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커피 두 캔을 위장에 털어넣고, 저녁으로는 그릇에 밥을 담고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었다.


나름대로 맛은 있었기에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지만, 살짝 모자르게 밥을 펐던 모양이었는 지 약간 배가 모잘랐다.


여기서 더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남자였을 때에 비하면 위장이 작아진 것인지 조금만 더 먹으면 체하거나 과식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먹지는 않았다.


남자였을 때에는 잔뜩 먹어도 그럭저럭 배가 차는 느낌이 들었는데, 여자의 몸이 되고 나서는 단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먹는 양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보니 배달도 잘 안 시켜먹거나, 두 끼에 나눠 먹을 양으로 나눠서 먹고 있었다.


금향이나 청하가 해준 밥은 이상하게도 잘 들어가는 편이라 잔뜩 먹고는 있었지만.


아마 둘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잘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어보면 요리에 대해 가르쳐주겠다며 한동안 난리란 난리를 치지 않을까.


…둘이 적당히 싸웠으면 좋겠지만 아마, 불가능한 부탁이겠지. 아까도 대판 주먹다짐을 하지 않았나.


아미야가 오자마자 멈추는 것을 보면 남들이 보기에 부끄럽다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냥, 싸우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었나 싶지만.


그러고보니, 저녁도 대충이지만 먹었으니 슬슬 필리아의 집으로 가보는 것도 생각해볼 시간이 되었다.


아미야에게서 들은 것들을 필리아에게 알려준다면, 알아서 방음 마법을 고치지 않을까. 적어도, 나보다 마법을 잘 쓰는 것으로 보였으니.


남자였을 때처럼 머리를 긁적거리려고 머리로 손을 올렸다가, 긴 머리카락이 만져져서 도로 내렸다.


짧은 머리였을 때에는 몰랐지만, 머리가 길어지니 긁적거렸다가 꼬인 경우도 몇 번 있었기에 되도록이면 머리는 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진짜로 잘라버리던가 해야지."


그런 혼잣말을 내뱉을 정도로, 내게 있어서 긴 머리카락이란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시원하게 보일 정도로 짧은 정도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단발 정도로 잘라버리는 게 훨씬 나아보이는 모습이지 않을까.


욕실의 거울로 봤던 내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치렁치렁한 건 나랑 잘 안 맞는 편인데.


머리카락이든, 아니면 옷이든 너풀거리거나 치렁한 것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쪽이었다.


누구는 여자가 되었다면 원피스나 치마를 입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집사복정도는 충분히 입을 만 했지만. 적어도 바지니까.


내게 있어서 바지와 셔츠가 가장 나은 옷이었다. 대충 입어도 그럭저럭 괜찮게 보였으니까.


남자였을 때에도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대충 입고 다녔는데, 여자가 되었다고 그 성격이 어디로 갈 리가 없었다.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겠거니 하는 생각밖에 없다.


금향이나 청하는 그런 내 생각을 태도나 분위기로 눈치챈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만약, 금향이 내게 집사복이 아니라 메이드복 같은 치마 종류의 옷을 입히려고 했다면 단호히 거부하고, 아마 두번 다시 카페에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지금도 몸에 경기가 일어나듯이, 치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거부감이 샘솟는다.


필리아가 입었던,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도 생각 없지만. 그게 대체 어딜봐서 바지라는 건지.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속옷에 가까운 옷이었다. 옷이라고 봐주기도 애매한, 정말 애매한 어딘가에 속한 무언가.


…필리아가 아직까지도 그런 옷을 입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편한 옷을 입고 나와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슬슬 필리아의 집에 가도 괜찮은 시간이 되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저녁을 먹고나서 잠깐 생각을 하고 있던 시간이 꽤 길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샌가 밤 9시를 넘어간 시각을 보면, 지금쯤이면 출발해도 괜찮겠지.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를 책상에 붙이고,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은 뒤에 현관으로 향하기 전에, 먹은 것들을 싱크대 안에 넣어두고 물을 받은 뒤에야 향했다.


저렇게 안 해놓으면 나중에 설거지할 때 잘 안 닦인다.


설거지에 대한 시간을 줄이고 싶기도 했고, 나중에 수세미로 벅벅 긁으면서 힘들게 닦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현관으로 향해서 신발을 신고 갈 지, 아니면 슬리퍼를 신고 갈 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 저번처럼 슬리퍼를 신고 가기에는 염치가 보였다.


신발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고 필리아의 집 문 앞으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밤이라고 아침과는 다른 느낌의 추위가 느껴졌기에,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고작해야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럼에도 더 빨리 걸어서 문 앞에 도착한 뒤에 문을 두들겼다.


똑, 똑, 똑.


세 번을 두들기고 나서, 문과 살짝 거리를 벌리고 기다렸다.


되도록이면 빨리 열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니 벌컥 하고 문이 빠른 속도로 열렸다.


문 뒤로 보이는 필리아의 모습은 새벽에 가까웠던 시간에 봤던 모습과 비슷했지만, 얼굴에 화장같은 것을 안 하고 있었다.


화장을 안 한 필리아의 얼굴은 생각보다 핏기가 돌지 않아서 눈 처럼 새하얗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거의 반쯤 죽어있는 시체처럼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별 말을 하지 않은 필리아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들어오세요!"


"…알겠습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필리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삐삑 하고 전자음이 울리며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새벽이랑은 다르게 보일러를 돌려놓고 있었는 지 생각보다 안은 따뜻했다.


신발을 벗고 현관에 가지런히 놓은 뒤, 필리아가 이쪽으로 오라며 방을 가리켰다.


"거실보다는 제 방에서 이야기하는 게 낫겠죠?"


"들어가도 괜찮은겁니까?"


"괜찮아요! 같은 여자끼리 못 보여줄 것도 없잖아요?"


"…그, 렇습니까."


같은 여자라는 말이 참으로 어색하게 들려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전에는 남자였을 지 몰라도 지금은 여자의 몸이 되었던 데다가, 이걸 필리아에게 설명하려고 입씨름을 할 시간에 방음 마법을 최대한 빠르게 고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남자라고 설명했다가 필리아가 이상한 눈빛으로 볼 지도 모른다는 것도 불편했고.


어쨌든간에, 지금은 여자의 몸이었으니.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던 필리아는, 내 손을 잡고는 자기 방으로 이끌어갔다.


마음을 다 잡을 시간도 없이, 그렇게 필리아의 방 안으로 들어오니 여기저기 핑크색으로 가득한 방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인 부분은 화려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눈에 띄는 컴퓨터와, 저렇게 큰 모니터로 게임이 가능한 건가 싶을 정도로 넓적한 모니터, 그리고 녹음할 때 쓰는 마이크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방송을 한다고 하더니 제대로 준비해놓은 것을 보니 전문적으로 하는 듯 싶었다.


마이크 쪽으로 향한 내 시선을 눈치챈 필리아는, 에헤헤 웃으며 자기 뒤통수를 매만졌다.


"그게, 아무리 그래도 안 좋은 마이크로 방송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과하지는 않습니까?"


"아니요! 전혀 안 과해요! 방송에 투자하는 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니까요! 방송의 질은 이런 사소한 물건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랍니다! 사소한 물건은 아니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가격이 얼마나 되는 지 물어봐도… 아닙니다."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필리아의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도 비싼 물건인 듯 싶었다.


생각해보면, 컴퓨터도 그렇고 모니터도 비싸 보였으니 당연히 부속품들도 비싼 게 맞았다.


저렇게 번쩍거리고, 화려하게 생긴 것들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필리아는 취향에 맞았던 모양이다.


"그, 그래도 돈 값은 하니까요!"


"알겠으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방음 마법때문에 오셨으니까요."


필리아는 핑크색 이불이 깔린 침대 위에 걸터앉고는 툭, 툭 하고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제 옆에 앉아서 이야기해요!"


"그렇게 가까이 앉을 필요가 있습니까?"


"있죠! 그래야, 조금 더 편하게 말하니까요!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은 것도 있어요."


"…그렇습니까."


필리아의 대인관계를 떠올려보면, 적어도 내가 봤던 모습으로는 없었던 것 같다.


밤에 생활하는 것도 그렇지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모습과 운동하러 나가는 걸 제외하면 밖에 나오지를 않는 듯 싶었으니.


…그래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다고 할 정도라면, 나 말고 다른 종족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어떻게 했는 지 궁금해진다.


컴퓨터를 살 때에도 자기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직원의 시선을 피하며 대화했을까. 그런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났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예의도 아니었을 뿐더러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필리아가 요청한 대로, 침대 옆에 걸터앉으니 함박 웃음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저,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는 건 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까?"


"오랜만이죠! 밤에 생활하는 종족도 있기는 하지만, 제 성격이 성격이라…."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처량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보는 필리아.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필리아에게 내가 뭐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나 또한 처음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끼리 뭐하러 침대에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럴 시간에 피시방이나 노래방에 가서 노는 데 집중하고 말지.


여자들끼리 노는 법은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과 같이 침대에 걸터앉고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지, 나도 모르게 필리아의 사소한 몸짓에도 움찔거리고 말았다.


"제, 제가 불편하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대화하는 게 처음이라서 그렇습니다."


"처음이라구요? 친구랑 이렇게 이야기해 본 적 없어요?"


"친구랑 이렇게 놀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았습니다."


"아… 죄송해요. 어제 들었는 데도, 제가 말을 잘 못 꺼냈네요."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아무튼, 처음이시라니까 제가 잘 알려드릴게요!"


두 손을 불끈 쥐고, 여자들은 어떻게 노는 건지 알려주려는 의욕을 열심히 뿜어내는 필리아에게는 미안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오늘은 그게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앗, 네. 그렇죠. 죄송해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필리아를 마주보며, 생각보다 흡혈귀는 입술이 새빨갛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핏기가 없는 새하얀 얼굴이다보니 눈에 띄일 정도로 새빨간, 사과보다 더 붉어보이는….


아니, 왜 이렇게 생각이 엇나가는 건지. 오늘따라 뭔가 이상하다.


엇나가는 생각을 바로 잡기 위해 오른쪽 뺨을 꼬집었다.


"주빈씨?"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생각이 엇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예?"


"그,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흡혈귀들이 가진 특성중에 하나가, 그… 유혹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쪽이거든요."


"…예?"


"되, 되물어보지 말아주세요! 저도 부끄럽단 말이에요! 어떤 식으로 발동되는 건지도 몰랐던데다가, 흡혈귀로서의 저는 반푼이란 말이에요!


"알, 알겠으니 진정하겠습니까?"


내 양 어깨를 붙잡고는 앞 뒤로 흔들기 시작하는 필리아를 제지해보지만, 잔뜩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필리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푼이다보니 저도 거울을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어떤 기분인 지 아세요?! 이런, 주빈씨의 동공에 비치는 제 모습을 봐도… 봐, 도…?"


아, 이거 심상치 않은데.


딱 봐도 스스로에게 흡혈귀의 특성이 발동한 듯한, 멍한 표정이 되기 시작한 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