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내 소중한 동생.
그 저주받을 마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건 우리 둘뿐이구나.
언젠가 네 영혼의 상처가 치유된다면,..
그래서 나와 다시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네게 제일 먼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빙의라고?”
“그래.”
“나까지도?”
“응... 지금 하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상대에게 강하게 투영하는 행위야. 상대의 영혼을 강제로 찢어 발길 것이 아니라면, 주인 있는 육신에 다른 영혼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영혼의 허락이 필요하지. 그러기 위해선 원래 있던 영혼과 익숙함, 강력한 마음의 유대같은 것이 필요해.”
“마음의 유대가 필요하다고...”
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우려하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응. 한마디로 이 방법엔 당신이 필요해. 당신 말고는 이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거지?”
“그건 그렇지만....”
한때 용사였던 한스는 강령술사가 때로는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물이나 생명체에 투영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딱봐도 고위급 마법사인 리코리스가 그런 것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의 여동생에게 빙의하는 것은 낯설고 심지어는 꺼림직할지라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납득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스가 주저하는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난 마법에 소질이 없어.”
모험가길드에서 용사일을 하면서, 그리고 용사에서 백수가 되었을 때, 뼈저리게 느꼈던 바로 그것.
한스는 마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리코리스는 들고 있던 칼을 그녀의 손목에 가져다 대면서 태연히 말했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했었지.”
그리고 그녀는 칼날을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단단히 묶인 가죽 주머니를 베어서 새로운 입구를 내는 것처럼 천천하고 깊게 손목을 그었다.
한스는 그런 난폭한 자살에 가까운 자해행위에 당황했지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가장 적당한 만큼을 확인하는 듯이 깊이와 길이를 재면서 칼이 낸 틈을 확인했다.
“그러니, 빠르게 당신을 마법을 쓸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야지.”
그녀의 혈관을 따라 길게 세로로 그어진 틈에서는 그녀의 보랏빛 혈액이 스며나왔다.
심장을 뽑아버린 리치는 인간일 시절처럼 피가 빠르게 흐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팔에서 나온 피는 인간 시절의 끊임없이 뿜어나오던 붉은 느낌이 아니라, 끈적하게 조금씩 나무에서 배어나오는 수액처럼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녀는 피가 배어나오는 깊은 상처를 한스에게 보이며 말했다.
“마셔.”
한스는 주저했다.
“이건...”
“내 마력이 잠시나마, 당신을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들어 줄거야.”
살아있는 대도서관과 같은 그녀의 피 역시도 강한 마력의 집합체로 자주 거론되는 용의 피, 유니콘의 뿔과 같은 물질들과 그 본질은 다를 바 없었다.
당장 그것보다 더 강한 마력의 집합체를 찾으라고 한다면 그녀의 사라진 심장 정도일 것이다.
리코리스는 짧게 덧붙였다.
“마시지 않으면, 시작도 할 수 없어.”
그 말을 들은 한스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동생을 위해서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시체의 혈액을 핥는 행위쯤은 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역겹고 구역질나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도 할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보랏빛 선혈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차갑고, 질척이며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입안에 머금은 그것을 한스는 목울대를 통해 억지로 넘겼다.
한번.
두 번.
세 번.
한스의 몸은 조금씩 새어나오는 리코리스의 체액을 받아들였다.
충분히 그가 마셨다고 생각한 리코리스는 팔을 거뒀다.
길게 벌어진 상처를 한마디 주문으로 봉합한 그녀는 한스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는 그의 말대로 스스로의 마력도 다른 이의 마력도 없었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마력이 그의 몸에서 이렇게나 가득... 잔뜩 요동치고 있어,,!’
묘한 고양감, 정복감이 리코리스의 마음 속에서 솟아올랐다.
한편 그녀의 피가 묻은 입가를 한스는 거칠게 쓸어넘기며, 그는 욕지기를 겨우 참고 있는 듯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의 몸에 가득차는 엄청난 힘과, 그동안 느낄 수 없던 새로운 기시감을 느끼며, 한스는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에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스는 그것을 느꼈다.
이른바, 마력의 자각과, 육감의 개안이었다.
리코리스는 그것을 보고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이제 당신도 준비가 된 것 같네.”
그리고 리코리스는 양손과 함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위대한 주문의 시동을 거는 동작이었다.
켜두었던 등불이 이지러지더니, 꺼졌다.
대신 그녀의 주위가 음침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도깨비불과 같은, 따스한 느낌 없이 어슴푸레하고 괴이한 느낌만 주는 그 빛.
그리고 한스는, 어느새 자신이 정체모를 그 빛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두 개의 원이 서로 만나는 형태로 그려진 마법진.
다른 원의 한 가운데엔, 그녀의 여동생이 누워있었다.
이윽고 점멸하듯, 마법진이 눈이 부시게 빛났다.
아득하게 먼 곳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서,
“시작할게.”
...
들려오는 울부짖음.
그것은 도저히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할퀴고 물었다.
처절한 비명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듣기라도 하는 듯이 잔혹하게도 목만은 갈무리하지 않았던 것인지 한번 들려온 비명은 약해질지언정 끊기지 않았다.
간혹 들려오는 고함소리.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욺부짖음과 그 안에 섞여오는 웃음 소리. 그리고 육중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도망치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한스.》
《한스.》
《한스.》
“...?!”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던 소년은 멈춰섰다.
그 소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한 손 대신 굳은 살과 흉터로 가득한 손이 보였다.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호리호리한 팔과 다리 대신, 단련된 잔근육과 함께, 낡고 헤진 갑옷이 보였다.
한스는 소년이 아닌 다 자란 청년이었다.
그는 음산한 바람이 부는 마을의 좁은 길 한 가운데에서 멈춰섰다.
조금 시선을 옮기니, 저 너머에 인가들이 보였다.
그러나, 역시나 조용할 정도로 인기척은 없었다.
리코리스는 한스를 재촉했다.
《정신이 들어?》
“...그래.”
리코리스는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은 연결을 회복해서 다행이야. 지금, 나는 당신의 혼에 말을 걸고 있어. 그리고 당신은 여동생의 심상세계로 들어온거야, 그런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심상이 이렇게 구체화된 건 기묘한 일이야. 특히나 당신의 여동생처럼 광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마치 급류에 휩쓸리는 것처럼...》
한스는 무언가 깨달은 듯, 몸을 떨었다.
“여기, 어딘지 알 것 같아.”
그리고 그 동요는 빠짐없이 리코리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의 변화를 느낀 리코리스는 물었다.
《저기, 괜찮아..?》
“언제인지도.”
《으응... 그래서, 그게 어딘데? 언제고?》
한스는 이를 악문채로, 답했다.
“내가 살았던 마을.”
“그리고, 습격이 있던 그날.”
말과 함께 전해져오는 노골적이고 분명한 적의, 그리고 그 안에 교묘하게 모습을 감춘 공포가 숨어있었다.
그녀와 한스와의 연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리코리스는 그 흔들림의 와중에도 연결을 안정화시키려 애쓰면서 말했다.
《우선, 한스. 마음을 가라앉혀. 진정해야 해. 마음이 흔들릴수록, 연결은 불안정해져. 당신이 들어온 이유를 망각해서는 안 돼. 만일 연결이 끊기기라도 하면, 모든게 끝이야.》
“내가 들어온 이유...?”
《응, 당신 여동생을 살리고, 광증을 치료해야지.》
“여동생을 살리고, 광증을 치료한다....”
연결이 안정화되었다. 들끓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한창 가라앉은 목소리와 감정을 느낀 리코리스는 안도했다.
《두 가지가 있지만 당장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야.》
“그게 뭔데?”
《이 심상세계 어딘가에 있을 당신의 여동생을 찾아야만 해. 그리고 설득해야 해.》
“설득... 해야한다고...?”
《응, 이건 전부 꿈, 악몽일 뿐이라고. 나갈 수 있다고....》
한스는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아무것도 없이 무력하게 도망치던 소년 시절의 한스와는 달리 그에게는 휘두를 수 있는 검이 있다.
그럼에도 떨리는 손으로 칼손잡이를 잡아 검을 뽑으며, 그는 말했다.
“가자.”
...
습격이 있던 날, 어린 시절의 한스는 달리고 달렸다.
눈 앞이 하얘지고, 가슴이 아파 터질 때까지 달렸다.
그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들이었다.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씹는, 사람을 양식으로 삼는 것들.
마을의 도로는 도망나온 사람의 살점과 피로 가득했다.
빵집 아주머니도, 대장간 할아버지도, 우체부 아저씨도 물레방앗간 누나도 모두
한스는 그들 중에 제일 빨랐을 뿐이었다.
자신의 집으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턱까지 올라온 숨을 겨우 들이마쉴 수 있었다.
그 들이마쉰 숨이, 곧 이어 막힐 줄도 모르고.
‘아빠!!’
“...”
그때의 기억은 한스의 머릿속에서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한스는 겉으로라도 침착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은, 피가 역류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한 웅큼 쥐어뜯긴듯한, 가슴팍.
그것을 부여쥐고, 한스의 아버지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스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도망...쳐라... 한...스....”
《한스, 여동생을 찾아야 해.》
“이건... 진짜가 아니야.”
《한스, 움직여.》
“이건 악몽일 뿐이야....”
《한스!!》
“...그래. 알았다고.”
한스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여동생이 있을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그는 거세게 뛰는 가슴으로, 성큼대는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악몽의 마지막 장소,
한스와, 여동생이 괴물을 피해 몰렸던 집의 가장 안쪽의 구석.
그곳에는...
“한스!! 도망쳐!!”
“살려줘 오빠!!”
저주스러운 그의 기억대로, 강령술사의 손에 붙들린 여동생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편 리코리스는, 한스의 시야로 그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
한스와는 달리, 그녀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그녀가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내뱉은 탄식을 한스는 듣지 못했다.
“아, 안돼...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