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몬드 음식 편이다.


다들 짐작하다시피 몬드 지역의 컨셉은 

북, 서유럽이 적당히 뒤섞인 중세 판타지풍이다.

좋게 말하자면 무난하고, 좀 그렇게 말하면

'서양'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뽑아낼 특징이 없다.



 등장하는 음식들 역시 간단한 꼬치구이로 시작해

수프와 스튜, 구운 스테이크나 파스타, 피자 등

굳이 파고 들 건덕지가 없는 쉬운 음식이 많고.


허나 이 중에 생뚱맞다고 해야 할까,

명백히 다른 요리들과 이질적인 이름을 가진 요리가 등장한다.



바로 바람신의 잡채.


양식풍 요리들 사이에 웬 난데없이 잡채?

라고 레시피를 얻은 많은 원붕이들이 의아해 했을 것이다.

일단 다른 언어에서의 표기를 살펴 보자.


중문(한자) - 風神雜燴菜 풍신잡회채

일문 - 風神ヒュッツポット풍신휘츠폿토

영문 - Barbatos Ratatouille 바르바토스 라따뚜이


보면 세 언어 모두 묘사하는 음식이 다르다.

중문에서는 중식에서 흔한 채소 조리법인 잡채.

일문에서는 네덜란드 지방의 스튜 요리인 휘츠포트.

영문은 프랑스 지방의 채소 요리인 라따뚜이를 가져왔다.



들어가는 재료만 따져 보자면

감자와 양파, 당근이 확실하게 들어가는 네덜란드의 휘츠포트(Hochepot)가 가장 정확해 보인다.

위 사진에는 고기가 들어가 있지만 그건 있으면 넣는 거고, 주 재료는 아니라고 한다.

이름의 의미 분석을 해 보면 Hochepot -> Hutspot = Hut(오두막) + pot(냄비)로, 

오두막에서도 끓일 법한 저렴하고 소박한 가정식이라는 점이 딱 맞는다.


그런데


여기서 이걸 옮기는 사람은 약간의 문제가 생긴다.

이게 휘츠폿인 건 좋은데, 이걸 대체 어떻게 번역을 한단 말인가?

휘츠폿이고 핫스팟이고 본질은 끓인 야채국일 뿐이다.

몬드는 네덜란드가 아니고, 휘츠폿이 네덜란드의 전통 어쩌고 하며 설명할 지면은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이야 과거 하이칼라 문화로 외국 요리를 발음 그대로 적는 게 흔하지만

한국에서의 번역은 그런 사정을 잘 봐주지 않는다.

번역이란 게 이래서 어려운 거기도 하다.


아무튼


여기서 번역자는 선택을 한 듯 하다.

아무래도 원문이라고 생각되는 중문의 표현을 따라

이 음식을 '잡채'로 부르기로 결정한 것.



중국에서 잡채라는 조리법은 딱히 별도의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잡다한 메뉴들을 총칭한다.

뭐든지 길쭉하게 썰어 볶으면 그게  다 잡채다.

따라서 뭐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야채 요리는 대충 잡채라고 부르면 알아먹을 수 있다는 거다.


중국에서는 말이다.


반면에 한국에서 잡채는 상당히 정형화되고 한정된 요리를 지칭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뇌절 하나 까고 알아 보도록 하자.



흔히 중세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쓸데없이 전통을 중시하고,

외국 문물을 경시하여 스스로 바뀌려 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되기 쉬운데,

실상은 그것과는 꽤 달라서,

뭔가 쓸모 있어 보이는 외국 물건을 발견하면

오히려 눈이 뒤집혀서 손에 넣으려 했다는 기록이 많다.



그 대표격이 목화씨로 민족급 호감고닉이 되신

일신 문익점 선생으로,

고려 말 덕흥군-정몽주-개국 반대로

3번이나 망하는 라인을 타며 숙청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였음에도

목화 보급에 대한 공으로 사후 추서에 대대로 명예관직까지 받으셨다.


이후 조선에 등용되는 관리들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법칙이 자리를 잡았지.

뭐든 간에 외국에서 좋은 거 하나 들여오면 출세는 보증에,

최소한 망하는 일은 없다는 것.


때문에 사절단이나 통신사 같은 임무는 상당히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동시에 국내 정세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는 거.


잡채도 이 무렵 해서 조선에 들어왔다고 한다.

'뭐든 냅다 썰어서 센 불에 휙 볶아 먹는다'

는 이 조리법이 민간 기준으로도 꽤 쓸모 있어 보였겠지.

그런데 이 잡채가 당시 조선에 자리잡기에는 큰 문제가 있었어.



'온돌'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거 형태는

불을 때는 아궁이에서 난방과 조리가 함께 이루어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석탄을 잘 쓰지 않아 나무를 태워야 하는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효율적으로 열을 쓰려면

한 번 얻은 열을 최대한 오랫동안 붙잡아둬야 했거든.


따라서 당시 중산층 이하의 조리 패턴은 이랬어.

저녁에 불을 한껏 때 방을 데우면서 그 불로 밥을 하고,

밥을 하고 난 뒤 잔불에다 나머지 국이나 반찬을 하는 거지.



이 잔불 정도의 화력으론

단시간에 휙 볶아 내는 볶음 요리는 무리라 이거야.

중국은 비교적 불 조절이 수월한 석탄 화덕을 써서 잠깐 센 불을 내는 게 가능했지만,

(작게 가공한 석탄을 사용)

반면 한국의 아궁이에서는 그런 짓을 했다간 제대로 익지도 않은 생야채를 씹게 된다는 거.



그래서 당시의 잡채는 한국 민간에 자리잡는 데에는 실패하고

고급 궁중요리로 남는 데에 그치지.

지금도 간신히 복원되는 궁중식 잡채는

쇠고기 꿩고기부터 해삼,  전복 같은 입 떡 벌어지는 비싼 재료가 들어가는 요리고.


그런데 훗날 이 잡채의 위치를 정반대로 바꿀 식재료가 정반대의 방향에서 들어와.




바로 당면과 왜간장(진간장).

이걸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 체류하던 화교가 활용하여 잡채를 만들어. 

(사천 지방 등에선 당면을 일반 국수처럼 곧잘 먹거든.)



그런데

이 버전은 의외로 한국 민간에 먹힐 만 한 방식이었다는 거.

한국에서 만만한 조리법이라면 단연 '데침'과 '무침'인데,

당면을 물에 데쳐 달달한 왜간장 넣고 나물처럼 무쳐 버리면

간단하면서 배도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반찬이 탄생하게 되는 거지.



이후로 이 당면잡채는 한식 문화에 급속도로 침투해

다른 요리에도 당면을 끼얹는 몹쓸 업적을 남기지.

이후 원판의 볶음 고명이 추가되며 가성비가 다시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때 쯤이면 가스레인지가 보급되어 화력이 큰 문제는 아니게 되었고,

잡채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영문 표기를 마저 디벼 보자.



라따뚜이(Ratatouille)는 전형적인 농경 민족의 요리야.

정형화된 요리법도 그다지 없고, 밭에 있는 야채를 따다가 썰어서

볶든 굽든 어쨌든 익히면 되는 거거든.

어디서 많이 본 조리법이지?


그런데 

인게임 내 요리 설명 중에 이런 문장이 있더라.


유서 깊은 간단한 반찬. 정성 깊은 조림과 3가지 야채의 맛이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예전에 누군가「 평생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음식 」이라고 평한 걸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맛있는 품질 잡채에 붙는 설명인데, 

여기서 그 '누군가'의 정체를 생각해 보면



이 양반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동명의 영화 라따뚜이에 등장하는 보스격 인물인 안톤 이고.

(영화 자체도 소동물에 거부감이 없다면 매우 볼만하니 한 번 보는 걸 추천함.)

영화를 본 적이 없다면 이후는 스포일러이니 스크롤을 조금 더 내리길 바란다.


















영화 이름이 음식 이름인 걸로 이미 추측 가능하지만

라따뚜이란 요리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한국 정서에 맞게 표현해 보자면

자신의 직업과 높아진 권위에 내심 지쳐 있던 미식가가

적잖은 의심을 품고 찾아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 주셨던 당면잡채를 받아든 것이다.


급에 맞지 않는 초라한 음식에 황당해 하던 미식가는 

이윽고 음식의 맛과 더불어 '행복'이라는 감정을 일깨우는

요리가 주는 체험에 감동하게 되고,

이제껏 쓴 적이 없던 최고의 찬사를 그 식당에 선사한다.


「 평생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음식 」 

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 영화의 줄거리를 염두에 두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거지.


이 지점에서 바람신의 잡채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바로 가정.

화려하지도 않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개념이지만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온기를 선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게 하는 것.


생각해 보면

이는 원신의 인물들 중 벤티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기도 하다.


물론 벤티는 바람신 바르바토스로서 몬드 전체의 숭배를 받고 있긴 하나,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바람신이라는 특별한 직위를 내려놓았을 때,

지금껏 공개된 세 신들 중

유독 벤티에게만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종려-모락스는 신이 되기 이전

바위 마신 자체로도 막대한 존재감과 인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재까지 잔존하는 선인, 야차들은 기본적으로 모락스의 부하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친구 내지 유사 가족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개인적으로 약을 챙겨 주고, 한가하게 차를 마시거나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신의 심복보다는 역시 식구(食口)에 가까운 일이겠지.



라이덴 쇼군-바알(바알세불) 역시 이 짤로 정리가 가능하다.

물론 그림의 인물들은 현재 사망하거나 생사불명 상태이지만

현재 그들을 계승하는 인물들이 존재하며,

손수 요리를 해 주거나 어린애 같은 응석을 받아주는 등

인간적으로도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


에이 스스로도 마코토의 빈자리를 계승한 인물임을 생각해 보면

그림의 화목한 관계는 불완전하지만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그럼 이제 몬드의 각설이를 보자.




위쪽의 댕댕이는 형님 모시는 건달 정도의 관계이고,

드발린도 부하가 아니라고 수 차례 못을 박았지만

부르면 제깍 날아오는 어쩔 수 없는 군바리다.


무엇보다 이 관계는 

바람신 바르바토스로서 이들과 맺고 있을 뿐이란 게 중요하다.



그림 오른쪽의 란란루같이 생긴 조그만 애가

벤티의 과거 모습이며, 진짜 정체이기도 하다.

이 무렵의 벤티와 연관점이 있는 인물 중

생존 중인 이는 현재 티바트 월드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밥이나 차는커녕, 그 좋아하는 술도 매번 혼자 마시는 게 

이 몬드 광장 풍각쟁이의 일상이다.



바람은 얽매이는 일 없이 자유로우나

머물 곳 또한 없고

누군가가 느끼거나 그 몸에 실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아챌 수도 없다.


오래 전에 죽은 친구의 모습을 빌리고

바람 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주정뱅이 시인은

빌린 것들을 내려놓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의 요리임과 동시에

소박한 가정의 음식이기도 한 이 잡채

요리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술꾼의 대표 요리가 된 것은

그 설명 대로 '작디작은 계기와 희망의 바람'이

바로 벤티 본인의 소망을 뜻하기 때문이 아닐까?


끝으로 

요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일부 원붕이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잡채는 요리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성가신 음식이기도 하다.

당면은 오래 전부터 미리 불려놔야 하고

재료를 하나하나 볶아서 준비하는 것도 상당한 고생일 뿐더러,

고기와 시금치, 버섯 등 재료도 막상 살려고 보면 상당히 비싸다.

게다가 중요한 건


비슷한 수고가 드는 김밥과 달리

잡채는 주식이나 메인 반찬으로 내놓기도 애매하며, 

보존성이 낮아 몇 시간이면 금세 맛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민 요리라고 해 놨지만, 의외로 비싸고 만드는 보람도 적은 음식이라는 거다.



명절, 잔치 등의 이벤트가 아닌 시점에서

어머니가 잡채를 만드신다는 건

보답받지 못할 많은 수고를 들여서라도

원붕이들을 잘 먹이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밥상에 잡채 올라오면 고기반찬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다 먹어라.

음식은 언제나 남김없이 맛있게 먹는 게 최고의 보답이기 때문이다.



뭐가 허전하다 했더니 요약 빼먹었다.


1. 바람신의 잡채 모티브는 중국의 잡(회)채, 네덜란드 휘츠포트, 프랑스 라따뚜이. 세 가지가 혼합된 이미지.

2. 한국어 번역은 중어 명칭을 잡채로 해석한 영향으로 추정.

3. 요리가 내포하는 개념은 '가정의 온기'로, 이는 벤티가 안고 있는 일종의 결핍과 연관되었다 여겨짐.



심심하면 전에 쓴 기사도 봐 줘.



은어조림 편


경책 가정식 편


벚꽃 모찌 편


모라육 편


매운 고기 찐빵 편


쌀 푸딩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