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금향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을 찢으며 그 틈으로 몸을 던지며 사라졌다.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슥슥 만지면서 나를 쳐다보는 금향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올려서 보여주었다.


"즐거우셨다면, 다행이네요. 이런 걸 보여줄 친구들은 전부 수만번은 넘게 봐서 질린다고들 하던데."


"저는 매일매일 같은 걸 본다고 해도 신기할 것 같습니다."


아마 저 수만번이라는 표현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말하는 거겠지.


사람에게 있어서 수만번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가볍게 입에 담을만한 말도 아니었을 뿐더러, 금향처럼 오래 살아가는 종족들이나 되어야 가벼운 느낌으로 말할 수 있는 표현이지 않을까.


치켜세웠던 엄지손가락을 도로 내리며, 멀쩡해진 카페 내부를 한번 슥 훑듯이 둘러본다.


둥글게 비워진 가운데를 중심으로 나무로 된 탁자들과 의자들, 그리고 벽면에 붙은 소파들과 그 앞에 놓인 거대한 탁자들.


아마 소파가 있는 쪽이 다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겠고, 의자가 놓여진 곳은 혼자서 오거나 적은 인원이 왔을 때 이용하는 곳인 것 같다.


…여기에 올 때마다 한번도 사용되는 걸 본 적은 없었지만.


금향에게 있어서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니 속으로만 삼키며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금향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왔던 손님중에서 거의, 꼬박꼬박 왔던 게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금향의 카페에 처음 왔을 때에 그렇게 기뻐하던 모습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와! 지인들 말고 처음 오는 손님!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카페 모카 한 잔 부탁드립니다.'


'마시고 가시나요? 아니면, 가지고 가시나요?'


'가지고 갑니다.'


'네~ 금방 내올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


아직 어색했을 때의 금향을 떠올리며 지금의 금향을 본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닙니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그 때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주빈말고도 손님이 온다구요!"


…내게 열렬히 말해오는 금향이었지만, 그렇게 신뢰성이 있지는 않았다. 여태까지 봐온 손님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처음이랑은 완전히 달라져버린 듯한 느낌의 금향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스스로도 부끄러운 건 아는지 얼굴을 돌려서 내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것보다 아직도 알바는 생각이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힝…. 이번에는 시급이 아니라 월급으로 줄 테니까! 보너스도 많이 드릴게요!"


"싫습니다."


"매정해!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면서, 알바를 한 번이라도 해주면 안 되는건가요!?"


"안 합니다."


안 그래도 금향과 금향의 지인인 청하때문에 고생하는 마당에, 여기서 알바라도 했다가는 더 골치아파질 인연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골치아픈 인연이 벌써 둘이나 생겨버렸지만.


그래도 어제랑, 오늘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골치가 아…프지는 않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 위기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부분이 약간이나마 문제가 생긴 듯 싶었다. 원래라면 좀 더 위기감을 느꼈을 텐데.


그런 내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금향은 뿌우 하고 볼을 부풀리며 내게 불만을 표현했다.


"그, 그럼 저번에 보여줬던 유니폼이나 메이드복, 집사복은 안 입어도 괜찮으니까!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고 일해도 괜찮으니까!"


"안 합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기십니까."


"저는, 주빈이 그런 복장을 입는 걸 보고 싶으니까요! 매번, 볼 때마다 칙칙한 색깔의 옷이거나, 아니면 매번 보던 옷이거나, 아니면 바지거나! 좀, 색다르게 입어보는 건 어때요!"


"싫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렇게 입고다니는 게 취향인지라."


"취향을 이번 기회에 한번 바꾸는 게 어떨까요?!"


"거절하겠습니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너~무해…."


어깨가 추욱 내려가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던 꼬리도 흐물거리며 땅으로 흘러내리듯이 떨어진다.


분위기 뿐만 아니라 얼굴도 나 시무룩해졌어요,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바지를 입는다는 건 내 정신성의 문제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여자보다는 남자에 더 가까운 내 정신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고.


그런 점을 모르니 금향의 입장에서는 내가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아마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매번 왔을 때에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으셨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야, 알바를 다닌다고 했으면 매일매일 새로운 옷으로 알바를 시킬려고 했으니까요! 무, 물론 보너스도 같이 줄 예정이에요!"


초롱초롱한 금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눈이 부시다고 느꼈지만, 그런 자세로 요구하는 게 참으로, 내 입장에서는 힘든 요구였다.


안타깝지만, 금향의 부탁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절이었다.


그런 내 태도를 읽고는 힝. 하고 눈을 비빈 금향은 금세 자세를 바꾸어 내게 다가왔다.


땅을 쓸듯이 내려가던 꼬리를 적당한 높이로 세우고,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렇게나 예쁜데, 왜 안 꾸미시는 거에요? 외모가 아깝게."


"꾸밀 생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진짜, 내가 생각하는 옷 뭐 하나라도 입으면 지금이랑 인상이 확연하게 달라질 것 같은데."


"인상을 한번에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번만, 딱 한번만 입어주시면 안 되나요? 사진 한장만 찍고, 바로 갈아입게 해줄게요."


"싫습니다. 치마가 싫은 쪽이라서."


"집사복은 어때요? 아니면, 제가 입고 있는 옷에 검은색 겉옷만 입고 어서오세요, 손님같은 걸 제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치사해!"


"안 치사합니다. 아니, 어린애도 아니면서 왜 이러십니까."


"그야, 그야… 지금보다 훨씬 좋게 변할 수 있으면서 안 변하는게 아쉬우니까 그렇죠."


금향은 그렇게 말하며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 걸까. 정말로 내가, 그런 옷들을 입는다고 내 정신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 의문들이 생겨났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언젠가는 입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집사복이라도 입어주셨으면 하는데…."


"…그렇게 합시다. 집사복이라도 입을 테니, 한동안은 옷에 대해서 조용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말인가요?! 그, 그럼 사진 한장만…."


"알겠습니다. …정말, 청하님이 부탁했다면 들어줄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청하는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혹시, 저도 지금 청하랑 같은 취급인가요?"


"지금의 모습으로 알았습니다. 서로 친구로 지내는 이유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친구로 인정받고 싶지 않은 날이 없었네요."


"어쩌겠습니까. 하시는 행동들이 비슷하신 것을"


카운터 앞 의자에서 일어나니, 허공에 붕 뜬 의자가 원래의 위치를 찾아 천천히 부유하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금향이 내게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는 금향을 따라, 카운터 뒤쪽에 보이지 않는 문을 금향이 아무렇지 않게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한숨만 내쉬며,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


카운터 뒤쪽의 문 안으로 들어가니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어떤 느낌이었냐면, 청하의 도서관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어딘가가 다르다고 느껴졌다.


아마 마법과 주술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주술은 뭔가, 공간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느낌이었다면 마법은 공간을 확장시켜놓은, 그런 느낌.


원래 이렇게 넓지 않은 공간을 강제로 넓혔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들어서니 방 여러개가 눈에 띄었다.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문팻말들 속에서, 금향은 맨 왼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걸어가니 금향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문 사이로 방 안이 보였는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가지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옷들은 이런 옷을 입는 다고? 싶은 것부터 움직이기 불편해보이는 옷, 너무 치렁치렁해서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 옷, 그리고 척 봐도 무거워보이는 옷.


그런 옷들이 수십을 넘어 수천가지는 넘게 보였고, 그리고 작아보인다고 느꼈던 방은 생각보다 더 넓은 편이었다.


금향은 그리고, 허공에 손짓으로 마법을 쓰는 것 같았다.


손짓에 따라 비슷비슷해 보이는 옷이 금향의 눈 앞까지 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다음 옷이 왔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그런 손짓을 몇십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금향의 마음에 든 옷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자! 이 옷을 입으면 된답니다! 아, 탈의실이 필요하시다면…."


금향이 허공에 손가락을 휙 하고 긋자 근처에 있던 커튼들이 간이 탈의실을 만들어 금향과 나를 갈라놓는다.


"…이렇게 만들어드렸으니, 잘 입고 나와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뱉으며, 입고있는 옷가지들을 벗어서 바닥 한 쪽에 잘 접어놓았다.


접어놓은 옷가지들이 알아서 허공을 유영하면서 어딘가로 날아간다.


날아가는 쪽이 어디인가 봤더니 문 앞 쪽에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때서야 금향이 내게 내밀었던 옷을 확인해본다.


예전에, 남자였을 때에 메이드복이나 집사복에 대해 슬쩍 봤던 것이 기억에 떠오른다.


그때 봤던 옷이랑 별다른 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정하고, 누군가를 시중을 들기 위한 복장 정도가 그 옷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였다.


흰색의 와이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입는 검은색 겉옷을 입은 뒤, 검은색 바지를 입었다.


전부 어떤 재질인 건지도 모를 정도로 부드러웠고, 옷을 입은 듯 안 입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가벼웠다.


넥타이는 맬 줄 몰랐지만, 이건 가볍게 조이는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간단하게 목에 맬 수 있었다.


그렇게 집사복을 입고나서, 어디선가 거울이 날아와 내 모습을 보여준다.


피곤해 보이는 검은색 머리의 여성이, 집사복을 입은. 흰색과 검은색의 복장과 검은색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다 입었습니다."


탈의실 건너편에 있을 금향에게 그렇게 전하자 촤악, 하고 커튼들이 가운데를 기준으로 삼아 양옆으로 쫙 갈라진다.


그리고, 그 사이로 메이드복을 입은 금향의 모습이 보였다.


"그건 왜 입으셨습니까?"


"모처럼 집사복을 입어주는 데, 그럼 메이드복도 같이 있어야죠! 게다가 사진도 찍어야하는데!"


훗, 훗, 훗. 하고 웃으면서 오래된 폴더폰을 꺼내 보여주는 금향.


…묘한 부분에서 낡은 부분이 있는 금향이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폴더폰을 쓴다고.


나중에 스마트폰이라도 사라고 하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알아서 말해주겠지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금향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방실방실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서는 팔짱을 끼고, 폴더폰으로 우리 두 명을 카메라에 담았다.


"자, 자. 모처럼의 사진이니까 조금이라도 웃어봐요!"


"…예."


요청하는 대로, 아주 약간이나마 입꼬리를 올리며 카메라를 쳐다본다.


옆에 있는 금향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웃고 있겠지.


금향이 손에 든 폴더폰에서 촬영 버튼을 누르자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찰칵. 소리가 나며 나와 금향의 사진이 찍혔다.


금향은 팔짱을 꼈던 것을 풀고, 내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지고는 폴더폰에 찍힌 사진을 보며 히히덕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 이걸로 청하를 놀릴 거리가 생겼네!"


"…아주, 둘이 똑 닮으셨습니다."


"제가요?! 청하가 날 닮은거겠죠!"


"그런 걸로 합시다."


이제는 금향과 말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금향은 뭐 그리 바쁜 건지 폴더폰을 열심히 꾹, 꾹 하고 누르고 있었다. 아마 청하에게 문자를 보내는 게 아닐까.


"사진 같이 찍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옷을 바꿔드릴게요!"


"…예?"


금향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하기도 전에, 저 멀리 문 앞에 있는 내 옷이 허공에 들리더니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게 대체 뭔 일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내가 입고 있던 옷은 어느샌가 금향의 손에 들려있었고, 내가 입은 옷은 어느샌가 원래 입던 옷으로 바뀌어있었다.


"자, 자.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가서 청하를 놀려주러 가요!"


"…카페에서 또 싸우시는 겁니까?"


"싸우다뇨! 그냥, 서로 같이 놀았던 것 뿐이에요. 그건 싸운 수준도 아닌 걸요."


도대체 용과 드래곤의 놀이란 뭘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상식이겠지.


역시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게 뭐냐고 소리지르는 청하에게 비웃음을 날리는 금향의 모습이 보였고, 그리고는 바로 투닥거림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몸도 정신도 지쳐버린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 그날 하루를 잠을 자는 것으로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