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있지, 이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

"오리는 기름까지 몸에 좋은 고기중에 하나야, 더군다나 탄수화물에 비타민까지 있으니까 엄청 건전해."

"짚어줘야 할 게 한두군데가 아니네."

"또 공감해주지도 않고 지적질이네, 말해봐 아싸."


남자는 우선 가장 신경쓰이는, 반의 누구라도 공감할 이 거대한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첫 번째야, 누가 베이징덕을 도시락으로 싸오냐."

"도시락 안에 중화풍 메뉴가 들어간다고 누가 뭐라 하는사람 없어."

"그렇긴 한데 오리 한마리를..."

"배달시켜주는곳 있어, 가격대비 괜찮더라고."


옆에 놓아둔 칼을 꺼내 능숙하게 살을 저미고 전병에 야채를 올린 후 말아내고, 찍어 남자의 입 앞에 내민다.

의자가 천천히 기울어지고, 그에 따라 여자의 팔도 근육이 버틸수 있는 만큼 늘어나기 시작한다.


"먹어."

"싫어."

"먹어."

"싫어."

"이거 먹을래? 아니면 나랑 사귈..."

덥썩, 순식간에 달려들어 나이프 끝에 꽃힌 것을 입으로 넣자 소녀의 얼굴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음, 맛있긴 한데 한가지 더 말하긴 해야겠다...오이엔 비타민이 있다는 말은 반만 맞아."


자신 몫을 만드는 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

"오이엔 비타민을 파괴하는 효소도 있어, 그래서 사실상 그게 비타민을 파괴시켜서 오이에 남는 건 수분뿐이야."

"뭐야 그럼, 좋아서 먹는 사람이 아니면 그냥 자연에서 키우는 딜도에 불과한..."

"미친놈아! 좀 조용히 해 제발."


그의 반응에 미소짓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웃고는 말했다.

"오늘 밤, 8시 40분에 통화해도 괜찮지?"

"메이플?"

"그런 게임 말고."

"던?"

"그런 거 말고...아무튼 받아, 안 받으면 내일 넌 죽어."


표정변화가 없다, 차라리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든가 빽빽 소리지르면 감정이 나타나 귀엽기라도 할텐데.

그냥 거의 미소짓는것 말고는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뭐라 리액션을 쳐주기도 그렇고 미친 짓의 전조도 없으니 대응도 힘들다.

언제까지 이 페이스에 말려들어가야 할까, 고등학생의 남성은 한숨을 뱉었고.

"나랑 전화받는게 그리 싫어?"

그녀는 어느새앤가 잔해만 남긴 오리뼈로 그의 볼을 찌름으로써 괴성을 토하며 화장실에 달려가게 만들었다.


괴이한 점심도 끝이 나고, 그 괴이와 대비되는 평범한 수업과 야자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남자는 그녀가 교실에 있는 동안 내뿜었던 존재감이 묘하게 감도는 듯한 빈자리를 쳐다보고, 이내 물었던 펜을 필통으로 옮겼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출발해야 그녀가 전화통화하는 시간에 맞춰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그녀와 편히 통화가 가능하다.

원래라면 야자시간엔 그냥 학교에 박혀 있어야 하건만, 남자의 학교성적을 추락시킨 데에 그녀가 기여한 것도 약간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 물론, 1등급을 찍던 것에서 가끔 2가 발견될 정도로 하락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기만자에 대한 저주를 들은 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가는 길에 그래도 커피라도 사갈까."

그녀에 어울려주는 만큼의 시간을 그 이상의 공부로 커버해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남자 특유의 계획하는 본능이 발휘되어 홀로 새벽 3시까지의 계획을 분단위로 수정하고 있을 때.


전화가 진동했다, 평소에 그녀답지 않게 10분이나 일찍 건 것은 이례적이다.

이례적이지 않아도 받을 것이었지만, 그때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남자기 느끼기에 그것은 이질적이었다, 정보통신기기에 분위기 같은걸 느낄리 없겠지만서도.


"여보세요..."

"...지금...어디야..."

길게 늘어지는 호흡, 그리고 그 흐름을 끊는 중간중간의 윽, 하는 신음소리.

설마 너.

"너 혹시 지금 네 메추라기 폴더 열어서 그짓하는 중에 나한테 전화건거면..."

"아니거든 등신아! 상황을 좀 이해를...아니다, 빨리 학교 쪽 공원에 와줘, 부탁할게...아프단 말야."


비둘기 좋아하지도 않는 얘가 공원엔 뭐하러.

거기 가서 미끄럼틀에 구르기라도 했나.

아니면 흔들목마에 서서 버티다가 장렬히 백덤블링이라도.

남자는 간만에 빨리 달리면서도, 그녀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그녀라면 이렇게 다쳤을 법도 하다, 란 어이없는 가설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덕분에 공원에 도착하는 것 또한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달리고 걸려 넘어져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것도 나중에 닦자, 란 생각을 하며 달려온 끝에 목격한.

그녀의 상처는-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너...뭐야, 차에 치이기라도 했어?"

"비슷해."


부축을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에게 무엇을 하려 했을까.

뻗는 손을 ,다가가는 그 다리를 그녀는 손을 뻗어 제지했다.

"피 묻으면 의심받아...경찰에 용의자로 찍히라고 널 부른건 아니니까, 더 가까이 오지 마."

"어쩌다...어쩌다 이렇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입술 다 터지고 난리났네...발색 잘 되어서 립밤은 필요없겠다 야."


그녀의 농담을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남자는 적어도 그러했다.

"뭐, 적어도 경찰이나 구급대가 오진 않을 거니까 안심해."

"119! 그래, 119 부르자 빨리, 지금이라면 아직..."

"내 상처는 병원에서 고칠수 없어."

"아니긴 뭐가 아냐, 전쟁통에서 지뢰밟아도 사람 사는데! 빨리..."

"아니야."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피를 빨아야 고쳐져 이건, 흡혈귀는 그렇게 사니까 말야."

"드립칠수 있는 것도 조금이면 끝이라고, 그러니까 119를..."

"방금 전에 내가 좀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나...아니면 평소 내가 쌓아놓은 업보가 너무 많은 건가."


그녀는 이내 피식 웃더니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원래는 너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나도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말야, 내가 처음으로 사귄 인간친구한테 그러면 안될것 같더라고."

"움직이지 마, 피 나와..."

"걱정마, 금방 끝나니까...약간의 피를 깨물지 않고도 흡수할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을 뿐이야."


뭐가, 라고 말할 틈도 없이 남녀의 입술이 맞물렸고, 쪼옥하는 소리가 들리며 여성은 피가 흐르는 부위를 찾아 그의 구내를 혀로 더듬으며 핥아갔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만 더 핥으면 원래대로 되돌아갈수 있어.

조금만 더...

아니야, 좀더.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그의 허리에 들어간 힘이 풀리고 팔이 축 늘어진걸 깨달았을 때였다.

"뭐야, 너무 잘해서 허리에 힘이...응?"

몸에 힘이 빠져있는걸 확인하자 우선 심장께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죽지는 않은 걸 느낀 뒤 한숨을 뱉었고.

이내 완전히 기절해버린 그의 입을 붙잡고 강제로 열어...


가장 유무를 가려내기에 쉬운 부분을 확인하고 깊게 한숨을 뱉었다.

"X됐다..."

진심으로 큰일났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입에도 상처가 나 있었구나..."

허리에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다른 곳에 피가 났는지는 잊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남자로부터 빨아들였던 피 덕분에, 그녀의 허리는 어느새엔가 말끔히 나아 있었고.

강제로 벌려진 이빨은, 묘하게 번뜩이며 날카로움과 하얌을 과시했다.





모닝콜 알람이 울려 핸드폰을 더듬은 남자는 우선 시간을 확인한 후.

자신이 왜 핸드폰을 늘 놓는 곳에 놓지 않은 건지, 그리고 왜 지형이 다른 건지.

왜 이불의 질감은 다른 건지, 조명도 왜 다른건지 하나둘씩 눈치채며 당황하기 시작했고.


이내 이불로 상체를 일으키며 자신이 나체란 것에 당황해했다.

아니다, 팬티는 입고 있었다.

"뭐여, 여기 어디야."

"내 집."

그녀도 나신이었다.

늘 보던 이질적인 하얀색과 분홍색이 섞인 머리카락, 그리고 분홍색의 은밀한 곳들- 팬티 유무는 침대로 인해 미확인상태.


그러나 낮선 침대와 늘 보던 친구, 어젯밤 일에 대한 기억의 왜곡은 남자로 하여금 어떠한 단일행동을 하게 하는데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참고로 말하는데..."

"우와아아아아악! 갸아아아아아악!"

"이상한 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리고 사과도 해야..."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엙!"

"말하면 좀 들어 쳐먹어줄래? 응?!"



현실부정을 소리로 풀어낸 듯한 남자의 끝없는 절규와 상황을 설명하려 애쓰는 여자의 변명은.

지붕 위에 앉아있던 살찐 비둘기 무리들을 간만에 날게 하는데 성공했고.

그러고도 그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둘의 통하지 않는 이중창은 십분동안이나 이어졌다.


식탁에 앉아 그녀가 흠흠,하면서 설명을 시작하기 전까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