 지킬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음.

  • 젤렌스키는 다음과 같이 답했음. 자신은 살아있는 사람이기에, 죽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필연적으로 자기는 죽게 될것이라고.

  • 미국과 유럽 관료들도 우크라이나 정부의 연속성을 위해서 키이우를 떠나는게 좋겠다고 전했음. 젤렌스키가 안전한 곳에 있어야, 권력의 공백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였음. 정작 젤렌스키는 정반대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음. 젤렌스키 본인이 도망친다면 우크라이나군 사기는 저하될 것이고, 정부가 붕괴될 것이라고. 이에, 젤렌스키는 서방 측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음. "자신이 떠나는 것이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즉시 떠날 것이라고. 자신은 대통령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며, 권력을 위해 정치를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 결국, 젤렌스키는 수도에 남았음. 이는 러시아의 예상과 정반대였음. 전직 코미디언이라고 얕잡아 봤는데,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친 가니(아프가니스탄 대통령)나 야누코비치(전 우크라이나 대통령)과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

  • 2월 25일 밤, 키이우 시내에서 총성이 들리고 체첸 군이 젤렌스키를 죽이러 온다는 소문이 퍼졌음. 이에 젤렌스키는 키이우 거리로 나와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음. 그리고 젤렌스키는 국민들에게 호소했음. ‘우리는 모두 키이우에 남아있으며,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수도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 이후, 젤렌스키 정부는 지원을 받아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음.

  • 젤렌스키는 유럽 정상들과 있었던 화상통화에서 ‘내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말했고, 연설을 통해 타국의 국민들에게도 우크라이나의 지원을 호소했음.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제거해도 무방한 ‘맹장’과 같았지만, 유럽에게 우크라이나는 ‘심장’과 같은 존재라고.

  • 비서실장 예르막은 몇 주 동안 살해된 우크라이나 아이들과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가정의 사진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 (Jake Sullivan)을 포함한 전 세계 관료들의 휴대폰으로 보냈음. 예르막 본인을 몇 일 동안 밤샘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끔찍한 사진들이었지만, 효과는 있었음. 그 사진을 받은 사람들 중 90%가 반응을 보였고, 예르막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와 더 많은 지원을 약속했음.




V. 


  • 키이우 변두리에 위치한 Moshchun 마을은 소나무 숲, 강, 호수로 둘러싸여 있는 한적한 마을임. 전쟁 전, 이 마을에는 1500여명의 주민이 거주 중이었음.

  • 2월 27일, 제72기계화여단의 중대장 로만 코발렌코(Roman Kovalenko)가 소규모 전투원들과 함께 Moshchun마을 안으로 진입했음. 집들은 불타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피난 중이었고, 비행기는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었음. 

  • 호스토멜과 Moshchun 마을 사이에는 Irpin 강이 흐르고 있었기에, 강을 따라 전투는 몇 일 동안 계속되었음. 

  • 3월 6일 아침 러시아군이 강을 건너려 하자, 코발렌코는 반격을 명령했음. 그러나 탄약이 떨어지자, 코발렌코는 마을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음. 마을 안에서 코발렌코 부대는 우크라이나 특수부대, 재블린으로 무장한 다른 부대, 그리고 외국 자원자들과 뒤섞여 재편성되었음. 

  • 3월 11일, 러시아군은 사방에서 Moshchun을 압박했음. 모든 것이 코발렌코 부대 바로 옆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부대의 대다수가 파편맞고 뇌진탕 판정을 받게 되었음. 우크라이나군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의 맹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음. 코발렌코도 머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음. 그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믿지 못했음.

  • Irpin과 수도 서쪽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저항에 직면한 러시아군은, Moshchun을 통해 키이우로 들어가려고 시도했음. Syrsky의 예상으로는, Moshchun은 머지 않아 함락당할 가능성이 있었음. Moshchun이 함락당한다면 키이우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Syrsky는 이후 전투의 향방이 키이우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라고 바라보았음.

  • 해결책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음. 소련은 농업용 목적으로, Irpin강을 따라 정교한 댐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었음.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댐의 일부를 폭파해 둔 상태였음. 이를 알게 된 Syrsky는 ‘다이버’라고 불리는 지역 농업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서 댐의 다른 곳들을 폭발시켰고, Moshchun 주변의 강 수위를 더욱 높였음. 강이 범람하자, 러시아 해병대는 모든 무장을 버리고 살기 위해 헤엄칠 수 밖에 없었음.

  • 그럼에도 러시아군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음. 3월 셋째 주, Moshchun 마을 근처에 러시아 낙하산 부대가 상륙했음. 이에 우크라이나 군은 새로운 전술로 맞대응하기 시작했음. 사흘 간격으로 병력을 교체해고, 러시아군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곳을 포병 사격으로 폭격하기 시작했음. 이에 러시아군은 공세 능력을 잃고, 강 건너편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음.









문장 띄우다가 글 전체가 깨져서 올렸다가 지웠다가 몇 번 재업함 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