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정말 미안해. 내가 너한테는 정말 못할 짓을 했어.”


내 눈 앞에서 경멸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한 여자. 백다은


“너 그냥 내 눈 앞에서 안 나타나면 안 될까? 널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려. 역겹다고!! 지금 이 따구로 사과한다고 내가 받았던 상처들이 나아질 것 같아? 꺼져!! 꺼지라고 시발새끼야!!”


나는 계속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 백다은의 앞에 있었다.


“미안해. 사과가 많이 늦었지. 너한테 하루라도 빨리 사과했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됐네..”


화가 잔뜩 난 듯, 그녀의 얼굴을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붉었다.


“뭐? 하루라도 빨리 사과를? 내가 살다 살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 나를 생지옥으로 떨어트려 놓고서도 방관하던 네가 이제 와서? 난 너 절대 용서 안할 거야. 시발 죽을 때까지 저주할 거라고.”


그녀의 증오는 생각보다 더욱 심했다. 만약.. 지금 이렇게까지 그녀가 상처를 받을 것을 알았다면 나는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


고등학교 시절. 연애는 하는 놈들만 한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남녀공학이었기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입학했으나, 나에게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내가 보기엔 미친 친구놈도 잘만 사귀는데 나는 왜 못 사귀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지내던 어느 날.


여사친이 엄청나게 많은 인싸놈이 나를 불러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인싸놈은 내 목에 팔을 걸치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야, 내 친구가 너한테 관심 있다는데?”


“뭐라고? 시발 내가 잘못 들었냐?”


“아 ㅋㅋ 진짜라고. 장난 아니다.”


“장난이면 너는 뒤졌지. 그래서 누군데?”


“그게.. 그 여자애는 너 좋아하는 거 알리고 싶어하지는 않아서.”


“그래놓고 나한테 와서 알려주는 이유는 뭔데. 괜히 설레게.”  


“내가 보기엔 걔 엄청 괜찮은 앤데, 아까워서. 너도 여친 만들고 싶어 했잖아.”


“그거야 그렇지. 근데 니 기준에서 괜찮다면 좀..”


“아니. 왜? 내가 너보다 여자도 많이 만나봤는데 내 안목 무시하는 거임?”


“아 그래서 만나는 여자애들마다 예쁘다고 칭찬하는 거야?”


“그.. 그건”


“인싸 나름의 고충인가보네.”


“....”


인싸놈은 인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선의의 거짓말도 하는 것이다. 적절하게 눈치를 보며 예쁜 여사친한테는 못생겼다고, 못생긴 여사친한테는 예쁘다며. 매장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어떻게든 넘어간 모양이었다.


어쨌든 인싸놈의 안목을 믿을 수는 없었기에 물어보았다.


“그래서 누군데.”


“아니, 내 말 못 들었냐? 말 못한다고”


“말 못하면 카톡으로 해. 그럼 되겠네. 내가 입 하나는 또 장난 아니게 무겁거든. 오늘 내로 보내놔라~”


그렇게 내 목에 걸쳐져 있던 팔을 내려놓고 툭툭 치고 반으로 다시 향했다. 평소처럼 친구들이랑 놀았지만 내 속은 달랐다.


‘드디어 나도! 지금 같이 노는 친구들은 모르겠지?’


같이 노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월감이 들기도 하고 어깨도 으쓱했다. 나를 좋아해준다는데 싫어할 리가 없었다. 친구들이랑 그렇게 투닥거리며 공부를 하니 어느새 야자까지 끝나있었다.


집에 도착하고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자 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아까 그 인싸놈


인싸놈 : 아 이거 진짜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

나 : 말 안한다니까?

인싸놈 : 얘 진짜 착한 애라서 니가 이 사실 안다고 하면 엄청 상처받을 거야. 내가 니 친구라서 걔가 나한테만 알려줬거든.

나 : 그래그래 상처 안 받게 나만 잘 기억할게.

인싸놈 : 후.. 진짜 비밀이다?

나 : 알았다고 ㅋㅋㅋㅋ

인싸놈 : 백다은

나 : ....

인싸놈 : 오 알고 있냐?


알고 있냐고? 2년간 학교생활을 하면서 진짜 처음 들어봤다.


나 : 아니. 1도 모름. 사진 있냐?

인싸놈 : 걔 부끄럼 많이 타서 사진 안 찍음.

나 : 아니 그러면 걔는 내가 왜 좋다냐? 이유가 도대체 뭔데.

인싸놈 : 그게.. 

나 : 그게 뭐. 상남자 어디 갔냐. 왜 이렇게 말을 끌어 오늘따라.

인싸놈 : 그냥 시선이 계속 간다하더라.

나 : ???

인싸놈 : 자기도 잘 모르겠데.

나 : 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외모를 보고 반했다면 기분이 좋았을 테지만, 본인도 모른다고 하니 뭐.


인싸놈 : 그래서, 잘 해볼 마음이 있냐?

나 : 내가 아는 거라곤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여자, 이름이 백다은이라는 거 말고는 없는데?

인싸놈 : 그래. 알아서 잘해봐라. 괜히 내 얘기 꺼내지 말고.

나 : 그 정도 눈치야 있죠 형님. 들어가십쇼.

인싸놈 : ㅂ


백다은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단답만 하는 놈을 바꿔 놓은 것일까. 가벼운 남자의 대명사인 저 친구를 저렇게까지 무겁게 만들어버리다니. 


내일 학교에 가면 확인해봐야겠다. 백다은이 누군지.


.

.

.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대충 개고, 엄마가 차려놓은 간장계란밥을 입으로 꾸역꾸역 넣었다. 원래라면 귀찮아서 물로만 머리를 감고 가지만, 오늘은 특별히 샴푸와 린스까지 풀로 샤워를 했다.


그야 나를 좋아한다는 여자애를 보러 갈 건데 이 정도 예의는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사놓고 귀찮아서 몇 번 쓰지도 않은 화장품도 덕지덕지 바르고 학교로 나섰다.


아 언제쯤 점심시간이 될까. 겉보기로는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온갖 궁금증이 나를 괴롭혔다.


아 엄청 예쁜 애면 어떡하지? 결혼은 언제하고 애 이름은 또 뭐로 하고.. 대충 이런 상상들을 하고 있자 생각보다 빠르게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인싸놈은 다른 반이어서 같이 점심을 먹지는 않는데, 오늘은 내가 인싸놈에게 다가가서 같이 밥을 먹자고 권했다.


“뭐야. 평소에는 찾아오지도 않던 놈이.”


“형님 레이더 기가 막히잖아요.”


분명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 괜히 나랑 있으면 의심 받을 게 분명한데. 그러면 줄만 같이 서고 밥은 따로 먹자.”


“콜”


“형님만 따라오면 볼 수 있을 거다.”


이제 고3인 나는 단점만이 가득한 남자였다. 대학의 압박. 부모님의 압박. 수능의 압박.


초등학생 때만 해도 ‘고등학교 언제 가냐..’ 했는데 벌써 수능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나마 고3이 되서 장점이라면 급식을 빨리 먹을 수 있다 정도? 급식이 어디든 그렇겠지만 맛이 있는 건 아니지만 빨리 먹으면 그만큼 자유시간이 늘어나니까 그게 좋았다.


인싸놈과 공부는 좀 했냐. 응 안했어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있자 어느새 우리 앞까지 줄이 줄어들었다.


결전의 순간. 급식을 다 받고나서 천천히 자리를 탐색하는 척을 하자, 인싸놈이 귀에다가 레이더 분석결과를 읊고는 사라졌다.


“11시 방향. 흰색 슬리퍼. 긴 머리”


“라져 댓”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 그 백다은이라는 애가 잘 보일만한 곳에 앉았다.


밥이 넘어가는 지 안 넘어가는 지도 모르겠지만 꾸역꾸역 먹으며 레이더를 돌리기 시작했다.


흰색 슬리퍼에.. 긴 머리라..


찾았다. 멀리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는 확인했다.


눈에 새겨 넣고 이제는 밥을 먹으려는 찰나, 눈이 마주쳤다. 빼도 박도 못하게 이건 무조건 눈이 마주쳤다.


이 먼 거리라 하더라도 확신할 수 있었다. 괜히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밥을 음미하려고 노력했지만 아까의 떨림이 아직 남아있었다.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우사인 볼트. 미친 듯한 속도로 밥을 먹고 급식소를 나왔다.


“후.. 위험했네.”


“뭐가 위험해?”


“으아악!”


혼잣말을 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대답을 했다. 뒤를 쳐다보자 아까 백다은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흰색 슬리퍼를 신고 긴 머리인 백다은.


“어.. 안녕?”


“응. 안녕”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리가 언제 본 사이라고 이렇게 웃으며 인사를 할까.


“저기.. 넌 누구야? 난 얀붕이라고 해.”


“응 알고 있어. 난 백다은이야.”


드디어 백다은을 만났다. 가까이서 본 백다은은 나에게 놀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오목한 이목구비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하얀지 태양이 피해가기라도 한 듯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얼굴은 귀운 상이었다. 


약간 떡 같다고 해야 하나? 이건 놀리는 게 아니라, 뺨이 모찌를 보는 것처럼 부드러워 보인다는 칭찬이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어떤 사람들이 봐도 귀엽고, 예쁜 애였다. 


“?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아.. 기분 나빴으면 미안. 난 이만 갈게.”


어떻게든 인사도 했으니 퇴각이다. 더 이상 둘이 있으면 어색한 분위기만 풍길 게 분명했으니.


.

.

.


“야 백다은 걔 엄청 귀엽더라?”


어느 순간부터 귀에 저런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좀 논다하는 여자애들이야 친구들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숨겨진 미인이라고 하니 모두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 얼마나 귀엽다고 그러는 건데..” 라고 말했던 친구가 쉬는 시간에 백다은의 반에 잠시 다녀오더니


“쒸불,, 오늘부터 우리 다은이,, 지지합니다,,,” 이렇게 바뀔 정도로 남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나야 인사 말고는 다른 것들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남자애들한테는 귀엽다는 소문이 다 퍼진 모양이다.


백다은은 어차피 나를 좋아해서 허탕일 텐데 라고 생각하며 백다은에게 말을 걸러 가는 남자애들을 쳐다봤다. 


근데 백다은은 사람을 쳐낼 줄 모르는 것일까. 어색해하긴 하지만 다가오는 남자애들에게 정성스럽게 대답을 해줬다.


그 꼴이 왠지 보기 싫었다.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해놓고 왜 저렇게 다른 남자랑 얘기를 많이 하는지. 나도 귀엽다고는 생각하고 친구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근데 정작 나를 좋아한다는 본인이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얘기하고 있지를 않나.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존나 꼬왔다. 다른 남자애들도, 백다은도


그래서 반에서 그 사실을 말했다.


“야, 백다은 걔 있잖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현재 화재의 중심인 백다은의 이야기가 나오자 반의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나 좋아한다?”


그 상태로 반은 패닉 상태.


진짜냐고 묻는 친구도, 구라 ㅈ까세요 라고 말하는 친구도, 옆 반에 소문을 내러간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은 다 퍼졌다.


‘백다은, 쟤 김얀붕 좋아한다던데?’ 이런 식으로


인싸놈은 그 소문을 듣자마자 나에게 찾아왔다.


“야. 이 시발놈아.”


“왜 그래.”


“나는 니 존나 믿었었다. 니가 입 무겁다며.”


“아니, 너도 알잖아. 갑자기 백다은 걔 떡상한 거.”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나를 좋아한다 해놓고, 다른 남자랑 시시덕대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은 꼴은 아니더라.”


그 상태로 빡친 인싸놈한테 존나 쳐 맞고 선생님께 둘 다 끌려갔다.


야자시간, 다른 친구들은 모두 반에서 공부를 하고, 교무실 앞에 나와 인싸놈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야, 뭐 나야 팰 거 다 팼으니까 이제 풀자.”


“하.. 그래 맞기만 한 건 억울한데, 이렇게 팬 이유라도 들어보자. 나보다 그 여자애 소문이 더 중요했나봐?”


“어. 내가 언제 고추새끼 걱정하는 꼴 봤냐?”


“그래서 본론이나 얘기해봐.”


“소문이 와전된다는 말은 알지? 우리 범생이 씨”


“그게 왜.”


“시발 니가 그거 말한 거 때문에 다은이 인생 좆되게 생겼다. 누구 덕분에”


“...”


“니가 말한 거처럼 다은이 떡상했지. 그래 좋아. 원래 친구도 많이 없는 앤데 친구 많이 생기면 좋지. 근데 그 꼴 보는 다른 여자애들은 기분 좋겠냐?”


“자기네들이랑 친하지도 않은데 남자애들 스포트라이트 존나 받고, 존나 꼴뵈기 싫겠지.”


“근데 하필 니 새끼가 입을 열어서, 다은이 입장이 좆이 된 거지.”


“너라는 좋아하는 새끼가 있는데 왜 다른 남자들이랑 잘 지낸 거지? 어, 저년 어장관리한 거야? 얘 완전 골빈년이었네 같은 내용으로 소문이 와전됐다고. 이제 이해가 되냐?”


“....”


남자에 비해서 여자들끼리는 신경전 같은 것이 있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전개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해했으면 마치는 대로 다은이한테 가서 사과해라. 나는 다 사과했다. 니 새끼 패기 전에 미리 용서를 빌었어. 이렇게 보면 너나 나나 마찬가지네. 둘 다 입 존나게 가벼우니까.”


“야! 너희들 뭘 떠들어!”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나와서 다시 훈화를 시작하셨다.


야자가 마치고 정말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찾아갈지. 물론 찾아가는 게 맞는 일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백다은이 왕따를 당하는 데에 가담한 것이 사실이니까.


근데도 나는 도피했다. 그 결과로 백다은은 가장 중요한 고3 시절에 왕따로 인한 자퇴


내가 벌인 짓치고는 너무나도 결과가 참혹했다.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만 안일하게 생각했다.


후회를 하면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하지만 수능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어서 내 발등에 떨어진 불만 처리하기에도 나는 바빴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백다은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사과를 하기로 마음 먹고 백다은을 찾아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 :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인싸놈 : 난 니 같은 친구 둔 적 없다. 그 날 사과하라고 분명히 얘기했잖아.

나 : 그건 뭐라 할 말이 없네. 그 때는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다 틀렸더라.

인싸놈 : 그래서 이제 니 새끼 좀 여유롭다고 사과하고 넘어갈 생각이냐 이 시발롬아?

나 : 니 신뢰를 다 저버린 거 알아. 이미 늦은 것도. 그러니까 더더욱 사과를 하고 싶어.

인싸놈 : 걔 만나기 전에 아무래도 나부터 만나자. 정신 상태 확인해보고 결정한다.


그렇게 또 놀이터에서 존나 쳐 맞고 나서야 인싸놈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새끼, 맷집은 또 왤케 좋냐.”


“누구 덕분에.”


“이제 집으로 가봐라.”


“어디 사는지 말 정도는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이제 입 무겁게 살려고. 카톡으로 보내줄게.”


————


“꺼지라고! 꺼지란 말야!”


“다 내 잘못이야. 네가 잘못한 건 단 하나도 없어. 네가 그런 꼴을 당한 것도 다 내 책임이야. 정말 미안하다.”


“그래 다 네 탓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네 탓이라고!”


이제는 거의 절규하다시피 소리치는 백다은. 여태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 미안해...”


내가 할 말이라곤 사과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진정한 백다은은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따라와.”


그 말을 듣고 몸을 일으키자 다리가 저려왔다. 계속 무릎을 꿇고 있어서일까. 움직일 수가 없어 가만히 서있자 백다은이 나에게 다가와 부축을 해준다.


“아.. 아니 괜찮..”


“잔말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무겁디 무거운 분위기에서 걸음을 계속하자 나온 것은 아파트였다. 분명히 인싸놈이 알려줬던 주소, 백다은의 집인 듯하다.


아까 사과를 한 곳은 이쪽으로 오던 도중에 백다은을 만난 곳이었다.


“왜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거야?”


“미안하다며. 내가 고통 받은 만큼 너한테 똑같이 돌려주려고.”


“....”


이미 인싸놈한테 맞고 오긴 했지만, 당사자에게 맞아야 벌이다. 백다은의 집으로 들어서니 집안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서 입을 열었다.


“백다은. 미안한데 불 좀 켜주면 안될까?”


“닥쳐. 아직도 나한테 사과 말고도 할 말이 남았을까?”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닥쳤다.


신발을 벗고 나자 백다은은 내 소매를 잡아 끌어 어딘가로 안내했다. 아까까지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으로 와서인지 나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백다은은 잘만 보이나보다.


덜컥,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찰칵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불이 켜지고 백다은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입 꼬리는 올라가 있었는데도, 눈만큼은 냉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드디어”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겠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너랑 내가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이 날을.”


“너를 원망하기는 해. 나를 안 구해줬으니까.”


“근데 꾸준히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더라. 그 썅년들이 문제지.”


“너는 나한테 질투한 거지? 다른 남자들이랑 잘 지내니까.”


“움찔거리는 거 보니까 맞네.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한다고 소문까지 낸 거고.”


“그래 맞아. 나 너 좋아했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학교 다닐 당시에는 별로 친구도 없고 그냥 그저 그렇게 지냈었어.”


“반에서는 짜져있고, 뭐 선생님이 걱정하시기도 했는데 내가 딱히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그냥 외모만 볼 만한 떨거지였지.”


“근데, 너를 봤다?”


“진짜 잘 모르겠는데, 너를 보니까 뭔가 확하고 오더라.”


“너를 처음 본 그 다음 날부터 항상 내 시선은 너에게 향했어.”


“친구들이랑 투닥거리면서 노는 것도, 웃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보기만 해도 행복한 거 있지? 딱 그 때쯤 깨달았어.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좋아했었지. 사랑했었지. 나한테 있어서 너는 운명적인 상대였어.”


“너랑 급식소에서 눈을 처음 마주쳤던 그 날 기억해? 나 그때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아?”


“나 그렇게 야한 여자는 아닌데, 아랫 쪽이 쿵쿵하고 울리더라.”


“근데 네가 빨리 먹고 도망치니까, 나도 모르게 쫒아갔어.”


“그렇게 인사하고 서로 소개까지 했잖아?”


“진짜.. 너무 좋아서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어. 다시 너랑 대화할 수만 있을 것 같았거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파리들만 꼬이더라? 관심도 흥미도 없는 것들이 붙더라고. 난 너 밖에 흥미 없는데.”


“뭐 니 입을 통해서 소문도 그렇게 나고, 딱히 상관없었어. 아니 오히려 좋았지. 파리들은 물러나고 내가 너 좋아한다는 것도 사실이었잖아.”


“근데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어. 뭐 이것도 예측했어. 근데 내가 정작 상처를 받은 사실이 뭔지 알아? 내가 자퇴까지 하게 된 이유가 뭔지 아냐고.”


“얀붕이 네가 나를 안 바라보잖아.”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내고, 내가 왕따까지 당하게 됐는데 그걸 알면서도 나를 무시했잖아.”


“너무 밉더라. 지금은 너도 질투했었구나 하고 이해하는데도 그 때는 너무 힘들었어.”


“내 운명의 상대가 나를 오히려 무시하는 상황이니까.”


“대화라고는 나눈 것도 쥐꼬리만 하고, 얼굴을 직접 마주한 적도 거의 없다시피 하잖아. 근데도 그렇게 큰 상처를 받았어. 그만큼 너를 좋아했다고. 사랑했다고.”


“그래서 너가 존나 싫어. 이해는 하는데 존나 싫어. 시발 존나게 싫다고.”


“왜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데? 인사 그 잠깐 한 거 가지고 존나게 사람 행복하게 해놓고, 왜 그렇게 나를 무시했냐고 시발놈아.”


“존나 싫은데 계속 생각나는 기분을 알아? 자퇴하고 나서 이 컴컴한 방에서 한 거라곤 니 생각밖에 없어.”


“그래. 너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애증이네. 그래 애증.”   


“지금 너랑 나랑 내 방에 있다니 믿기지가 않아.”


“그렇게 보고 싶어할 때는 안 나타나더니, 이제 나타났으니까.”


“이 상황이 존나 역겨운데 존나 기쁘다. 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러니까 책임져.”


쮸릅-쮸웁


입술이 닿고


사르륵


옷이 벗겨지고


스윽스윽


백다은의 손이 내 몸을 희롱하고


철퍽


두 몸이 합쳐졌다.


.

.

.


“야, 더 세우라고. 너 할 수 있잖아.”


“다은아.. 나 이 이상은 안될 것 같아.”


짝-


뺨이 얼얼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좋은 말할 때 빨리 세워. 그 때 나 무시했는데, 지금이라도 무시하지 말아야지.”


“벌써 우리 다섯 번은 넘게 했잖아. 다은아. 제발..”


“내가 집에 들어올 때 분명히 말했지. 닥치라고.”


짝- 


이번엔 반대쪽 뺨이 얼얼하다.


“넌 그냥 이대로 있으면 돼. 나한테 정말로 죄책감을 가진다면 세우기나 해.”


“...”


.

.

.


“하.. 하악.. 시발 존나 좋다 진짜.”


“나 입도 험해졌지? 너 원망할 때 다 익힌 거야.”


“너를 욕하면서 혼자 나를 달래고, 너를 그리워하면서도 달랬어.”


“아 참. 나 너한테 줄 벌이 생각났어.”


“....”


“나랑 이대로 계속 살자.”


“이대로 벌은 끝난 거 아니야?”


“끝나기는 무슨. 나는 너 때문에 자퇴도 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


“그래서.. 같이 살자고?”


“응. 너를 보면 역겹긴 해도, 그래도 행복해. 텅 빈 방에 혼자 있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좋아.”


“미안.. 무리야. 이렇게 이어진 관계가 오래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


“정말? 정말로 오래 못갈까?”


“....”


“그럼 됐어. 돌아가.”


그 말을 듣고서 굉장히 의아했다. 나랑 관계를 할 때 사랑한다고 싫어한다고 얼마나 외쳐댔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일까.


바지를 입고 어두컴컴한 집을 나선다. 관계를 몇 번이나 맺었는 지 기억도 안날 만큼 해댔으니 거기도 많이 따가웠다.


————


띵-동




 









띵-동








띵-


“누구세요?”


문을 열자 앞에는 백다은이 서있었다.


“나야.”


“어.. 어떻게 우리 집을 안 거야?”


“그건 알 필요 없고, 줄 선물이 있어서 왔어. 아니 벌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뒤로 숨기고 있던 양 손을 내 눈 앞으로 내미는 백다은.


그 두 손에는 빨간 선 두 개가 그어진 무언가가 들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