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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민항기 시장 장악의 일등공신 보잉 747 팬암 도입 광고부터 보고 읽어보자 


어제 념글보니까 보잉관련 글들이 보이길래, 넷상에서 현재의 보잉이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 잘 정리한 글들을 퍼옴






보잉이 군사와 민간항공 분야 모두를 아우르는 강자로 군림할 수 있던 원동력은 너무도 단순하게 보유한 엔지니어에 있었습니다. 20세기까지 보잉이 보유한 엔지니어들로만 구성된 항공 엔지니어 협회가 있을 정도로 보잉은 독보적인 엔지니어 인력풀을 가동하는 '제조업' 회사였는데 (21세기 들어 대규모 정리해고가 일어나기 전 보잉이 보유한 '엔지니어'만 4만명이었습니다.) 현재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는 필 콘딧과 해리스톤 사이퍼가 CEO로 취임하기 전까지 보잉의 경영진은 대부분 항공기 개발에 직접 종사했던 엔지니어로 이루어져 있었죠. 심지어 CFO 조차도 보잉의 경영 기반을 금융이 아닌 '보유한 엔지니어 숫자'로 월가에 어필할 정도였는데 엔지니어들이 발견하고 개발한 항공 특허가 보잉이라는 회사를 존속하게 한 원동력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경영 철학이었겠죠.







필 콘딧 (Phil Condit), 보잉의 대표적 제트기 항력설계 엔지니어였습니다.






해리 스톤사이퍼 (Harry Stonecipher) GE출신의 맥도널 더글러스 부활 신화의 주역이었죠.


20세기, 그러니까 필 콘딧과 해리스톤 사이퍼가 CEO로 취임하기 전 보잉의 '제조업'으로서의 기본정신무장은 당시 본사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는데 시애틀의 보잉 공장은 보잉의 수 많은 명기들을 탄생케 했던 엔지니어들의 보금자리로서 본사 역시 엔지니어들이 직접 항공기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시애틀 공장 옆에서 오래 기능해왔지만, 01년 5월, 작은 기업 문화를 시작한다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보잉의 새로운 본사 이전 사업은 시애틀 공장을 떠나 뜬금없이 시카고로 옮겨가는 것으로 시작부터 삐끗해버렸습니다. (원래 후보에는 달라스도 있었지만 텍사스의 달달한 법인세율을 씹어버릴 정도로 매력있는 제안을 시카고에서 했기에 탈락해버리고 말았겠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런 모습은 시애틀에






실제 경영 사업부는 시카고의 본사에 있습니다.


이때부터 보잉은 공돌이는 시애틀 공장에, 사무직은 시카고 본사에 머무르는 요상한 투트랙 경영을 시작했는데 본사의 경영진은 시애틀의 공장과 엔지니어들에게 쏟는 관심보다 기업 재무재표를 가지고 월가의 금융인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보잉 경영의 언어가 '공학'에서 '금융'으로 바뀌는 대 격변의 시간이 찾아온 것 입니다.


이렇게 보면 필 콘딧과 해리스톤 사이퍼만이 보잉이라는 회사를 이상하게 드라이브해서 벌어진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던 배경이 있어요. 상식적으로 한 기업의 경영문화가 이렇게 갑자기 바뀌는게 가능할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겠죠. 뭔가 극적인 외부요인이 발생해야 할텐데 특히 보잉정도의 역사와 규모를 가진 회사라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변화입니다. 이 변화의 원인은 바로 합병에 있었습니다.


냉전 종식으로 군 항공기 사업 분야에서 허덕이던 보잉이 같은 처지이면서 상태는 더 안좋은 회사들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항법장비, 통신장비 제조회사인 Rockwell Aerospace와 하워드 휴즈로 알려진 Hughes Space & Communications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보잉의 가장 큰 인수합병 딜은 맥도널 더글러스로, 이 맥도널 더글러스를 인수합병하면서 맥도널 더글러스 경영진이 대거 보잉 경영진으로 편입되었는데 보잉은 맥도널 더글러스를 인수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합병된 회사의 우선 경영자리에서 前 맥도널 더글러스 경영진에게 밀려 빠르게 도태되어버립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이루어진 보잉 경영진은 정치와 금융에 도가 튼 맥도널 더글러스 경영진의 상대가 되지 못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월가에서는 이를 두고 '맥도널 더글러스가 보잉 돈으로 보잉을 샀네 ㅋㅋㅋ' 라고 대차게 비꼬았고 이 중차대한 변화의 기로에 필 콘딧이 있었습니다.


딱 봐도 공돌이로 보이는 이 아조씨는 18세에 취득한 항공기 면장을 시작으로 항덕후의 세계에 입문했고 특이하게도 캘리포니아대에서 기계공학과 항공공학 석사, 도쿄대에서 공학박사를 마치고 프린스턴과 MIT에서 경영학 석,박사를 받은, 경영하는 공돌이라는 특이한 이도류의 소유자였습니다. 65년에 보잉에 입사해 공기역학설계부 이곳 저곳에서 일하면서 초음속 항해 (STT)에 필요한 날개 디자인 특허도 받은 찐 공돌이로 민항사업부로 옮기면서 보잉 747 개발과정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해 입사 4년만에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승진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후 707,727,737,757 개발에 참여하면서 민항기 프로그램 경영이사가 되었는데 이 당시 개발에 참여한 (프로그램 관리직) 민항기 프로젝트들이 전부 대박을 터트리면서 92년에는 본사 사장직을 거쳐 보잉의 인수합병이 휘몰아치던 96년 대망의 보잉 CEO에 올라요.




이 당시 보잉의 상황과 필 콘딧이 예측한 항공기 시장의 미래는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는데


1.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는 컴퓨터 자동화 시대의 도래.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항공기 동체 생산에서 요구되는 안전 규격도 산업이 시작되던 당시에는 일어난 사고를 바탕으로 원인을 분석해서 개량해나가는 미쳐버린 유료 베타 테스트의 시간을 거쳐왔는데 대표적인게 동체 판넬 조립을 리벳이 아니라 볼트와 너트로 조였다가 항공기가 공중에서 분해되어 승객 전원이 사망해버리는 버리는 사고 따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던가, 관제시스템 개발 전의 개판오분전 항공트래픽, 마주오는 항공기를 자동으로 회피하지 못해 일어난 공중충돌 사고등등 항공산업 자체가 나사 하나부터 관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에 엔지니어들이 없었다면 존속될 수 없던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어왔지만 이렇게 반세기를 넘어가며 삽질해온 결과물이 점점 데이터로 쌓이고, 항공전자분야 회사를 인수해 통합 에비에이션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기초 설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화가 가능해지는 수준에 도달하게 됩니다. A부터 Z까지 엔지니어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 중 일부는 쌓아온 데이터로 퉁칠 수 있는 분야도 생겨나게 된 것이죠.


2. 냉전의 종식으로 쪼그라들어 버린 군 사업부. 이것은 군붕이들에겐 더 긴 이야기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압도적인 신기술보다는 경제성, 또한 줄어든 시장에서의 타사와의 경쟁은 고정비를 줄여야 한다는 압박으로 귀결됩니다. 경영 컨설팅이라는 고상한 작업은 대부분 정리해고 가이드에 가깝지 않습니까. 유럽 국가들은 빠르게 군축에 들어가고, 동아시아 국가엔 냉전 시절 개발한 항공기들이 수출제한으로 묶이거나, 오버스펙으로 판매가 힘들어지면서 신기술 개발부 보다 중고기체 SI 사업부를 향후 더 크게 일으켜야 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요.


3. 민간항공산업도 에어버스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미래가 불투명해집니다. 필 콘딧의 미래 예측 실패 중 가장 뼈아픈 것으로 지적받는 것이 부상하는 에어버스의 위협을 애들 장난으로 넘겼다는 것. 제트 민항기 사업에서 맥도널 더글러스의 DC 시리즈, 록마 L-1011와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했지만 보잉의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 아래 금새 파산할 것 같던 에어버스가 한국의 모 항공사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해버리는 바람에 21세기의 제트 민항기 시장에선 점유율에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중국이라는 메가 마켓에서의 양사 세일즈 경합도 있지만, 중국 정부가 자국 국내선 민항사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할 민항기를 개발해서 자체 조달할거라는 부정적 전망도 영향을 주었을 것 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중국이 코맷시리즈를 개발해서 잘 굴리는 것으로도 현실이 되었고. 목적에 따라 여러 타입의 민항기를 개발해서 판매하기보다 단거리, 장거리, 화물기 특성을 모두 충족하는 똘똘한 항공기 한, 두 모델만 개발해서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판매하는 세일즈 전략이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잉 CEO에 오른 필 콘딧에게 97년 인수하는 맥도널 더글러스의 CEO였던 해리 스톤사이퍼의 등장은 여러가지 의미로 악연에 가까운 만남이었겠죠.


테네시 공대 출신 물리학 공돌이로 시작한 해리 스톤사이퍼는 공돌이로 시작해 제조업의 거물 GE에서 부사장을 거치며 동종 항공업계 CEO에 올랐다는 점에서 필 콘딧과 비슷한면이 있었고, 냉전 후 군축으로 비틀대던 맥도널 더글러스의 CEO로 옮긴 후엔 단숨에 주가를 4배나 뻥튀겨버리는 경영의 마법(칼바람)을 불어일으켜 보잉이 인수를 결정하게 만드는 위치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공돌이라는 틀을 깨고 전문 경영인으로 거듭나고 싶었던 필 콘딧에겐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해리 스톤사이퍼는 전문 경영인으로서 맥도널드 더글러스를 자신이 CEO가 되기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가격에 보잉에 팔았고, 이후에는 곧바로 보잉 이사회에 합류하여 바지사장 콘딧을 앞세운 경영 실세로 활동하기 시작하죠.


해리의 경영법은 오늘 내일 하던 맥도널 더글러스에게는 일종의 극약처방이 되었겠지만 아직 엔지니어라는 성장동력이 충분했던 보잉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급전을 마련하는 몰상식한 경영으로 비춰졌는데 이를 전 부사장이었던 딕 알브레히트(Dick Albrecht)는 '해리가 시애틀에 맥도널드 더글러스산 전기톱을 가져왔다.' 할 정도로 무자비한 것이었다고 해요. 칼바람으로 금융의 맛을 본 맥도널드 더글러스 경영진과 여기에서 새롭게 채용된 CFO는 계속해서 필 콘딧에게 고정비를 줄이고, 새로운 금융제도를 회사에 도입해야 한다고 압박하면서 시애틀과 시카고로 양분되는 투 트랙 경영 아래 4만명에 달하던 보잉의 강력한 엔지니어 인력풀을 점차 해체하면서 월가의 금융인들과 딜 할 수 있는 금융인력을 확충하는 변화를 선택한 것이겠죠.


공학 대신 금융을 선택한 보잉은 미 공군 공중급유기 사업에서의 비리로 마지막 공돌이 출신 CEO 필 콘딧과 엔지니어 축소에 열을 올렸던 CFO가 해임되는 것으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고 이후 터지는 737MAX 같은 문제들이 결국 이 시기의 경영 선택으로 '항공기에 대해 좆도 모르는 책상물림들이 엔지니어를 부리면 벌어질 수 있는 나쁜 일'의 대표적인 예가 되어버립니다.


미국의 언론에서도 이 보잉의 변화에 대해 필 콘딧과 해리 스톤사이퍼의 경영실책으로 조명하고 있긴한데 개인적 시각으론 이건 그냥 일어날 수 있는 미래예측 실패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여러가지 잘못된 만남의 총합이라고 해야할까... 특정 인물만의 잘못으로 몰기는 어려운 배경이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영예측 실패의 예가 근래의 HP나 ESPN의 경영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요.



글에 어떤 오류가 있거나 틀리다고 생각신다면 여러분이 맞습니다.




https://arca.live/b/gaijin/74707972?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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