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한참을 바닥을 뒹굴다가 다시 자리에 앉은 흡혈귀의 모습은 그렇게 좋은 꼴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엉망이 되고, 헝클어지거나 비비 꼬여버린 머리카락이 보였고, 방송한다고 차려입은 옷도 엉망이 되어버린데다가 눈도 울었던 탓에 퉁퉁 부어버린, 눈 뜨고 봐주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건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보지만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귀는 가릴 수도 없었다.


"…잊어주세요."


잊어달라고 말하는 흡혈귀의 모습에 나는 그저, 뒤통수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방음 때문에 찾아오셨는데, 제 멋대로 화풀이를 해버리고 말았네요."


"그런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남에게 풀어놓고 싶은 날이."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남자였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에게 내 안에 품은 화를 한번도 남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보여줄 이유도 없었고,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으며, 남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앞에서 훌쩍거리는 흡혈귀의 모습에 잠깐 다른 곳으로 생각이 튀어나갔다.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흡혈귀에게 집중했다.


흡혈귀는 코를 훌쩍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에 가서 얼굴만 닦고 올게요."


"알겠습니다."


흡혈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화장실로 향하고는, 문을 닫고나서 세면대의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생각을 해보지만, 방음 때문에 찾아온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냥, 온갖 것들이 겹치고 겹쳐서 발생한 일에 불과했다. 단순히 말하자면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저 운이 없었다.


그렇게 표현하니 참, 여태까지 겪어왔던 일들이 단순하게 느껴진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이것도 인생이라는 것이겠지 같은, 나이먹은 사람이라면 할 법한 생각도 들었다.


남의 거실에 앉아서, 멍하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며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벌컥 하고 화장실의 문이 거세게 열리며 그 뒤로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흡혈귀가 보인다.


감정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건지 침착해보이는 표정과는 별개로, 아직도 퉁퉁 부어있는 눈과 귀처럼 새빨개진 코가 눈에 띄었다.


훌쩍, 하고 코를 한번 들이마신 흡혈귀는 천천히, 내게 절을 올렸다.


"다시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크게 말 안 하셔도 들립니다. 그리고, 다른 집에 민폐니까…."


"다른 집에는 들리지 않을 거에요. 벽에 설치된 방음 마법이 양 옆은 물론이고, 위 아래로 넘어가는 소음도 막아주니까요."


"그렇습니까? 저는 옆만 막아주는 줄 알았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죠. 저도 방음 마법을 고쳐보려고 찾아봤어요. 제가 어떻게 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교한 마법이라는 걸 깨닫고는 손톱만 씹어댔지만."


그렇게 말하며 흡혈귀는 편안한 자세로 앉은 뒤에 자기 손톱을 보여줬는데, 말한대로 손톱들의 끝이 다 무언가에 씹힌 것처럼 닳아있었다.


"…한심하죠? 흡혈귀면서 마법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모르겠습니다. 제가 흡혈귀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가요."


그 말을 끝으로,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할 말을 찾지 못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와는 다르게, 흡혈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나를 보는 듯 싶었지만, 눈동자에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그렇게 큰 건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시도조차 못하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혹시, 흡혈귀의 역사에 대해 잘 아시나요?"


"모릅니다."


"역시 그렇겠죠. 이건 인터넷에 올라가지도 않았고, 올라갈 일도 없었을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흡혈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할 것이 있다면 그냥 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는 제가 더 답답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말할게요. 그냥, 그냥… 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경청하겠습니다."


자세를 똑바로 세우며, 흡혈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며 흡혈귀를 쳐다보자 그런 내 시선에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게 보였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몇번을 내쉬면서 자신을 진정시키는 것 같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흡혈귀는, 저희 종족은… 사람의 수가 줄어들어서 멸망하기 전까지 갔어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따로 찾아보기로는 서로 간의 전쟁으로 수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자세하게 적혀있지는 않았죠."


나도 거기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청하나 금향이라면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과거의 이야기였으니 그렇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청하나 금향도 이야기하는 걸 꺼려하는 느낌이기도 했고.


잠깐 상념에 빠져버린 정신을 다시 흡혈귀에게로 돌려놓자, 흡혈귀는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결과로 인해, 사람의 피로 삶을 이어나가던 저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내부에서 분열이 났습니다."


"분열입니까?"


"한정적인 자원은 언제나 분열의 소재가 되는 편이죠. 그 자원이 목숨과 연결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말한 흡혈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갔다.


흡혈귀의 수가 줄어들은 이유가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느낀 것은, 사람은 다른 존재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종족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건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인 이야기.


흡혈귀는 냉장고를 열고는 잠깐 고민하는 가 싶더니 작은 유리병을 꺼내고는 냉장고 문을 닫고, 이쪽으로 향했다.


손 안에 들린 작은 유리병 안에는 피처럼 붉은 색의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피를 물에 희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흡혈귀는 손 안의 유리병을 나와 흡혈귀 사이에 놓았다.


"이건, 물을 섞은 사람의 피에요."


"…색이 붉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예상은 했습니다만, 굳이 사람의 피인 이유가 있습니까?"


"있죠. 있고 말고요. 흡혈귀는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니까요."


"다른 종족의 피를 마셔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겁니까?"


"저도 노력은 해봤는데, 안 되더라구요. 오로지 사람의 피만이 저희의 생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갈증을 느끼지 않게 해줘요."


"지금도 갈증을 느끼십니까?"


"아니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보는 흡혈귀의 표정에는, 약간의 열망같은 게 느껴졌다.


아니, 열망보다는 흥분에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그리고, 저희 종족은 이렇게. 인간의 피가 섞인 물로 삶을 연장해나가고 있어요."


"그럼, 된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보니 저희는 조상님들과 다르게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었어요."


자, 보세요. 하고 말한 흡혈귀는 손을 펼치고는 작은 빛을 만들어냈는데, 눈이 멀정도로 밝은 것도 아니었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배터리가 다 되어가는 손전등처럼 깜빡거렸다.


"고작해야 이런, 작은 마법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마법을 연습했던겁니까?"


"네. 저는, 예전의 흡혈귀들처럼 마법을 사용하고 싶어요. 그럴려면 사람의 피가 필요하구요."


흡혈귀는, 가운데에 두었던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는 마시기 시작했는데, 쓴 약이라도 먹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으…. 맛 없어라."


"…그냥, 물에 피가 섞인 맛 아닙니까?"


"그래서 더 그런거에요. 저는 피에 민감한 종족이라 피가 물에 희석되면서 맛도 물에 섞여버려서 이상한 맛이 나거든요."


으 하고 혀를 내밀며 맛없다는 표현을 내보이는 흡혈귀는,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자기 옆에 내려놓고는 아까처럼 손바닥을 펼쳐 그 위로 빛을 만들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빛은 아까와는 다르게 빛이 깜빡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출력이 약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빛은 몇 초밖에 유지되지 않았고, 전구의 퓨즈가 나가듯이 픽 하고 꺼져버렸다.


"…이렇다보니 제가 마법을 연습하는 이유에요."


"그렇다고는 해도, 집 안에서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요!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제대로 사용하고 싶단 말이에요."


자기 손에서 꺼져버린 빛을 쳐다보던 흡혈귀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내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변하지 않는다.


소음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해결법을 듣지 못한다면 백호연이 알려준 아리센이나 금향에게 요청하여 방음 마법을 고칠 생각이었다.


"부, 부탁드립니다."


흡혈귀는 자세를 고쳐서 또 내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방송하면서 벌은 수익도 드릴 테니까, 제발. 제발 저를 여기서 쫓아내지 말아주세요. 더는 갈 곳도 없단 말이에요."


내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부탁해오는 흡혈귀의 모습에, 나도 사람인지라 불쌍하다고 여기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아리센은 이미, 흡혈귀를 찾아가겠다 말했으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만."


"네…?"


"아리센이라는 마법사가, 당신을 찾아가겠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그, 그게 언제였죠?"


"이틀 전이었던가, 그랬을 겁니다. 저희 집에 있던 방음 마법을 살펴보시고 가셨으니."


흡혈귀의 새하얗던 얼굴이 거의 죽기 전의 시체에 가까운 푸른색으로 변해간다.


어버버 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흡혈귀는 금세 울상으로 변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앙! 망했다! 망했어! 흡혈귀도 마법을 잘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내 계획도 망했어!"


얼굴을 바닥에 박고는, 손으로 쿵 쿵 두들기며 울기 시작한 흡혈귀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흡혈귀에게는 안타깝지만 아리센이 찾아갈 날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리센이 언제 찾아올 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 만이 내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다.


"아리센이 찾아올 때까지 하루에서 이틀 정도 남았습니다."


"…녜?"


"그때까지, 방음 마법을 고칠 수 있습니까?"


"부, 불가능해요! 방금 전에 보셨잖아요!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떻게, 그런 복잡한 마법진을…?"


스윽 하고 흡혈귀에게 손가락을 내밀자 그걸 눈물이 맺힌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도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감정은 이상하게도 눈 앞의 흡혈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에 희석된 피로 그 정도였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피라면 얼마나 가능하십니까?"


"…저, 저도 잘 몰라요. 애초에, 희석된 피 말고는 사람의 피를 마셔본 적이 아예 없는 걸요."


"그렇습니까. 그럼, 이 참에 한번 마셔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흡혈귀의 입으로 손가락을 갖다대자 벌벌벌 몸을 떨기 시작한 흡혈귀가 보인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표정으로 내 얼굴과 손가락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앙 하고 손가락을 물었다.


…무는 게 아니라 빨았지만.


"뭐하십니까?"


"저, 저… 어떻게 상처를 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입에서 손가락을 빨기만 하는 흡혈귀의 모습에 내가 칼이라도 가져와서 손가락을 그어야하는 건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날카롭게 보이는 게 눈에 보였다.


"잠깐, 입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네."


아─ 하고 입을 여는 흡혈귀의 입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인다.


직접 갈은 것도 아닐 텐데도, 손가락을 갖다대면 충분히 상처가 생길 정도로 잘 갈린 송곳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몸을 떠는 흡혈귀의 눈을 마주본다.


"그렇게 떨면, 상처가 더 크게 날지도 모릅니다."


"녜, 녜!"


고개만 들어올린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흡혈귀의 눈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연한 분홍색이었다.


벛꽃과 비슷한 색인 것 같으면서도, 그 안 쪽으로 진홍색의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흡혈귀에게서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느껴졌고, 흡혈귀의 송곳니에 손가락 끝을 아주 살짝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