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왕.


둘 중에 누가 더 셀까?




유치해 보이지만 이 질문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화두야.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일단 대답을 해 보자면, 처음에 강했던 건 이었지.




인류 문명 초기의 신이란 자연의 구체화였고, 

그건 당시의 인간들이 절대로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으니까.


부족의 지도자들은 대개 그 신의 대리인이나 중개자로서 활동했고, 

절대 이길 수 없는 자연의 힘과 조화가 그들의 권력을 보증했지.


이런 사고 방식은 이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고 나서도 '운명'의 형태로 남아서,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주제로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어.




(위에서부터 오이디푸스 왕, 맥베스, 위대한 개츠비)


그리스 비극으로 시작해서 중세, 근대, 현대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영웅은 물론 왕이나 부호, 스타들이 정점에서 포르투나(운명)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여러 작품들은

어찌 보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신의 위세를 증명하는 사실이지.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 들고 있는 바퀴를 보면 알겠지만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 의 상징 역시 여기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고대 시대를 지배하는 신의 위세는 

대도시가 형성되고, 권력이 온전히 집중된 들이 등장하며 한 풀 꺾이게 돼.

(김제 벽골제와 제천 의림지 고대 시대 저수지이다.)


안정적인 농경 노하우가 정착되고 치수, 관개 등

자연을 길들여 인간에 이롭게 하는 커다란 공사가

권한이 집중된 왕의 손에서 이루어지거든.


강력하긴 해도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신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자연을 극복할 힘을 가진 왕을

사람들은 더 의지하게 돼.


땅이 적응해야 할 곳에서 길들여야 할 곳으로 바뀌며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나라 간의 분쟁이 격렬해졌고,

신이 권력을 보증하지 않으니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실로서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어.




물론 자연과 고대의 신들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왕들은 이들의 권위를 자신이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이로 인해 일부 지역에선 인간이 신의 위치를 대체하는

'조상 숭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지.


(한국의 종묘.)


그래서 왕들이 충분히 강해지고 나서는

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정 반대의 결과가 일어나.


흔히 '제국'이라고 부르는 거대국가의 등장 이후

쪼그라들었던 신들은 새로운 입지를 다지게 돼.



하나의 왕조가 광범위한 영토를 통치하는 거대국가에선

당연하지만 총독이라던지 여러 대리자를 보내 각 지역을 다스려.

그런데 그 지역의 백성들 입장에선

다스리러 온 총독들은 왕의 말을 들을 뿐이고,

정작 왕이라는 양반은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어.


왕과 백성들 사이에 깊은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지.

이 상황에서 옛 신들은 토착신앙으로 모습을 바꾸어 

백성들 사이로 깊숙히 침투하고,

대리자까지 거기에 우호적이라면 

그 지역은 왕보다 신의 입김이 더 센 지역이 되는 거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황건적.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거지.)


이건 왕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는데


전제 국가에서 왕의 카리스마란

연예인의 인기 차트 같은 개념이 아니야.

나라의 국력에 직결되는 백성들의 세금

조세저항이나 대리자의 횡령 없이

얼마나 원활하게 중앙 정부로 전달되는지 나타내는 척도라고.


누가 됐든 ㅈ도 있는지도 몰랐던 놈한테 세금이랍시고

자기 돈 갖다 바치고 싶겠어?


(대충 유비랑 조조라는 짤)


그 대상이 인간적으로 흠모하는 인물이든

개겼다간 날 확정적으로 ㅈ되게 할 인물이든

그런 뚜렷한 인물상이 있어야 

사람들은 자기가 땀 흘려 번 돈을 맡길 수 있는 거라고.


때문에, 자기 카리스마를 어딘가의 신이 갉아먹고 있는 이 상황을

대다수의 왕들은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았어.



서론은 여기까지로 하고,

지금부터 어떤 왕의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많은 왕들이 여가 활동 겸 지지도 관리의 일환으로

영토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일을 즐겼는데,

이 왕도 그러해서 당시의 양주(揚州).

지금의 소주(쑤저우蘇州. 상하이 바로 서쪽에 있음.)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순행을 온 참이었어.


여행을 왔으면 뭔가 먹어야 하는 법.

마침 밥 때도 되어 출출해진 왕이

송학루(松鶴樓) 란 식당에 앉아 메뉴를 고민할 때


신을 모시는 감실에 공양된 물고기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어.


"여보게 주인장."


왕은 가게 주인을 불러, 제단에 올려진 물고기를 요리해 달라 요청했어.

말이 요청이지, 그의 신분을 고려하면 명백한 '명령'이었지.



클라스가 다른 진상 손님의 출현에 주인장은 고민에 빠졌지.


왕이 저런 주문을 그냥 꼬장을 부리려고 한 건 아니었거든.


앞에서 말한 '신'에게서 카리스마를 되찾으려는 왕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의 세력을 견제했는데,


(기독교의 많은 상징물들이 박해 속에서 탄생했지.)


신자를 박해하고 상징물을 부수는 등

강경하게 나오는 왕들도 많았고


국가 종교를 지정해 나머지를 흡수해 버리는 등

치밀한 수를 쓰는 이들도 있었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과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치밀한 수를 성공적으로 해낸 경우지.


암튼 이것들에 비하면 저 왕의 '견제'는 그렇게 난폭한 수는 아니었어.

본래 이런 작업이 잘 되면 좋지만

문제가 생기면 '폭군'으로서의 명성이 쌓이게 되니까.

제삿상의 음식을 뺏어먹는 걸론

뭔가 목숨 걸고 저항하기는 애매한 사건이잖아?


그래서 주인장은 이 해프닝을 무난하게 끝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게 돼.


생선의 머리를 비스듬히 쳐 내고,

몸통과 꼬리에 촘촘하게 칼집을 낸 뒤 기름에 튀겨.


생선의 머리가 위를 보도록 접시에 세운 뒤

바삭하게 부푼 몸통과 꼬리를 뒤에 눕히면

(별로 안 닮아 보여도 그러려니 하자. 이미지 찾기힘들어.)


마치 꼬리가 긴 다람쥐(松鼠)같은 모양이 되지.

여기다 새콤달콤하게 만든 걸쭉한 소스를 뿌려서 완성.


왕은 생선 요리를 주문했지만

주인장은 다람쥐 모양의 요리를 들고 나왔지.

왕의 명령도 거역하지 않았지만

동시의 신의 눈도 속일 만 한 지혜를 발휘한 거야.


왕은 주인장의 기지와 더불어

바삭하고 새콤달콤한 생선의 맛을 마음에 들어 해

이후로도 송서계어(松鼠桂魚)라 부르며

이 요리를 종종 즐겼다고 해.


덤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인 청 건륭제

지금은 또 평가가 복합적이지만

치세 동안은 제법 좋은 평을 받은 왕이었다더라.


암튼 그래서


이게 그거다.

탕수어.


중국에도 탕수어라는 이름을 단 요리가 있긴 한데


비주얼이 미묘하게 다르다.


또한 이상한 품질과 일반 품질에서 '다람쥐 꼬리'가 거듭 언급되는 점을 보면

이 요리의 기원은 이 송서계어(松鼠桂魚)가 거의 확실해 보여.


그래도 탕수어라는 번역이 나쁜 번역은 아닌 게

탕수육이라는 요리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한국에서

새콤달콤한 소스를 끼얹은 튀김 요리를 표현할 떄

'탕수○'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으니까.

다람쥐 튀김 어쩌고 하는 것도 좀 거시기하고.





중어랑 영어에서는 다람쥐 생선,

일어에서는 '새콤한 콩장소스를 끼얹은 생선튀김'이라고 해 놨는데

탕수어에 비하면 좀 거추장스러운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지.


끝으로 뇌절을 더 하자면


(종교개혁과 권리장전. 대략 이 사건 이후로 신과 왕은 점차 중앙 권력에서 멀어지며 소멸해 갔다.)


신이 쎄냐? 왕이 쎄냐 하는 질문은 

현재로서는 재미 이상의 의미가 없는 화두가 돼버렸지.

이미 오래 전에, 다들 권력을 손에서 내려놓았으니까.


중동 지방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거긴 예로부터 종교 세속화로 유명한 데였고

현재의 상황도 종교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하물며 저 둘이 위세를 떨치던 과거에도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그들을 속여 왔잖아?


제갈공명의 만두 일화도 그렇고

널리 알려진 도루묵 이야기나

전에 다룬 서태후와 옥수수찐빵 이야기,

이자겸의 굴비 이야기 등.


결국은 신이든 왕이든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실체는 희미한 존재인 거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좀 그렇다고 해야 하나

이 둘을 그리워 하거나, 환상을 갖는 사람이 제법 많아진 것 같아.


그게 나쁘단 건 아니야.


저 아득히 드높은 장소에서

오직 선의로 인간을 굽어살피는 존재와


무수한 뭇 사람들의 염원을 모아

운명과 싸워 이기고자 하는 존재.


실체이든 환상이든, 

그런 게 있다는 상상만으로 삶이 충만해진다면

그건 가치가 있는 거니까.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이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개인으로선 더 이상 따라잡을 수도, 손에 넣을 수도 없다는

그런 무력감이 들 때가 많지.

내가 알고 있는 게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의 향수가 초인을 부르고,

신과 왕, 마법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불렀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점,

호기심과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세상에 빛나는 것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언제나 기억하길 바란다.


요약하자.


1. 탕수어의 기원은 다람쥐 모양의 생선튀김 송서계어(松鼠桂魚).

2. 송서계어는 신앙과 왕권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이 낳은 창작 요리.

3. 신과 왕이 싸우면 인간이 제일 쎄다. 끝.


아 그리고




신학 운근 어서오고~



이거는 지난 기사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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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파이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