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인공은 음식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먹을 거는 맞지만, 따로 조리를 하는 요리가 아니라고.



원신 하면서 이 열매를 못 본 사람은 없을 거다.

일몰 열매라는 이름처럼

해 질 무렵 노을빛을 띈 이 과일이

무슨 맛이 날지, 그리고 원래는 무엇이었을지

한번 정도는 의문을 품어 보았으리라.


일단 결론만 말하자면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생각보다 금방, 유사한 과일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어릴 때 남쪽 지방에 살았다면 잘 하면 볼 기회가 있었을 거다.

비파라고 하는 열매로,  중국 서남부가 원산인 온-아열대 수종이다.



내 어릴 적 고향집에도 한 그루가 있었는데,

더울 때 열매가 노랗게 익으면 할머니께서

마찬가지로 노란 대야에 담아 온 비파를

과일칼로 예쁘게 깎아 주시곤 하셨다.



일단 씨가 상당히 컸고,

질감은 약간 무른 단감.

팔리는 과일보단 덜 달고 신맛이 있어

원붕이들에겐 쫌 호불호가 갈릴 맛이다.



그리고 꽁무니 부분에 이렇게

보기에 썩 좋진 않은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건 꽃가루를 받은 암술이 씨방이 되어 그대로 열매(참열매, 진과眞果)가 된 것이 아닌,

꽃받기/침이나 꽃대 등이 열매로 부푼 헛열매(위과僞果)에서 종종 보이는 부분이다.




(비슷한 위과인 꽃사과와 석류 등에도 이렇게 꽃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있다.


붉은 기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황색 계열의 색과 

원추형 형태, 

위과 특유의 꽃이 변형된 흔적.


색상 면에서는 더욱 유사한 애플망고가 있었지만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은 온-냉대기후인 몬드에서도 널리 자랄 만큼

생육 조건이 여유롭지 않다.

게다가 위과의 흔적도 뚜렷하지 않아서 제외.


노랗게 익은 구아바도 비슷한 형태이지만, 

마찬가지로 열대 과일이란 점과

대부분 덜 익은 녹색 과일 상태로 유통되는 점을 들어 제외했다.


그리고


이름인 비파가 

동양의 악기인 비파(琵琶)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 하지.

악기의 이름을 가진 과일이라...



왠지 이 새끼가 연상되잖아?

암튼 그렇기 때문에

일몰 열매의 정체는 바로 이 비파 열매.

적어도 거기에 가장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


끝이다.


아무래도 이번 주제는 요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볼륨이 좀 작은 거 같다.

그러므로, 분량이 충분히 늘어날 때까지

뇌절을 더 해 보겠다.


좀 전의 비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어린 시절 먹던 비파가 열리던 나무.



그 나무는 이제 없다.



대충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나무가 심어져 있던 감귤 과수원은

싹 정리되어 비닐하우스가 들어섰고,


심심하면 씨앗을 가지고 놀았던 측백나무, 삼나무도

매미가 많이 살아 늘 무서워했던 담팔나무도

이젠 모두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는 것이,

겨우 2천 평도 되지 않는 노지 밀감밭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어느 지역, 어떤 직종이든

세월이 지나면 이건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사라져 간 것이 과연 비파나무 뿐일까.

하나 묻자면,



버터가 노란 이유를 아는가?

분명 우유는 하얀 색인데,

이걸 가공해 만드는 버터나 치즈는 노란 것이 많다.

치즈야 발효 핑계를 댈 수 있지만

버터는 그렇지도 않을 뿐더러

어떤 것은 하얗고, 어떤 건 또 샛노랗게 다르다.


제품에 색소를 타는 경우를 빼면

그 이유는 하나 뿐인데,

우유를 짜는 소가 먹은 때문이다.



이전에 다룬 바 있지만

동물이 주로 먹고 축적하는 영양소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인데,

당연하지만 음식에는 이 세 가지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이 중에는 서둘러 밖으로 배출해야 하는 해로운 성분도 있으나

있어도 딱히 상관 없거나, 제법 유용한 기능을 가진 성분도 있다.

비타민이라는 개념이 이런 '잡 영양소'중 몇 가지를 정리한 것이고.


보통 필요한 양 이상의 잡 영양소는 체액에 녹아 나중에 소변으로 배출이 되지만

물에 잘 녹지 않는 영양소는 몸에 천천히 축적이 되는데,



이 중 카로티노이드라는 물질은 물에 잘 녹지 않으며,

대신에 체내의 지방층에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카로티노이드의 색은 대체로



노랗다.

이런 황색 채소 말고도

산화되지 않은 신선한 풀에도 이 카로티노이드가 많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파릇파픗한 풀을 뜯어먹은 가축은

체내 지방에 카로티노이드를 축적하게 되고,

이 노란 색소는 지방이 주 원료인 버터와 치즈 등에 모이며

밝은 노란색을 띄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노란 치즈나 버터를 먹으면 우리 몸에 뭐 좋은 게 있냐고?

없다.



건초와 사료를 먹은 가축에서 생산된 축산물과

신선한 풀을 급여한 가축의 축산물은

영양학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


이는 이미 유기농 등의 고급 농축산물을 팔아먹으려는 업자와

그걸 반박하려는 이들 간의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유의미한 차이를 찾을 수 없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 잡았지.


하지만 다른 부분. 예를 들어

에는 차이가 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닭 등의 가금류家禽類는 풀을 곧잘 먹는다.)


내가 일하던 농장에서는

넘쳐 나는 잡초를 조금이라도 먹어 없애라고

닭이며 오리 등을 키웠던 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브로일러(broiler, 육계) 종에

평범한 가축 사료를 공급했음에도

파란 풀을 뜯어먹은 닭의 품질은 정말 확연하게 달랐다.


달걀은 라면에 하나 까 넣으면 카레 국물처럼 노랗게 물들었고,

닭 한마리를 잡아 삶는 날이면 국물엔 샛노란 기름이 둥둥 떴다.

맛 역시 마트에서 파는 달걀이나 생닭보다 

훨씬 고소하고, 진한 맛이 났다.


가축의 지방질에 축적되는 잡 영양소

영양학적으론 별 의미가 없지만

복합적인 물질이 모여 만들어내는 향,

그것에 의해 입 안에서 퍼져 나가는 풍미(風味)는

먹는 사람이 확실히 다르다고 느낄 만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입을 털어 봐야

대다수의 원붕이들은 이런 걸 먹어 볼 방법이 없을 거다.

이유야 간단하지.


닭을 이렇게 키워선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이 나라 어느 구석의 슈퍼마켓을 가도

노른자가 노랗다 못해 붉은 빛이 도는 달걀과

풀을 먹인 커다란 생닭은 보기 힘드니까.


거기에 관련해

우리나라에서 심심하면 올라오던 논쟁이 이번에 또 뉴스를 탔더라.

'한국 닭은 맛이 없는가?'


국뽕 이슈 자극하기 딱 좋은 주제지만, 

일단 나는 여기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이제 동네 마트에서 싸게는 3-4천원에 살 수 있는 생닭은

육질은 부드럽지만 닭고기 특유의 풍미를 느끼기는 상당히 힘들다.



물론 그 풍미라는 게

사람에 따라서 잡내나 누린내라고 느낄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고기의 그런 면을 즐기는 나에게는 엄연한 맛이고,

적어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없다는 건 제법 아쉬운 일이다.


한국에서 특히나 작은 닭이 유통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시장성'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동물이 사료를 고기로 전환하는 비율은

몸집이 클수록 비효율적이 되고,

생육 기간이 길어도 마찬가지로 떨어진다.


특히 초지가 적어 가축을 방목하기 곤란했던 한국에선

농사용이 아닌 육용 가축을 오래 키우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알을 낳지 않는 닭은 적당히 크면 얼른 잡아 먹어버리는 게 경제적이었겠지.


(씨암탉이라는 개체가 왜 귀한 취급을 받는지 생각해 보자.)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규합총서(閨閤叢書) 등에 이렇게 어린 닭.

연계(軟鷄)를 이용한 탕과 찜 요리가 등장하는데

연계탕은 닭개장에 가까운 매콤한 탕이고

연계찜은 된장, 차조기, 생강 등 갖은 양념을 한다는 걸 보면

어린 닭은 양념을 진하게 해서 먹는 게 그 때도 보통이었나 봐.



(연계라는 단어는 현대에 와서 영계로 발음이 바뀐다.)


요즘도 주로 소비되는 닭 요리가

튀기거나 짙은 양념을 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닭고기 자체의 맛보단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운 편이

요리하는 입장에서도 더 낫다고 생각될 거야.


그래서 닭을 공급하는 입장에서도 비교적 어린 닭을 마리 단위로 팔게 되고,

작은 닭을 주로 소비하는 식문화가 정착되면서

지금의 '맛없는 한국 닭'이라는 화두가 나오게 된 걸 수 있지.


아무튼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이제는 슬슬 고기 자체의 맛에 신경 쓰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거겠지.

전체적인 경제력이 늘고

맛을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하겠다는 사람도 늘면서

비단 닭 말고도, 경제성 때문에 맛을 희생했던 케이스가 하나둘씩 조명되고 있는 편이야.



광어를 비롯한 양식 횟감들도 사람들이 큰 게 맛있다는 걸 알면서

양식업자들도 점차 물고기를 크게 키워서 출하하는 경향이고.


그리고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다시 과수원으로 돌아온다.


밖에 있으면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겨울은

귤을 먹기에 좋은 계절이지.


그런데 이 귤 농가에도 돈이 얽힌,

골치 아픈 문제가 있어.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가축은 오래 기르고, 크게 기를수록 사료 효율이 나빠져.

허나 그건 가축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야.


농산물 역시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계속해서 비료와 농약을 투입해야 하고

병충해나 새(특히 까치)등이 정말 어마어마한 양을 먹어 치워.



(겪어 보면 진짜 제사해 마렵다.)


하지만 다 익지도 않은 걸 팔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일부 악덕 유통업자들이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어.



거의 가을 무렵에 다 익지 않은 과수원을 통째로 계약해서

덜 익은 귤을 따 저장한 다음,

적당히 노랗게 만드는 수작을 부려 내다 파는 거지.


농가 입장에서는 몇 달 동안의 유지비와 인건비 등을 아낄 수 있고,

업자는 아직 귤이 출하되지 않을 기간에 그걸 비싼 값을 받고 팔아.

그럼 손해는 누가 보냐고?


물론 그 귤을 사다 먹는 사람들이지.

덜 익은 귤을 따서 저장하면 그 동안 신 맛은 없어지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가 어떻게 당분을 축적하겠어?

시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 그야말로 물 맛밖에 안 나는 귤이

제철 귤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려나가.



비싼 돈 주고 맛없는 귤을 사다 먹은 사람들은 

결국 감귤을 외면하게 되고,

이후 피해는 농가 전체가 보게 되는 거지.


지자체에서 이런 미숙과 출하를 수시로 단속하지만

하우스 감귤에, 청귤 따위로 둔갑하는 등

온갖 편법을 동원해 소비자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어.


(이게 청귤이다. 겨우내 푸르다가 봄에야 익으며, 덜 익은 풋귤과는 종부터 다르다!)


우리 집에서도 이 일로 인해 가족들 간에 한동안 갈등을 빚었어.

뭐 하러 손해까지 보면서 규정대로 하느냐는 파와

한 두 해 하는 게 아닌 농사를 속이면 안 된다는 파.


결국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제철에 따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 결정은 결코 개인적인 고집이나, 귤에 대한 숭고한 의무감 같은 데서 나온 건 아니었어.



시장에 대한 믿음.


옛날처럼 소비자가 눈 가리고 코 베이는 시대가 아니라

상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좋은 품질의 상품이

결국 그에 걸맞은 좋은 값을 받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지.


완벽한 건 아니지만 리뷰나 커뮤니티 시스템의 영향으로

좋고 나쁜 상품에 대한 정보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미식(美食)이라는 개념 역시

좋은 상품이 인정받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 봐.



미식이라는 단어가 예전엔 일부 상류층들의 사치스런 취미를 뜻했지만

현대의 미식이란 식사를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닌

삶의 즐거운 부분 중 하나로 대하는 것이고,

그 즐거움을 위해 스스로 탐구하고 사물을 가릴 안목과 지혜를 갖추는 것.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소비를 통해 시장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낼수록

식당이나 마트를 가더라도 좋은 상품을 접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겠지?



먹고 살기 위해 생산을 포기하고

알게 모르게 시장에서 사라져 간 많은 식자재들도

조금씩 느리게나마 돌아올지도 모르고.


여담이지만 기쁘게도

집 근처 마트에서 지금까지의 자그마한 닭들과 더불어

1KG가 넘는 커다란 닭을 들여놓기 시작했어.


이런 흐름이라면

언젠가 과일 코너에서 샛노란 노을빛의

비파 열매가 쌓여 있는 걸 볼지도 모르지.



페이몬이 좋아하는 일몰 열매 주스도



어쩌면...먹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요약하자.


1. 일몰열매의 기원은 비파열매와 가장 가까움.

2. 식재료는 기르는 방식에 따라 영양은 아니지만 맛이 달라진다.

3. 더 좋은 상품을 위해선 소비자들의 관심과 안목도 중요하다.


부록으로 

요즘 제철인 좋은 귤을 고르는 방법을 짧게 짚고 마칠게.

색깔이나 껍질 상태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적어도 하자 없는 싱싱한 귤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꼭지를 보는 거야.

꼭지가 선명한 초록빛이고

껍질에 단단히 붙어 있다면,

저장을 거치지 않은 싱싱한 귤이라고 봐도 된다.



이건 저장 중이지만 싱싱하니까 보고 가.



바람신의 잡채 편


달빛 파이 편


탕수어 편


몬드 감자전 편


다음 편은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