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부부예정
개념글 모음


위옹거리는 알림음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배란다의 창문으로부터 기분 좋은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햇빛을 쬐다가 그대로 쇼파에 잠든 모양이야.


다시 찾아온 봄은 생각보다 더 따스했다.



"일어났니. 필요한건 없고?"



일어나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는 건 정말 기분이 좋아. 


그것을 알고 미리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할정도로 매번 자고 일어나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이때는 충분히 잘 먹어둬야한단다."

"필요하면 제가 귀찮게 엉겨붙을테니까요. 히힛. 간지러워요."



다정한 손길로 내 배를 쓰다듬는 손길에 느껴지는 만족감과 간지러움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만삭의 배를 생각날 때마다 쓰다듬는 그이의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작년의 우리는 정말... 정말로 위태로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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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의자에 묶어두고 멋대로 강간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 뒤, 나는 그저 행복해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과정을 겪고 망가진 채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해 왔으니까. 어딘가 뒤틀린 욕망을 애정이라고 여기며 망가진 마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에 집착했다.


그 때의 나에겐 그것말고는 남은게 없다고 여겼으면서 정작 이버지의 상태에 대해선 눈을 돌렸다.


그냥 매일 밤 나를 안아주는 것에 만족하며 비겁하고 추잡하게 협박하여 얻어낸 사랑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갑자기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지만,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할 때쯤에서야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평소같으면 그대로 장을 보러 갔을 것이다. 지갑이 없어도 결제는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지갑을 챙기고 싶었다. 엄마가 선물해 주었던 지갑을 가지고 있고 싶었다.


그런 변덕을 오늘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 아빠... 이,이게... 무슨...? 뭐하고 계신,계신..."



지갑을 챙기기 위해서 돌아간 집에서 아버지는 현관에서 의자위에 올라 밧줄을 들고 계셨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제대로 숨을 쉬기 힘들었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전부 모르겠다."

"아빠..."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니. 네 엄마를 볼 자격도 없지만."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기 딸에게 허리를 흔드는 원숭이가 된 것이 너무 화가 났고, 내 딸이 내게 질척하게 안겨드는 것이 내 탓이라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

"하지만 가장 괴로웠던 건... 이렇게 힘들면서도 결국 너에게 흥분해서 매일 밤 좆이나 세우는 나 자신이 싫구나."



술에 취했던 아버지가 날 깔아 뭉갰던 그 날부터 우리는 진심어린 대화를 한적이 없다는 것을.


오늘 야식은 뭘 먹을까하는 대회조차 즐겁게 하던 우리가 일상을 연기하며 말없이 몸을 섞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빠... 사실은 너무 아팠어요."

"재희야..."

"아빠가 엄마 이름을 부르면서 제 몸을 더듬을 때, 너무 무서웠는데... 정신을 차리면 너무 괴로워 하실까봐 숨죽여 울었어요."



아버지가 들고 있는 밧줄덕에 진심어린 대화가 시작되었다.


바닥에 주저 앉은 채, 의자위에 서있는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았다.



"너무 아프고 힘든데... 마지막에 결국 기뻐한 제가 너무 더러워서... 그냥.그냥 전부 즐거웠다고 생각하자고... 나만 몰래 그러면 된다고... 그런데 들킨날부터 아빠가 안돌아오니까아..."

"..."

"버려질까봐아... 끄흑... 밀쳐질까봐... 나랑 똑같이 되면 된다고 생각해써요. 흐으윽... 죄송해요. 아빠. 날 믿어주는 사람이 아빠밖에 안남아서, 혼자 남는게 무서워서 그랬어요. 죽지마세요. 제바아알..."



내 엉망인 고해성사가 시작되었다.



"흐흑... 사랑해요. 아빠.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날 제대로 봐주는 사람이 아빠뿐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어요. 떠나라고 해도 좋아요. 꼴도 보기 싫어도 괜찮아요."

"재희야."



의자 위에 서있던 아버지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셨다.


바닥에 주저 앉은 나를 품안에 껴안아 주시며 등을 두들겨 주신다.


언제나처럼 아버지는 나를 위로해 주셨다. 상처받아 괴로움에도 상처 입힌 것이 나임에도.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아빠... 제발 벌써 절 떠나지 말아주세요."

"가지 않으마."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아빠... 저 정말로 아빠를 사랑해요. 처음에는 그렇다고 자위해온 걸지도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진심이에요."

"...축복받지 못할 마음이란다."

"괜찮아요.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괜찮아요. 평생을 숨기며 거짓범벅인 삶이어도 괜찮아요."



이전에 비겁하고 추잡한 강요와는 다른 고백을 입에 담았다.



"사랑해요."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조금씩 다가오는 아버지의 얼굴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쪽하는 소리와 함께한 풋풋한 버드키스.


그저 입술이 잠깐 붙었다 떨어진 가벼운 입맞춤이 이전까지의 어떤 육체적 쾌락보다 만족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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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발로 찼어요."



쇼파에 함께 앉은 그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뱃속의 아이가 발을 굴렀다.


아이도 아빠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저녁은 우리 닭볶음탕으로 할까요?"

"그러자꾸나."



남들에게 축하받기 힘든 부부이지만, 남들은 물론 아이에게도 숨겨야할 사이지만.


지금 난 행복했다.


배덕감과 거짓에 포장된 가짜가 아닌 진심어린 행복을 찾았다.


우리는 비록 비슷한 실수를 했고 비슷한 상처를 받았지만, 그렇기에 어울리는 부부가 된 것이 아닐까?


조금 더 욕심부린, 조금 더 거짓말을 해간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보내고 있었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모든걸 털어 놓은 그 날 두고간 지갑이, 엄마가 우릴 도와준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배달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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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옹위옹거리는 부서진 차량 위에서 쓰러진 여자의 꿈을 꾸었다.


가슴아픈 기분이 들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기도했다. 다음엔 꼭 행복할 수 있길 바라며.


시간이 흐르고 이재희는 자신을 닮은 딸을 출산하여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엄마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딸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꿈에서 본 여자와는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