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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https://arca.live/b/tsfiction/106024048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어. 너무 원망하진 마라,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원작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모른다.

 

 알 게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읽어놨지.’

 

 “꺄아- 우븝…!”

 

 “닥치라고 했지!”

 

 소리 지르려던 입을 남자의 손이 틀어막고, 반대편 손은 우악스레 내 목을 쥐었다.

 

 ‘억울해.’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침착해지려고 해도 목이 졸린 채로는 쉽지 않다.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예지고, 분노와 초조함이 뒤섞인 침입자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다가 내 이마에 떨어진다.

 

 시큼하고 고약한 땀 냄새. 나 대신 삐그덕 삐그덕 비명을 지르는 침대.

 

 입을 막고 있던 남자의 손이 내려와 내 가슴을 주무른다.

 

 연약한 팔다리로는 막을 수 없다.

 

 “헤헤, 창녀처럼 천박한 젖탱이나 달고 있는 주제에… 뭐가 잘나서 귀족이라는 거냐…!”

 

 “크으읍-!”

 

 곧이어 젖꼭지를 깨물렸다.

 

 풀어 헤쳐진 옷섶 안으로 남자의 손과 입술과 축축한 혀가 밀고 들어와 핥아지고, 빨리고, 마구 주물러진다.

 

 “오호, 느끼나 본데.”

 

 느낄 리가 없다.

 

 아프기만 하다.

 

 애초에 나는 남자다.

 

 목은 여전히 졸리고 있는 상태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짤그락짤그락 혁대를 푸는 소리에 눈을 부릅 떴다.

 

 ‘안 돼. 그것만은.’

 

 한 손만을 쓰는 데다가 서둘러서인지, 허리띠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젠장, 가만 안 있어?!”

 

 신경질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던 남자는 발버둥치던 내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미 무리였는데─

 

 “끄, 엑…!”

 

 목을 조른 손에 체중이 실리자 실낱같던 숨구멍이 턱 막혀버렸다.

 

 목구멍에서 거품이 일고 눈이 뒤집히려고 한다.

 

 팔을, 뿌리치고 싶어도, 가녀린 팔, “끄르륵……” 너무 억세다….

 

 …….

 

 “푸하아-!”

 

 숨구멍이 트이고, 가장자리부터 어두워졌던 시야가 갑자기 환해진다.

 

 무슨 일인가 정면을 쳐다보면 내 위에 올라탄 남자는 비열하게 웃고 있다.

 

 “얌전히 있으라고.”

 

 “후움!”

 

 남자에게 키스를 당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침이 질질 흘러서 턱을 적신다.

 

 나는 정신이 없어 남자의 혀가 맘껏 꾸물거리도록 한동안 내버려 두었다가.

 

 이판사판으로 그 혀를 힘껏 깨물고 “아악-!” 그 틈을 타서 도망쳐…

 

 ─털푸덕!

 

 …치려고, 했는데.

 

 침대 아래 바닥에 장렬하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블 무늬의 대리석은 차가웠고,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줄곧 이불을 덮고 있어 몰랐지만─

 

 ‘─아니, 알고는 있었어.’

 

 양쪽 발목 아래로, 있어야 할 신체 부위가 없었다.

 

 즉, 발이 없었다.

 

 걷고 뛰기 위한, 당장 도망치기 위해 필요한 기관이 없다.

 

 ‘다리는 없어도 되지 뭐.’

 

 문득 전생하기 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엉금엉금 바닥을 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입을 틀어막고 고통을 호소하던 침입자는 벌레처럼 기는 나를 보며 코웃음 쳤다.

 

 “…하, 도망치지도 못하는 주제에.”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머릿속으론 그런 말을 외치려는데, 입에서 나오는 건 고작…

 

 “아악! 아아악!”

 

 …이 정도였다.

 

 “닥치라고 했지. 닥쳐… 이익, 이년이…! 안 닥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강간범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쿵!

 

 “끄엑! 흐어억!”

 

 뒷덜미를 낚아챈 남자는 내 머리를 그대로 딱딱한 바닥에 내리꽂았다.

 

 눈앞에 별이 튀기고,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마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목에 통증이 밀려왔다.

 

 남자의 손이 경동맥을 노리고 먹이를 낚아챈 새 발톱처럼 날아든 것이다.

 

 가느다란 목은 손아귀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뚫릴 것만 같았다.

 

 아팠다.

 

 “썅년이 뒤질라고…! 간 떨어지게 만들고 있어!”

 

 아파서 눈물이 나와.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사고로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이제 와선 남자한테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처지가 됐어.

 

 ‘억울해….’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되뇌던 나는….

 

 차라리 이 모든 게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원래 몸의 주인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나와는 관계없는 꿈처럼 여기기로 했다.

 

 나는 관조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웨슬리를 덮친 침입자는 더이상 서두르지 않았다.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쇠 맛이 이성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 것이었다.

 

 “씨발, 씨발련….”

 

 그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웨슬리를 침대 위에 동댕이치고, 그녀의 옷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북북. 그닥 귀하지 않은 선물상자의 포장을 뜯듯이.

 

 무심한 손길을 버티지 못한 옷은 늘어지다 못해 찢어지고, 웨슬리의 알몸이 바깥에 드러났다.

 

 조붓한 어깨, 달보다 부드러운 호를 그리는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 오목한 배꼽.

 

 소설 속 여주인공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귀족 영애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신체였다.

 

 ─조르르르…….

 

 그때, 작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물소리에 침입자는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하하, 뭐야? 귀족이라는 년이 오줌이나 지려대고. 귀족의 품위 같은 건 엿 바꿔 먹으셨나? 응, 아가씨?”

 

 웨슬리가 몸을 희미하게 떨며,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남자는 웨슬리의 뺨을 툭툭 치며 비아냥거리다가, 꿀꺽, 군침을 삼키고, 허리띠를 천천히, 확실하게 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웨슬리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자신의 배를 깔고 뭉갠 남자에게 감히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다만 굳게 닫힌 문을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다. 그러면서 중얼거리고 있다.

 

 “살려줘… 살려줘….”

 

 “헤, 걱정 마. 죽일 생각까진 없으니까….”

 

 눈물 한 방울이 웨슬리의 뺨을 타고 흐른다.

 

 이윽고 남자의 더러운 하물이, 웨슬리의 허락되지 않은 곳에 닿으려는 때에-

 

 ─벌컥!

 

 문이 열리고, 문설주에 선 남자의 인영이 방안에 길게 드리웠다.

 

 “누, 누구냐?!”

 

 “웬 놈이냐.”

 

 놀라 소리치는 강간범의 것과 대비되는, 얼어붙은 호수보다도 차가운 목소리.

 

 구원의 빛이 웨슬리에게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