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ありえない…”(있을 수 없어…)


그것이, 거울을 본 나의 첫 마디였다.




나는, 야한 게임, 그러니까 야겜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애초에 야겜을 왜 하느냐는 것부터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섹스가 하고 싶다면, 나가서 여자를 만나면 될 것이 아닌가.


왜 화면을 들여다보며, 내 이름도 제대로 불러줄 수 없는 2D의 여캐들이 헐벗고 박히는 걸 보며 내 자식을 흔들어야 하는가. 거기서부터 이해할 수가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야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과거형이 되었는가 하면, 그야, 지금 내가 그 야겜 속에 들어와버린 모양이니까.


어찌 알았는가 하니, 그야, 거울 속에 비친 지금의 내 모습은, 친구가 이거만 꼭 해보라고 건네줬던 게임 CD의 타이틀 히로인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




그것이 벌써 반년 전의 일이다.


나는 남자였다는 기억도 어느덧 희미해져 갈 무렵. 남자 주인공, 그러니까 나를 공략해야 하는 소년이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서, 이틀 뒤의 이 모습. 


“미안, 미안해. 넌 이제 나를 잊어버리게 될 거야.”


무슨 말이야.

ㅡ라고 생각했던 것도, 예전이었다. 이 짓을 벌써 12번째 하고 있다. 이 게임의 한 사이클은 2주다. 캐릭터 하나를 공략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2주. 즉, 이 모습을 12번째 보고 있는 지금, 내가 이 세계에 빙의된 지 반년이 지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게임의 남자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정령이라서, 인간과 인연을 맺으면 그 인간은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러니까, 얘가 특정 플래그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이 아이과 연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억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그냥, 게임의 첫날로 계속해서 돌아갈 뿐. 아무래도 이 소년은 나를 향한 일직선인 모양이었다. 나와 맺어지지 못하면, 게임을 계속 새로 시작할 정도로.


처음에는 당황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나를 향해 계속해서 사과하지, 눈을 떠보면 게임은 첫날로 돌아와있지, 주변 사람들도 처음 나를 봤을 때의 반응 그대로였으니까.


“다시 처음인가.”


어지간하면 공략집 좀 보지 그러냐. 그러면 일찌감치 끝날 텐데. 그러면 니가 보고싶은 H씬도 들어갈텐데.


나 좀 빨리 꼬셔주지.


내가 남자였다는 기억도, 어느 샌가 많이 희미해졌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내가 왜 남자에게 꼬심을 당해야 하는가ㅡ 라는,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이제 찾아볼 수 없는 내 이전 모습은 어느새 점점 사라져가고.

내게 온갖 진심을 내보이며 일직선으로 부딪혀오고.

내 기억이 사라져간다는 것에 진심으로 절망하고 슬퍼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 사랑에, 보답해주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닐까.




“응, 안녕.”


소년에게 나는 밝게 웃음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소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자길 알아보지 못하는 내 모습에 실망한 것이리라.


하지만 미안해. 나는 널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이 캐릭터는 널 몰라야만 해. 이번에는, 네가 플래그를 찾아줬으면 좋겠어. 이쯤 했으니, 네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난 내게 공략을 당해주고 싶거든.


내 동선은 항상 일정했다.

학교의 공주님이라는 별명답게 수업은 언제나 착실히.

테니스부라는 동호회 활동도 착실하게.

수업 후에는, 과자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확실하게.


그리고, 내 시야가 닿는 곳에는 언제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열정적인 모습. 플레이어의 분신이겠지만, 저 끈기에는 나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있잖아.”


“응?”


“나, 본 적 있어?”


“어머, 그런가?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테니스 연습을 끝내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서는 내게 소년이 쭈뼛쭈뼛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쩐지 이건 새로운 패턴이었다. 돌발적인 이벤트인 걸까. 하지만 이런 건 좋지 않아. 나는 어쩌면 소년이 기다렸을 법한 대답을 남겼지만, 그 이상의 여지는 주지 않았다.


내 뒤로 소년의 시선이 계속해서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힘내. 이번에는 꼭, 플래그를 찾아주길 바라.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소년은 플래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사흘만 더 지나면, 이번 회차 역시도 내가 고백을 받아들이지만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결말로 끝날 터였다.


그리고 오늘, 소년은 나에게 고백할 것이다. 나는 받아들일 것이고.

그리고 내일, 나는 소년과 데이트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레, 나는 약속의 나무 아래에서,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소년과의 기억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결말이니까.


“사랑해.”


소년은 내 앞에서 얼굴을 확 붉히며 진심을 고백해왔다.


“응, 나도 사랑해.”


이것만은 진심이었다. 싫건 좋건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대시를 받고, 12번의 고백을 받다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고백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이 고백이 끝나고, 만에 하나 진짜 엔딩이 나온다면 나는 이 소년과 살을 섞어야 할 터였다. 그게 그렇게나 싫었다.


그야, 나는 남자였는걸. 남자가 남자와 살을 섞는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ㅡ


“사실, 나도 널 많이 좋아해.”


이것은, 진심. 그리고, 게임에서도 나오는 대사.


“네가 고백해주기를, 기다렸어.”


이것도, 진심. 그리고, 게임에서도 나오는 대사.


“네가 나와 함께 해주기를, 나도 바라고 있었어.”


이것 역시, 진심. 그리고, 게임에서는 안나오는 대사.


“이번에야말로 너와 함께 할 수 있기를, 나는 바라고 있어.”


이것 역시, 진심. 그리고, 게임에서는 안나오는 대사.


나 하나만을 위해, 12번이 지나 13번인 지금까지 진심으로 부딪혀오는 이 소년에게, 이제는 나도 그에 맞게 보답해주고 싶다.




다음날.

우리는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이제 친구에서 연인이 된 나와 소년, 우리는 유원지에서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회전목마를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귀신의 집에서 비명을 지르며 소년에게 안겨보기도 하고. 


빙의가 된 후 어쩐지 너무 맛있는 크레페를 사서, 하나를 들고 둘이 나눠먹기도 하고. 


“오늘, 즐거웠어.”


“그러네, 너와 함께여서 더 즐거웠던 거 같아.”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어느 샌가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유원지에 내려앉는 석양은, 그 빛이 붉게 물든 것 같아 아름다웠다.


대관람차는 느리게 돌아간다. 한바퀴 도는 데에 30분이라고 했었던가. 그만큼 크고, 거대한 대관람차.


제법 높이 올라와, 석양이 내리쬐는 빛이 정면으로 들이쳤다. 저 멀리, 바닷가가 보인다. 바다 위로 가라앉는 태양이, 그 단말마처럼 내뱉는 석양.


“저기.”


“응.”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석양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년의 부름에 대답했다. 한동안 말이 없다. 불러놓고 말을 안하네ㅡ 하고 쳐다보니, 소년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불렀지 않아?”


“맞아. 불렀었어.”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


“응. 있긴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뭐야 그게.”


풋, 하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넌 이런 면이 매력적이야. 감정을 숨길 줄 모르고, 늘 나만을 바라봐왔지. 게임 캐릭터에 불과한 나를, 이렇게 진심으로 꼬시고 싶어한다는 게ㅡ 어떻게 보면 참 웃긴 일인데.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뭘?”


하지만 지금까지의 루프에서 이런 대화는 없었다. 그저, 여기서 서로 좋아한다는 키스를 나누는 것이 전부.


그리고 다음 날, 약속의 나무 아래에서ㅡ


“나, 이게 12번째야.”


응?


“너에게 고백하고, 너와 사귀게 되고, 너와 데이트를 하는 게, 12번째야.”


이건 지금까지의 이벤트에 전혀 없었던 일인데.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소년을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믿지 않을지도 몰라. 이게 무슨 소리냐, 할지도 몰라. 날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었어. 이건 그냥 게임일 뿐이지만, 나는 널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저, 저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사실은 너무나 잘 알지만. 하지만 여기서 응, 하고 대답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에, 애써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플래그를 찾아내지 못했어. 네 기억을 지켜낼, 그 플래그를 찾아내지 못했어. 넌 이번에도 나에 대해 잊어버리게 될거야. 나와 함께 한 시간들을, 모두 다 잊어버리게 될 거야.”


“자, 잠깐만.”


“미안해. 내일, 낮에. 약속의 나무 아래로 나와줄 수 있을까?”


“으, 응.”


덜컹.

대관람차가 어느 새 한 바퀴를 다 돌고서 지면에 안착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 문을 열고서 내게 손을 내밀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소년이 말하지 않아도, 약속의 나무 아래로 나가야 할 시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한다. 브래지어를 차고, 팬티를 입고,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프릴이 잔뜩 달린 핑크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조그만 팬더 모양 브로치가 달린 미니 핸드백을 메고서, 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소년은 이 게임이 계속해서 루프가 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소년은 플래그를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내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내가 진정한, 히로인이 되는.


그런 플래그를, 소년은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기다릴게.

몇 번이라도, 내 기억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면서.

네가 마침내 내 곁으로 돌아오기를.


나를, 진정한 히로인으로 만들어주기를, 기다릴테니까.


마음의 각오를 하고서, 나는 집을 나섰다.


약속의 나무까지는 걸어서 20분. 천천히 길을 걷는다. 4월, 벚꽃의 계절. 토리이 위로 우거진 벚꽃들이 춤을 추며, 벚꽃잎이 그 춤사위를 따라 하늘하늘 내달렸다. 그 사이를 걷고 걸어, 약속의 나무로ㅡ


소년은, 나무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게임은 엔딩으로 향해간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트루 히로인이 아닌, 그저 타이틀 히로인이기 때문에, 1회차에서는 아무리 나를 공략해도 트루 엔딩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소녀를 먼저 공략하고서, 그 다음에서야 나와 함께하는 엔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소년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일직선. 나 하나만을 위한 일직선. 보답 받을 길이 없는, 일직선. 그 일직선은, 소년은 주위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기만 했다.


“왔구나.”


“응.”


“미안해.”


“어제 한 이야기 말이야?”


“응. 미안해.”


“이제, 나는 널 잊어버리게 되는 거야?”


내 물음에 소년은 서글프게 웃어보였다. 긍정의 웃음이리라. 나는 가슴 한켠이 아파왔다. 이 소년은, 언제까지 루프를 탈 수 있을까. 소년이 게임을 접어버리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나는 계속해서 이 게임 속에서, 소년이 다른 소녀를 공략한 후 내게 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아무리 해봐도, 플래그를 못찾겠어.”


“...”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벚꽃이, 소년과 나 사이로 흩날리듯 몰아쳐왔다.


“있잖아.”


“응.”


“나, 다 기억하고 있어.”


해서는 안될 말이다. 이 게임의 근간을 뒤흔드는 말이다.


“네가 나를, 몇번이나 공략해왔다는 거.”


해서는 안될 말이다. 나라는 히로인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말이다.


“다른 소녀를 먼저 공략해야, 날 공략할 수 있다는 거, 계속 말해주고 싶었어.”


소년은 잠시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큰 눈에 넘실대는 눈물이, 소년의 심성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파왔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


소년의 말은, 내게도 뜻밖이었다.


“그럼에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어떻게든, 너만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계속, 계속해서 고민했어.”


“그랬구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실패인 것 같아.”


이제, 1분. 게임 내 이벤트 타임으로, 1분이 지나면 이 씬이 끝난다. 그리고, 다시금 처음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나는 더 찾아볼거야. 나는 너 때문에 이 게임을 시작했고, 네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어.”


50초.


“너만을 생각했어. 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래. 너 아니면 의미가 없어.”


40초.


소년의 진심에 응하듯, 내 입이, 제멋대로 떠들어댄다.


“나도 그랬어. 줄곧 너를 생각했어.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듯한 네 모습에, 어쩌면 너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으니까.”


30초.


“나도 어느 순간부터, 널 사랑해. 나도 너와 계속 함께 하고 싶어.”


20초.


“그러니까, 꼭 찾아내줘. 내가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그 플래그를.”


10초.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해.”


3초.


이제 곧, 화면이 꺼지며 다시 첫날로ㅡ




돌아가지, 않았다. 이벤트 타임은 끝났다. 하지만 첫날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의 곁에는 여전히 약속의 나무가 서있고, 그 사이로 벚꽃이 날리고 있었으며, 소년과 나는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나, 너 기억하고 있어.”


“나도, 나도 너 기억하고 있어.”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루프하지 않았다. 이벤트 타임이라는, 항상 보이던 시간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ㅡ


뒷일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내 다리가, 내 의지보다 먼저 움직여 소년을 향해 달렸다.


소년이 팔을 벌린다. 폴짝 뛰어, 소년에게 안겨들었다. 벚꽃향이 진하게 날아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는 사라지지 않았어. 우리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어. 괜찮아. 우리는ㅡ


서로를, 기억하고 있어.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 속에서, 울먹이며 소년에게 말했다.


“이거, 13번째야. 이 멍청아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