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좆고딩시절


수능을 앞두고 있던 나는 참으로 기열스러운 두뇌를 가져 공부라곤 손에 대지 않고 있던 사람이었다.


학교가 공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놀러갈 사람이 없어서 맨날 야자시간에 자곤했는데, 어느 날 자리를 바꿀 날이 다가왔다.


어차피 나는 잠만 늘 자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걸리던 상관이 없었고, 자리 배정 결과 내 옆에는 중학교때까지만 해도 친했던 여자애가 앉게 되었다.


이 아이도 공부를 안하는 편이었기에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고 야자시간에 둘이서 카페를 가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얘는 카페를 가도 커피말고 스무디같은 음료만 시켜서 그냥 카페인이 안맞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서만 야자시간에 이곳 저곳을 쏘다니다보니 어느새 중학교 시절보다 더욱 친해져있었고, 주말에도 서슴없이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1달쯤 지났을까, 꿈에서 계속 그 여자애가 나왔다. 머릿속에는 그 아이 생각 뿐이었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걔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되서야 생각해보는 거지만 걔도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심증의 영역이지 물증의 영역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주말에 만날때 화장부터 패션하나하나까지 신경써서 "가붕아~ 나 오늘 어때?"하고 질문했던것. 아무렇지 않게 물어본 것에 부끄러워 했던것. 등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어보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원한게 아닐테니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볼게.


여느날처럼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을 나온 나는 룸카페에서 아무생각없이 놀 생각에 책을 대충 펴놓고 음료수 하나를 시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따라 뭔가 긴장이 되고 눈치가 보이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여자랑 단 둘이 룸카페를 놀러와서 긴장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근데 그건 얘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스윗남의 느낌을 내기 위해 가볍게


"왜그래? 어디 아파?"


부터 시작해 소소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인지 얘도 긴장이 풀린듯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그때, 얘가 내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붕아.. 너.. 내가 혹시 특이한 이야기 해도 받아줄 수 있어..?"


이 말을 듣는순간 순간 띵했다.

고백이라도 하려는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 뭐라고 답해야할까도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물론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 뒤에 그 애는


가붕아 그러면...


하면서 뒤끝을 흐리더니 옆에있던 가방을 자기 무릎 위로 올렸다. 

가방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다시 가방을 닫고 그 가방을 책상위로 올려두었다.


"..열어볼래?"


그 한마디가 뭐라고 나는 엄청나게 긴장했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한동안 그 가방을 바라만 보다가 이내 결심하고 담담한듯 지퍼를 열었다. 그 여는 순간에도 안에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다.


러브레터? 선물? 아니면.. 혹시..?


한참 성욕이 왕성한 고등학교시절이니만큼 이상한 상상을 하기는 충분했고 얘가 절대 그런 애가 아니라는건 알고있으면서도 그런 류의 상상을 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본 것은 두꺼운







두꺼운,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양장본이었다.


아이보리 빛깔에 금실로 꾸며진 골동품 양장본.


요즘 나오는 조잡한 쓰레기들과는 달리 볼드체의 큼지막한 글씨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Das Kapital'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그 아이 ㅡ알키비아데스의 얼굴에 레닌의 심장을 감춘ㅡ 는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저 당시의 무지한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뿐이다.

주체사상..독재..비효율..자유...


그녀는 이 모든 개념을 한 순간에 일축했다.


ㅡ이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자본가들의 음해일 뿐이야.


ㅡ진정으로 중요한 사회주의의 기치는 이런 것이 아니야. 사회주의는 경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해.


ㅡ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본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졌을때 뿐


ㅡ 우리는 심판을 쟁취할 것이고,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미학적 선택으로써 역사의 진보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야.


나의 첫 '자본' 썰은 열아홉의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