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절 스시는 존나게 컸다

지금이야 가성비 씹창렬인데 맛있는 음식이란 이미지지만 에도시대 당시엔 길거리 노점상에서 팔아대는 일종의 패스트 푸드였슴

크기도 상당히 컸는데, 그 크기가 어느정도였냐면 두 토막이나 세 토막을 쳐서 먹을 정도의 사이즈였다

당연히 이런 사이즈의 초밥을 젓가락으로 먹기엔 좀 그래서 손으로 집어먹는 문화도 발달했다

스시 종류도 간사이나 에도같이 지역마다 다른 특색이 있으나 그건 알아서 찾아봅시다

틀에 넣고 눌러먹는 간사이 지방의 오시 초밥

손으로 주먹을 쥐어 만드는 에도의 에도마에(에도앞바다) 초밥


그러나 조선의 해방자 성 트리오가 일본에 입갤하고 열도 전체가 개씹창이 나면서 식량수급도 노짱을 따라가게 되면서 스시의 크기도 상당한 난항을 겪는다

전선이 쭉 밀리면서 패전한 일본은 식민지에서 공수해오던 쌀의 수급도 끊겨버렸고, 이 상황에서 식민지에서 살던 약 140~150만명 정도의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막대한 인구에 비해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예전에야 심심하면 조선이랑 태국라인을 조패면 나오는게 쌀이었지만, 식민지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기고 발을 떼게 된 상황이었기에 쌀값은 무려 130배 폭등하고 천만명이 아사한다


종전 전&에도시대 초밥은 현재의 초밥에서 약 5배 정도로 컸지만 났지만, 쌀값이 아주 개씨발이 되고 사방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이전의 크기를 유지할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국가 단위로 배급제를 결심하며 식당들의 장사를 조져놨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적잖은 일본게이들은 식량 부족 원인이 조선인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미군정에 편지를 보냈는데

 "조선인은 일본인의 4배를 먹고, 이들이 식량 암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인 200만명이 일본인 8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먹어치우므로 조선인들을 조속히 제거해야 한다. 100만명의 조선인을 제거하면 식량 부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고, 범죄도 줄어들 것이다"

라고 조센징 청소각을 봤으나 미군정의 반응은

"이새끼들 또라이 새끼들 아녀;;" 라는 반응과 함께 빠르게 무산되었다

개씹 뒤져가는 상황에서 유일하다시피한 희망은 어업이었는데, 문제는 어업하려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쪽바리 새끼들아 어선 기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오^"

씹상남자 대한 남아답게 이승만이 호쾌하게 남쪽으로 쭉 그은 이승만 라인이 고기좀 낚으려 들던 일본의 발목을 턱 붙들었다

 "여긴 우리 영해인데 어딜 기어들어오느냐"

하면서 조선 해안경비대 무톤듀오가 달려와서 쪽바리들의 가슴팍을 걷어차고 냉장기능까지 있는 최첨단 어선을 자진입대시키니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조선 얘기하다 삼천포로 빠지긴 했는데, 아무튼  일본은 식당까지 규제할 정도로 개씹창이었다

그런데 식당이 장사 안하면 뭐 먹고 사냐, 땅 파먹고 사냐?

졸지에 뒤지게 생긴 동경쪽 요식업계 주인들은 이전에 위법을 감수하며 손님들에게 스시를 내준 경험을 바탕으로 동경 당국에 우르르 몰려가


"우리도 먹고는 살자. 쌀을 가게에서 파는게 문제라면 손님이 우리한테 쌀을 가져와서 우리가 가공해서 스시로 내놓으면 되는거 아니겠느냐"

라는 논리를 펼쳤고 이것에 부랄을 탁 친 동경시는

"그러면 한 사람당 한 홉씩 제한한다. 한 사람당 스시 10피스로 제한한다는 말임. 무슨 말인지 알겠음?"

으로 서로 딜을 치게 된다

한 홉이면 약 한 그릇의 밥량인데, 당연하게도 스시의 크기는 5배 아래로 대폭 줄어버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줄더니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그리고 10개의 피스 제한이 있었기도 했고, 생선 수급도 씹창이 나면서 요리사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생선을 올린 초밥을 2피스씩 쥐게 되며, 우리에게 익숙한 초밥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세줄요약

1. 초밥은

2. 원래

3. 가성비 씹창인 음식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