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허나 닿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과 적이었고, 그 사람 또한 우리를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었으니까.
시나리오가 끝난 후, 그 사람을 봤을 때는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나와 그 사람은 이어질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였으니까.
하지만.. 가능하다면.. 적어도 그 사람과 한 집에서 살며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큼은 허락해줬으면 했다.
"어디 가?"
나한테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매번 내가 어디를 가는지 꼭 물어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이나 찍으러 가면 언제나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 나를 찍어주곤 하는, 당신이 너무나 빛나서.
카메라 안의 모습 말고 진짜 나를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김독자.. 좋.. 아니, 사랑해."
"뭐라고?"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더 이상 내가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는데.
여자 친구가 생겨 버리면..
"수영아.."
하지만 그녀는 작가.
오직 한 소년을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한 소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3000편에 달하는 소설을 써 온 여자.
그런 여자의 고백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 사람은 내게 눈빛 한 번 주지 않았다.
".. 나도, 사랑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아니하였기에.
그 날부터, 하루를 술로 지냈다.
맥주, 꼬냑, 위스키, 보드카, 뭐든 상관 없었다.
"후으으.."
때로는 술을 너무 마신다는 주위의 타박이 오기도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이렇게라도 그 사람을 잊을 수 있다면.
아니잖아.
내가 잊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실망해 떠나주기를 바라는 거잖아.
그런데.. 또 왜..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 다음 날 구토를 하는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는 사람은.. 어째서 또 당신인 건데.
날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왜 항상 내 옆에서 빛나는 건데..
왜.. 닿지 못할 사람이..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나는.. 어떡하라고.
그렇게 갈팡질팡 시간을 보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결심했다.
끊어내야 했으니까, 내 사람이 될 수조차 없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어째서인지 그 사람은 아침 일찍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틀려 있던 TV에서 뉴스 속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시나리오에서 인류를 구해낸 지구의 영웅, 현재 한강에 떠오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니야.
그래, 그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잖아.
"네놈은 또 어딜 가는 거냐."
유중혁이 앞을 막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달렸다.
불안했다.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기분일까.
불확실한 불안은 곧 확실한 형태의 슬픔이 되어 다가온다.
"뭐야. 또 어딜 가는 건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불쾌한 확신만이 온 몸을 엄습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믿고 싶지가 않았다.
필사적으로, 내 안에서 떠오르는 불안한 상상들을 지우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이윽고 숨이 차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에야.. 나는 한 구의 시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 아니야. 거짓말이죠..?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말해.."
거짓말.
필사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아직 생각해본 적도 없는 질문이었다.
나의 별이 떨어질 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안 돼.."
애석하게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설화가 왔으면 살 수 있었을까? 유중혁이 왔으면 살 수 있었을까?
예전과 똑같이 겨우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후회할 뿐.
"눈 좀 떠 봐..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데.. 나는.. 모두가 여기에 살아 있는데.. 왜 당신만 떠나냐고.."
믿겨지지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밝게 웃으며 커피를 마셨던 그 사람이.. 죽었다고?
아니야..
우습게도,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어나 봐.. 제발.. 말할 게 있었단 말이야.. 부탁할게.. 안나.. 제발 일어나줘.. 장난 치지 말고.."
그 밤을 어떻게 지샜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무언가를 미친 듯이 썼다는 것과, 그러다가 잠들어 꿈에서 그녀의 얼굴을 봤다는 것 뿐.
그래.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꿈 속의 안나 크로프트가, 내 손을 한 번 잡고 웃는 얼굴로 떠나갔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에 대한 여러 기억이 떠올랐지만, 내 가슴을 가장 쓰리게 했던 건 그녀가 내게 건낸 꽃이었다.
"이게 무슨 꽃이야 안나?"
"아네모네라고 하던데요. 그냥, 예뻐서 한 번 사 봤어요."
푸르고 붉고, 흰 각양각색의 꽃들.
예뻤어.
정말, 당신처럼 아름다웠어.
또 다른 기억은, 그녀가 내게 건넨 꽃의 꽃말에 대해 찾아본 것.
"왜.. 이런 꽃을 줬어.. 왜 아네모네를 줬어.. 주황 튤립을 주지.. 보라 장미를 주지.. 아니면 백합을 주지. 왜.."
아네모네
학명: Anemone coronaria
꽃말: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 허무한 사랑, 이뤄질 수 없는 사랑.
하나같이 가슴을 후벼파는 말들.
오죽하면 그녀가 내게 이 꽃을 건넸을까, 생각하며.
나는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