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소설 속 캐릭터에 빙의한다고 생각한다면, 보통 주인공에 빙의하는 것을 상상한다.

소설이라는 것은 결국 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이며 빙의ㅡ 라는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라면 당연하게도 주인공일테니까.


가끔 엑스트라 빙의니 뭐니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마찬가지 아닌가? 온갖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기연을 선점하고 능력을 얻어 주인공과 대등한 능력을 얻거나, 주인공의 자리를 대신한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그런 점에서, 단 하나의 이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히로인 빙의다.



웹소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남자는 아니지만, 일단 남성향 소설에서 히로인이라는 것은 주체적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끌려가는 입장이 대부분이다. 초반부라면 몰라도 마지막 정도를 가면 주인공을 보면 얼굴을 붉히며, 주인공의 말을 따르고, 주인공을 위해 움직이는 캐릭터 A가 되어버리니까.

그런 시점에서 보자면 히로인ㅡ 아니, 캐릭터 A에 빙의해버린 빙의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남자의 아래에 깔려서 교성을 내는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히로인 빙의라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특히 남자를 여자의 몸에 쑤셔넣는다면 더더욱.


남자의 밑에 깔리지도 못하는ㅡ 아니, 절대 그것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히로인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공략불가 히로인? 그건 몇십년 전에 이미 쇠퇴해버린 개념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성욕에 뇌수까지 절여져버렸거나, 그것도 아니면 타인의 고난을 보며 낄낄 비웃는 사디스트 새끼들임이 분명하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여자의 몸이 되어서 남자에게 박히고 싶어한다는 시점에서 지옥의 염라대왕조차 재활용불가 판정을 때리고 영혼까지 불살라버리리라.


그러니까.

이건 많이 잘못되었다.


졸라 많이.


"안녕하세... 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내 얼굴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하는 남자.

나는 그런 남자가 무언가 나를 궤뚫어보기 전에, 먼저 말을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호감상의 남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잘생겼다, 라거나 연예인 정도로 잘생겼다는 것은 아니지만 반에서 줄세워보면 못해도 세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정도의 외모. 그리고 능력자 답게 탄탄한 근육질이 뒷받침된 몸과 훤칠한 키.

말 그대로 '주인공'다운 외모를 하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교수님께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러니까... 마천우씨?"


"아, 네. 맞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손을 내밀자 남자는 생긋 미소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손 너머로 느껴지는 굳센 손길. 어째서인지, 남자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았지만ㅡ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나는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히로인으로 공략당하기 싫다고, 남장을 해서 '남자'취급을 받은 것 까지는 괜찮았다.


원래 이 히로인 캐릭터 자체가 가슴이 작은 캐릭터라서 우스갯소리로 빨래판 소리를 듣던 캐릭터들 중 하나였으니까. 가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 붕대나 다른 도구로 꽉 누르면 최소한 겉에서 보기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만들 수는 있었고, 숨쉬기 불편하다거나 그런 점들은 능력자 특유의 강인한 신체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

나머지 여자 특유의 곡선이라던가 그런 점들은 어떻게든 숨길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를 보고 '쟤 여자아니야?'라고 말하는 남자가 그리 많겠는가? 게다가 능력자들 특성상 남자들 중에서도 선이 고운 남자들은 꽤 있었던지라, 딱히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히로인으로 공략당하는 루트를 피했다고 자신하던 나에게 찾아온 시련은.


"영웅아카데미 1학년, 마천우입니다. 개인사정으로 늦게 합류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원작'에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혼자서 팀으로 일을 하게 되었던 '주인공'.


"같은 팀이잖아요?"


ㅡ마천우와의 2인팀 페어였다.



......아무래도 선택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남장을 하느니 아카데미를 자퇴해버리는게 나은 선택지 아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