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형이상적인 문양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새겨진 벽을 보며 든 생각은 이걸 어떻게 해야 끌 수 있나 였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냅뒀다가는 밤에 제대로 잘 수도 없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시도 때도 없이 파란색으로 빛나더니 딱 봐도 위험하게 생긴 붉은색으로 빛나기를 반복했다.


파란색으로 빛날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지만, 붉은색으로 바뀌자마자 옆 집에서 잠이라도 자는 것인지 내 것이 아닌 숨소리가 들렸다.


지금 시간이라면 아마 자고 있는 시간이라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마법진의 색이 붉은색으로 변하면서 옆 집에서의 소리가 내 쪽으로 다 넘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반대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벽을 두들기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벽에 새겨진 마법진이 일정한 시간으로 색이 변하는 게 아니었고, 그리고 이 시간에 자는 종족인 것을 감안하면 할 이유가 없는 행동이었다.


자는 사람을 깨우는 건 예의 맞지 않는 행동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굳이, 정말로 굳이 벽을 치지는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벽을 두들기면서 자는 걸 깨우고는 싶었지만, 애초에 실수로 마법진 이렇게 된 모양이었으니 별 수 있나.


마법이 없어도 나름대로 방음이 잘 되는 편이기는 한 지 큰 소리로 지를 때만 소리가 넘어오는 것 같았고.


…일단은, 벽에서 빛나고 있는 마법진을 어떻게 해야 빛을 끌 수 있는 지 부터 알아보는 게 좋겠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떻게 해야 마법진을 끌 수 있나에 관한 내용이 있는 지 검색을 해보니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이었다.


끄는 방법에 대해 대충 읽어보고, 마법진 앞으로 가서 마법진의 위부터 아래로 검지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대충 시도해본 것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는 지 마법진이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천천히 벽에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마법의 위대함이란. 아니, 이 경우에는 편리함과 간단함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조작하는 방법이 간단해서 좀 놀랍다.


책에서 읽던 마법같은 경우에는 꽤 복잡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주문자말고는 아무도 조작하지 못한다던가, 아니면 그것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사여야만 끼어들 수 있다던가 같은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마력이 없는 나도 간단하게 조작이 가능했다.


아무튼, 벽에서 빛나는 마법진은 해결했고. 나머지는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문제였다.


점심시간이 될 무렵에 집에 왔지만 배는 그렇게 고프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면서 보내기에는 그렇게 끌리는 게 없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낮잠이라도 잘 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시간에 잤다가는 여차하면 새벽에 잠들 수도 있어서 곤란하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잘 보냈다고 할 수 있을까.


방에서 나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보며 생각을 계속해본다.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서 아무데나 돌아다니는 건? 그건 생각보다 괜찮지만, 가장 마지막 방법으로.


도서관에라도 갈 까.


문득, 청하의 도서관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청하가 관리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아주 많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있을 수많은 책들이 궁금했다.


여기에 와서 가장 최근에 책을 읽었을 때가 거의 이주일이나 넘었으니.


그것도 이곳의 기본적인 상식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라 그렇게까지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재미있기는 했지만, 마음에 드는 내용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어찌됐든, 갈 곳이 정해졌으니 옷도 그대로 였고 신발만 신고 밖으로 나가서 도서관으로 향하기만 하면 됐다.


점심은 딱히 생각은 없었으니 거르고 저녁만 먹어도 될 정도였다.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넣고,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에 있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는 지 제대로 확인하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보니 10층에 멈춰있었기에 금방 타고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부르고, 금방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푸른색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던 그 푸른색 일색인 용이라면 복주머니에 담긴 비늘을 쫓아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쫓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적어도 도서관에 가는 동안 방해를 받을 일도 아마도 없겠고, 도서관에서 이제 별다른 일만 없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서관을 향해 걷다가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금향의 카페가 눈에 띄었다.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창 뒤로 보이는 카페 내부의 모습은 여러모로 개판 오분 전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여기저기에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린 탁자들과 집에 있는 소파가 싸구려로 느껴질 정도로 고급스러웠던 소파는 삼등분이 나 있었고, 카운터는 가운데를 기준으로 반으로 쪼개져있었다.


이 멀리서도 저렇게 보일 정도인데 과연, 직접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얼마나 더 개판으로 보일까.


저기를 개판으로 만든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어딘가에 가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참 좋은 일이었지만. 가는 동안 적어도 얼굴을 볼 일은 없다는 소리였으니.


마음이 약간 편해진 것을 느끼며 도서관으로 도착하니 여전히 평범하게 생긴 서점이 보인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아무리 봐도 평범하게 생긴 서점이었는데, 그 내부는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모르는 넓은 공간이 있는 평범하지 않은 곳이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번 내쉬고, 서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나 밖에서 보던 것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공간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저 멀리,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감도 안 잡힐 정도로 길게 늘어선 책장들과 어딘가를 향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날아가는 책들, 그리고 문 옆에 있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직원이 보였다.


갈색의 머리카락에 갈색의 사슴의 뿔처럼 생긴 뿔, 그리고 어제 봤던 검은색 스웨터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빨간색 체크무늬 치마까지.


어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카운터에 앉아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아서 카운터를 똑, 똑. 하고 두번 두들긴다.


"으헥?! 사장님 오셨… 아, 손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오늘은 어떤 일로 찾아오셨나요? 책? 아니면 마도서?"


"어… 추천하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추천하는 책이요? 저야 수많은 책들을 읽어 봤으니 추천할만한 것들이 수두룩하죠! 근데, 손님께서 읽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생각해보니 내가 한글은 읽을 줄 알지만 다른 언어, 그것도 일본어나 영어도 아닌 아예 다른 언어를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도서관에 찾아왔나 싶었지만,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직원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입을 뗐다.


"손님이 원하시는 책이라도 따로 있으신가요?"


"원하는 책이 있기는 합니다."


어제 왔을 때 보지 못했던 용의 역사라던가 드래곤의 생김새같은 것들이 궁금하여 물어봤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던 것들.


"그렇다면, 이걸 손에 쥐시고 저쪽으로 가보시겠어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 위로 푸른색의 코팅된 책갈피를 올렸다.


딱 봐도 청하의 취향으로 생각되는 푸른색의 책갈피를 보다가, 손에 쥐고 직원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거기로 가셔서 원하시는 책을 상상하시면서 걷다보면 아마 원하시는 책이 있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보너스를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죠! 손님께서 원하시는 책을 찾기를 바랄게요!"


원하는 책. 원하는 책.


머릿속으로 내가 뭘 원하는 건지 생각을 해본다.


용의 역사인가, 아니면 드래곤의 생김새인가. 역시 가장 궁금했던 점은 용의 역사였다.


드래곤의 생김새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와서는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보게 된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덩치일 테니 올려다보는 것 만으로도 목이 아파오지 않을까.


게다가 용이나 드래곤이나 내가 보왔던 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는 게 더 익숙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책은 용의 역사였다.


머릿속으로 용의 역사에 대해 적힌 책을 상상하며 앞으로 걷다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거기에는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장들중에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작은 책장들이 있었는데, 그 책장들에 있는 책들은 몇 권이 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6권이었다.


용이나 드래곤의 수명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아마 역사라고 할만한 것도 수두룩할텐데 어째서 6권 밖에 없나.


의구심을 품고 6권 중에서 한 권을 꺼내어 중간을 펼쳐보았다.


…역시 아예 모르는 언어로 적혀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직원에게 가지고가면 직원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직원도 자기가 읽고있는 책이 있으니 도와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래도 책갈피를 주면서 가라고 했으니 아마 가져간다면 읽어주거나 내용을 요약해주지는 않을까.


다른 책도 가져갈까 생각은 해 봤지만, 지금은 이 한 권으로 충분하겠다 여겨 그것만 챙겨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마 원하는 책을 생각했던 것처럼 원하는 곳을 떠올리면서 걷다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카운터를 떠올리며 아까처럼 무작정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걷다가 허리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책장에 부딪쳤을 때에는 부드러운 무언가에 머리를 박은 느낌이 들었다면, 이건 진짜 나무랑 박은 느낌이 들어 놀란 나머지 눈이 떠졌다.


거기에는 내가 괜찮은 건지 놀란 눈치로 보는 직원이 보였다.


"아, 죄송해요. 그냥 돌아올 때에는 걸어오면 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무작정 걸어간 제 잘못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아, 혹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 손에 챙겨왔던 책을 카운터 위로 올려놓고, 그리고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책갈피도 카운터 위로 올려놓는다.


직원은 먼저 책갈피부터 챙겨서 카운터 밑의 어딘가에 집어넣고는 내가 올려둔 책을 살펴봤다.


"흠… 용의 역사에 대해 적힌 책이네요. 사장님에 대해서 궁금하신거라면, 제가 직접 알려드릴 수 있는데."


"청하님에 대해 궁금한 게 아니라 용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요청은 받았으니 내용을 읽어보고 요약을 해드릴게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 장을 읽는 시간이 매우 심상치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한쪽면을 훑어내린다 싶으면 다음 면을 훑어내리고, 그러고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는 그 다음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일할 정도니까 평범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 저런 속독을 보게 되니 참 놀라웠다.


한 장, 한 장을 읽는 데 몇 초도 걸리지않는 걸 보며 저렇게 읽으니 수많은 책들을 읽을 시간이 생기는 거구나 싶었다.


참 부러운 능력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저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아마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 짧아져서 힘들지 않았나.


내게 있어서 책을 읽는 시간이라는 건 나만의 개인 시간같은 느낌이라 여유를 가지고 즐기고 싶은 시간이었다.


저렇게 읽다가는 커피는 마시기는 커녕 커피가 마실 정도로 식기도 전에 책을 다 읽어버려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 지 고민해야할 정도로.


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나가는 직원이 2분에서 3분정도 사이에 책 절반을 읽어나가는 모습에 이제는 경악을 넘어 좀, 무서웠다.


책에 코를 박듯이 내용을 읽어나가는 직원은 옆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도 무시하고 책을 읽을 것처럼 책을 읽었다.


그렇게 직원이 책을 다 읽는 것에는 6분이라는 시간만이 걸렸고, 탁. 하고 책 표지를 덮었다.


"와. 생각보다 흥미로운 소설이었네요."


"…흥미로운 소설입니까?"


"네. 손님께서 찾으시던 용의 역사가 맞기는 한데, 아마 손님처럼 사람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책이라 그렇게 신용성이 높지는 않아요. 그래서 아마, 이건 사람이 용의 역사란 이럴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쓴 글이지 않을까."


"그렇습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맞는 부분들이 꽤 있기는 해요. 천 년 전부터 현대에 있었던 일들은 비교적 최근이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 요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래도, 제가 말한 것들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도 책을 읽으면서 안 것들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직원의 입에서 천 년동안 있었던 용의 역사에 대한 요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