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부는 승리, 중반부는 5대 5의 백중세, 후반부는 패배 


- 일본육군항공대 11전대 소속 타카야마.



번역출처 - http://beholderer.egloos.com/980385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3호(2000년 가을호) 176~181쪽의 특집기사《붉은 독수리들의 노몬한》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할힌골 전투, 혹은 노몬한 사건의 공중전을 다룬 글로 저자는 구 공산권의 군사사를 많이 다루는 분인 후루제 미쓰하루古是三春 씨입니다.(저작권에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정치위원(커미셔르) 보로제이킨의 첫 전투


  '이곳의 초원은 공군에 있어서 정말로 쾌적한 곳이군. 마음껏 날아다녀도 되겠어.' 하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여름 계절학기를 열어도 되겠군.'

  아침 식사가 차로 운반되어 왔다.

  "여기로 음식을 가져올까요?" 바실리예프가 물었다.

  "아니, 먹고 싶지 않아. 괜찮다면 차를 가져와주지 않겠나."

  이윽고, 코코아 컵과 버터 빵을 그의 손으로부터 넘겨 받았을 때, 갑자기 붉은 신호탄이 2발 하늘로 쏘아올려졌다. 비행장은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떼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초 후에는 엔진이 시동을 걸고, 또다시 몇 분 후에는 우리들의 비행중대는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노몬한 공중전기 - 소련 공장空將의 회상》A, B. 보로제이킨 著, 하아시 카츠야林克也, 오타 다코太田多耕 번역, 고분도弘文堂, 1964년 p.3)



  1939년 6월 22일, 할힌골(할하 강) 서쪽 강변의 야전비행장에 배치된 소비에트 제 22전투기연대의 중대 커미셔르(정치위원) 보로제이킨은 일본 육군 항공대와의 공중전에 처음으로 출격했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은, 그의 노몬한 공중전 회상기인《이스토리 비첼리(전투기)》에 나오는 출격장면이다. 
  

  그는 노몬한에서 6기, 훗날 독소전에서의 전과를 합치면 약 20기를 격추시킨 에이스 파일럿으로, 이 날 다행히도 97식 전투기 1기를 처음으로 격추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 당시는 이륙 후에 편대를 짜는 것조차 확실히 하지 못하고, 쫓고 있던 적기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한 채 격추 기회를 날려버리던 미숙한 파일럿이었다. 그리고 이 때 출동하였던 대부분의 소련 파일럿이 비슷한 상태로, 단련된 일본 전투기를 상대로 큰 희생을 치렀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노몬한 사건에 대해서, 지상전투에서는 일본군이 패배했으나, 항공전에서는 우수한 97식 전투기와 파일럿들의 활약으로 일본 측이 폴리카르포프 I-16 같은 전투기를 투입한 소련 측에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보로제이킨《공중전기》의 일부도 소개되었으나, 그 내용이 자세히 분석된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본고에서는, 일본어역이 절판된지 오래 된 보로제이킨의《노몬한 공중전기》의 내용을 축으로 일소 항공전을 소련측의 시점에서 검증해보려고 한다.




  사기가 왕성하지 못했던 소련 전투기 부대

  5월 11일 이래, 몽골 - 만주의 국경선 확정지역이었던 할힌골 유역에는, 소련 / 몽골 연합군과 일본/ 만주국 사이의 분쟁이 커다란 무력충돌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종래부터 이 지역에서는 소규모 공중전이 빈발했으나, 이번에는 이 지역에 진출한 몽골 기병대를 일본 경폭격기가 폭격한 이후(5월 15일) 항공전이 격화되었다. 그리고, 소련측도 6월 중순 이후 만주 영토 깊숙히 폭격을 시도하여, 공지 모두 분쟁은 격화되고 있었다. 

  지상전에서는, 아즈마 지대(東支隊, 일본육군 제 23사단 수색대 등으로 편성됨 - 지휘관 아즈마 야오조東八百藏 중령)가 5월 29일 소련 기계화부대와 몽골 기병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소련 / 몽골 측에 유리하게 정세가 흘러갔는데, 격렬함을 더하던 항공전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은 이미 출동하고 있던 몽골 파견 제 100 혼성항공여단(제 70 전투기 연대와 제 150 폭격기 연대로, 합계 84기)에다 N, 글라스이킨 소령이 지휘하는 제 22 전투기 연대(64기)를 증파했다. 제 22연대는 폴리카르포프 I-15 복엽 전투기와 폴리카르포프 I-16 단엽 전투기의 혼성으로, 특히 후자는 세계 최초의 저익단엽 바퀴다리引込脚 전투기로 소련이 자랑하던 것이었다.

  보로세이킨의 중대가 장비한 I-16은, 기체 앞머리에 7.62미리 ShVAK 기총 2정, 중앙부 좌우 날개에 20미리 ShVAK 기관포 2문을 탑재한, 당시의 전투기로서는 최강의 무장을 한 타입 17(38년 이후 생산)이었다. 이윽고 중앙부 좌우 날개 아래에 RS82 로켓탄을 6발 탑재한 타입도 출현했는데, 이것은 공중전에서의 사용도 가능한 세계 최초의 로켓탄이 되었다. 최고속도는 시간당 470km(고도 3천 미터)로, 일본의 97식 전투기의 시간당 460km에 비해 약간 우수하며, 급강하 속도는 압도적으로 빨라 일격이탈 전법을 득의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증파된 제 22 전투기 연대는 당초에는 전혀 힘쓰지 못했다.

【 최초의 공중전(인용자 역주 : 5월 22일)에서는 우리 I-16 전투기 6기가 일본의 96식 전투기(역주 : 97식 전투기의 오류) 대편대와 조우하여, 3기가 격추되었다. 5월 28일 출격한 파베르 마야코프가 이끄는 I-15식 10기는 약 2배 이상의 일본 전투기와 할힌골 상공에서 조우하여, 단 1기도 귀환하지 못했다. 】(
《노몬한 공중전기》, p. 2)

  도착한지 겨우 1주일만에, 제 22연대는 소속기체의 20%에 달하는 13기가 격추된 것이다. 이 때의 대전상대는, 마쓰무라 코지로松村黃次郞 중령이 이끄는 일본육군 항공대 제 24전대(97식 전투기 18기, 2개 중대)의 경험 풍부한 정예 파일럿들이었다.

여기에 비해 소련 파일럿들은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훈련이 부족했고, 사기도 왕성하지 못해 비참한 상황이었다. 보로제이킨의 중대장은 베테랑이었으나 알콜에 빠져 있었고, 다른 대원들도 의기소침하기 일수였다. 그 원인의 한 이유에 대해서, 보로제이킨은 "연간 8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은 훈련 비행시간" 이라는 놀랄 만한 실태를 들었으나, 이러한 무질서한 훈련태세가 된 원인은 1937년 경부터 소련군 전체를 습격한 【 숙청 】 의 폭풍이었다. 

  선진적인 군사사상을 외치던 장교들의 다수가 투옥되고 처형되었고, 군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시키는 커미셔르(정치위원) 제도가 부활하여,(실력 없는 장교 파일럿 보로제이킨이 베테랑 중대장을 감시한 것이다) 군 근대화의 기술적 측면에서도 정신적 측면이 중시되게 된 시대역행의 기풍이 군대 내의 사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파일럿들의 고투苦鬪


  6월 22일의 공중전에 대해, 몽골 파견 소련 제 57 특설군단 사령관 G. K. 주코프 장군이 "다수의 소련측 영웅 파일럿이 탑승한 소련기 95기가 일본기 120기와 몽골 영공 내에서 교전하여, 12기를 잃었으나 일본기 31기를 격추하여, 일본군에게 우리 실력을 보여주었다." 고 말했다고 구소련의 대표적 자료인 S. N. 시시킨이 쓴《1939년 할힌골에서의 적군 전투기록》(일본어역 없음. 모스크바 군사출판사, 1946년 출판)는 기록하고 있다. 다른 소련 측 자료에도 이 공중전이 일소 항공전의 터닝 포인트라고 적혀 있는 것이 있으나, 보로제이킨의 회상에서는 "승리"의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 그 날, 우리 부대는 12기를 잃었다. 그 중에는 우리들의 비행연대장 그라즈이킨 소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의 우리 공군의 총합전과는 격추 30기 이상이었다. 관동군의 보도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6월 22일 오후 4시 경, 소비에트 군 비행기 105기가 국경을.. (생략) 침범했기에 추격전으로 적기 49기를 격추했다. 우리 측의 미귀환기는 5기. 그 중에는 모리모토 대위의 기체(역주 : 제 24전대 제 2중대장, 모리모토 시게노부森本重信 대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 뻥도 적당히 치길 바란다. 】 (《노몬한 공중전기 - 소련 공장空將의 회상》)

  일본기 "30기 이상" 의 격추를 인정한 것은, 소련 항공대의 사기를 어느 정도 올리는 것이었으나(즉 사기고양을 위해 작위한 숫자일 가능성도 높다) 제 22연대만 해도 연대장을 비롯해 12기의 손실을 내었다. 다른 부대에도 손실이 나왔을 것이 확실하므로, 앞의 시시킨의 저서에서 나온 "손실 12기로 31기를 격추" 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은 낮다. 

  거기에다 보로제이킨 회상기의 기술에 따르면 "나는 완전히 경직되어서, 발사 손잡이를 잡는 간단한 동작만을 겨우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조준기를 놓지 않고 그저 필사적으로 쏘아댔을 뿐이었다."(《노몬한 공중전기》p. 10) "그들의 전투기는 I-15나 I-16보다도 우수하고, 특히 그 조종성능은 매와 같이 경쾌했다."(《노몬한 공중전기》p. 13) 고, 22일의 공중전에 대한 좋지 못한 말이나 적측의 97식 전투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등, "패배" 의 분위기가 농후하다. 그리고, 주코프가 증언한 "영웅 파일럿이 참전" 한 흔적은, 이 때는 보이지 않는다.

  덧부여, 이 공중전에서 일본측은 보로제이킨의 기술에 나온 대로 49기 격추(그 외 불확실 7기)에 7기의 상실과 파일럿 4명이 전사, 2명이 부상당했음을 인정하여, "대승리" 였다고 관동군關東軍의 우에다植田 사령관은 전투기 부대에 감사장을 수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시기를 달리하여 발간된 소련측 자료들을 비교해 보면, "정치적 작위" 가 흔들려 떨어진 끝에 진실의 실마리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




  격감한 소련 항공전력

  소련 항공대의 부진한 모습은, 6월 27일에 일본군이 감행한 월경공폭작전 때에 정점에 달한다. 일본 항공대는 같은 날, 소련측 항공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몽골 영내의 탐스크, 마타트, 산베스 주변의 비행장을 대대적으로 공폭했다. 이는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도쿄의 참모본부와의 사이에 커다란 대립을 야기하며 문제가 되었으나, 경계체제가 미비했던 소련군에 대해서는 커다란 기습효과를 보아, 공중전에서도 일본측이 대전과를 올렸다. 

  【 하늘에서, 무언가 어렴풋한 반점이 보인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적 / 아군의 식별이 되지 않았다. 지휘소에 주의를 보냈으나, 그곳은 변함없이 조용했다. 대공감시원은 쌍안경을 가슴에 매달고 걸어다니고 있었다. 중대장은 잠들어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어쩌면 신기루 때문인가? 쐐기 모양 대형, 앞으로 내민 고정각, 틀림없는 일본기였다. 그러나 경보는 아직도 울리지 않았다. 】(《노몬한 공중전기》p. 28)

  이윽고 보로제이킨들은 긴급발진하여, 지상에서의 파괴는 면했으나, 불리한 태세로 전투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대장기와 동료기, 도합 3기로 전방 아래쪽에서부터 97식 전투기 약 20기를 정면공격했으나 적들은 가볍게 회피하여, 오히려 역으로 추격당해 중대장기가 격추되었다. 잠깐의 공중전 후, 깊이 쫓지 않고 잽싸게 물러나려고 하는 일본 전투기 부대의 뛰어난 실력이 보로제이킨에게는 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공으로 단기도주하려는 97식 전투기를 발견하여, 동료기와 함께 공격했으나 기량에서 앞서는 일본 파일럿은 교묘하게 피하여 실패했다.

  【 보링과 나는 교대하면서 번갈아 연속적으로 공격했으나, 적은 초저공으로 교묘하게 몸을 피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기총이 고장나서인가. 그보다는 "무슨 꼴이지. 두 명이서 달려들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략) 우리들은 이동하는 목표를 정확히 사격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 대다수의 탑승원은 바람을 따라 표적에 사격하는 훈련을 2회 이상 받지 않는다. 조종성능이 우수한 비행기에 대한 사격은, 장기간의 부단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공중 사격능력은, 당시 우리들의 중대한 약점이었다. 】(《노몬한 공중전기》p. 31)

  그 후, 만주영공까지 깊이 쫓아간 보로제이킨들은 역으로 97식 전투기 다수의 요격을 받아, 집중공격으로 자기 기체의 왼쪽 날개를 크게 손상당하고 동료기는 격추당하고 만다. 손상당한 I-16을 몰고 다른 부대의 비행장에 착륙한 그는, 일련의 비행장에 대한 일본 항공대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많은 소련기가 이륙하려던 때에 일본기의 먹이가 되는 꼴을 보았다.

  이러한 경과는, 일본측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측은, 제 1, 제 11, 제 24전대로 편성된 제 12 비행단(97식 전투기 약 80여 기), 제 7 비행단(피아트 BR - 20 중폭격기 12기), 제 9 비행단(97식 중폭격기와 97식 경폭격기 합계 20여기) 등 120기 이상을 투입하여 소련 항공기지를 습격했다. 제 24전대 대장인 마쓰무라松村 중령은, 황급히 이륙하는 소련군을 격추하는 건 "갓난아기 팔을 비트는 것 같았다" 고 술회하였다.

  보로제이킨의 회상은, 이 때의 큰 피해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다른 소련측 자료, 예를 들면 주코프의 회상에서는 역으로, 6월 22일부터 26일에 걸쳐서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 항공부대 에이스들을 차출했음에도 불구하고 64기를 상실, "이기지 못했다" 고 하고 있다.(《노몬한 - 초원의 일소전 上》, 아르빈 D. 쿡스 著, 아사히 신문사 간행, 31페이지)

  그러나 이러한 소련 측의 "승리" 주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나오는 소련측 자료에 의해 뒤집히게 된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시대와 함께, 소련에서 비교적 정보공개가 원활했던 흐루시초프 수상 시대에 간행된《제 2차 세계대전사》(소련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편, 일본어역 고분도弘文堂 출판사, 1963년 제 2권)를 분석하면, 6월 말의 할힌골 지구의 소련 항공전력은 82기로, 6월 17일 시점에서의 267기(전투기 151기, 폭격기 116기)에서 고작 2주 못 미친 시기에 3분의 1 이하로 격감하여, 동시기의 일본군 항공대(약 180기)의 절반 이하로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일본기와의 공중전과 공폭에 의한 격추 / 파괴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이 소련 항공전력 감퇴의 "곡저谷底" 였다.





영웅 파일럿들의 출현

  그러나 6월 말이 되면, 고전 속에서 스페인 내전이나 중국 전선에서 돌아온 영웅 파일럿들의 활약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보로제이킨의 기술에서도 S. I. 그리체베츠 소령이 6월 26일, 피탄하여 만주국 영토에 불시착한 제 70 전투기 연대장 사바루에프 소령을 초원에 착륙하여 구출하여 온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체베츠는 이후 I-16기에서 신형 복엽전투기 I-153 "챠이가(갈매기란 의미)" 로 갈아타고 싸워 나가 노몬한의 소련 파일럿들 중 1위인, 12기를 격추했다.(종합전과는 스페인 내전시의 공동격추를 포함해서 42기. 그리체베츠는 노몬한 정전 직후에 사고로 죽었다.) 

  7월 2~3일, 일본군이 할힌골 서쪽 강변에 고바야시小林 보병단(약 8천 명)을 도하시킴과 동시에, 동쪽 강변에서도 제 1 전차단(전차 / 장갑차 합계 약 90대)을 주체로 하여 야스오카 지대安岡支隊에게 공격을 개시시켜 새로운 격전이 일어나자, 보로제이킨의 부대는 할힌골의 일본군 가교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이 가교에 대한 소련군의 공격은, 일본측 기록에서도 많이 소개된 바 있다) 이 때, 제 22 전투기 연대에는 새로운 연대장으로 G. P. 크라브첸코 소령이 부임해 있었는데, 그도 중국에서 의용병 신분으로 I-16 전투기에 탑승하여 싸운 영웅이었다.

  이러한 경험 있는 영웅 파일럿들의 출현이 노몬한의 소련 항공대에 얼마만한 무게감을 주었는지는, 크라브첸코 연대장이 보로제이킨의 중대원들에 남긴 인상적인 훈시 정면에서 잘 드러나 있다.

【 연대장은, 우리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일어서더니, 문제의 비행기에 눈길을 주었다.

  "이 구멍을 보도록. 이것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적은 2연사를 했고, 거기에다 대부분이 명중했다... 이걸로 죽는다 해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31발이나 피탄하고... 일반적으로 전투기 탑승자가 당하는 것은 그 대부분이 부주의에서 비롯된다. 본 기체는 탑승자가 우수한 한, 사실상 적기가 사격한 탄으로는 격추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여기를 잘 봐라. 등짝의 장갑판에 2발 명중하였다. 그럼에도 멀쩡하다. 금도 가 있지 않다. 날개도 동체도 구멍투성이지만, 구멍을 막아버리면 전투에서 버틸 수 있다. 우리들이 우월한 건 우리 전투기가 속력 면에서 일본의 전투기에 앞서고, 그리고 방탄력과 화력장비에서 몇 배나 적에게 우세하기 때문이다. 만약 97전에 31발의 탄환이 명중했다면, 조각조각나 버렸을 것이다."(《노몬한 공중전기 - 소련 공장空將의 회상》, p. 45~46

  이 훈시는, 조종능력에서 앞서는 97식 전투기에게 고전해 온 보로제이킨들의 마음에 울리는 바가 있었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에 시험받아온 그들에게 I-16의 특성에 입각한 지적은 납득이 가는 것으로, 이는 이윽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크라브첸코 소령의 이야기는, 일본 전투기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고 승리하는 방법의 핵심에 도달하였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중전에서 승리하는 주요조건은, 적기의 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속으로, 그것도 고공에서 결정적인 수직강하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공격 후는, 가속도를 이용하여 적의 반격에서 이탈하고, 다음 공격에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 전투기 탑승자에 있어서 항상 공격에 매진하는 것은 승리의 확실한 조건이다. 다음으로, 불행히도 적기에게 유효 사정거리에서 꼬리를 잡혔을 때 어떡해야 하는가... 커다란 수직반전으로 여러 번에 걸쳐 기체를 구부려야 한다. 제군들은 가속성능을 이용하여 97전과의 거리를 크게 벌릴 수 있다. 물론, 그 경우는 커다란 하중이 따른다. 그러나 I-16은 충분히 이를 견딜 수 있다. 반면, 97전은 이 점에서 취약한 설계를 했다. 그러면 어떡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직진비행으로 안전한 거리까지 이탈하든가, 아니면 180도 수직반전하여 적기에 정면공격을 가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어떠한 공중전도 망을 보고, 조작하고, 사격하는 3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를 완전히 몸에 익히면 상황판단을 용이하게 할 수 있고, 공중전투를 올바르게 계획하여 제군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보증하게 될 것이다." (《노몬한 공중전기》, p. 47~49

  크라브첸코 소령은, 1936년 이래 중국에 파견되어, I-16 전투기를 몰고 일본의 경폭격기 3기와 공중에서 싸워, 부상을 입으면서도 3기 모두를 격추한 외에도, 총 9기를 격추한 경험을 가진 소련 에이스 파일럿의 선구자였다.(1943년, 독소전에서 전사) 중전투기로서의 I-16의 특성과 일본육군 항공대의 전술을 숙지한 그이기에 할 수 있는 훈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굵은 글자로 쓴 곳은, 7월 이후 소련 항공부대가 자주 쓴 전법 그 자체로, 이로 인해 소련 측의 피해는 감소하고, 역으로 "소수정예" 로 분투해 오던 일본 항공부대의 손해가 증가하게 되었다.

  크라브첸코를 위시하여, 스페인 파견 항공사령관 Ya. M. 스무시케비치 군단지휘관과 그리체베츠 등 21명의 에이스 파일럿들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5월 말 ~ 6월에 노몬한에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전선에서 미숙한 파일럿들을 다시 교육시켜, 새로운 전법을 만들어 내고, 7월부터 항공전의 양상을 바꾸는 추진력이 되었다.




  지나치게 많은 일본측의 격추수

  보로제이킨의 회상은, 7월 4일의 피격추 체험, 그리고 8월에 전선 복귀한 이후 전과를 계속해서 올린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어, 각종 노몬한 자료와 대비해 보면 흥미롭다. 단지, 전과와 같은 것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고, 소련측 손실도 각자 뿔뿔이 흩어진 국면의 이야기 뿐으로 총합적인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당시의 정보공개도의 한계, 내지는 참전당사자로서의 감정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군사관계자료의 공개와 함께, 구 소련군의 분쟁 / 전쟁에서의 손실의 정확하고 신뢰성 높은 데이터가 러시아 군 관련자들에 의해 공적으로 출간되고, 노몬한의 손실도 확정이 용이해졌다. 그 영어판《20세기에서의 소련 전투손실과 희생자 수》(G. F. 크리보쉐에프 대장 감수, 런던 그린빌 출판사 간행, 1997년)에서는 노몬한 사건에서의 소련 장병의 손실이 병과에 따라 산출되어, 항공부대에 대해서는 전사 100명, 행방불명자 59명, 부상 102명으로 합계 261명이라고 나와 있다. 후르시초프 시대의《제 2차 세계대전사》에 의하면 이 사건에서의 소련 항공기의 손실은 207기로 되어 있는데 사상자 / 행방불명자의 수로 본다면 300~350여 명 정도가 될 듯하다(몽골 항공대는 데이터가 없으며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전력비율로 보자면 소수이다.) 

  종래의 일본에서는 "노몬한에서 1300기 이상의 소련 기체를 격추 / 파괴했다" 는 설이 유력시되어, 이를 "입증" 하기 위해 "소련군은 초기에는 1천 기, 후기에는 300기 이상을 투입" 했다고까지 하는 해설도 나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최신 데이터와 비교하면 상당히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 측이 한 번에 투입한 항공전력은 초기에 200~250기 정도, 최대는 8월 후반 공세 당시의 564기에 지나지 않고, 이 이상의 투입은 연료보급과 그 외의 이유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지상전투의 규모가 【 군단 규모 이내 】의 것이었기도 하여, 이 정도의 투입이 한계로 보인다.

  물론, 소련측이 주장하는 "일본기 660기를 격추 / 파괴" 했다는 전과도 일본측 항공전력으로 본다면 명확히 과대하나, 적어도 일본 측이 발표한 자군 항공기 171기 전후(정치적 이유로 과소한 견적이 잡혔을 가능성이 있다)의 격추는 사건 후반에 역량을 보여준 소련 항공대에 의한 귀중한 전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일본측의 손실은, 다수의 베테랑 파일럿들과 지휘관을 포함하여, 육군 항공대의 그 후에 심각한 영향을 준 바 있다.

  그런데 지금가지 검토한 바에 의하면, 노몬한 항공전의 일본 / 소련 손실비율은 1:2 정도로, 내용적으로는 "일본군의 압도적 승리"는 아닌 듯 하다. 이는 전과의 수량비교는 물론이고, 작전면에서도 소련 측이 지상부대와 연대하여 효과적인 대 지상작전을 실시한 데 비해, 일본측의 항공작전은 지상전투에 전혀 공헌하지 못한 사실을 봐도 그렇다.(적 측의 대지작전을 용이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제공권을 확보했다고 할 수 없고, 그 점에서도 일본 항공대의 일방적 승리라는 건 공허하다는 게 명백하다.)

  그 어느 쪽이든 노몬한 사건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지금은, 종래의 자료를 공평하고 엄밀하게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리라.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보로제이킨의《노몬한 공중전기》에서도 다양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므로, 다시 간행된다면 좋겠지만.


일본 측 발표소련 측 발표

소련기 격추 / 파괴 수

1340기

일본기 격추 / 파괴 수

660기

일본군 손실

171기

소련군 손실

207기

  위의 기록이 종래의 일본, 소련의 쌍방이 발표한 전과와 손실 수인데, 일본과 소련 모두 전과를 상당히 과대하게 잡고 있다. 본문의 고찰과 같이, 실제 소련기의 손실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350기 정도, 일본 측의 손실은 일본 측 발표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추측된다.(일본 측이 손실을 약간 과소하게 발표했을 가능성이 있는 건, 육군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몽골 영내에의 불시착이나 탑승자의 투항을 은폐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쌍방의 항공기 모두에게, 부대에서 전과 수를 확인하는 작업은 엄밀히 행해지는 것을 본지로 하며, 수속은 원래는 복수 탑승원들의 시인과 지상부대의 확인을 필요로 하나, 이 노몬한 사건은 쌍방의 확정되지 않은 국경을 놓고 공중전이 실시되었기에 상대측 영내에서의 전과확인이 불확실하였고, 한편 다른 부대와의 중복도 있어서 전과가 과대해졌다고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쌍방의 발표를, 서로의 투입기 수나 보충능력 상에서 그대로 적용해 버린다면 일소 양국 항공대가 모두 전선에서 소멸해버릴 정도의 숫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