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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28편 입니다.



연합 파트는 여기서 끝입니다.

히힉 신난다

다음 파트는 좀 빨리빨리 이야기를 진행해야겠네요.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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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8.



 불타버린 잔해에 남은 빛깔은, 고유의 원색조차 흩어져버린 잿빛.

 시추선을 둘러싼 빙하는 바로 그 색을 띄고 있었다.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 외딴 얼음의 섬은 시시각각으로 거멓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북상하는 태풍이 바다를 끝없이 채찍질해 밀어내고 있었기에.



 그 한복판에, 거조의 알처럼 생긴 순백의 얼음 구체가 박혀 있었다.


 알의 껍질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얼음으로 된 구체가 부스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둘은 서로를 부서져라 끌어안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서늘한 얼음에 등을 댄 채, 소녀는 그 위에 엎드려 눈을 감은 채.

 둘의 몸 사이에는 바람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을 듯했다.


 몸이 부스러질 듯한 통증을 참고 민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으윽… 누님. 정인 씨.”

 “…”



 정인의 안색은 혈색 하나 없이 창백했다.

 코와 입, 감은 눈 아래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와 대조되는 새하얌.

 오밀조밀한 얼굴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평온해 보였다.

 잠든 사람의 안락한 낯빛보다는, 관에 들어간 망자의 얼굴에 맺힌 정적에 더 가까웠지만.


 민우는 그녀의 경동맥을 짚으려다 신음을 흘렸다.

 뼈가 완전히 조각난 듯, 왼팔은 직각으로 꺾인 채 밑으로 늘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고개를 숙여 귀를 그녀의 목덜미에 댔다.


 심장이 피를 힘겹게 펌프질하는, 조그맣고 느린 소리.

 긴장으로 격하게 귓속에서 쿵쿵거리는 자신의 박동과는 정반대.

 아직 살아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고동이었다.



 민우는 그나마 온전한 팔꿈치로 몸을 기대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추선의 하부선체를 둘러싼 널찍한 얼음덩어리.

 추락한 위치 바로 옆에는 작은 배가 얼음 한가운데 고정되어 있었다.

 상부가 밀폐된 폐쇄형 구조의 구명정.


 그는 어쩌면 정인이 노리고 이쪽으로 떨어뜨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팔이 부러진 자신과 다리가 없는 그녀가 저 구명정을 어떻게 바다까지 옮길지.

 구명정에 과연 연료는 제대로 채워져 있을지.

 설령 옮긴다 하더라도 지르콘이 추격해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바다로 어떻게 나간다 한들 이 풍랑 이는 바다에서 어떻게 육지까지 나아갈 것인가.

 천운이 따라 뭍에 도착해도, 그곳이 사람 사는 곳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한탄이 그의 입에서 저절로 새어 나왔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신 겁니까. …정인 씨.“



 위험천만한 도박을 한 끝에 맞이한 최악의 상황.

 그는 정인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천운이 따라 살긴 했으나 그 뿐.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지르콘에게 항복하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부산으로 가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 터였으니.


 그러다 그는 문득 자신과 정인이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지에 생각이 미쳤다.


 40미터.

 김천에서도 그 높이에서 떨어져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농가 위에 떨어졌고 지금은 아무런 완충재 없는 빙판.

 원래라면 햄버거 패티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민우는 삭신이 쑤시긴 했으나, 이미 부러진 왼팔을 빼면 새로 다친 곳은 없는 상태.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기화되어 사라져가는 얼음조각이 들어왔다.



 “이건…?”



 둘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흩어져 있는 얇은 파편들.

 마치 계란을 망치로 내려쳐 산산조각낸 광경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하늘 위에서 외침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살아있냐!”



 그와 동시에 단망토를 휘날리며 착지한 제복 차림의 여자.

 옷에 묻어 있던 포르네우스 기름이 주변에 떨어지며 고약한 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민우는 무의식 중에 정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릴 마무리하러 온 겁니까?”

 “그럴 작정이었으면 보호막도 안 걸었지. 혹시나 늦었나 싶어서 마음 준비도 했는데 다행이군.”



 역시 지르콘의 마법이었나.

 그리 생각하면서 민우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살아서 다행이라는 듯한 대답.

 반대로 표정은 차게 굳어 있었다.


 그에 담긴 감정은 민우가 읽어 들이기엔 불분명했다.

 쓸데없는 트러블을 회피한 직업인이 한시름 놓은 건지,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한 건지.


 지르콘은 모터보트를 흘깃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걸 타고 도망칠 셈이었나? 여긴 육지로부터 300km는 떨어져 있는데. 이런 악천후에서 좋은 선택이라 할 순 없겠군.”

 “…”



 한숨을 쉬며 그녀는 둘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빙하가 진동하면서 민우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이윽고 넓은 원판 모양으로 뚝 떨어져 나와, 수평을 유지한 채 공중에 뜬 얼음덩어리.

 자칫 움직였다간 미끄러져 정인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민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보다는 허무함과 좌절감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괜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약한 운명이라도 들러붙은 것처럼, 이토록 처참하게 실패할 줄 알았다면.



 ‘어디서 잘못됐을까. 좀 전에 정인 씨를 설득하지 못했을 때? 연합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했을 때? 주나은을 소개해줬을 때? …아니면,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녀의 삶에 자신 따위가 얽혀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였을지도.

 초인이라면 모르되, 한낱 범용(凡庸)한 인간이 감히 떨어지는 별의 궤적을 틀 수는 없는 법이니까.

 같이 지상에 추락하여 잿더미가 될 뿐.



 ‘만일 내가… 그냥 외팔이 퇴역장교, 입만 산 마약상이 아니라, 좀 더 잘나고 훌륭한 인간이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까?’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잘못한 선택, 망쳐버린 결과, 비틀린 경로를 걸어온 인생은 되돌릴 수 없다.

 그저 그 부산물을 걸머진 채 이정표 없는 광야를 끝없이 헤매어야 할 뿐.

 외팔이가 되었던 자신, 외다리였던 그녀가 그래야 했듯이.

 앞으로도 그래야 하듯이.


 하지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광야가 아닌 막다른 골목의 끄트머리.

 부산으로 끌려가면 자신은 마약 사범으로, 정인은 간첩으로 처벌받으리라.

 잘해봐야 십 년 이상의 징역, 높은 확률로 교수형.

 무엇보다 부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녀가 버틸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했다.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납치된 그녀를 구출했을 때와는 다르게,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민우는 자신의 품에 있는 정인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화끈거리는 눈시울을 감추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녀의 생기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미지근한 돌풍이 끝없이 둘의 몸을 흔들어 댔다.



 잠시 후 민우는, 얼음 원반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았다.



 “…”



 조심스럽게 눈을 뜬 민우.

 지르콘은 고민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품에 안긴 정인을.


 이 여자는 또 뭐하는 짓인가.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정인 씨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었지.

 이 자리에서 그녀가 죽는 걸 그렇게 보고 싶다는 말인가.


 문득 그런 불합리한 분노를 느낀 민우는 이를 악물고 으르렁댔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응?”


 “끌고 가려면 빨리 끌고 가라고! 재판에 넘기든 그냥 즉결처형하든, 마음대로 하란 말이다, 씨발!”
 “왜 욕하고 지랄이야? 기다려 봐. 생각 좀 하게.”



 퉁명스러운 지르콘의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우는 악담을 멈추지 않았다.



 “기다리고 염병이고 할 게 뭐가 있어? 왜, 정인 씨가 죽는 모습을 그렇게 보고 싶냐? 아주 악취미가 다 됐어, 한송이! 그렇게 인성이 씹창났으니 정부가 한때의 전우들을 조지는 걸 외면하고 나라의 개 노릇이나 하고 있겠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은 지르콘은 민우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라피스라줄리나 너나, 사람 말 들을 생각이 없군 그래. 됐어. 내 맘대로 하지 뭐.”



 민우는 다시금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틀었다.

 정인을 그녀의 손길에서 지키려는 듯.

 지르콘의 장기인 빙결 마법이 쏟아져 들어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산채로 액체질소에 담기는 작열통을 기다리던 민우는,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어?”



 얼빠진 목소리를 낸 그의 앞에는 자유낙하식 구명정의 유선형 선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뒤를 따라온 지르콘이 잠시 개폐구를 만지작거리더니, 출입구가 덜컥 열렸다.

 선체 안은 유백색, 그 사이로 온갖 구난물품들이 엉망으로 흩어진 상태.

 자유낙하식 구명정이라 원래는 전부 고정되어 있어야 할 터.

 그러나 정상적인 낙하 과정이 아니라 시추선을 휩쓴 파도에 쓸려 떨어졌기 때문인 듯했다.


 멍하니 구명정과 지르콘을 번갈아 쳐다보는 민우를, 지르콘은 원반을 기울여 안으로 굴려 넣었다.


 낙법을 취할 틈도 없이 그대로 선실 바닥에 떨어진 민우는 왼팔과 배에서 밀려오는 격통에 비명을 질렀다.



 “으악! 으허윽…”



 끔찍한 통증 가운데서도 민우는 품에 있던 정인의 안위를 우선 살폈다.

 자신의 몸이 쿠션이 된 덕분에 그녀는 무사한 듯했다.

 지금의 상태를 무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어금니를 부서져라 깨문 그에게 지르콘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마력광이 날아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욕할 깡이 있으면 그 정도는 참아보든가.”



 민우의 왼쪽 하박에 두터운 살얼음이 끼며 강제로 펴지기 시작했다.

 뼈가 와드득거리며 움직이는 격통에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다시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저런 말을 듣고도 또 약한 모습을 보일만큼 자존심이 없진 않았으니까.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민우는 뼈가 맞춰지기 무섭게 욕을 내뱉았다.



 “미친, 미친 년이…”
 “끝까지 욕질이네. 너도 라피스라줄리도 일단은 급한 불은 꺼 놨다. 팔은 완전히 붙으려면 두 달은 걸릴 거고, 라피스라줄리가 살 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럼 앞으로는 볼 일 없길 바라지.”



 개폐구를 닫으려는 그녀에게 민우는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뭐야? 이제 시간 없으니까 빨리 끝내. 바람 더 세지면 너네 육지까지 못 간다. 저 여자도 지금 당장은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르고. 설마 나보고 도와 달라는 건 아니겠지.”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지? 나는 몰라도 정인 씨, 으윽, 정인 씨를 잡아가는 게 한송이 네 임무 아니었나?”



 수혜를 입은 당사자가 묻기에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사정을 안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었고.

 그러나 민우는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 투성이였기에.


 추락하는 자신들에게 지르콘이 방어막을 걸어준 것도.

 정부의 사냥개로서 잡아가야 할 정인을 놓아주는 점도.

 지르콘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풀어줘도 얼마 못 살고 숨을 거두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차라리 시추선 위에서처럼 확인사살을 하려고 드는 게 합리적이다.

 이렇게 괜한 수고를 감수하느니.


 돌아온 지르콘의 대답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명료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멍한 민우의 표정을 보며 지르콘은 개폐구의 문을 닫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거 하나는 알아 둬. 나도 생각하고 소신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누가 명령하면 물어뜯기만 하는 개가 아니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는 출입구.

 이윽고 밖에서 엔진을 켰는지, 선체가 살짝 흔들리며 요란한 구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정인을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뒤 구명정의 창 밖을 쳐다봤다. 

 구명정을 둘러싼 얼음은 사라진 듯, 잿빛 물살이 뒤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빙하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마법소녀와 함께.





 

 민우는 흔들리는 선내에서 정신없이 비상물품들을 정리했다.


 선박엔진용으로 정제한 예비연료에서는 희미한 탄내와 비린내가 났다.

 구명정이 낙하할 때 어디 부딪혔는지 비상약품키트는 플라스틱 통이 깨져 있었다.

 진공포장식과 식수통 사이에 흩어진 약품을 그러담으며 겸사겸사 민우는 다른 물건들을 점검했다.

 호루라기, 낚시세트, 손도끼, 잭나이프, 휴대용 섬광기, 로켓 신호기…

 없는 게 없었지만 작동이 안되는 게 태반이었다.


 구명정의 창 밖에선 넘실거리는 파도가 일순 솟구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에 맞춰 배도 위아래로 조금씩 출렁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면 뱃멀미를 할지도 모를 정도의 요동.

 태풍이 올라온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민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모포와 담요를 꺼내 정인의 몸을 둘둘 말았다.

 저체온증 때문인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민우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창백한 얼굴과 살짝 열려 있는 눈꺼풀.

 잠든 사람처럼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휘파람 부는 듯한 가느다란 숨소리가 샜다.


 핏기 없는 피부에서 그는 어린 시절 본 디즈니 만화동산을 문득 떠올렸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본, 독사과를 먹고 깊은 잠에 빠진 백설공주를.


 왕자의 키스는 백설공주를 깨울 수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백설공주가 아니다.

 풀어야 할 마녀의 저주도 현실에는 없고, 자신은 왕자가 될 수 없다.



 상념을 떨쳐버린 민우는 요동치는 배를 돌아다니며 비상물품을 마저 정리했다.

 6노트의 속도로 느릿하게 시추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구명정.

 가장 가까운 육지가 300km 거리라고 했으니, 넉넉잡아 이틀은 배 안에서 지내야 할 터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는 문득 몸을 부르르 떨며 재채기를 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콧물과 침.

 그는 입가를 닦으려다 팔이 안 구부러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는, 남는 모포에 얼굴을 비벼 닦았다.



 “감기 걸렸나 본데. 약이…”



 곤란한 듯 중얼거린 그는 비상약품키트를 다시 열어, 조금 전 다시 모아둔 약을 살폈다.

 해열제, 소화제, 거즈, 탈지면, 포비돈 스틱, 밴드, 가위…

 정신없이 뒤섞인 물품 사이에서 해열제를 두 알 꺼낸 그는 간신히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뒤늦게 물을 마시며 그는 정인을 힐끗 쳐다봤다.

 열이라도 오르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

 열이라도 오르는 모양이었다.


 무심코 해열제를 한 움큼 집은 그는 멈칫했다.

 입 안에 넣어준다고 해도 정인이 삼킬 수 있을지 어떨지.


 입으로 넘겨주는 걸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공호흡을 하느라 입맞춘 적은 있지만 당시는 긴급상황. 지금과는 궤가 달랐다.

 기절한 사람에게 물이든 약이든, 억지로 뭘 먹여봐야 사레만 들릴 뿐.

 기도에 걸리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빈사 상태인 그녀는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수건에 물을 부어 적신 뒤 꾹 쥐어 짜고는 정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시원하진 않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반듯한 이마. 불이라도 붙은 듯 달아오른 양 볼. 퀭하니 들어간 눈가와 부드럽게 휘어진 콧잔등.

 아직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아내며 찹찹한 물기 어린 마찰음이 났다. 


 정인의 앓는 목소리가 애달프니 그의 귀에 꽂혔다.



 “흐윽, 푸후으, 푸우, 으으… 민우…”



 바닥에 쪼그려 앉은 민우의 손이 멈칫했다.

 혹시나 정신이라도 차린 걸까.

 기대감에 차 수건을 치운 그는 곧바로 실망 가득한 한숨을 쉬었다.

 반쯤 혼수상태에서 내뱉은 헛소리인 모양이었다.


 그는 수건을 잠시 무릎 위에 내려놓고, 정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예, 누… 정인 씨. 저 여기 있습니다. 당신 앞에 있어요.”
 “푸우, 푸후우…”



 잠꼬대였는지, 섬망이었는지.

 그녀의 입에서는 말 대신에 깊은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민우는 잠시 정인의 불덩이 같은 머리를 밑으로 쓸어 내리다가 다시 수건을 집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다시 그녀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열은 살고자 하는 정인 나름의 저항일까.

 아니면 죽어가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잔광일까.

 민우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신에 가까운 직감은 있었다.


 라피스라줄리.

 물의 마법소녀, 이면세계 대전의 영웅은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걸.

 밤하늘의 별똥별이 한때 제아무리 빛났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상공에서 불타 재가 되듯.



 그녀가 잿더미 사이에서 다시금 되살아날지, 아니면 꺼져가는 불티를 흩뿌리며 사그라들지.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예전의 그녀는 분명 아니리라는 예감이 민우를 사로잡았다.

 생사의 경계에 놓여서도 자신의 이름만을 하염없이 부르는, 사랑스럽고도 가여운 여자.

 그런 그녀에게서는 마법소녀의 흔적은 찾을 수조차 없었다.

 수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이자, 뜻대로 바다와 강을 부리던 마법소녀는.



 민우는 그제서야 완연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전의 그녀가 어떤 존재였든 이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심지어 그녀 스스로 말한, 남자였다는 고백조차도.

 자신이 모름지기 좋아했고 인생을 바치고자 결심한 여자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자였으니까.

 ‘정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였으니까.




 기우뚱거리는 선체와 간간히 현창을 두드리는 포말.

 둘만의 격리된 공간을 채우는 모터의 진동과 탈탈거리는 소리.

 그 사이로 서로 주고받는 척만 할 뿐, 듣는 자는 아무도 없는 공허한 대화가 간간히 오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명정의 천장에서 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창을 쳐다본 민우의 눈에 들어온 건 기나긴 해수면과 위로 끝없이 뭉게뭉게 솟아오른 적란운.

 아침만 해도 화창하던 황해는 이제 햇빛 한 점 없이 어둑어둑했다.

 그 광경에 끼어들 듯 투명한 원이 하나 둘 현창에 찍히더니 파도에 씻겨 사라졌다.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곧 차차 템포를 올리며 구명정의 천장을 두드리는 소나기.

 반대측 현창에서 일순 번쩍 섬광이 울리더니, 번개가 사라진 자리를 장대 같은 빗줄기가 메웠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

 곧 태풍이 이곳까지 북상하려는 징조.

 그를 뒷받침하듯 선체의 요동도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민우는 잠시 멍하니 현창 밖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팔을 감싼 얼음은 반쯤 녹은 상태.

 손목은 여전히 안 움직였지만 팔꿈치는 그럭저럭 굽힐 수 있었다.


 그는 폴리머 재질의 부목으로 부러진 아래팔을 고정했다.

 오른팔이 없기에 이빨과 발까지 동원해야만 했다.

 쥐가 나려는 발바닥을 주무르는 그의 손에 묻어나는 진득한 기름 찌꺼기.

 손을 닦은 민우는 남은 노끈을 자신의 허리에 메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한 끝에 간신히 성공한 그는, 모포에 싸인 정인의 몸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예전 같았으면 왼팔만으로도 그럭저럭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몸무게.

 지금은 기껏해야 무릎 높이의 좌석으로 들어올리는 것만 해도 힘겨웠다.



 “으허억. 으극…”



 정인의 몸과 딱딱한 바닥 사이에 눌린 왼팔에서 밀려오는 끔찍한 격통.

 민우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앓던 그는, 잠시 후 통증이 가시자 정인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노끈으로 둘둘 감아 매듭을 꼭 지었다.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그러나 둘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몸이 닿아 있을 정도로 좁게.


 반대쪽 노끈을 선체 벽면의 손잡이에 마저 묶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선체에 등을 기댔다.

 페인트로 도색된 철판의 까끌한 감촉이 등에 흥건한 진땀과 엉겨 끈적했다.

 그의 왼쪽 허벅지 옆에서 들려오는, 정인의 속삭이는 듯한 잠꼬대.



 “민…우야… 도망…”



 현창을 두드리는 소나기와 강풍.

 태평양의 열기를 빨아들이며 북상한 태풍의 울부짖음.

 이제는 파도가 한 번 몰아칠 때마다 뒤집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배.

 칠흑 같은 바다는 끊임없이 마수를 뻗어 배를 굴리고, 내려치고, 위로 집어 던지리라.

 그 앞에서 기껏해야 5톤짜리 구명정은 바람 앞의 촛불, 고양이 앞의 털실이나 마찬가지.

 이제 와서 타륜을 쥐어 봐야 아무 소용 없을 터였다.


 민우는 정인의 이마를 왼손으로 덮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배가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네요, 누님. …만일 일이 잘못돼도, 언제나 곁에 있겠습니다. 외롭지 않으시도록...”



 돌풍과 격랑이 그 순간 구명정을 덮쳤다.

 그의 결의를 밟아서 뭉개려는 듯.


 민우는 정인을 모포 채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행여나 튕겨져 나가지 않게.

 만일 배가 뒤집히더라도, 그녀 대신 자신이 먼저 다치고 죽도록.

 이 작은 쪽배가 부서지고 바다에 삼켜지더라도 결코 둘의 사이는 갈라지지 않도록.





 태풍이 황해를 휩쓸고 지나가는 데는 이틀이 걸렸다.


 희뿌연 안개와 담색의 먼동이 뒤덮은 바다 위에, 배는 어디에도 없었다.

 






*

 






 [이번 사태는 정부의 안일한 인식과 대처가 불러온 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피해 시민들에 대한 조속한 보상책과 더불어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철저히 수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본 당의 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사태의 발단이 된 마법소녀 특별법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연단에 서서 열띤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

 타고난 웅변가처럼 굴었지만 시선은 간간히 연단 위에 놓인 대본을 향하는 듯 밑을 힐끔거렸다.

 그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 누군가 리모콘의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암전한 TV화면은 몇 초 뒤 다른 광경을 비췄다.

 바닷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산 옥녀봉.

 그 봉우리를 등에 진 기자가 마이크를 쥐고 떠들어댔다.



 […테러가 벌어졌던 이곳 해운대구 현장에 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현장감이라도 주려는 듯 휙 돌아가는 카메라.

 울창한 산자락이 사라지고, 바다 너머의 희뿌연 오륙도와 태종대가 드러났다.

 서광으로 반짝이는 수평선에서 이어지는 낮고 부드러운 능선.

 금빛 물살을 가르며 돌아다니는 수많은 배들.

 꽤 괜찮은 경치라 할 만했다.


 그러나 TV를 보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위화감밖에 느낄 수 없었다.

 원래라면 해운대의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고층 아파트로 인해 볼 수 없는 풍경이었기에.



 [-현장은 현재 해경에 의해 실종자 수색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일이 지난 지금 추가적인 지진이나 산자락의 붕괴는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해운대구의 대부분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상태이기에 당국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목소리는 침통한 기색인지, 단순히 피로가 묻어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카메라가 살짝 회전하며 옆을 비췄다.

 먼 바다까지 이어진 광안대교는 강어귀에서 뚝 끊어진 모습이었다.


 있어야 할 것들도 없었다.

 요트경기장, 마린시티를 위시한 마천루, 벡스코, 해안가의 리조트, 수영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대신 빈자리를 채운 건 밀려들어온 바다와 둥둥 떠다니는 온갖 잔해들 뿐.

 부서진 간판, 주인 없는 파라솔과 천막, 사람의 옷가지와 뒤집힌 요트.

 잔해 사이를 선박들이 돌아다니며 구조에 방해될 만한 잔해들을 그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때마침 클로즈업한 카메라에 잡히는 고속단정 한 척.

 위에 타고 있던 해경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른 잠수부 두 명에게서 큼지막한 덩어리를 넘겨받고 있었다.

 따개비가 드문드문 달라붙은 불어터진 시체였다.



 화면이 잠시 휙 돌아간 사이, 휴게실에 있던 자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역겨운 꼴을 봤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를 뜨는 자.

 해운대에 가족이라도 있었는지 탄식하거나 우는 사람.

 그런 건 관심 없고 저들끼리 집값 이야기나 쑥덕거리는 군상.

 이때다 싶어 정부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는 불평분자들.


 선희는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이번 테러로 여당 국회의원 36명을 포함하여 해운대구에 거주하던 정재계 인사들이 다수 실종되거나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한편 김길주 대통령은 테러 당일 관저 주변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피해 일광신도시의 별장에 칩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시민들이 무책임한 행동이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에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며 기장에 집결한…]


 “저 저 저 대통령이라는 새끼가… 우리가 그 개고생하고 있을 때 지는 별장에서 띵가띵가 놀고 있었다, 이거여?”



 누군가의 짜증 섞인 중얼거림과 뒤를 따르는 울분 섞인 성토.

 이번 테러 진압에 동원되었다 부상당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선희는 그런 휴게실의 분위기가 피곤한 듯, 모자를 눌러쓴 뒤 휴게실을 나갔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려니 부러진 오른팔을 고정한 깁스가 꽤 불편했다.

 몰래 역장이라도 치면 빠져나가기 수월할 터였으나 그럴 순 없었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마법소녀임을 드러내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



 병실로 돌아온 선희는 자신의 병상으로 돌아가 털썩 걸터앉았다.

 조식을 걸러서 배가 고프긴 했지만 지금은 딱히 뭘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 세 번 들어오는 진통제 때문에 통 입맛이 없기도 했고, 기분이 영 안 좋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날 재수없는 꿈을 꾼 데다가 아침부터 저런 뉴스라니.

 저절로 악몽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시큰거리는 오른팔 때문에 선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아야야… 아우 씨. 좀 안 아플 때도 됐는데.”



 아침 진통제는 썩 약발이 듣지 않았던 모양.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까 싶었지만 선희는 꾹 참았다.

 어차피 눌러봐야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간호사가 제 시간에 오기란 요원한 일이었으니.


 그녀는 왼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할 곳은 딱히 없었지만 메신저라도 보고 있으면 신경은 분산시킬 수 있을 터였다.


 가족 단체방에는 아직 안 읽은 메시지가 세 건.

 최근은 불면증으로 새벽까지 메신저를 읽다 잠들곤 했으니 오늘 아침에 온 메시지인 듯했다.

 선희는 왼손으로 빠르게 화면을 톡톡 터치했다.



 [귀여운막내: 대피소 떠나서 집에 오니 좋다. 그런데 언니 언제 퇴원해? 아직 멀었어? 보고 싶당]



 막내 동생 가영의 메시지는 아침 6시 56분.

 아침 일찍 대피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나저나 보고 싶다니. 예전에는 이런 살가운 아첨을 부리는 애가 아니었는데.

 아마도 요즘 집에 갈 때마다 사가는 비싼 간식이나 화장품을 원하는 거겠지.


 그리 생각한 선희는 작게 웃고는 다음 메시지를 읽었다.



 [울엄마: 일어났으면 무리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오늘 오후에 병문안 갈게]



 명색이 마법소녀인 장녀를 두고서도 걱정이 팔자.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당장 이면세계 대전에서도 자잘한 부상 말고는 없었던 장녀가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니.


 마지막 메시지는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온 문자였다.



 [울아빠: 가족들다집에잘들어갓다 걱정말고푹쉬엇다온나 우리장녀고생만앗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띄어쓰기를 안 하고, 쌍시옷 발음을 안 누르는 투박한 메시지.

 본인은 당뇨 때문에 손가락 감각이 둔해서 그렇다고 언제나 변명하곤 했다.

 하지만 그저 같은 곳을 여러 번 두드리기 싫어하는 버릇 때문이라는 걸 본인만 모른다.


 다른 동생, 선우는 단체방의 내용을 안 읽은 듯 메시지 뒤의 ‘1’이라는 숫자는 그대로였다.

 선희는 빠르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선희: 다들 집에 잘 들어갔어요?]

 [울아빠: 오냐팔은좀개안나]

 [선희: 아프긴 하지만 참을 만해요 들어가는 길에 별 일 없었어요?]


 [울엄마: 별 일 없었다 니 걱정이나 해]

 [울엄마: 집은 괜찮은데 뒷산 무너지면서 그 밑에 연제중학교하고 동명초등학교가 싹 묻혔다더라]

 [울엄마: 해운대는 아예 수몰됐다며 진짜 그런 테러범 상대로 위험하게 다시는 그러지 마라]



 전광석화처럼 메신저 너머로 날아오는 잔소리에 선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선희: 그래도 저 아니었으면 집 대출 어떡할 뻔했어요 ㅎㅎ]

 [울엄마: 아이고이 모질이년 집이중하니 목숨이중하니]

 [웬수: 뭣이 중헌디]

 [귀여운막내: 어휴 저거 자다 일어나서 또 헛소리하네]



 순식간에 다르륵 올라가는 문장들.

 선희는 대화에 적당히 맞장구 치면서 실없이 웃었다.

 아직도 미적지근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이 가시는 걸 느끼면서.



 3일 전 해운대구를 초토화시키고 도주한 테러범, 마법소녀 아메지스트.

 그 여자가 연산동 방면으로 도주했을 때는 말 그대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이 들었었다.

 연산동에는 가족들이 살고 있었으니까.

 자칫하다간 연산동이 위치한 연제구 전체가 지옥도가 될 판이었다.

 그러지 못하게 진로를 틀려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부러진 오른팔은 그 노고의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성과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어머니가 언급한 동네 뒷산인 배산은, 아메지스트의 염동력 때문에 결국 산사태가 일어나고 말았으니.

 거기에 산 서쪽 동네는 무사했지만, 동쪽은 과학교육원부터 연제경찰서까지 말 그대로 쑥대밭.

 아메지스트를 막던 다른 마법소녀 셋 역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

 집과 가족이 무사한지만이 선희의 관심사였다.

 그 목적을 달성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가영이가 나 언제 퇴원하는지 궁금해했지?’


 [선희: 아 그리고 퇴원 말인데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할 거 같아요]

 [귀여운막내: ㄹㅇ?]

 [울아빠: 며친더잇지뭐그리빠리한다냐]


 [선희: 아빤 내 얼굴 안 보고 싶나 봐 ㅠㅠ 넘행]

 [웬수: 귀척하는 거 봐라 우욱십 구웨에엑]

 [선희: 선우 너 집에 가면 죽었어]



 빠르게 키패드를 두드린 선희는 잠시 대답이 뜸한 메신저를 빤히 들여다봤다.

 침묵의 이유는 대충 예상이 갔다.

 아마 까불던 선우를 어머니와 가영이가 때려잡고 있을 터.


 선희는 잠시 메신저 앱을 내리고 부재중 통화가 왔는지 확인했다.

 혹시나 마법소녀 지원단이나 연제구청, 혹은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친구들에게서 전화라도 왔을까 싶어서.



 통화 앱의 부재중 전화를 나타내는 숫자는 0이었다.

 선희는 “그럼 그렇지”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군대에서 자신을 더 찾을 만한 일이 딱히 없기도 했다.

 연합과의 전쟁은 어제부로 끝났으니까.


 강원도나 경기도 일대에서 일부 연합 마법소녀와 방위군들이 저항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원래 그런 전사들의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높으신 분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법.

 이러나저러나 부산 정부 역시 전쟁을 지속할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우선 전략적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한 상태.

 평택과 청주의 반도체단지, 황해의 유정, 서해안의 화력발전소 단지, 그 외 많은 인프라들을 되찾았으니까.

 서울의 탈환을 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인명피해가 너무 많았다.

 이면세계 대전으로 초토화되었다 하더라도, 서울은 기본적으로 요새화된 메트로폴리스.

 위성도시를 방패 삼아 농성하며 연합 마법소녀들이 육군을 들쑤시기 시작하면 피해는 겉잡을 수 없을 터.


 그리고 3일 전의 해운대 테러 역시 급한 종전의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정부 내각이 반쯤 무너진 판에, 연합이라는 힘만 센 거지떼를 더 들쑤실 이유는 없었으니.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선희는,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족 단체방에 메시지가 올라온 모양.

 그녀는 메신저 앱을 열어 올라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울엄마: 팔이 부러졌는데 그렇게 빨리 퇴원해? 또 그 마법인가 뭔가 썼지]



 선희는 침대 매트리스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잠시 목덜미를 슬슬 어루만졌다.

 혹시나 치유마법을 썼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차피 마력 억제장치 때문에 지금은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상태.

 만일 그럴 수 있었다면 굳이 갑갑하게 깁스를 끼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어머니는 원래부터 마법소녀이니 뭐니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수수한 인생이라도 좋으니 탈 없이 흘러가는 게 제일.

 괜히 남의 싸움질에 고개 들이밀지 말고 제 몸이나 간수 잘 하라고.

 그래서 그런지 최근 들어서는 이런 잔소리가 꽤나 늘었다.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이면세계 대전 때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지금은 그런 극한 상황도 아니니까.


 선희는 답신을 날렸다.



 [선희: 지금 어차피 막혀 있어서 쓰지도 못하는데… 그냥 병실이 없어서 빨리 퇴원하래요 ㅠㅠ]

 [울엄마: 에휴 큰일이다[

 [울엄마: 마법소녀 그거 그만둘 수 없니]



 키패드를 터치하는 소리에 섞이는 한숨.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이면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마스코트와 소통할 방법을 찾아 헤매기도 했었고.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계약 이후로 마스코트는 단 한 차례도 텔레파시를 보낸 적이 없었으니.



 [선희: 그만두려고 해서 그만둬지면 나 안 이러고 있지…]

 [울엄마: 처음부터 잘 생각하고 했어야지]

 [울아빠: 여보그만해]



 선희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마법소녀가 된 건, 끊어진 서부산낙동강교에 고립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당시에는 코 앞까지 닥쳐온 몬스터 때문에 앞뒤 잴 시간조차 없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간밤 꾼 악몽의 내용이 현실이 되었을 터였다.

 가족들의 장례식에 검은 상복을 입고 자신만 울며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서 있는 그 꿈이.


 그래서 마법소녀가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지금도 이렇게 가족이 살아있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다시 한 번 고민했을 수도 있었다.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거나, 국가의 차별과 감시대상이 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임플란트를 목덜미에 심거나.

 혹은 지금 같은 소리를 듣게 될 거라는 걸 알았더라면.



 [선희: 전쟁통에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돼? 내가 왜 마법소녀가 됐는지 엄마도 알고 다 알잖아? 갑자기 왜 그래]


 [울엄마: 네가 걱정돼서 그래 앞으로도 이런 일 없으라는 법 있니]

 [울엄마: 이상한 수술도 받고 공무원으로 잘 있다가 갑자기 전쟁터에 끌려가고]

 [울엄마: 테러범도 막으라고 그러고 팔도 부러졌지]

 [울엄마: 왜 우리 딸이 그런 무서운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 엄마는 모르겠다]



 휴대폰을 노려보던 선희는 울컥하며 키패드를 두드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데. 나라고 마법소녀가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

 한 번 마법소녀가 되면 다시는 못 되돌린다는 걸,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걸 내가 어떻게 그때 알 수 있었냐고.

 국가가 마법소녀를 사람이 아니라 병기 취급하는 게 내 잘못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가 그런 소릴 하면 안 되잖아.

 엄마는 내가 마법소녀가 돼서 산 거야.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선우도, 가영이도.

 나와 내 친구들이 흘렸던 피 위에 서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한참을 쓰던 선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시 문장을 지웠다.

 그리고는 속에서 끓는 울분을 다시 키패드 위에 들이부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구원의 손길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울아빠: 여보선희지금편찮다 아픈애한테그러지마]

 [울아빠: 나중에선희퇴원하고이야기해 톡으로말고]

 [울엄마: 알앗어]



 해결이 아닌 단순한 보류.

 하지만 완성되어 가던 분노를 살짝 식히기에는 충분했다.

 선희는 여섯 줄이 넘어가는 문장을 다 지워버리고 대화를 끝맺었다.



 [선희: 병원 오면 연락해]



 답문을 확인할 생각도 들지 않았던 그녀는 휴대폰을 그대로 베개 위에 집어 던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가느다란 티끌.

 사실은 가족이 오늘 병문안 따윈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햇살에 투명하게 비치는 먼지를 보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있거나 잔다고 해서 북받치는 속이 진정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병실 밖으로 나서는 선희의 걸음은 질질 끌리듯 무거웠다.

 




 *

 




 야음이 내려앉은 산기슭에 울리는 맑고 투명한 개울의 물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새 울음은 소쩍새인지 부엉이인지, 소영은 알 수 없었다.

 야산에 오니 이런 새벽에도 새가 우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

 애초에 마법소녀가 되기 전에는 몸이 약해서 남들 다 가는 등산 한 번 가본 적 없는 몸이었다.

 동물에도 별 관심이 없었으니 구분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올이 다 나간 스타킹을 벗어 던진 소영은 개울물에 맨발을 담갔다.

 여름답지 않게 꽤나 서늘한 물살.

 사흘 동안 쉬지도 못하고 내리 걸은 탓에 퉁퉁 부은 발바닥이 바닥의 자갈을 밟았다.


 처음에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괜히 꼼질거려보는 발가락.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시원한 쾌감이 밀려왔기에, 소영은 곧 몸을 이완시키고 한숨을 후욱 쉬었다.


 이래서 찬영 오빠가 지압해주는 걸 그리 좋아했구나.

 그리 생각하며 소영은 경사진 산기슭 위쪽을 쳐다봤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도 눈에 띌 만큼 커다란 날개뼈와 두개골.

 마치 엎드린 공룡 같은 괴수의 잔해였다.

 계곡 상류에 자리잡은 그 사체에서는 아직도 장기(瘴氣)가 샘솟듯 흘러나와 물결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지금 소영이 발을 담그고 있는 바로 그 시냇물을.


 아무리 마력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다지만 오염원에 직접 몸을 담그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다.

 자잘한 상처를 통해 장기가 스며들어가 조직에 손상을 입을 수 있으니.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이런 곳이 아니면 잠시도 쉬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할 상태였으니까.



 잠시 숨을 돌리던 소영의 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8시 방향, 거리는 30m 정도의 수풀.

 그녀는 무의식 중에 그 방향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공중에서 뭔가 뭉개지는 듯한 섬뜩한 분쇄음.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고기 큐브처럼 으스러진 짐승의 시체가 들어왔다.

 갈색 줄무늬 털에 고양이처럼 생겼지만 덩치는 조금 큰 생물.

 삵인 모양이었다.


 소영은 마력을 거두며 잠시 멍하니 그 잔해를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발목을 훑으며 흘러내려가는 오염된 시냇물로. 약간 노이로제 기미였다고 아주 조금 반성하면서.

 생각해보면 추격자들이 멍청하게 이런 오염지대까지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해운대에 잇는 국정원 본부를 파괴하고, 큰오빠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에게 복수한 것도 이미 사흘 전.

 이후 이곳, 지리산까지 도망치는 동안 눈을 붙인 시간은 겨우 30분 남짓이었다.


 부산 시내에서 빠져나온다고 끝이 아니었다.

 추격자가 수방사와 경찰 대신 특수전부대로 바뀌었을 뿐.

 아마 지금도 지리산 곳곳의 오염지대를 피해서 자신을 쫓아오고 있을 터였다.

 아니면 생화학보호복을 갖춘 채 지금도 어딘가에서 저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든지.


 아마 그들을 죽여버린다 해도 또 다른 추격대가 쫓아올 뿐.

 다음에는 뭐가 오게 될까.

 어쩌면 드론으로 소재지를 파악한 뒤 미사일이라도 쏠 지도 모른다.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로 도망칠까… 전남 쪽으로? 섬이 많으니 숨어 살긴 좋겠네. 아니면 강원도도 나쁘지 않… 고?”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든 의문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굳이 도망칠 필요가 있을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야 당연히 필사적으로 도주해야 마땅한 상황.

 지금이야 오염지대에 일부러 들어와 시간을 끌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순 없었다.

 독한 장기로부터 몸을 지킬 마력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으니.

 무엇보다 마법소녀 넷을 한번에 상대하느라 지금 소영의 마력은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식량과 식수 문제까지 고려하면 어떻게든 행정력은 미치지 않되, 인근에 사람이 사는 은신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허무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소영’이라는 인격체에 휑하니 바람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망함에.



 국정원 본부의 고위 간부들. 최근 차기 국장으로까지 거론되던 심 전무.

 그를 고문해서 알아낸, 큰오빠의 죽음에 관여한 여당 국회의원들과 전 과학기술부 장관.

 무고한 사람들과 놈들을 분별하여 죽일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국정원 본부를 들어올려 부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군경이 자신을 사살하려고 사방에서 몰려왔으니까.

 쏟아지는 총격을 방어하면서 심 전무를 천천히 파괴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죄 지은 자와 무고한 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저 전력을 다하여, 그들이 다수 살고 있는 해운대 서부의 부촌을 염동력으로 짓눌렀을 뿐.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은 있었다.

 조금, 아주 조금.


 원래부터 자신이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소영에게 놀라움은 없었다.

 철이 들 때부터 큰오빠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많은 것이 결핍된 인간.

 건강도 온전한 정신도 건전한 인격도.

 그랬기에 소영은 더더욱 허망했다.

 복수라는 목적이 사라지고 나니,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기에.



 소영은 자신의 모습을 재차 상기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눈처럼 새하얗던 페이퍼셔츠는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얼룩진 채.

 베이지색의 랩스커트는 한 마법소녀의 기습 때문에 거의 불타버려, 지금은 미니스커트나 마찬가지.

 그 밑으로 드러난 맨다리는 생채기와 열상 투성이였다.

 다른 부위도 대체로 마찬가지일 터.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풉, 후후…”



 그 웃음소리와, 점점 다가오는 헬리콥터의 로터음이 산꼭대기에서 내려온 재넘이에 실려 흘러내려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영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묘하게 우스웠던 것이다.

 사무실에 입고 갔더니 큰오빠가 예쁘다고 칭찬해 줬기에 줄곧 아끼던 옷.

 이제는 그것조차 손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신이 저질러버린 폭력이, 소중한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다는 현실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서.



 한참을 웃던 소영은 피로함을 느끼고 몸을 벌러덩 뒤로 뉘었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 밤하늘 가득한 은하수가 날아와 박혔다.

 그 빛의 강을 헤치며 나아가는 몇 대의 헬리콥터 또한.



 “도망쳐봐야 평생을 혼자 살 뿐이야. 그저 숨만 쉬면서, 외롭게 시들어가는 잔디처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힘이 쭉 빠진 몸이 저절로 늘어지는 모습은 생을 포기한 듯했다. 

 바로 코 앞까지 들이밀어진 지금을 피하는 대신, 그녀는 마법소녀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은 그때 없겠지만 어쨌든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미래가 아닌, 밤하늘 같은 암담한 앞날.


 수많은 군경이 지키는 대도시에서, 상류층의 고귀하신 생명을 휴지처럼 구겨버렸다.

 부자든 권력가든 제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한 인간이든 차별없이.


 마법소녀 단 한 명이 나라의 중심부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증명.

 그 때문에 나라를 움직이는 높으신 분들의 인식은 이제 바뀔 것이다.

 이전에는 마법소녀를 채찍만으로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아니라고.

 마음만 먹으면 현대사회의 강고한 계급도 지배구조도 무시할 수 있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마법소녀들에게 씌울 굴레는 더더욱 교묘해질 것이다.

 개가 된 늑대들이 목줄을 올가미가 아닌, 주인과의 신뢰의 증표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듯이.

 협력하는 자들과 아닌 자들을 철저하게 가르기 시작할 터였다.

 자신이라면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늑대와 개는 언제나 차별당하는 법이니.


 인간 사회에 들어온 개들은 양질의 사료를 먹으며 따스한 겨울을 보내도록.

 하지만 늑대는 언제나 굶주려 있고 엄동설한을 견디며, 비참한 삶을 이어 나가도록.

 견디지 못한 늑대가 양떼를 습격하면, 개를 풀어 물어 죽인다.

 그리고 개에게는 언제나 주지시키리라.

 너는 늑대와 다르기에 예쁨을 받는 거라고.

 네가 양떼를 지키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한, 늑대처럼 비참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 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황금처럼 물결치는 목초지는 개가 아닌 양떼를 위한 것이니.



 문득 그녀는, 그런 망상을 잠깐 했다.

 큰오빠의 복수라는 걸 처음부터 생각조차 안 했으면 어땠을까라고.

 은하수 사이를 배회하는 헬리콥터의 아랫면을 바라보면서, 아련하니.


 발톱과 이빨을 뽑아버리고 얌전한 강아지가 되었다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까.


 회식 다음날 숙취에 절어 일어나 보기도 하고,

 휴일에 모든 걸 잊고 해수욕장의 햇볕 아래 나아가도 보고,

 부모님의 잔소리를 반찬 삼아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먹어도 보고,

 남들처럼 맘 설레는 연애도 해보고…



 자신이 그럴 수 없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소영은 망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상을 했다.


 그녀의 눈과 머리를 뚫은 저격수의 총탄이 바위에 충돌하는 그 순간까지.

 




 *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인식표.

 은정은 그 금속판을 만지작거리다 군복 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빈 손에 남은 감촉이 허전한 듯 잠시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곧 주먹을 꾹 쥐었다.

 죽은 고정훈 중사의 유품.

 차가운 금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의 잔열(殘熱)을 언제까지고 느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옆의 테이블에 놓아뒀던, 중사의 다른 유품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도청 상황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의 뒤통수에 겨눴다.


 4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

 움찔 몸을 떠는 진동이 권총을 타고 그녀의 손에 전해졌다.

 경기도청에서 농성하던 연합 방위군의 지휘관이랬던가.

 이름도 계급도 몰랐지만 어쨌든 다른 자들보다는 아는 게 많을 터였다.


 다른 포로들이 보내는 겁먹은 시선을 흘린 은정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베스토스 그년은 지금 어디에 있지?”



 방위군 지휘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 모릅니다.”



 썩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이었다.

 은정은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로 대답했다.

 딱히 안전장치를 풀 필요는 없었지만, 괜히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기 때문에.


 자기 나이의 반도 안될 여자의 손가락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아서인지, 지휘관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정말로 전 모릅니다… 마법소녀가 어디에 배치되는지는 군사국방부 간부들만 알고 현장에는 따로 전해지는 게 없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수원시청에 틀어박혀 있던 년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수원 방면 지휘관이 모르신다, 이 말이네? 입이 참 무거워서 당신 상사들은 좋아하겠어.”


 “윗선이 다 죽거나 도망가버려서 어쩔 수 없이 떠맡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급이 끊긴 것도 일주일이 넘는 판에 뭐하려 그런 같잖은 의리를 지키겠습니까…”



 억울하다는 듯 대꾸하는 지휘관에게 은정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됐어. 쓸모없는 놈…”



 뒤통수에서 떨어지는 쇳덩어리.

 지휘관은 티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은정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깎은 지 얼마 안 된 듯 아직 수더분한 검은 단발.

 살짝 통통한 볼에 칠한 위장크림이 화장기 없는 피부와 섞여 얼룩덜룩했다.

 군복과 방탄모가 아니라 사복을 입고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수다나 떠는 게 아직은 어울릴 인상.

 그러나 지휘관은 오히려 그런 외모에 위화감을 느꼈다.


 2주 전부터 최전선에서 연합 방위군을 개미처럼 학살하기 시작한 마법소녀.

 부산 정부군의 공세도 영 미적지근한 와중에 홀로 들이닥쳐 구 오산 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든 광인.

 그런 여자가 이렇게 어린 나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에.



 다만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긴 했다.

 지금 그들의 목숨은 순전히 이 여자의 변덕에 달려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 포로를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인간백정이라는 소문까지 붙은 마법소녀라 해도.


 그 판단이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휘관의 떨리는 시선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잿더미에 꽂혔다.

 한때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던 먼지 더미.

 그들을 ‘분해’시키면서 아이보리가 중얼거린 말은, 낙관적이었던 그의 생각을 단숨에 뒤엎었던 것이다.



 ‘우리가 쪽수가 적어서 관리하기 힘드니, 숫자를 좀 줄여야겠네.’



 이 마법소녀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50명 가까이 되던 인원은 이미 절반으로 줄어든 상황.


 설령 전원 무사했다 하더라도 만시지탄.

 스무 명 넘는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 가루로 만든 괴물이다.

 반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상대의 비위를 맞추며 자비를 베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은정은 눈알 굴리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휙 돌렸다.

 넙죽 시선을 내리까는 연합의 패잔병들.


 그녀는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박수를 한 번 치고, 뒤의 분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오빠들 잠시 나가 있어요.”



 분대장인 황 병장과 그 밑의 분대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마법소녀인지 뭔지가 이런 식으로 명령할 때면 언제나 사고를 치곤 했기 때문이다.



 “소위님, 아무리 상대가 항복했다 하더라도 단독은 위험-“

 “그래서 내 명령은 못 듣겠다, 그 말이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은정은 황 병장의 귓가에 대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건넸다.



 “저런 밥벌레들 데리고 여기서 용인까지 복귀할 거면 마음대로 해봐요. 난 안 도와줄 거니까.”
 “…”


 “오빠들만 입 다물면 아무 문제 없어. 안 그래요?”



 황 병장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몇 살이나 연하인 여자가 바로 코 앞에 있는데도, 싱그러운 향기가 아닌 피내음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소대장인 고정훈 중사가 죽은 공주캠퍼스 이후로는 언제나 이랬다.

 연합 병력을 죽이는 데만 온 정신이 팔린 정신병자.

 지금처럼 항복한 방위군들도 예외를 두는 법이 없었다.


 군사재판에 응당 회부되어야 할 범죄.

 그러나 황 병장과 분대원들은 무시당할 게 뻔한 내부고발을 할 생각은 없었다.

 증거도 없었고 무엇보다 사람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이는 사이코패스를 건드려봐야 자기만 손해였으니.



 떨떠름한 발걸음을 옮기는 수색부대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은정은, 상황실의 문을 잠갔다.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에 연합 패잔병들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은정은 고 중사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말없이 입구 근처를 서성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그러다가 권총에 마력을 살짝 불어넣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포로 따위 잡을 여력은 없으니 원래는 다 죽이는 게 맞겠지만, 그러기엔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어. 다들 살고 싶을 거 아냐?”



 몇몇 포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발랄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러니까 기회를 줄게. 아스베스토스 그 년에 대해서 뭔가 유용한 정보를 부는 놈, 선착순 열 명.”



 넓은 상황실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그 말의 의미를 깨닫은 지휘관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 나, 나머지는 어떻게 됩니까?”



 은정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연합의 부역자 주제에 목숨을 부지하려면 최소한 쓸모는 있어야지. 쓸모없는 놈은, 이렇게.”



 그리고는 지휘관의 몸을 겨냥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어차피 실탄은 장전되어있지 않았기에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지만.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그의 배를 관통한 마력탄.

 피 한 방울 튀지 않았지만, 지휘관의 몸은 망치에라도 얻어맞은 듯 휘청거렸다.



 “으아아아…”



 주황색 마력광에 휩싸인 채 내지른 단말마는 몇 초도 가지 못했다.

 사지말단부터 시작하여 순식간에 풍화되어가는 그의 육신.

 잠시 후 잿빛 가루로 분해된 인체가 바닥에 풀썩 내려앉았다.

 고기를 태우는 듯한 냄새가 일순 훅 퍼졌다.


 그 악취를 맡은 방위군들은 공포에 질렸다.

 몇 명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섬찟한 비명, 혹은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미친 살인마년아!!”
 “이래 뒈지나 저래 뒈지나, 씨발!”



 은정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발 밑에 대고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일순 그녀의 앞에 생겨나는, 투명한 스크린 같은 장벽.

 가장 앞서 달려오던 방위군 둘이 그 방어벽에 몸을 부딪히고는 소리도 없이 튕겨져 나갔다.

 뒤이어 달려온 셋이 마력장을 손발로 가격하는 꼴을 보며 은정은 피식 웃었다.

 지근거리에서 터진 클레이모어도 쉽사리 막아내는 방어막이다.

 하물며 사람의 보잘 것 없는 힘으로 뚫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머리라는 게 조금은 굴러가나 봐?”



 하지만 능력 여부와는 별개로, 반항하는 자는 처리해야 하는 법.

 은정은 마력탄을 연거푸 쐈다.


 투명한 스크린에 붙어 있던 세 명이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흘러내렸다.

 조금 뒤에 있던 둘은 마력탄이 빗나갔는지 아직 살아있었지만, 어차피 여기서 피할 곳은 없었다.

 둘의 겁에 질린 얼굴이 해머가 공이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은정은 사람 모양의 잿더미가 눌어붙은 방어막 반대편을 손으로 툭툭 쳤다.



 “방금 덤비다 죽은 이 등신들은 뺄 게. 선착순 다섯 명.”



 멍하니 그 선언을 듣던 방위군들은 곧 앞다투어 떠들기 시작했다.


 이면세계 대전 당시에 특수전사령부 소속이었다고 들었다.

 다른 마법소녀들은 한 번씩 연합 매스컴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딱히 본 적이 없다.

 연합 상부에서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안다. 본부에서 근무할 때 그 여자 실명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차지연. 차지연 대위라 그랬다.

 소문으로는 전쟁 때 북한이 붕괴하고 나서 중국 북부전구군이 못 내려오도록 북한 땅에 비밀리에 파견되었다더라.

 원래는 마법소녀관리부 소속이었다가 부장이 실각하고 나서 군사국방부로 옮겼다고 들었다.

 아니다. 전략물자관리부라 그랬다.

 내가 맞다.

 니가 뭔데.

 운운, 운운.



 비루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아귀들의 다툼.

 그런 불쾌한 느낌을 받으며 은정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드잡이질을 하면서도 방위군들의 시선은 그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윽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접은 뒤, 그녀는 꼭 쥔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자, 다섯 명 끝.”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집적해둔 마력탄을 한 발 쐈다.

 상황실의 한복판에.


 실내에 자욱하니 깔리는 유독가스.

 은정은 방어막 너머의 아비규환을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서 있었다.

 고막을 때리는 비명과 저주, 구토하며 껄떡거리는 소리, 꺼져가는 신음을 무시하고.

 공주캠퍼스에서 독가스를 푼 아스베스토스 그 년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정보는 고마워. 그런데 처음부터 살려준다고 얘기도 안 했는 걸.”



 이윽고 은정이 마법을 거두자, 상황실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그녀 혼자 뿐.

 나머지는 모두 토사물과 배설물을 쏟아낸 채 기괴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독가스에 질식해 죽었던 고 중사의 유해처럼.


 은정은 무심한 몸짓으로 권총의 슬라이드를 한 번 당기더니 다시 마력탄을 바닥에 쐈다.

 이번에는 연소의 마력을 담아서.

 새파란 불꽃이 일어나더니 시체들과 함께 오물과 부러진 손톱 조각이 훅 불타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금 떠올렸다.

 연합 마법소녀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고 중사를 지켜만 봐야 했던 자신을.

 첫사랑이 독가스에 중독되어 몸 속의 모든 걸 게워내는 동안, 아무 것도 못했던 비참함을.

 그때 느꼈던 슬픔과 고통을.

 퇴각하기 전 사망자들을 급하게 화장하며, 타오르는 그의 곁에 자신도 뛰어들고 싶다고 느낀 그 절망감을.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연료 삼아 불태우고 있는, 연합의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아직 한참 멀었어. 아스베스토스… 차지연. 적어도 그년은 내 손으로 직접 살 하나하나 발라낼 거야. 아저씨의 원수.”



 중얼거린 그녀의 눈알이 핏발 선 채 번들거렸다.

 공주캠퍼스에서 마주친 연합의 마법소녀 셋, 메테오라이트와 오팔, 아스베스토스.

 메테오라이트는 평택 삼전캠퍼스에서 직접 죽였고, 오팔은 이천에서 제2군단에 생포됐다.

 남은 건 아스베스토스 뿐.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전쟁이 끝나면 지금과는 다르게 행동에 제약이 걸릴 테니.

 최근에야 안 사실이지만, 마법소녀가 경남 권역 밖으로 벗어나려면 관련 부처의 허가가 필요했다.

 마법소녀 강제 징병법 때문에.

 설령 허가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마력 억제장치가 켜진 상태에서 아스베스토스를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


 치밀어 오르는 조바심을 가라앉히려 은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년이 걸리든…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

 군자도 성인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

 기회가 찾아오기를.

 남은 인생을 번데기 안에서 기다리며, 언젠가 아저씨를 위한 복수의 날개가 펴지기를.

 




 *

 




 기름이 말라붙어 잿빛으로 물든 해안도로의 가드레일.

 그 옆을 걸어가던 윤아는 모자 밑으로 이마를 닦으며 투덜거렸다.



 “아따 오지게 후덥지근하구마. 태풍 그치니께 습도가 장난 아이네.”



 그녀는 타이어와 문이 다 떨어져 나간 폐차를 괜히 한 번 걷어찼다.

 공허하고 우울한 텅 소리.

 덩달아 침울해진 윤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콘크리트가 운동화 밑창에 짝짝 눌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왼쪽에는 반듯하게 각진 해안선, 오른쪽에는 말라죽어가는 갈색 숲.

 원래라면 적당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야 하나 선선하기는커녕 찜통 마냥 눅눅하기만 했다.

 그 불쾌한 습기와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는 짜증이 겹친 통에, 윤아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놈 자슥들은 와 보령까지 기들오고 지랄들이고…”



 원래 계획은 군산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보령에서부터 평택까지 일직선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보령 시내까지 국군과 연합 방위군이 들어와서는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

 우연찮게 마주친 난민에게서 흘러나온 풍문이라 신빙성은 애매했지만, 윤아는 위험을 감수하기 싫었다.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어느 새 도착한 보령해저터널 입구.

 처음에는 그저 지나치려고 했지만 하필 북쪽의 대천항이 모조리 침수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북쪽으로 나아갈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산을 넘어가느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느냐의 기로.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포성이 그녀의 발걸음을 해저터널로 향하게 했다.

 며칠 돌아가더라도 그냥 안전하게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 판단이 잘못됐다고 깨닫은 건, 안면도를 삼 분의 일쯤 지나쳤을 때였다.

 윤아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아니 거 먼 놈의 섬이 한가운데가 통째로 늪이 돼가 있노. 글타꼬 돌아갈 수도 없고 참말로.”



 굴곡진 야트막한 동산, 사이사이로 펼쳐진 전답, 거기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 뜨문뜨문 흩어진 마을…

 한때는 시골 특유의 그런 정겨운 풍경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해안가를 빼고는 대부분 뻘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몬스터의 잔해에서 나오는 유독물질과 기름 섞인 바닷물이 섞인 늪지대.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섬이었다.


 그나마 해안가는 지대가 낮고 밀물이 주기적으로 쓸고 가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그나마 깨끗한 편이었다.

 고약한 휘발유 냄새가 나는 건 변함없었지만.

 어쨌든 유독성 뻘에 운동화를 다 망가뜨리면서 걷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든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만큼 왔는데 왔던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무엇보다 보령해저터널을 다시 거쳐가는 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포르네우스 기름이 섞여 잿빛으로 울렁거리는 바닷속은 생각보다도 훨씬 역겨운 광경이었다.


 윤아는 텁텁한 공기와 살을 태우는 땡볕 밑을 걸으며 살짝 회의감을 느꼈다.



 ‘내 이렇게까지 정인이 갸 보러 서울까지 꼭 가야겠나?’



 처음 그러자고 결정했을 때, 사무치게 외로웠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맨몸으로 나선 여행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들뜨기도 했었다.

 그런 판국이라 호기롭게 군 걸 부정할 순 없었다.


 그래, 서울에나 한 번 가보자, 가는 김에 겸사겸사 친구도 보고.

 태어나서 한 번쯤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 여행쯤 해 볼만하지 않겠나.

 뭐 그런 생각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냥 우울한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낭만적인 배낭여행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실상은 징병을 피해 몇 달이고 폐허나 다름없는 서해안을 방랑하는 신세.

 일 때문에 호서나 호남에는 자주 갔었지만 이런 인적 드문 지역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지금처럼 너저분하니 며칠이고 빨래도 세수도 제대로 못한 적도 없었고.

 둘러멘 배낭은 모르긴 몰라도, 들러붙은 손때로 몇 백 그램은 더 무거워졌을 게 틀림없었다.


 거기다 최근은 전쟁이 끝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기에 더더욱 기분이 내키지가 않았다.

 군산에서 주워들은 풍문으로는 그랬다.

 뭐 김길주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느니, 부산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정치인이 떼죽음을 당했다느니.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 보령에서 열심히 서로에게 총질을 해댔으니 헛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 켠에서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슬슬 부산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다리 위를 걸어가는 윤아의 곁으로 인적 없는 수산시장과 닳아 해진 작은 항구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연안에 정처없이 떠 있는 녹슨 배에 시선을 보냈다.

 페인트가 벗겨진 쇳덩어리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따개비.

 그 위에서 꾸물거리는 보랏빛 불가사리와 군데군데 섞여 있는 쇠고둥.

 서해안을 돌아다니며 자주 본 광경이지만 언제 봐도 꽤나 그로테스크했다.



 “그러고 보이 저것들은 이래 기름투성이인데 뭐 묵고 저래 자라나 모르겄네.”



 그녀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와 방파제를 건너, 방파제가 둘러싼 자그마한 항구로.

 왼쪽 멀리 비행장이 보였기에 그녀는 거기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하지만 해안가의 꼴을 보자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뭇하니 번들거리는 뻘을 지나가야 했던 것이다.



 해안을 따라 가로로 이어진 항구의 너비는 200m 남짓.

 뼈대만 남은 수산시장과 수협 건물을 지나치던 그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깐 멈춰 섰다.

 10m쯤 떨어진 텅 빈 횟집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누고? 사람이 이딴 데 살진 않을 긴데.’



 일순 그녀의 손아귀에서 번쩍거리는 황색 전광.

 난민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혹시나 탈영한 병사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대가 자신을 기습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이런 곳까지 물건을 찾아 내려올 사람이면 자신의 배낭을 보고 눈이 돌아갈지도 모르니.


 수협 옆에 몸을 숨긴 윤아는 횟집 입구를 주시했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나온 사람은 하얗게 센 머리의 남자.

 노년이라 하기에는 애매했고 중년이라 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였다.


 그 뒤를 다리 짧은 개 한 마리가 따라 나오다가, 잠시 킁킁거리더니 큰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윤아가 숨어있는 방향을 향해.



 “이놈의 개새끼가 왜 이래. 거 누구 있소?”



 윤아는 두 손을 들고 모습을 슬쩍 드러냈다.

 허름하고 비쩍 마른 늙은이의 몰골을 보려니 옆에 있는 개가 차라리 위험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언제든지 방어할 수 있게 살며시 끌어올린 마력은 유지한 상태로.



 “고놈 깡새이 코 함 거 밝네예. 고마 지나가던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마이소.”



 늙은이는 희한한 사람 본다는 눈길을 보냈다.



 “경남 쪽 사투린가? 사람하고 말해본 게 하도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만.”

 “뭐, 맞심더.”


 “부산 아가씨가 이런 데는 웬 일이여. 보다시피 먹고 죽을 것만 많은 동넨데 말이여.”
 “여차저차 하다보이 그리 됐지예. 아재는 여 삽니껴?”



 낡은 행낭을 둘러멘 늙은이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갈색 가래를 탁 뱉으며 쉰 목소리를 냈다.



 “살기야 산다만 죽지 못해 근근이 배에 풀칠이나 하며 지내는 거지. 지인도 가족도 없으니 이 늙은 똥개만 책임지면 돼서 좋긴 하구만.”

 “꼭 어디 고립돼서 살았던 거 맨치로 이야기 하네예.”


 “남 인생에 관심이 많은 처잘세. 먼저 이야기라도 해보지 그러나? 이눔의 개새끼, 그만 좀 짖어.”



 으르렁거리던 개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후려친 노인은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는 듯.

 그 뒤를 꼬리를 만 개가 애처롭게 낑낑거리며 따라갔다.


 공교롭게도 윤아가 가려던 방향과 똑같았지만, 어차피 항구에서 태안으로 올라가려면 그 길 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늙은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신뢰할 이유는 없었지만 적어도 위협이 될 만한 부류는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사정이 다 있긴 한데 내나 서울 올라간다고 밖에 말 몬하겠네예.”

 “서울? 보아하니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구만. 하다못해 홍성으로 가지.“


 “것두 다- 사정이 있심더.”
 “사정. 사정 말이지. 말하기 싫으면 말게. 요즘 세상 사람들이야 다들 비밀 한두 개쯤 감추고 있는 법이니. 그런데 털어봐야 나올 것도 없는 늙은이는 왜 따라오나?”


 “길이 겹친 것 뿐인데예. 으르신이야말로 와 이쪽으로 갑니꺼? 집이 이쪽인갑지예?”

 “저기 위에 청포대하고 달산포에 물건이나 건지러 가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난류 때문에 구명보트나 난파선이 한 번씩 밀려오거든. 하나 건지면 두 달치 비축을 만들 수 있으니 남는 장사 아닌가.”



 한 번 물건을 건지면 그 대가로 유독물질 때문에 며칠은 앓아 눕지만 말이지.

 그런 말을 남기고 늙은이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뒤를 누런 개가 짧은 다리로 뽈뽈거리며 쫓아갔다.

 털이 짧고 귀가 축 늘어진 게 닥스훈트 잡종인 모양이었다.

 윤아는 옛날에 부모님이 길렀던 웰시코기를 잠시 떠올리며, 늙은이와 거리를 조금 좁혔다.



 항구를 지나 북상하는 해안길 곁에는 숲이 있었다.

 계절 상 한창 푸르러야 할 나무는 잎도 가지도 없이 휘어진 줄기만 앙상했다.

 숲과 비닐하우스를 지나 도착한, 인적 하나 없이 조용한 마을.

 집은 온전했지만 창틀은 모조리 부식됐는지 온전한 게 없었다.

 낚시꾼들을 위한 펜션이든, 로컬푸드를 만드는 식당이든.


 희고 누런 곰팡이가 핀 고목림(古木林)을 지나 원형 로터리에 도착할 때쯤, 늙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바깥 세상은 좀 어떻게 돌아가나?”
 “뭐가예?”


 “한번씩 서산까지 나가서 연합인지 뭔지 하는 친구들하고 물물교환은 하는데 그때 아니면 사람 볼 때가 없거든. 전쟁 끝나고 수도가 부산이 됐단 이야기는 들었다만… 기왕 동행하는 김에 그 동네 이야기라도 좀 해주게. 아직도 김길주가 대통령 해먹고 있나?”

 “아직은 맞을낍니더. 요번에 디지뿟다 뭐 그런 야그도 있긴 한디.”


 “어쩌다가?”



 마침 윤아도 입다문 채 똥개 궁둥이만 보며 걷기에는 지겨웠던 참이었다.

 그녀는 적당히 부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슬쩍 늙은이의 정체를 캐물었다.

 궁금증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생태계도 문명도 없는 이런 불모의 섬.

 더군다나 식수로 쓸 만한 물은 대부분 오염됐고, 곳곳에는 몬스터 잔해가 지뢰처럼 깔려 유독물질을 뿜는다.

 오래 전에 본 흡혈귀 아포칼립스 영화도 여기보다는 더 인간 친화적인 환경임이 분명했다.

 그런 곳에서 비록 노쇠하긴 했으나, 개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늙은이는 대체 누구인가.



 두런두런 오가는 대화.

 답을 찾아낸 윤아는 왠지 모르게 실망스러운 기분이었다.

 군에 소속된 세균학자도 아니고 전설이 된 흡혈귀 살육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 흡혈귀 같은 상상 속의 존재 따윈 없었지만.



 “그러니까 공무원 하다가 짤리가 인생무상이다- 글카고 저-기 신진도 옆에 빈 절간에서 은둔해가 살다가, 전쟁이 나고 나서 고립되는 바람에 지금까지 거서 내 살았다 그 말인가보지예?”



 늙은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30년 가까이 일에만 매여 살았지. 그 일에서 잘리고 나니까 인생에 기둥뿌리가 뽑힌 느낌이더군. 꼭 부평초가 된 느낌이었어. 전쟁이 났대도 뭐 그러려니 싶었지.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고. 천운이 따라서 지금까지 질긴 목숨 붙이고 사는 게야. 그 천운이 한참 전에 찾아왔으면 훨씬 좋았, 쿨럭, 쿨럭.”



 말을 길게 하는 게 버거운지 늙은이는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더니 조금 전처럼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침을 퉤 뱉았다.

 걸쭉한 갈색 객담이었다.



 “소싯적에 담배 좀 피웠더니 이젠 이놈의 폐가 말썽이군.”



 투덜거린 늙은이는 “얼른 가자 이놈아”라고, 괜히 개에게 카랑카랑한 소리를 질렀다.



 곰팡이 숲을 지나치자 잡초 무성한 전답, 폐차 몇 대가 서 있는 주차장이 나타났다.

 윤아는 버릇처럼 주변을 힐끔거렸지만, 늙은이는 그 광경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지나쳤다.

 이 주변에서 줄곧 살았다는 말이 허투는 아닌 듯, 멈추지 않고 걷는 모습이 꽤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둘은 뜨문뜨문 이야기를 나눴다.

 주변의 논밭을 볼 때면 식사 이야기는 빠질 수 없었다.

 윤아는 늙은이가 대체 뭘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를 궁금해했다.

 따개비? 조개? 게?


 늙은이는 해산물의 이름을 늘어놓는 윤아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따개비를 먹는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냐면서.

 동해에서는 먹기도 한다는 반론에, 늙은이는 연합 남부에 사는 친구들에게 기름을 팔아 교환한다고만 대답했다.



 천장이 무너진 LPG 충전소 옆에서는 최근의 기름값 이야기.

 늙은이의 기억은 2024년에 정체된 듯, 휘발유 가격을 리터 당 2천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까지 자동차용으로 정제한 포르네우스 기름은 리터 당 2,600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최근은 훨씬 오르지 않았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자 늙은이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음모론 좋아하는 놈들 하나도 제대로 맞추는 게 없어. 산유국이 없어져도 기름값은 똑같이 오르지 않나. 자기들 주식 말아먹은 걸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게지.”

 “유전을 차지하고 있는 연합을 정부가 때리패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예. 실제론 내도 모릅니더.”



 늙은이의 낯이 일순 어두워졌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유를 궁금해하는 윤아의 물음에는 그저 고개를 젓더니 이렇게 대답할 뿐.



 “연합이니 뭐니 해도 정부 상대로 어떻게 버티나? 망할 게 뻔하지. 서산에 있는 그쪽 동네 친구들하고 물물교환을 못하게 될 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네.”



 그러다가 왼쪽에 있는 초등학교 건물을 잠시 알 수 없는 눈길로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연합이 망해뿌도 조만간에 머 정부에서 지자체 하나 안 들이놓을까예? 걱정도 팔자시고마.”
 “믿을 게 따로 있지 정부를 믿나?”


 “으르신 전직 공무원이라 안 캤심니꺼?”

 “그러니까 더 못 믿는 걸세. 어떻게 나랏일이 돌아가는지 아는데 그 치들을 어떻게 믿나.”



 그런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십자 모양 교차로에 들어섰다.

 늙은이는 오른쪽을 가리키며 윤아에게 턱짓을 했다.



 “저기로 한 시간쯤 걸어가면 방조제가 있지. 건너면 바로 서산 부석면일세. 서울로 간다며? 여기서 찢어져야겠군.”



 윤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이까지 온 김에 으르신 물건 줍는 거나 좀 도울까 하는데예.”



 왠지 지금 헤어지기엔 아쉬웠기 때문이다.

 거의 반 년 동안 이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눈 적 없던 윤아였다.

 늙은이와 썩 죽이 맞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대화는 메마른 땅을 적신 소나기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예감도 있었다.

 늙은이가 향하는 청포대라는 해변가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가래 섞인 기침을 하던 늙은이는 약간 경계하는 시선을 보내더니 곧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하게. 별난 처자구만.”



 그러더니 왼쪽으로 난 도로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는 개 옆에서 윤아는 같이 그를 따라갔다.



 청포대 해안가로 다가갈 수록, 고사한 소나무들이 이리저리 꺾인 광경이 점차 가까워졌다.

 주변의 집들은 해일이라도 맞은 마냥, 속의 내용물을 사방에 토해 놓은 꼬락서니였다.

 며칠 전 불어온 태풍을 직격으로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들짐승들이 얼쩡거릴 법도 하건만 그런 기색은 일체 없었다.


 개는 진입로 쪽의 펜션 옆에 주저앉더니, 들어가기 싫은 듯 제 앞발에 턱을 얹고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의아해하던 윤아는 곧 개가 그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해수욕장 가득한 쓰레기 무더기.

 윤아는 코를 찌르는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기름때 진 나무토막, 더러운 플라스틱, 삭은 그물, 썩어가는 게의 사체, 그 외 온갖 잡동사니들…

 바다의 폐기물들이 뒤섞인 해안에서는 끔찍한 썩은내가 났다.


 그 악취가 꽤 익숙한 듯, 늙은이는 코도 막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은 허탕이구만.”



 윤아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으르신은 냄새 안 역합니꺼? 와 씨 죽겄네.”
 “어지간히 곱게 자랐나 보구만. 이걸로 죽을 거 같으면 내 진작에 흙하고 단일화했지. 저기 위에 달산포하고 몽산포나 가 보세.”


 “거도 이런 꼬라지면 우짜게예?”
 “어쩌긴 뭘 어째. 말했잖나. 난파선은 어쩌다 한 번씩 오는 복권이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여다나 보고 가는 게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고.”


 “냄새만 맡아도 건강 다 베릴 거 같은데 만다꼬…”
 “그러게 아까 사거리에서 제 길 가랄 때 말 듣지 그랬나?”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몸을 돌리는 늙은이.

 윤아는 그를 잠시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다가, 곧 시야 한 끝의 뭔가를 발견하고 무심코 탄성을 올렸다.



 “어, 저짝에 뭐 있는데예?”



 늙은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윤아가 쳐다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해안가 가득한 난지도 뿐.

 노안이 온 데다가 햇살도 쓸데없이 밝은 탓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뭐가 있단 말이여?”
 “저 보소, 저-기 저… 캠핑장? 같은데. 쓰레기산 옆에 주황색… 저 머라카노? 커다란 박스맨치로 생긴 거 함 보이소. 1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거 같은데.”



 윤아는 11시 방향을 손가락질하며,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조금 전에 든 직감이, 바로 저곳에 뭔가 있으리라고 속삭이기 시작했을 뿐.


 늙은이는 희게 센 더벅머리를 벅벅 긁었다.

 갑작스레 그녀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양쓰레기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는 했지만 애초부터 기대감은 전혀 없었다.

 꼬락서니는 자신보다 더한 거지꼴이었으나, 그 와중에 옷매무새니 몸가짐이니 신경 쓰는 걸 보면 천상 도시 태생.

 쓰레기더미에서 옥석을 가려낼 감식안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건 필요 없었을 테니.


 다만 난데없이 강도로 돌변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말동무나 삼을 겸 따라오는 걸 내버려뒀는데, 아무래도 뭔가 엉뚱한 걸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는 뒤에 엎드려 있던 개에게 휘파람을 한 번 불고는 윤아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누런 얼룩무늬 털의 잡종견은 내키지 않는 듯 꼬리를 축 내렸지만, 그럼에도 쫄쫄거리며 쫓아왔다.



 쓰레기 난지도와 고사한 소나무 숲의 사잇길.

 그 위를 걷는 윤아의 보폭은 점차 빨라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오렌지색 구급함처럼 생긴 물체.

 그녀는 왠지 모를 조바심을 느끼며, 뒤에서 느긋이 걸어오는 노인과의 거리를 벌려갔다.

 딱히 서두를 일도 아니었건만, 마음 하나만은 급했다.

 왠지 늦게 도착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한때 캠핑장이었던 너른 풀밭.

 지금은 악취 나는 새까만 진흙과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해양쓰레기로 뒤덮여 있었다.

 윤아는 자신의 허리 높이까지 쌓인 쓰레기더미 사이로 나아갔다.

 코 안의 점막이 바싹 익혀지는 듯한 부취(腐臭)를 참아가며, 목표를 향해.


 그 오렌지색 물체는, 옆으로 뒤집힌 구명정이었다.


 뒤따라 늙은이가 도착했을 때, 윤아는 마침 구명정 위에 올라 타 출입구를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으르신, 이 문짝 뜯는 거 쫌 도와주이소!”



 늙은이는 잠시 눈을 찡그리고 구명정의 크기를 가늠해봤다.

 길이는 10m 남짓, 폐쇄식 구명정이고 얼추 50인승 정도 되어 보였다.

 표면이 녹슬지 않은 걸 봐서는 표류해온지 얼마 안 된 모양.


 그는 뜻밖의 횡재를 주운 기분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안의 비상물자도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곤 했으니.

 특히나 통조림 같은 비상식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낡은 지렛대를 꺼낸 늙은이는 쓰레기더미를 밟고 구명정 위로 올라갔다.



 “이걸로 될런지 모르겠구만.”

 “그걸로 문을 열라고예? 되겠십니꺼?“



 늙은이는 픽 웃더니, 손바닥에 침을 뱉은 뒤 지렛대를 단단히 쥐었다.



 “젊은 처자가 벌써부터 머리가 굳어서는… 문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리고는 발 밑의, 찐득한 원유 찌꺼기로 새까맣게 덮인 창문을 내리쳤다.


 강화 플라스틱이 쩍 금 가는 소리.

 지렛대가 창문을 후려칠 때마다 원유 찌꺼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행여나 몸에 튈 까봐 윤아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늙은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충분히 창을 부쉈다고 생각한 늙은이는, 창의 모서리 부분을 발로 밟았다.

 부직포가 뜯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거미줄처럼 금간 창문이 구명정의 반대쪽 현으로 떨어졌다.

 늙은이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더니, 또다시 기침을 했다.



 “쿨룩, 쿨룩, 카악 퉤. 그래도 재작년까지는 건강했는데 이젠 이렇게만 해도 진이 빠지는 구만.”
 “으르신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신데예.”


 “이게 뭐 대단한 재주라도, 쿨럭, 되는 양 그러기는. 교통사고 한 번도 안 내봤나. 문이 안 열리면 창문을 깨야지.”

 “5년 무사곱니더.”


 “난 사고 냈던 적이 좀 많아서 말일세.”



 숨을 고른 늙은이는 바닥에 엎드려 안을 들여다봤다.

 구명정의 폭은 대충 3미터 정도니, 내려가면 자력으로 올라오긴 조금 힘들 터.

 하지만 안에서 개폐구의 잠금을 풀기만 하면, 갑판의 요철을 붙들고 충분히 기어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네모난 구멍을 통해 선내를 비추는 태양빛.

 그곳이 닿는 곳, 닿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늙은이는 샅샅이 눈으로 훑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은색 진공포장식 봉투.

 바닥에 엎어졌지만 내용물이 쏟아지지는 않은 기름통.

 대량의 식수병. 그 외 잡동사니들.


 그리고,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사람 둘.


 늙은이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탑승자가 있었군.”



 옷에 묻은 기름을 지우던 윤아의 시선이 그를 향해 휙 돌아갔다.



 “누가 있다꼬예?”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밧줄로 서로 몸을 꽉 동여매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군. 남자는 꽤 덩치가 큰 외팔이에… 여자는 어린앤가? 아니군. 다리가 없어서 조그맣게 보였던 거였어. 둘 다 죽었나 본-“



 다음 순간, 윤아는 늙은이의 옆을 지나쳐 깨진 창 안으로 뛰어내렸다.



 “어어, 뭐하나!”



 놀란 늙은이의 외침을 무시하고, 윤아는 구명정의 반대쪽 창문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노인이 말한 남녀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거대한 오물의 산 안에 파묻힌 구명정, 그 속의 어둠을 헤치며.



 늙은이가 말한 탑승자들은, 선미 부분의 좌석에 묶여 있었다.



 윤아는 홀린 듯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을 이곳까지 이끈 직감을 따라.


 햇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둘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났다.


 더벅머리의 사내.

 세파에 삭은 듯 눈가와 볼이 홀쭉했다.

 부러진 듯한 왼팔에는 폴리머 부목.

 오른팔은 상박 아래가 없었다.


 뭉툭한 자국은 그가 한때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 윤아에게 상기시켰다.

 김천에서 태풍에 휘말려 자신들의 곁을 떠난 지원단 장교.

 건실한 척하며 자신의 친구에게 집착하던 남자.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그 품에 안겨 있는 소녀를 향했다.


 앙상한 두 팔은 사내의 가슴을 꽉 둘러 안은 채.

 가느다란 허리는 노끈으로 사내와 좌석 뒤 고정대에 묶여 있었다.

 덕분에 둘의 몸은 공기 한 점 들어갈 틈 없이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한쪽은 무릎 아래에서, 한쪽은 허벅지 가운데서 없는 두 다리.

 언제나 그곳을 차지하던 의족은 없었다.


 윤아의 시선이 살짝 위를 향했다.

 소녀의 얼굴로.


 목덜미를 뒤덮은 검푸른 머리카락.

 그 밑에 가려져 있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산 자의 안녕인지 죽은 자의 안식인지. 그 경계는 모호했다.


 숨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은, 얕디얕은 둘의 숨소리가.


 윤아는 이름을 불렀다.



 “조민우, 그리고… 정인이.”



 생의 끈을 놓지 않은, 둘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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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