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번쩍, 하고 눈이 떠진다.


아무 것도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한 어둠이 나를 지배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시야가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무 것도 못 본다는 말이 맞겠지만.


눈을 뜨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나니 어둠에 적응이 된 눈으로 천장이 보였다.


옆 집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새벽이지 않을까 싶은데.


주섬주섬 옆으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에 팔을 휘적거리니 손에 무언가가 턱하고 걸리자 그것을 잡아채 얼굴 앞까지 가져다댔다.


전원 버튼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눌렀지만, 전원이 들어오지를 않아 충전이 덜 됐나보다. 하고 충전기를 찾아서 다른 손에 쥔 뒤, 스마트폰의 충전구에 꽂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서야 내가 반대로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반대로 돌리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절반 정도 남은 충전률이 보였다.


시간을 확인해 보면 저번 새벽에 깨어났을 때랑 비슷한 시간이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때는 소리에 깨어났다면 지금은 내 자의로 깨어났다는 점이겠지만.


원래는 이런 이른 시간에 깨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제와 어제 일어난 일들 덕분에 안 그래도 피곤했던 몸이 수면을 원했고, 나도 그걸 거부하지 않은 채로 잠들었다.


덕분에 이틀 동안 씻지 않았지만, 생각외로 가려운 곳은 없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면 머리의 상태도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씻을 예정이었지만. 하루는 어떻게 안 씻어도 괜찮다지만, 이틀을 넘어가면 무조건 씻는 편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키니 창문 밖으로 달빛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와 아직 새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잠도 충분히 자버려서 더 졸리지도 않았고, 배는 그다지 고프지도 않았다.


어제 아침에 볶음밥을 먹고 점심에 또 청하가 해주는 밥을 먹었고, 그 다음 저녁은 각자 잘하는 요리를 내놓고는 내게 먹으라 시켰기에.


배가 빵빵해진 그 상태로 집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양말을 벗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뻗어버린 것이었다.


이쯤 되면 이불이나 베개에 냄새가 배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킁킁 하고 베개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봤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켜보았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꼐 스위치가 눌리자 방 안의 전등에 불이 들어오고, 그리고 처참하기 짝이 없는 방의 상태가 눈에 보인다.


여기저기 엉망으로 널부러진 옷들부터 시작해서 책상 위에 올라간 양말에, 저기 구석에 박혀있는 청하가 건네준 복주머니와 황금색 동전.


그리고, 금향이 건네준 옷까지.


…마지막의 옷은 필요없지 않았나 싶었지만, 금향이 내가 입은 옷이니 알아서 책임지라며 강제로 떠넘긴 물건이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제 입었을 때 느껴졌던 촉감이나 이상하리만큼 가벼운 옷감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명품에 가까운 옷이지 않을까.


집사복치고는 너무 제대로 된 물건이라 내게 있어서는 부담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걸 아무렇지 않게 주는 금향의 돈감각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옷들이 넘쳐날 정도로 돈이 많아서 그런 건가.


금향의 옷장에 들어간 옷들을 생각해보면 아마 저런 옷 한벌쯤은 줘도 상관없겠다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저게 아마, 내가 산 옷이나 물건들을 전부 합쳐도 옷 값은 안 나오지 않을까.


그건 그거였고, 일단은 저대로 냅둘수는 없었기에 옷장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 해야할 일은 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널부러진 옷들과 양말과 속옷들, 그리고 입은 옷과 속옷도 벗어서 나가려다가 누가 본다면 변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기에 적당히 잠옷을 챙겨 입고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로 향하니 세탁물이 절반쯤 찬 바구니가 보였고, 이걸 집어넣으면 바구니가 가득 찰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세탁기를 돌리면 안 되겠지만.


얌전히, 손에 든 것들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 바구니에 들어있는 것들도 집어넣었다.


속옷은 다른 바구니에 따로 빼놓았다.


여자가 되면서 불편한 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게 속옷을 따로 돌려야한다는 것이었다.


따로 돌리지 않으면 브라의 후크였던가, 그 갈고리같은 부분이 걸려서 옷의 상태가 말도 안 되게 변해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남자였을 때에는 그냥 다 같이 돌려버리면 장땡이었는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지만.


옷가지들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은 뒤, 넣기만 하면 끝나는 세제를 두 개 집어서 안으로 집어넣었다.


요즘에는 세제가 간편하게 되어있어서 이런 것만 넣으면 다른 것들을 넣을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그걸 넣어놓고, 9시나 10시쯤에 돌리거나 아니면 점심에 돌릴 예정이니 그대로 뒤로 돌아서 방 안으로 돌아갔다.


방 안으로 돌아오니 이제서야 깨끗해진 방 안이 보였다. 책상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였지만.


그래도 정리할 것이라고는 컴퓨터나 모니터를 제외한 나머지였으니 간단한 것들이었다.


복주머니는 앞으로도 자주 챙겨다닐 것 같으니 가져가기 쉬운 곳에 놓고, 황금색 동전은… 잘 모르겠다.


이건 어떻게 써야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부담스러웠다.


소중하게 간직하다가 금향에게 주거나 청하에게 돌려주면 될 것 같았다.


금화를 책상 안 쪽에,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나니 이제 해야할 일이 씻는 것만이 남았다.


옷장을 열어 씻고 입을 속옷들과 옷을 챙겨서 욕실로 향했다.


욕실 벽걸이에 걸어놓은 뒤, 잠옷과 속옷을 욕실 밖으로 던져버린다.


휙 하고 문 앞에 날아간 옷가지들과 속옷을 보다가 뭔가 잊은 게 있지 않나 머리를 굴려보니 보일러를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맨 몸으로 급하게 욕실 밖으로 뛰어나가 보일러를 목욕으로 돌려놓고, 빠르게 욕실 안으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서 샤워기를 온수로 틀고, 욕실 안이 따듯해지는 걸 기다리는 동안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펴봤다.


저번에 보았던 것과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얼굴에서 어느정도 가시기는 했지만 피로가 느껴졌고, 그리고 눈가 밑으로 내려온 진한 다크서클이 눈에 띄었다.


…오늘 하루는 집에서 그냥 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집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 게 더 취향에 맞았다.


거울을 보며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생각하는 사이에 욕실이 적당히 따뜻해져서 샤워기를 적당한 온도로 바꾸어 틀고, 이틀 동안 씻지 못해 더러운 몸을 닦았다.


길어서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대충 닦으려다가, 예전에 생겼던 일이 떠올라서 얌전히 꼼꼼하게 머리를 감는다.


남자였을 때에도 이 정도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왜 여자의 몸이 되어서는 이다지도 부드러운 건지.


내가 만지면서도 만족감이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래도 청하의 머리카락만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이니까 제외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금향도 드래곤이니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 기분 좋은 느낌이 나지 않나. 청하도 그랬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금향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만져보고 싶었다.


청하한테는 부탁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부탁했다가는 머리를 쓰다듬어달라, 껴안아달라, 그외 여러가지 요청을 해올 것 같았기에.


샴푸를 적당히 덜어서 머리에 거품을 내다가 머리카락 깊숙히 손가락을 집어 넣고 머리카락 끝까지 주욱 내려간다.


사이사이에 샴푸를 묻히고 닦아야지 머리가 거칠어지거나 아니면 꼬이지 않으니 별 방법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에 정성을 다해서 닦아야지만 나중에 귀찮아지는 일이 발생하지를 않는다.


그렇게 신체를 닦은 시간보다 머리에 정성을 들인 시간이 더 길어지고 나서야 샤워가 끝났고, 몸을 수건으로 닦고 나서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지는 못하고 수건으로 감싸 올렸다.


아무래도 물기가 너무 많다 보니 수건 하나로는 다 닦아내지 못한다.


이 상태로 대충이나마 갈아 입을 옷을 챙겨 입고, 욕실 밖으로 나간 뒤에 수건 한 장을 더 챙겨와서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 끝까지, 정성을 들여 물로 닦은 것처럼 물기도 정성을 들여 닦아내지 않으면 여전히 물기가 남아 머리카락이 무거워진다.


…이런 곳에서 여자의 불편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한달이나 넘는 시간동안.


이 귀찮음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었지만, 자르려고 할 때마다 귀찮은 일이 발생해서 이제는 반 쯤 포기한 심정이었다.


어느정도 물기가 털어지고 나니 완전히 젖어버린 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옷들도 그냥 빨아버리기로 결심을 내리고 베란다로 향한 뒤, 수건 두 개와 함께 세탁기 안으로 집어넣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이 세탁기에 들어갔지만 괜찮다. 귀찮음은 나중의 내가 알아서 해결할테니.


벌써부터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욕하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알게 뭔가. 지금 세탁기를 돌리면 안 되는데다가, 귀찮았다.


…대충 씻고, 옷가지들도 정리하고, 방도 정리했으니 남은 것이라고는 쉬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집에 있어봤자 어제 먹은 것들이 소화도 안 될 것 같았고, 그리고 아침을 늦게 먹을 것 같았기에 밖에 나가서 걸어다니면 적당히 소화도 되고 운동도 하니 괜찮아 보였다.


방으로 돌아와 옷장에서 양말을 꺼내 신고, 겉옷을 걸친 뒤에 침대로 가서 스마트폰의 전원을 켜보니 거의 다 충전이 된 것을 확인하고 충전기를 뽑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카드와 신분증, 그리고 복주머니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잊은 게 없나 머리를 굴려본다.


아. 보일러를 끄는 걸 또 까먹을 뻔 했다.


급하게 거실로 나가서 목욕으로 돌아가던 보일러를 끈다.


베란다쪽에서 열심히 돌아가던 보일러의 소리가 잠잠해지는 것이 들려왔다.


이걸로 밖에 나가도 문제가 될 것들은 없어졌겠지.


가만히 서서 생각을 해보니 보일러도 껐고, 방도 정리했고, 세탁기는 점심쯤에 돌아와서 돌리면 되니 다 해결된 듯 싶었다.


스마트폰을 켜보니 아직 새벽 5시인 게 보였지만, 고작해야 7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점심이니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으로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은 뒤 밖으로 나갔다.


겨울이 점차 다가옴에 따라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후─ 하고 입바람을 불면 하얀 연기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바람이 입을 타고 폐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곧 있으면 겨울이 된다는 사실에 묘한 기대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벌써 한달이라는 시간이 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자에서 여자가 된 뒤, 원래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의 적응을 얼렁뚱땅 넘겨버리다보니 시간 감각이 약간 이상해진 것 같았다.


…상념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휘휘 돌려 상념에서 벗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버튼을 눌러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9층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패널에서 광고가 보였지만 별 크게 신경쓰지 않고 1층을 누르고 내려간다.


묘한 부유감과 함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을 광고 소리가 채웠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밖으로 나가자 9층에 있을 때보다는 바람이 덜 부는 건지 그렇게까지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늘도 공원에나 갈 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파트 밖으로 나서서 공원으로 향하던 도중, 길거리에 있는 벤치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챙이 넓은 보라색 모자에 양쪽 허벅지를 노출하는 과감한 스타일의 보라색 옷을 입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느낀 것이라고는 엮였다가는 귀찮은 일에 꼬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다른 곳으로 돌아서가려고 방향을 꺾었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너는 누구기에, 내가 친 결계 안으로 들어온거니?"


"…예?"


결계라니, 나는 그런거 하나도 못 느꼈는데.


몸을 돌려서, 멀뚱멀뚱 노출이 과한 옷을 입은 여성을 쳐다보니, 뭔가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자, 잠깐만. 몸에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그냥, 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다른 종족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룬까지 붙여놨는데…?"


생각보다 더 골치아픈 일에 엮여버린 모양이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