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전에, 난 이쪽에 평생을 연구해왔고 

좆부심이나 그딴게 아니라 이런분들도 있었다는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하는 취지로 글좀 써봄.

가챈에는 따로 글 안쓴것같기도하고.







왼쪽은 2018년 4월 발굴한 [설마리전투] 로 유명한 글로스터셔연대 모장. 

오른쪽도 발굴한 [해피밸리 전투] 로 알려진 1.4일 전투에서 기습으로 전멸에가까운 피해를 입은 얼스터라이플스 모장.


글을 쓰기전, 우선 우리집안의 6.25전쟁 관련 썰부터 풀게.

한국의 [해병대] 긴빠이 크롬웰전차가 등장하게 된 전투가 우리집안 6.25 썰이랑 긴밀한 관계가 있기때문임.






1.전쟁의 발발




작은할아버지는 1950년 7월경 친할머니와 원래 혼례를 올리실 예정으로 함께 사시다가 같이 장을 보러 평택역전에 나갔다가

헌병들에의해서 현장에서 징집되어 트럭에 실려가심. 

당시 14살이던 할머니에게 [어른들에게는 무사할거라 전해라] 라는 말과함께 그대로 후퇴하던 국군들과 함께 내려간걸로 추정함.

할머니는 10리정도 되는 거리를 울며 걸어서 오성면의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그게 시작이였고. 민간인들한테도 전쟁의 여파는 컸음.

이미 [오세국] 이라는 친척분이 육군장병으로 입대했다가 돌아가셔 평택 오성면 오성국민학교에서 3명의 전사자들과 장례를 치뤘고

평택시장까지 참석할정도로 큰 장례식을 치뤘는데, 할머니의 증언을 따라서 여러모로 알아보니 실제로 전사명부에 계셨음.




추정상 아마도 1사단 12연대 소속으로 6월 30일 김포비행장 2차 탈환시도 전투에서 전사하신것같고

시신이 인도되서 장례식이 치뤄진 7월초, 아직 인민군이 내려오기전인 상황까지 일치함.


다만 안타까운건 이후 해당 군번을 다시 받은분 역시 전사하며 이름은 다르나 동일한 군번의 소유자가 두분이 존재하게됨.

이분은 한동안 평택에 안치되어계시다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신것같은데 자세한건 나도 모름. 


이분의 경우는 그럭저럭 유공자로 인정받으신 비교적 해피엔딩이지만...





할머니 동네주민들은 [보도연맹사건]으로 14명가량이 순경들에 의해 학살당했고 

인민군의 진주 당시엔 보도연맹가입을 안했다는 이유로 파랭이라며 인민재판으로 집안이 몰살당할 위기였는데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철수하며 무사할 수 있었음. 

다만 위 사진의 [정태진] 희생사건과 같이 다시한번 동네주민들은 납북되어 다시한번 학살당했고 

국군의 수복으로 인민군 협력자들을 (보도연맹가입 집안 포함) 다시한번 체포/재판으로 처형함. 

2020년에 현장답사를 해보니 실제로 순경의 학살지로 판단되는 자리에는 .30 탄피가 나왔고.










이제 다시 할아버지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아마도 국군 17연대에 배속되어서 낙동강에서 살아남으신 후 생사를 알리셨다는데

50년 11월을 마지막으로 편지가 오질 않았다고하심. 이때 편지에 함께 동봉한 소속부대 패치가 저 흰 동그라미 패치고

결국 전쟁이 끝나도 작은할아버지가 돌아오는 일은 없어서 결국 작은할아버지의 형. 내 친할아버지랑 결혼하심. 


그러다가 태극기휘날리며가 개봉하고 며칠 후에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와 편지에서 저 패치가 멋져보였던 나머지 저거만 집에 들고왔고, 부대원들과 촬영한 사진은 결국 그때 더이상 떠올리기도 싫다면서 태워버리셨고. 

이게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중 하난데 저 사진만 남아있었다면 아마 참전사실은 인정됐을거라는게 더 안타까움.







여튼 밀덕에 입문한 초딩시기에 읽은 [마지막 한발] 에 나와있는 '해피밸리 전투' 라고 불리는 전투를 읽어보다가 사진속 부대원들 모장이 할아버지 사진속 모장이랑 같아보여서 조사를 해 보니 동봉된 패치는 영국 제29여단 패치라는거고, 편지가 11월에 부쳐졌다는 점, 1.4이후로 연락이 끊어졌다는점으로 미루어보아 KATOM 이라는 영국군속 한국인 병사로 종군하셨으며, 영국 제29여단이 50년 12월- 51년1월 사이에 치룬 전투가 양주의 송추/벽제 전투밖에 없었고 사진속 베레모의 모장을 봤을때 얼스터라이플스로 보여서 전투지를 추정할 수 있었어.






이게 또 충격적이였던게, 양주는 우리가족이 놀러가던 일영유원지이고 지나가던 고갯길옆 비석들에 나있던 총탄자국들이 그 흔적이라는것과 알려지지 않은 전투라는게 나한텐 충격적이였지. 내 가족이 죽은자리를 내가 10여년간 지나오면서도 몰랐으니까.

이후 10여년간 인터넷과 밀덕질을하며 있는자료 없는자료 관련자료는 수집했고 2018년에 드디어 영국군참전용사들 방한소식을 접하고 뛰어갔지. 마침 대학생이라 전공 교수님들한테 양해좀 구하면 됐으니까.



알버트.R.모로 씨 당시 얼스터라이플스 B중대 트럭 운전병이였는데 이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병사들이 존재했던것은 분명하고, 임진강전투 당시에는 새로 보충된 한국인병사들이였기때문에 아마도 작은 할아버지는 그때 돌아가셨을거라고 하셨어.

이외에도 뒤에 보이는 고지에서 싸우신 글로스터셔 C중대분도 만났는데 긴 이야기가 되니까 생략하자.


이때 만난분들은 2020년 한국전쟁발발 70주년행사에 다시 방한할 예정이였는데 코로나의 발병으로 결국 못오셨고

이때 내가 한 맨 윗사진의 발굴한 모장들도 전해드리겠다는 약속도 못지켜서 지금도 내 서랍에 있음.







이후에 마침내 2020년 결정적인 증인인 당시 16살로 얼스터라이플스 대대본부에서 노무자로 통역을 하시던분을 만나서

[당시 11명의 한국인 병사들이 있었는데 1명만 대대본부에 배속되어있어 나와함께 살아서 탈출했다. 안타깝게도 너의 할아버지는 그때 돌아가신것 같다] 라는 증언을 들었음.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신문회사 회장직으로 일하고계시더라.


결국 10여년 좀 넘게 작은할아버지의 행적을 조사, 내린 결론은 [1.4후퇴 당시 양주 삼하리에서의 전투로 돌아가셨다]고 결론지음.

병무청은 증언자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고 병적이 존재해야하는데 조부님의 병적자료가 존재하질 않음. 

전쟁 초창기에 징집되신만큼 소실되버린거지. 1.4이후 문서가 사라져버린거거나. 영국군측에도 기록이 남아있질 않아서 결국 유공자로 인정을 못받음.... 할머니도 더이상 이미죽은사람 찾아서 뭐하냐고 포기하신 상황이고.


후회는 되지않지만 그간 내가 걸어온길을 돌아보니 그냥 안타깝네...



이제 대충 해피밸리 전투에대해서 알아봤으니 크롬웰에 대해서 알아볼 차롄데, 

2편에서 본격적으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