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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 태그 :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분량 문제 상 태그 3개 전부 다 한 파트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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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5.


 민우에게는 자신의 몸만 잘 챙기라고 이야기하긴 했으나, 정인에게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대출을 어떻게 갚느냐는 것이었다. 민우 없이는 해결이 거의 불가능한 문제였다.


 어머니의 의식은 결국 퇴원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짝 마른 어머니의 몸은 반나절만 체위 변경을 해주지 않아도 욕창이 생겼다.

 다른 환자들의 썩어가는 욕창을 봤기에, 정인은 집에서도 한두시간마다 어머니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굴려야 했다.


 돈도 평소의 생활비보다 더 많이 들어갔다.

 기저귀, 욕창 방지 패드, 한 캔에 3천원이나 하는 경관유동식…

 병원에서는 어머니가 살아있으려면 최소한 하루에 5캔은 먹여야 한다고 했다.

 식대만 한 달 50만원 가까이 나가는 셈이었다.


 그렇게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면, 정인은 일할 시간이 없었다.

 병원비를 지불하고 남은 돈은 1,000만원 정도.

 벌금 분납금은 다 지불했지만, 최종적으로 정산된 병원비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정인은 결국 요양병원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싼 곳이 월 85만원이었다. 

 노인복지가 없어지면서 요양병원 지원금도 대부분 폐지되었기에, 전쟁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정인은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는 것과, 요양병원 비용을 조심스럽게 계산했다.

 요양병원에 모시는 게 그나마 이득이라는 결론이 났다.

 최소한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 않으면, 그녀가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정인의 어머니는 허름한 요양병원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정인은 면회를 갈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벌금 납부 역시 문제였다. 납부용으로 등록된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는 민우가 잠적했으니까.

 그러나 검찰청 담당 직원은 현금을 들고 온 정인을 한심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문제삼지는 않았다.

 사정이 있어서 현금으로 분할 납부하는 사람들도 많기에 암묵적으로 허용해주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윤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인력소에서 일을 받지 못하고, 편의점 세 군데서 아르바이트 지원을, 전과자라는 이유로 떨어진 날이었다.


 [내 한 몇 달은 좀 먼데 출장 갈 거 같다. 아마 내년이나 되야 오지 싶데이.]


 언제나처럼 안부 전화인지 알고 받은 정인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낙담했다.

 그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몰려 있었던 정인에게 그녀와의 대화는 꽤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자신이 처한 사정을 다 털어놓을 순 없었다.

 어머니를 도저히 모실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느니, 거액의 대출을 받았는데 갚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든지.

 그게 윤아에게 털어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나누는 시덥잖은 잡담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그게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정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는데?”

 [충청도 쪽인데, 자세히는 내 말 몬한다. 정부쪽하고 회사가 머 비밀엄수계약인가 맺었다 그라드라.]

 “무슨 출장인데 그렇게 오래… 아, 말 못한다 그랬지. 미안.”
 [아이다. 내도 쫌 그렇긴 한데, 출장비 많이 준다 카이 어쩔 수 없드라. 대출 빨리 갚아야제.]


 대출이라는 말에 정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몸 건강히 잘 다녀와.”

 [오야. 출장 갔다 오면 언제 밥이나 함 묵자.]


 통화를 끊은 정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민우는 잠적. 윤아는 장기출장. 예지는 실종.

 이제는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대출이라는 곰팡이는 그런 정인의 마음을 점점 좀먹어갔다.


 이미 날도 9월 중순. 나은에게서 돈을 빌린 지도 2달.

 병원의 민사소송이라는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대출 상환이 문제였다.

 상환기한은 5년. 매달 원리금을 균등하게 상환한다고 치면 월 145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납입해야 한다.

 어머니의 요양병원비까지 생각하면,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잡아도 월 250만원 정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는 별다른 일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간히 인력소에서 노가다를 나가는 게 전부.

 그나마도 민우네 사무소에서 일할 때처럼 가명으로 수주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령 겨우 나간다 하더라도, 산재보험료를 강제로 원천징수 당했다.

 마법 사용자를 고용하는 작업장에서는 반드시 상해산재보험을 가입할 것. 마법소녀 특별법의 그런 내용 때문이었다.

 도매금으로 같이 보험료를 징수 당한 다른 인부들이 불평하는 일이 잦아졌다.


 곧 정인은 인력소에서도 일거리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의 하루하루가 가을 해질녘처럼 저물어 갔다.


 선희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문자로 잔뜩 푸념을 털어놓았지만 정인은 무신경하게 단문의 답신만 보냈다.

 머릿속에 돈과 일 생각으로 가득차서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선희는 삐진 듯한 마지막 문자와 함께,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철딱서니 없는 년. 정인은 속으로 조용히 욕을 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자책했다.


 민우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민우네하고 비슷한 ‘불법적인’ 일을 수주하는 사무소를 정인은 수소문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무소들도 민우처럼 다 폐업했거나 체포된 모양이라 생각했다.

 실제 사정은 조금 달랐지만.


 희박한 기대를 가지고 다시 신청한 기초수급 신청은 떨어졌다. 근로능력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쟁 전과는 다르게, 조금이라도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기초수급자가 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정인은 그 통지서를 찢어서 난민촌 구석의 쓰레기 태우는 드럼통에 넣었다.


 집, 인력소, 공장, 편의점, 직업 소개소, 물류센터, 파출부 소개소, 기타 등등… 정인은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지끈거리는 허리와, 계속 부하가 가해지면서 휘어진 의족 뿐.

 청테이프로 부서진 발을 땜빵하고 휘어진 축을 억지로 바로잡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정인은 폐기장에서 버려진 목발을 구해 짚고 다녀야 했다.

 쓰레기더미 안에 파묻혀 있던 목발에서는 며칠이고 퀘퀘한 냄새가 났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나은이 상환을 재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약정서에 월별 상환인지 일시 상환인지 명확히 명시를 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연락은 한 번씩 왔다. 내용은 매번 달랐지만 안부를 묻는 정도의 잡담이었다.


 그러나 정인은 매번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점점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됐지만, 마치 거미줄로 싸 놓은 먹이를 확인하는 거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은에게 그럴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여름은 지나간지 오래. 가을도 깊어 가고 있었다. 해가 뜨지 않으면 언제나 공기에는 조금씩 서늘함이 감돌았다.

 원래 같으면 흐드러지게 단풍이 피어 있어야 할 시기.

 그러나 지금의 부산에는 계절감이란 없었다.

 드물게 피기 시작한 꽃들은 노숙자와 난민들이 앞다투어 따갔다.

 거리 바닥을 메운 낙엽도, 조금씩 헐벗을 준비를 하는 나무도 없다.

 그저 나다니는 사람들의 옷 소매가 길어지기 시작한 것만이 유일한 변화였다.


 그런 시기, 정인은 요양병원에 면회를 와 있었다.

 늙고 병든 환자들이 시루떡처럼 들어찬 곳이었다. 앉아있는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노인은 엉덩이에 구더기가 들끓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환자들 대부분이 의식이 없었으니까.


 어머니는 창가 자리에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도 더 마른 듯한 모습이었다.

 비위관을 너무 오래 하고 있었는지 한쪽 코는 헐어서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목에 뚫린 기관절개관에서는 얕게 숨쉬는 소리가 한 번씩 새어 나왔다.

 살아있고 생각하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그저 침대라는 우리에 갇힌 채 죽음을 기다리는 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정인은 침상 옆의 의자에 걸터앉은 채,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전에 나은하고 한 통화 내용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언니. 어머님을 꼭 그렇게 애써서 부양해야 하나요?]

 [요양병원비가 월 85만원이라면서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언니가 그 돈을 부담하면서 대출까지 갚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채권자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요, 언니. 제가 만일 그런 상황이라면 전 그냥 신분 새로 파서 잠적할 거예요. 어머니든 빚이든 다 잊어버리고.]

 [아예 부산 밖으로 도망치는 것도 나쁘진 않죠. 대부분 범죄자들이거나 난민들이긴 하지만, 부산 밖에도 사람 사는 곳은 많거든요.]

 [도저히 그러진 못 하시겠다구요… 뭐,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혜인 언니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런 언니를 믿고 돈을 빌려준 건 저니까.]

 [혹시 다른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아, 추가 대출은 안 돼요. 솔직히 언니 조건에 팔천만원 대출도, 사업 측면에서는 완전 손해거든요.]


 “하아…”


 정인은 한숨을 푹 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방 구석에서 휴대폰을 보던 간병인이 흘긋 쳐다봤지만, 곧 관심 없다는 듯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인은 마음 속으로 계속 갈등하고 있었다.


 나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머니를 부양하는 걸 포기한다면 자신의 삶은 한결 편해질 터.

 월 85만원은 일용직도 이제 구하기 힘든 정인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다.


 그나마 통장 잔고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허리띠를 지금보다 더 졸라매고 버틴다면 10개월까지는 버틸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경우, 어떤 미래도 없었다. 어머니와 사이좋게 굶어 죽는 결말 뿐.

 그렇다면 돈을 벌 다를 방법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다른 방법이.


 어머니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신과 혜인을 홀몸으로 키워온 어머니였다.

 포기할 거라면 처음부터 사채도 빌리지 않았을 것이다. 뇌출혈이 왔을 때 치료를 포기했겠지.


 마침 간병인이 간호사의 호출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한 동안은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정인은 작은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엄마 아들 왔어요. 저 정인이예요.”


 혼수 상태의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인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병실 안의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은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랑 혜인이가 어렸을 때 늘 말씀하셨죠. 언제나 남에게 피해 끼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남을 돕고 살리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예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혜인이는… 죽을 때까지 엄마 말을 잘 지켰어요. 제가 봤거든요. 걔가 살린 난민들만 수만 명은 될 거예요.”


 혜인이 마신 할파스를 격퇴했을 때.

 사령부는 창원과 김해를 점령한 마신 가미긴에만 신경을 썼지, 북부의 난민촌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켜야 할 전략적 중요성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할파스의 괴조들에게 난민들을 미끼로 던져서 시간을 벌자고 주장한 사람들조차 있었다.


 혜인은 그 상황에서 홀로 그곳을 지키러 이탈했고,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항공모함보다도 거대한 마신에게 홀로 달려드는 것.

 자신이라면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은 그때 그저, 두려움에 몸을 맡긴 채 대공포만 계속 쏴 댔을 뿐이었다. 포신이 휘어질 때까지.


 정인은 다시 한 번 열등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지켰지만, 그 때문에 지금 엄마가 이렇게 되는 걸 못 막았잖아요. 제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조금만 더 멀쩡한 인간이었다면… 혜인이처럼 잘 할 수 있었을까요?”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답을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정인은 사과하듯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는 엄마 말을 못 지킬 거 같아요. 전 혜인이처럼 될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엄마를 안 죽게 하려면 어쩔 수가 없네요.


 정인은 속으로 변명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발을 짚은 채 병실 밖으로 나갔다.

 스테이션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면회 다 하셨어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간호사는 빨리 나가라는 듯 출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다시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

 정인은 간호사가 그러는 이유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다른 보호자들은 언제나 간식거리라도 들고 오는데, 그녀는 언제나 빈손이었기 때문이다.


 정인은 목발을 짚으며 병동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는 점검 중이었다. 그녀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한 단씩 내려갔다. 목발을 짚고 있을 때는 언제나 조심해야 했다.


 1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는 잠시 통화 목록을 살펴봤다.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선희의 전화를 제외하면, 전부 주나은.


 그녀는 나은의 전화로 연락을 걸었다.


 [네, 진영 홀딩스입니다. 언니, 웬 일로 먼저 전화를 하셨어요.]

 “혹시 잠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늘 시간 돼?”
 [갑자기요? 오늘은 안 될 거 같고, 내일 어때요? 언니가 해운대 오는 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서면에서 보는 걸로.]

 “알았어. 내일 출발하면 연락 줘.”
 [아마 저녁쯤 갈 거 같으니까, 낮에는 일 보고 계세요.]

 “그래. 고맙다.”
 [뭘요~ 소중한 채무자신데. 농담이예요. 후후.]


 채무자.

 정인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내일 나은에게 할 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통화를 끝내고, 집에 가서도 하루 종일 이어졌다.

 





 *

 





 지난 번에 사무소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나은은 커피에 이상한 고집이 있는 것 같았다.

 알아듣지도 못할 긴 주문을 카페 점원에게 해대는 그녀를 보면서 정인은 새삼스럽게 괴리감을 느꼈다.


 “언니는 뭐 시키실래요?”


 정인은 가격표를 쳐다봤다.

 그 중에서 아는 이름은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일 싼 것을 골랐다.


 “그냥 아메리카노? 저걸로 해줘.”
 “따뜻한 걸로 해드릴까요, 아이스로 해드릴까요?”

 “…따뜻한 걸로 해주세요.”


 아이스는 500원 추가였기에, 정인은 더운 날씨에도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그럼에도 한 잔에 사천 원은 좀 너무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돈이면 믹스커피가 스무 봉이었다.



 나은이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제가 사는 거니까 좀 비싼 거 시키시지 그러세요.”


 계산대에 출력되는 가격을 보던 정인은 약간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나은처럼 한 잔에 만 원씩 지출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남이 사주는 거라고 해도.


 “됐어. 어차피 맛도 잘 몰라.”
 “그냥 저게 제일 싸니까 고르신 거 다 알아요. 죄송한데 주문 좀 바꿀 게요. 아메리카노 대신 메이플 시나몬 아이스 블렌디드 그란데 사이즈로 해주시고 샷은 반만 추가…

 “됐다니까…”


 정인의 만류를 무시하고 나은은 끝끝내 긴 주문을 마쳤다.

 영수증과 진동벨을 건네 받은 둘은 가장 구석진 자리로 들어갔다.

 정인이 자리에 앉아 목발을 바닥에 기대 놓자 나은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전에는 목발 안 짚고 다니시더니, 이번에는 짚고 오셨네요.”


 정인은 나은이 자신의 상태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서울 탈환전 이후로는 다른 부대였기에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파주에서 다리를 잃은 건 서울 이후로도 한달이 지나서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사실대로 말해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혹시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의족 하고 계신 건 알고 있어요.”

 “의족이… 응?”


 정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은을 쳐다봤다.

 나은은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다.


 “언니 항명으로 군사재판 넘어갔을 때 저도 탄원서에 서명했거든요? 당연히 다리 잃으신 것도 알죠.”

 “어, 어? 그래…”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정인에게 나은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목발은 왜 하고 계신 건데요?”

 “아, 그게, 요즘 좀 험하게 다루다 보니까… 프레임이 많이 휘었어. 자.”


 그러면서 정인은 바지의 오른쪽 밑단을 걷어 올렸다.

 발 부분은 몇 겹씩 감은 청테이프 때문에 양말 밑으로도 보일만큼 불룩했다.

 그리고 정강이 부분의 프레임이 뒤쪽으로 15도 정도 휘어 있었다

. 왼쪽 다리와는 결과적으로 길이부터 차이가 났기에, 정상적으로 걷기엔 힘들어 보였다.


 나은이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인은 다시 바지 밑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귀밑 머리카락을 살짝 꼬면서 운을 뗐다.


 “아무튼 수리할 돈이 없어서 이러고 다니고 있다. 목발도 대충 굴러다니는 거 주워 온 거고.”

 “그건 보면 알겠어요. 혹시 오늘 절 부르신 게 그거 때문인가요?”
 “비슷해. 나은아, 진동벨 울린다.”

 “제가 받아올 게요.”


 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인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오늘 나은을 불러낸 용건. 그녀에게 알아내야 할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모든 대부업자가 다른 범죄와 연관된 건 아니다.

 정인이 기억하는 나은이라면,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훨씬 낮을 터였다.

 부상을 입은 군인이나 마법소녀들을 언제나 치료하던, 그리고 야전식량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던 나은이라면.


 하지만 그런 그녀가 돈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정인의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불법 추심이나 다른 범죄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나은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리라는 보장 또한.


 하지만 부딪혀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트레이를 가져온 나은이 테이블에 컵을 차례대로 내려놨다.

 정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컵을 쳐다봤다.

 깊은 갈색 커피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휘핑 크림, 아몬드 조각이 놓여 있었다. 비싼 가격인 만큼, 꽤 사치스러운 구성이었다.


 눈을 살짝 크게 뜬 정인에게 나은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아니, 그냥.”


 얼버무린 정인은 빨대로 가볍게 커피를 빨아 마셨다.

 달달한 설탕과 고소한 연유의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싸구려 믹스커피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과도하게 달았다.

 정인은 그 맛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꾹 참고 마셨다.


 “그래서 오늘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언니? 저도 아주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정인은 입 안에 남은 텁텁한 뒷맛을 혀로 살짝 훑고는 대답했다.


 “좀 부탁할 게 있어서.”


 나은은 휘핑 크림을 빨대로 젓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추가 대출이나 상환연장은 안 된다고 지난 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돈 더 빌리거나 떼먹겠다는 말은 아니야. 아니, 떼먹을 거면 애초에 연락도 안 했지…”

 “그건 그렇죠.”


 그렇게 대답한 나은은 커피를 쪽 빨아 마셨다.

 정인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구석진 자리라서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약간 떨어진 창가쪽 자리에 앉은 브랜드 옷을 입은 남녀 정도.

 작은 소리로 말하면 그쪽까지 목소리가 닿진 않을 것이었다.


 정인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테이블으로 상체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


 “너희도 혹시 추심이나 일수 쓰냐?”


 나은은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적어도 이런 공공장소에서 물어볼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대꾸하는 그녀의 목소리 역시 작았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세요?”

 “혹시 불법 추심 같은 것도…”


 나은은 정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언니가 묻고 싶은 게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냥 결론만 빨리 말하실래요?”


 그 말에 정인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머리카락을 꼬았다.

 방금 전까지 정리해둔 간보기용 질문은 어느 새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법. 이런 돌려 말하는 방식은 자신하고 맞지 않음을 정인은 다시 느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은이 사실대로 대답해줄 이유 자체가 없었기도 하고.

 바보 같은 발상이었다.


 그래서 정인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래, 그냥 결론부터 말할 게. 전직 마법소녀 하나 고용할 생각 없냐? 보다시피 다리 병신이고 마력도 많이 떨어졌지만, 어지간한 건 할 수 있어.”


 나은은 잠시 입술을 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은 순간 거절당했나 싶어 철렁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던 나은은 곧 픽 웃으면서 정인의 어깨를 짚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으니까 일어나죠. 근처에 주차해 놨으니 거기서 얘기할까요?”
 “어, 응.”

 “컵은 제가 챙겨갈 게요. 목발 짚고 들고 가실 순 없잖아요.”
 “…그래.”


 나름의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인 정인은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은은 카운터에 테이크아웃을 요청하고는, 목발을 짚으며 다가오는 정인을 곁눈질했다.

 일회용 컵에 담겨 나온 커피를 받은 둘은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늦은 시간에 만났기에 거리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부산 최대의 유흥가, 서면.

 고층 상가의 벽면에는 온갖 색의 불빛이 켜진 네온사인과 간판이 가로, 혹은 세로로 가득했다.

 인도에는 사람들이, 차도에는 차량들이, 건물에는 가게가 빼곡했다. 정갈한 카페에서 화려한 룸살롱까지, 지하의 노래방에서 옥상의 클럽하우스까지.


 술에 거하게 취한 남자가 미니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모텔로 사라졌다.

 브랜드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깔깔거리며 둘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거리에서는 호객꾼들이 목청 높여 길 가던 사람들을 꼬시고 있었다.


 정인은 비척거리며 그 사이를 걸었다. 목발을 짚고.

 나은은 커피 두 잔을 들고도 정인보다 가볍게,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정인은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잠시 받았다.

 판자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도 않은 이곳에는, 바로 옆의 우중충한 진창을 모르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가운데서 그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구가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는 잠시 상상해봤다.

 빚에 시달리지 않고 다리도 온전한 자신의 모습.

 어려웠다.


 파주에서 사람들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말을 조금만 어겼다면.

 남들처럼 얌전히 사령부의 명령에 따랐다면.

 죽어가는 민간인들을 방치했더라면.

 혜인의 뒤를 쫓으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지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여러 번 했던 후회였지만 오늘은 유달리 묵직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쓰렸다.


 넓은 주차장에 도착한 둘은 흰색 스포츠카 앞에서 멈췄다.

 나은이 차 키의 버튼을 누르자 시동이 들어오며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타세요, 언니.”
 “…어.”


 정인은 위로 올라간 버터플라이 도어 밑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손으로 짚은 시트는 가죽 특유의 단단한 질감 밑으로 부드러움을 숨기고 있었다. 밴이나 버스의 딱딱한 시트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

 무심코 감탄한 정인은 조수석에 앉아 목발을 안으로 당겼다.


 운전석에 앉은 나은이 차 키의 버튼을 다시 누르자 차문이 내려와서 닫혔다. 그러더니 그녀는 품을 뒤적거렸다.

 정인은 그녀를 돌아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정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마에 와 닿는 차가운 쇠의 감촉. 권총의 총구였다.

 그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는 건, 방금 전까지도 생글거리던 나은.


 나은은 정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눈 채 말했다.


 “괜히 마법 쓸 생각은 말아요, 언니. 변신 못 하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수작 부리면 쏴 버릴 거예요.”
 “…이게 무슨 짓이야?”


 나은은 대답하지 않고, 왼손을 가로로 휙 저었다.

 그 경로를 따라 번져 나온 건 유백색의 빛무리. 거기서 퍼진 안개 같은 마력이 순식간에 정인의 몸을 붙들었다.

 정인은 전신에서 갑작스럽게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좌석에 등을 기댄 채 축 늘어졌다.

 그녀의 작은 몸이 밑으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에으… 이아…”


 혀까지 완전히 풀린 채 어물거리는 정인.

 숨소리도 점점 가늘어지고, 얼굴이 보랏빛으로 질리기 시작한다.

 나은은 아차 싶어서 마력을 일부 회수했다.

 사지의 골격근 정도만 마비시킬 생각이었는데, 위력 조정을 실수한 모양이었다.


 “흐억, 히익, 히익. 헉.”


 완전히 마비되었던 호흡근이 회복되면서 숨을 헐떡거리는 정인에게, 나은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해요. ‘마취’는 오랜만에 쓰다 보니 감을 잃었나 봐요.”
 “그걸, 후우, 왜, 후으, 나한테…”


 정인은 새하얗게 질린 채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나은은 권총을 다시 품에 넣고, 조수석의 시트를 뒤로 눕혔다. 그리고 정인을 그 위로 끌어올렸다.


 “잠시 몸 좀 뒤질 게요, 언니.”

 “뭐, 잠깐만… 흐익.”


 옷을 파고드는 차가운 손길에 정인은 기겁하며 몸을 비틀려고 했다.

 하지만 풀린 건 호흡근과 안면근육 정도. 사지와 몸통은 여전히 나은의 마법 때문에 흐물흐물해진 상태였다.

 상체부터 하체까지 곳곳에, 심지어는 속옷 안까지 파고드는 손길에 정인은 숨을 헐떡거렸다.

 창피함과 두려움, 그리고 간지러움이 그녀를 동시에 괴롭혔다.


 곧 몸수색을 마친 나은은 손을 떼고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청기나 무기, 폭탄 같은 건 없네요. 전 혹시나 언니가 짭새나 다른 ‘청소부’의 끄나풀로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 아니라고…”
 “뭐 아님 말고요. 마취 풀어드릴 게요.”


 나은이 손가락을 튕기자, 정인의 몸 곳곳에 붙어 있던 빛무리가 사라졌다.

 정인은 잠시 몸을 뒤틀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나은을 노려보면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속옷 안까지 뒤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런 무언의 항의를 담은 시선이었다.


 나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억울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언니처럼 구는 사람들한테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거든요.”


 뻔뻔한 태도에 정인은 더 화가 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내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고, 치료 마법 전문이라지만 마법소녀로서의 능력도 지금의 자신보단 월등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은이 갑이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부탁하러 온 신세였으니까.


 그리고 나은의 말에서 얻은 정보도 있었다.

 그녀가 경찰이나 다른 조직을 경계한다는 것.

 모종의 루트로 나은이 불법적인 일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정인은 불만을 속으로 숨겼다.


 “그래서 고용해줄 거야, 말 거야?”
 “그 전에 먼저 묻고 싶은데요, 언니. 어디까지 할 수 있겠어요?”

 “어디까지, 라는 건?”
 “말 그대로죠. 제가 언니를 고용한다면 사무실에 앉혀서 서류작업이나 하게 하진 않을 거거든요. 그런 건 언니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은의 표정이 돌변했다.

 한때 전우였던 마법소녀의 얼굴이 아닌, 대부업자이자 범죄자의 얼굴이었다.

 차갑게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정인은 피하지 않았다.

 정인은 열리지 않으려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전부 다. 보수만 충분히 준다면.”


 나은이 물었다.


 “가난해서 돈을 못 갚는 사람의 재산을 억지로 압류해오는 것도?”


 정인은 잠시 갈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 떼먹고 도망간 채무자를 반 죽을 때까지 패거나, 가족들을 납치하는 건?”


 그녀는 조금 더 깊이 갈등하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누군가를 드럼통에 넣어서 기장 앞바다에 던지라고 하면?”


 칼날로 찌르는 듯한 목소리에, 정인은 한참을 갈등하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은 그런 그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싱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럼 오늘 당장 한 번 해볼까요? 잘 처리해주시면 정식으로 계약 조건에 대해 상의해보죠.”

 “…”


 나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정인은 약간 멍한 상태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주소를 불러주는 소리. 연장 챙겨서 애들 모아오라는 말. 신참 하나 따라붙을 테니 잘 교육하라는 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영웅이었던 동생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했고, 여러 번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걸 포기했다.

 남자의 몸도, 다리도, 마력도.

 어쩌면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인생의 일부조차.


 그렇게 지켜오려 노력했던 신념을 버리는 건, 이렇게 간단했다.


 정인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지금의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거울이나 백미러를 볼 용기는 없었다.

 감촉은 꼭 마네킹을 만지는 것 같았다. 아까 당한 마비가 덜 풀린 걸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이 상황에서 현실감을 못 느끼는 걸지도.


 새까만 대형 밴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밴에서 사내들이 줄줄이 내렸다.

 어느 새 차에서 내린 나은에게 직각 인사를 하는 그들.

 정인 역시 자신도 모르는 새, 차에서 내린 채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한 생각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정도였다.


 험상궂은 사내 한 명이 정인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사장님, 이 다리병신 가시나가 신참이라꼬예? 빠따 한 대 맞으면 어무이~ 하면서 오줌 찌리면서 질질 짤 거 같은데예.”

 “말 조심해. 이렇게 보여도 너희 전부 10초 안에 죽일 수 있어.“


 똥 씹은 듯한 표정의 사내를 뒤로 하고, 나은은 정인에게 돌아섰다.


 “악질 채무자가 한 놈 있어요. 빌려간 돈은 2억원. 전부 차명계좌로 돈세탁을 해서 송사로는 회수가 어려워요. 마침 ‘처리’하려는 참이라, 언니한테 맡겨볼 거예요.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으니까 차명계좌만 전부 알아내세요. 압류하고 뒷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 알겠죠?”


 정인은 나은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은은 약간 못미더운 듯 고개를 젓고는 부하 직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오늘 이 사람 보조만 하면 돼. 보다시피 몸이 불편하니까, 그놈 못 도망치게 잡기만 해주고, 절대로 직접 연장질 하진 마. 어떻게 처리했는지 확인해서 끝나면 보고해.”

 “알겠심다, 사장님.”


 나은이 스포츠카를 타고 떠나자 대표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았다.

 그리고는 정인을 보며 엄지로 밴을 가리켰다.


 “빨랑 타소. 얼른 끝내구로.”


 정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목발을 짚으며 밴에 탔다.

 민우의 밴보다도 훨씬 컸다.

 트렁크 바로 앞좌석은 뜯어낸 듯 없었고, 빈 공간이 널찍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뒷자리를 골라, 그곳에 구겨지듯 앉았다.


 차례대로 탄 직원들은, 선팅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창 밖을 멀거니 바라보는 정인을 보며 수군거렸다.

 뭔데 사장님이 저렇게 싸고 도느냐느니. 사실 어디 조직에서 나온 킬러 아니냐느니. 다리 병신인 킬러가 어딨냐느니.

 그런 잡담이었다.

 정인은 가는 내내 그 수군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유일하게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누군가 자신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였다.


 “…서정인.”


 차마 혜인의 이름을 댈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댔다.


 연산동의 한 상가에 도착한 직원들은 “잠시 기다리고 있으쇼”라는 말만 남긴 채 밴에서 내렸다.

 곧 그들은 꽁꽁 묶인 사람 한 명을 끌고 와서 트렁크 안으로 던졌다. 50대의 빼빼 마른 남성이었다.

 정인은 고개만 돌려 그 모습을 보면서 멀거니 생각했다.

 아, 누군가의 뒷배가 있나 보구나. 그러니 이렇게 당당하게 사람을 납치하겠지.

 그 정도의 감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밴은 다시 이동했다.

 그들은 판잣집과 낡은 주택가 사이의 소로를 따라 산길을 올라갔다.

 뒤에서 ‘악질 채무자’가 발버둥치면서 읍읍 거리는 소리를 냈다.

 정인은 그 소리를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곧 그들은 무너진 절터 구석에 정차했다. 인적 드문 곳이었다.

 정인은 그 절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아마 황령산 북쪽에 있는 절인 것 같았다.


 직원 중 한 명이 뒤로 가더니, ‘악질 채무자’의 입을 맨 걸레를 풀었다.

 곧바로 그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 차 방음 잘 되니까 어디 함 해보쇼, 아가씨.”


 정인은 고개만 끄덕이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애써 짜낸 덤덤한 목소리로 ‘악질 채무자’에게 물었다.


 “아저씨, 돈 2억원 빌려간 거. 차명계좌에 빼돌렸다면서요. 다 불면 곱게 보내 드릴 게요.”


 뒤에서 직원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해서 어디 10원이나 받겠냐는 듯.

 정인은 애써 그 소리를 무시했다. 가급적이면 온화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그는 그런 그녀 앞에 엎드린 채 울며불며 빌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갚겠다느니. 지금 이러시면 자기 사업이 망한다느니. 가족이 다 거리로 나앉는다느니.

 그런 흔하고 절박한 핑계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정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빌려간 2억원이 들어있는 차명계좌와 비밀번호.

 그리고 그걸 알아냄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


 정인은 몇 번 더 말을 걸었다.

 ‘악질 채무자’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더더욱 애걸복걸하며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온화한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인은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어머니와 빚을 떠올리자, 진통은 금세 사라졌다.

 그래서 그녀는 거친 방법을 동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정인의 몸에서 파란 마력광이 일어났다. 혼탁하고 불투명한 청금석 색의 빛이었다.

 그러자 ‘악질 채무자’는 갑자기 미친 듯이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의 전신에 난 모든 구멍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라도 열린 것처럼.


 밴 바닥에 체액 섞인 물이 찰랑거리며 차올랐다. 직원들이 기겁하며 앞좌석으로 달라붙었다.

 정인은 그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면서, 직원들에게 물었다.


 “차 좀 더러워져도 상관없죠?”
 “으아아… 어, 엉?”


 정인은 속으로 60을 세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 흥건한 물웅덩이도, ‘악질 채무자’의 허파와 내장에 들어찬 물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악질 채무자’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헐떡거렸다.

 그 주변에는 마법으로 없애지 못한 눈물, 콧물, 위액, 각종 체액들이 너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곧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깨닫았다. 그리고 발악했다.

 씨발놈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깟 돈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너희 다 고발할 거다. 애미 애비 없는 살인자 새끼들아.


 정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차명계좌. 다 불어요.”
 “좆 까, 쿨럭, 개 같은 년아! 돈 못 줘! 안 줘! 켁, 쿨럭. 죽일 거면 죽여보든가!"

 “그건 대답이 아닌데.”


 파란 마력광이 일었다.

 그는 다시 굼벵이처럼 꿈틀거리고, 껄떡거리면서 물을 몇 리터나 토해냈다.

 정인은 이번에도 속으로 숫자를 셌다. 60. 그리고 손가락을 튀겨 마법의 물을 없앴다.

 남자는 거의 보랏빛으로 질려서 쌕쌕거렸다.


 “차명계좌. 불어요.”
 “살, 쿨럭, 살려줘… 제발…”

 “그건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냉정한 대꾸에 그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다시 그는 1분 동안 살아있는 수도꼭지가 되었다.

 직원들의 안색도 점점 질려갔다. 어느 새 그들 모두 정인을 피하려는 듯 앞좌석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정인은 그렇게 몇 번이고 ‘악질 채무자’에게 마법을 걸고 풀었다.

 그가 모든 계좌와 비밀번호를 불 때까지.


 “다 받아 적었어요?”
 “네, 네! 누님! 하나도 안 놓치고 다 녹음했슴다!”


 처음에 가래침을 뱉았던 직원은 어느 새 굽실거리는 태도였다.

 그의 시선에 잡힌 ‘악질 채무자’는 반쯤 죽어가고 있었다.

 바닥에 쓰레기처럼 나뒹군 채, 기침하면서 연신 분홍빛 피거품을 뱉았다.

 주변에는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체액과 배설물이 희미한 악취를 풍겼다.

 더러운 악행의 냄새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휴대폰을 꺼내, 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진영 홀딩스입니다. 잘 끝났어요?]

 “응. 너네 직원들이 다 녹음했어. 인감도장하고 증명서 같은 건 네가 알아서 하는 거 맞지?”

 [좋아요. 내일 해운대 사무소로 와서 계약서 작성하죠. 말씀드릴 것도 있고.]


 그 뒤에 이어진 나은의 말은 약간 씁쓸한 기색이 묻어났다.


 […고생하셨어요, 언니.]


 정인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니.”

 [상세는 직원들한테 확인할 테니까,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 보죠. 나중에 문자 꼭 확인하시고요.]

 “그래.”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정인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목발을 짚은 채 좌석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다가갔다.

 근처의 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왜, 왜 그러십니까? 누님?”
 “나은… 사장한테 보고도 했고, 퇴근할 게요.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세요.”
 “알겠슴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쇼, 누님!”


 직원이 밴의 옆 문을 활짝 열었다.

 VIP라도 모시는 듯한 태도였다.

 정인은 조심스럽게 내리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네?”
 “누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됨까?”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차갑게 대꾸한 정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직원들은 그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다가 곧 밴의 문을 닫았다.

 뒷정리 시간이었다.


 정인은 봉수대까지 이어진 소로를 걸어갔다. 목발을 짚고 있었기에 오르막길을 걷기는 힘이 꽤 들었다.

 하지만 내리막길도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 너무 많이 돌아가야 했다.

 곧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산책로.

 여유롭게 산책을 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보도블록만큼은 여전히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지그재그로 난 틈새에는 잔디나 이름모를 들풀이 누렇게 물든 채 시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산책로 너머, 서쪽의 내리막길로 내려갔다.

 곧 벌통처럼 들어찬 판자집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정인은 복잡하게 얽힌 사잇길과 짧은 계단을 지나 집 앞에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도착한 지로나 통지서가 있는지 문 밑을 살핀 후, 그녀는 문을 열었다.


 훅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

 왼다리로 선 채 재주껏 신발을 벗은 그녀는 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씻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고.

 그렇다고 잠을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누운 채 뒤척이던 정인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낸 정인은 문자가 온 걸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녀는 메시지 팝업을 눌렀다.

 200만원이 입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정인은 좀 전에 나은이 한 말을 떠올렸다. 문자 꼭 확인하시라는 말.

 그녀는 무심코 액수를 중얼거렸다.


 “이백만원…”


 오늘 ‘일’의 보수였다.

 원래는 한 달을 정직하게 벌어도 모으기 힘든 돈.

 오늘 일한 시간은, 단 15분.


 노동의 대가는 아니었다. 양심과 신념, 힘을 판 대가였다.

 정인은 바닥에 뒹굴던 중년의 사내를 떠올렸다. 자신이 그렇게 만든 그를.

 그는 살아남더라도 앞으로 몇 달, 어쩌면 평생 산소호흡기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정인은, 문득 콧가에 악취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밴 안에 떠돌던 오물 냄새.

 인간의 배설물 냄새.

 죄악의 냄새.


 갑작스럽게 그녀는 구역감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정인은 몸을 뒤집어서 애벌레처럼 화장실을 향해 기어갔다.

 엉금엉금.

 그러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에 토했다.

 토사물에서는 비싸고 달달한 커피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 위에서 흐느꼈다.

 





 *

 





 토사를 뒤집어쓴 정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듯한 사격음이 멀리서 울렸다.

 어쩌면 바로 옆에서 울렸을 지도 모른다.

 정인은 흐릿한 정신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 앞 역시 마치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정인은 힘 빠진 팔을 들어 눈가를 닦으려 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내 팔이…?’


 가느다란 소녀의 팔이 아닌, 굵은 근육질의 팔.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상박까지 걷어 올린 군복 상의가 희미한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소녀가 되기 전 자신의 몸이었다.


 정인은 팔뚝으로 눈가를 비볐다.

 몇 번을 비벼도 시야는 좋아지지 않았다. 대신 끈적한 느낌이 정인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약간 탄 피부 위에 묻은, 질척한 진흙 같은 핏자국.

 피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팔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정인은 위화감을 느끼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배꼽 밑으로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보이지 않아야 할 내장이 보였다.

 정인의 목에서는 굵은 남자의 목소리 대신, 실바람 새는 듯한 시익시익 소리만 났다.


 ‘왜 이렇게 됐지? 그래, 할파스가 머리 위로 떨어졌지.’


 정인은 옆을 쳐다봤다.

 시야 전체를 칠흑 같은 깃털과 보랏빛 연기가 가렸다.

 그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건, 산더미 같은 새의 머리. 모두 터진 눈알에서는 새까만 피가 흘렀다.

 땅에 박힌 부리 사이에는 정인이 있던 오리콘 대공포가 완전히 뒤집힌 채 굴러다녔다.

 그 바퀴에 걸려 있는 건 정인의 하반신이었다.

 트럭에 밟힌 것처럼 비틀리고 휘어진 다리.

 정인은 그 한쪽이 의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이러니하게도 웃었다.

 정말로 자신의 원래 몸이 맞구나. 그런 감상이었다.

 얕은 기침을 뱉는 정인의 입과 코에서 피가 나왔다.


 그제서야 정인은 지금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언제나 꾸는 미몽이었다. 노포동에서 마신 할파스를 혜인이 격추한 바로 그때의 환영.


 곧 정인의 시야에 꾸물거리는 생명체가 들어왔다.

 생명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마치 거대한 달팽이가 남긴 점액처럼 바닥을 기어오는 부정형의 괴물.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스코트’라 불리는 이계의 몬스터.

 다른 몬스터와는 다르게 지구의 대기에서 생존할 수 없기에, 인간의 몸을 빌어 생존하는 대신 강력한 마력을 제공하는 기생형 마물.


 정인의 머릿속에 그 괴물의 사념이 울렸다.


 [개체-청금석의-혈육-사망-직전의-상태-확인-공생-계약에-대한-적성-존재-그러나-원본-청금석보다-열등-주변-대체재-없음]

 ‘…’

 [청금석의-혈육-본체와-공생-계약-시-상호-생존-가능-공생-계약-승인-요청함]

 ‘그래.’


 속으로 대답한 정인은 눈을 감았다.

 이미 꿈 속에서도 수십 번을 들었기에, 이 다음의 전개는 뻔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그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정인의 부서진 상체가 마스코트의 유체 속으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물 안에 소금이 녹아내리듯.

 그리고 그 자리에는 투명한 물로 이루어진 스노우 글로브 같은 고치만이 남았다.


 정인은 그 속에서 기다렸다. 언제나 찾아오던 누군가를.

 매번 형상은 희미하여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여자라는 건 확실했다.

 와서는 말없이 그리운 듯한, 차가운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여자였다.


 이윽고 스노우 글로브 속의 정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정인은 기대감에, 방금 갓 만들어진 눈을 떴다.

 곧 이 지긋지긋한 꿈도 끝나리라.

 깨어나 봤자 기다리는 건 구질구질한 삶이었지만, 그저 고장 난 비디오처럼 재생되는 꿈 속보단 낫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정인은 입을 벌렸다.

 방금 만들어진 마법소녀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기포가 새어 나오다가, 우악스러운 손길에 막혔다.

 남자였던 그녀는 어느 새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의 육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을 틀어쥔 것은,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

 서혜인이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정인은 뭔가 잘못된 걸 느끼고 발버둥쳤다.

 헛수고였다.


 혜인이 증오와 악의가 흘러내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려고 내 몸을 가져간 거야, 오빠? 내 몸, 내 힘을 가지고 사람을 고문하고, 돈을 뺏고, 죽이려고?]


 아니다. 이건 혜인이 아니다. 혜인이 이런 말을 할 리 없다.

 목을 졸리면서 정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통이, 숨막히는 현기증이 너무 생생했다.

 그녀는 오른쪽 다리로 혜인, 아니, 혜인을 가장한 무언가를 걷어찼다.

 소용없었다.

 다리는 그 무언가의 몸이 마치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쑥 통과했다.

 이윽고 다리가 뚝 떨어지더니, 잘린 그루터기에서 의족이 가지처럼 자라났다.


 [왜 그 정도 밖에 못해? 오빠의 한계가 그 정도야? 그 정도밖에 안 되면서, 나처럼 사람을 구하겠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웅처럼 살겠다고 다짐한 거야? 응? 응? 그랬어?]


 고여 있던 울분이 폐수처럼 정인의 마음 속에 차 올랐다.

 그녀는 다리에 달린 실패의 상징을 외면하며 울부짖었다.


 ‘네가 뭘 알아, 씨발년아! 뒈져버린 네가 뭘 아냐고! 숙주나물만 가지고 일주일 버텨본 적도 없는 게! 엄마 하루 두 끼 먹이려고 몸이라도 팔아야 할 지 고민해본 적도 없는 게!’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파주에서 다리도 안 잘렸을 거야. 민간인을 버리라는 사령부도 잘 설득했을 거야. 내가 살아있었다면 엄마가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 네가 문제야. 네가 모자라니까. 네가 영웅이 되기엔 부족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된 거야. 범죄자. 살인자.]

 ‘닥쳐. 난 살인자가 아니야. 아직 아니라고!’


 그렇게 발악하듯 내지르려던 정인은, 식은땀에 젖은 채 바닥에서 눈을 떴다.

 꿈 속의 질척하고 끈적한 공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현실의 메마른 공기가 채웠다.

 어느 새 어두컴컴해진 사위. 코 앞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아무래도 아까 토한 뒤 울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잠든 모양이었다.


 정인은 벽을 짚으며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백열등을 켜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더부룩한 검푸른 장발의 소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목을 쓰다듬었다.

 목이 졸리는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지만 그 뿐. 하얗고 가는 목에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입가에 토한 자국이 남아있는 걸 보고 그녀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 세면대에 몸을 살짝 기댄 채 수세미로 문지르듯 세수했다.

 수도꼭지를 다시 잠그고, 살짝 빨갛게 튼 얼굴을 보던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마법을 쓰면 굳이 물을 틀 필요도 없었음을 그제서야 눈치챘기 때문이다.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는 마법을 안 쓰던 버릇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집을 혼자 쓴지 어느 새 넉 달이 넘었는데도.


 문득 정인은 코끼리 사슬 이야기를 떠올렸다.

 새끼 때부터 코끼리를 말뚝에 사슬로 매어 놓으면, 집채만큼 자란 후에도 사슬을 못 끊어서 말뚝 주변을 못 떠난다는 이야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코끼리가 아니다. 멍청한 짐승이 아니다…”


 그리고, 엄마는 족쇄가 아니다. 사슬이 아니다.

 정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뒤, 화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마법의 물로 바닥에 말라붙은 토사물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식욕은 없지만, 뭐라도 먹을 까.

 그렇게 생각한 정인은 거실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는 그래도 이런저런 찬거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를 세게 닫고, 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마법소녀는 며칠 안 먹는다고 죽지는 않으니까.


 내일은 나은의 사무실에 가야 했다. 억지로라도 잠을 자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인은 벽장에서 이불을 끌어내려 대충 펴고는 그 위에 드러누웠다.

 잠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그리고 정인은 이번에도 똑같은 악몽을 꾸었다.

 혜인이 자신의 목을 조르며 매도하는 꿈을.

 





 *

 





 마신 가미긴에게 누가 처음 ‘죽음의 왕’, ‘마법의 지배자’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전쟁이 끝난 지 삼 년째인 지금,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윤아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판타지 소설이나 오컬트 같은 것에 심취한 자였음이 틀림없었다.

 가장 강력한 몬스터들에게 거창하게 ‘마신’이라느니, 어디선가 들어본 판타지스러운 이름을 붙인 작자하고 동일인일지도 몰랐다.


 분명 죽지 않는 시체와 유령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 서부를 휩쓴 가미긴의 위용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별명을 가지고서도 결국 재래식 포격을 못 막고 가루가 되어서야. 이름값이 아까웠다.

 덕분에 윤아와 분대원들은 엉망진창이 된 국립세종수목원의 폐허를 뒤지는 신세였다.


 한때 습지와 자연이 어우러져 있던 넓은 수목원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은 곰보 자국처럼 남은 무수한 포탄 구덩이와 작은 못, 뻘 같은 진창 뿐.

 곳곳에 불발탄두와 부서진 총기류가 뻘 사이로 머리를 빼꼼히 드러냈다. 마치 무채색의 바위나 갈대처럼.

 그나마 큰 연못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수련꽃이 갈색과 회색 투성이의 경치에 색깔을 더했다.


 주변을 경계하던 분대원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대장, 우리 언제 집에 갑니까? 벌써 석 달이 다 되갑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던 윤아는 날 선 목소리로 받아 쳤다.


 “마 조용히 해라. 저번에 찾은 그거 하나로는 부족하다 안 카드나. 까랴면 까야제. 보너스도 마이 준다 카이 고마 찔찔대라, 머스마들아.”
 “아- 보너스고 지랄이고 시원한 생맥 까고 싶다.”

 “난 집에 가서 자고 싶어. 침대가 그리운데.”

 “모기새끼들은 어찌나 또 많은지. 습지대라 그런가?”


 윤아는 툴툴대는 분대원들을 무시하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몸에서 정전기가 튀더니, 곧 청백색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윤아의 머릿속에 주변의 무수한 금속원(源)의 위치가 떠올랐다.


 전기 마법을 이용한 일종의 탐색 기술.

 주변에 포탄이나 탄환 등 금속이 너무 많아서 효율은 떨어졌지만, 일일이 삽으로 땅을 파고 다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파동의 범위를 조절하던 윤아는 곧 한숨을 푹 쉬면서 마력을 가라앉혔다.


 “공쳤다. 이 주변은 불발탄이 너무 많아가 몬 찾아내겄다.”


 윤아의 푸념 섞인 말에 분대원들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이제부터 이 습지를 수작업으로 수색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들 중 한 명이 다시 투덜댔다.


 “그 가미긴의 유산이 뭔데 그리 찾으라고들 난립니까?”

 “낸들 아나. 뭐 즈그들도 마법이라도 써보고 싶은 갑제.”


 그렇게 대꾸하는 윤아 역시 SP시큐어의 윗분들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 받은 명령은 세종시 수목원 지역을 수색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물건이 있으면 본부로 발송하라는 것.

 아마 진짜 발주처는 국방부나 부산 행정부일 것이다. SP시큐어는 국방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PMC였으니까.


 그리고 세종시 수목원은 마신 가미긴이 최후를 맞이한 곳.

 이 둘을 연결하면, ‘정부에서 가미긴과 연관된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이 윤아의 추측이었다.


 다만 폐허가 된 수목원을 인력으로 수색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세종시는 서울연합의 남쪽 경계인 천안과 가까웠기에 사람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최근의 마약 단속 이후 서울연합과 부산 행정부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으니까.

 충남과 경북의 경계 지역에서는 국지전도 간간히 벌어지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별 소득 없이 소극적으로 수목원을 뒤지던 차였다.

 한달 전 온실 폐허에서 우연히 발견한 반지.

 그걸 본부로 보냈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SP시큐어의 전력 대부분을 세종시에 투입한 것이다.

 거기다 가미긴의 ‘유산’ 한 점 당 거액의 성과급까지 내걸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수상쩍은 임무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업 대출을 갚아야 하는 윤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조끼의 야전삽피에서 3단으로 접힌 삽을 꺼내며 소리쳤다.


 “오늘도 삽질 시간이다! 불발탄 안 건드리게 조심해레이. 전자식 신관은 아까 다 조져 놨는데 기계식 신관은 내가 어뜨케 몬한다. 알긋나?”
 “예- 예. 알겠슴다 대장.”
 “제대하고 나서도 삽질할 줄은 몰랐네. 염병.”


 마지막 말에 무심코 동감하면서, 윤아는 적당한 지점을 골라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수색 작업은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성과는 없었다. 윤아와 분대원들이 얻은 건 바지 곳곳에 묻은 진흙 뿐.

 윤아는 주변의 웅덩이에 삽날을 씻은 뒤 물을 털고, 접어서 주머니에 수납했다.

 더러워진 바지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뒤 정돈할 요량이었다.


 만일 정인이 있었으면 이럴 때 편했을 텐데. 적어도 진창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윤아는 고개를 저었다.

 장기출장이 잦은 PMC 업무의 특성 상,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정인은 이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했다.

 특히 이런 서울연합과의 경계지대에서는 총격전이 빈번했으니까.

 다른 마법소녀들은 문제없었다. ‘인간 형태’에서 큰 부상을 당하거나 심지어 즉사해도 재기의 기회가 있었다.

 마스코트가 숙주의 생존을 위해 자동으로 마법소녀 형상으로 변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스코트가 소멸해버린 정인은 그게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았다.

 즉 분쟁지대에 투입됐다가 눈 먼 총알이라도 맞으면 정말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큰 일 없이 지내고 있을 것이다.

 출장오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땐 어머니도 지금은 꽤 호전되셨다고 했고, 병원비도 할부로 갚고 있다고 이야기 했으니까.

 윤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짐을 꾸리고 베이스캠프로 걷기 시작했다.


 “가자 머스마들아. 오늘 저녁 뭐꼬?”


 그 뒤를 사주경계하면서 따라가던 분대원 중 하나가 대답했다.


 “어차피 C레이션인데 왜 맨날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저번에 본부에서 황금마차 왔을 때 머 안 사놨나?”

 “벌써 다 우리 똥으로 나가서 거름 됐죠.”


 낄낄대는 분대원들을 보며 윤아는 질색했다.


 “아따 미친, 여자 앞에서 몬하는 소리가 없노. 드르븐 새끼들, 이러니까 아직 장가도 못 갔제.”

 “같은 솔로끼리 이러지 맙시다. 안 그래도 친구놈들 청첩장 올 때마다 서러운데.”

 “내는 안 사귀는 거고, 니들은 몬 사귀는 거고. 힘의 차이가 느껴지나?”
 “그런 쉰내 나는 드립은 또 어디서 주워듣고 오셨습니까?”


 그런 잡담을 나누면서 그들은 호숫가의 도로를 가로질러, 세종시 정부청사에 있는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베이스캠프와 수목원을 오가며 긴장한 것도 처음 한 달 뿐.

 우려했던 서울연합과의 접촉은 한 차례도 없었기에, 분대원들은 어깨에 들어간 힘이 꽤 빠진 모양이었다.


 파괴된 지 오래된 정부청사 건물은, 마치 옛 성터 같은 모습이었다.

 S자로 이어진 폐허 사이로 서 있는 24인용 막사와 캐빈 텐트들.

 막 불을 붙일 예정인 듯, 삼각대 모양으로 각 잡혀 쌓인 나무토막들이 윤아의 눈에 띄었다.

 지기 직전의 낮게 깔린 햇빛 때문에, 장작의 그림자가 한없이 반대 방향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다른 그림자는 하나도 없었다.

 있어야 할 사람들의 그림자도, 천막의 그림자도.


 이상함을 느낀 윤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말없이 산개, 경계의 수신호를 보냈을 때였다.


 “오랜만이네. 잠깐 얘기 좀 할까?”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윤아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뒤를 돌아봤다.

 분대원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여자.

 예지였다.


 실종되었던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가.

 반가워할 법도 했지만, 윤아는 경계를 푸는 대신 마력을 더 끌어올렸다.

 주변의 공기에서 부싯돌 튀기는 듯한 소리가 나며, 파란 불꽃이 곳곳에서 일었다.


 예지는 고개를 저었다. 선명한 올리브색의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인간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머리 색.

 윤아는 그런 그녀에게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았다.


 “얘기는 변신부터 풀고 하입시더, 언니.”

 “그건 안되겠는 걸. 나도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깐. 저기 캠프, 너희 것 맞지? 가서 이야기 할까?”


 그러면서 예지는 뒤로 돌아서 캠프로 먼저 걸어갔다. 마력을 끌어올린 윤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윤아는 주변에 충만한 정전기를 흩었다.

 마법소녀 형상으로 변신한 상대에게 맨몸으로 덤벼봐야 승산은 없다.

 예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당장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예지는 어느 새 장작더미 옆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의자였다.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를 후 불자, 선명한 녹색빛의 거품이 부채꼴로 퍼져 나갔다.

 거품이 스친 장작은 갑작스레 불이 붙었고, 내려앉은 바닥에서는 접이식 의자가 나타났다.


 윤아는 그 의자에 앉으며 투덜댔다.


 “거 사람 보자마자 환각 마법부터 걸고 이게 머하는 짓입니꺼. 힘자랑하는 것도 아이고, 예?”


 그림자 없는 세상.

 갑자기 사라진 분대원들.

 예지의 뜻대로 불려 나오는 ‘현실’의 물건들.

 전부 예지, 마법소녀 페리도트가 만들어낸 환각 속의 일이었다.


 예지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 너는 괜찮아도 다른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금마들은 어떻게 했는데예? 옛날처럼 막 자살하라고 그런 건 아니지예?”

 “걱정 마. 적당한 데 들어가서 자고, 왜 그랬는지는 잊도록 암시를 걸어 놨을 뿐이야.”


 예지가 다시 거품을 막사 쪽으로 뿌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저마다 얌전히 잠들어 있는 분대원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SP시큐어의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 저마다 침대 위, 혹은 바닥에서 뒤엉킨 채 잠들어 있었다.

 예지가 다시 손바닥을 휘젓자 그들의 모습이 다시 허상처럼 사라졌다.


 곧 예지의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검은색으로 서서히 돌아왔다. 변신을 풀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곧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먼 얘기가 하고 싶은데예? 아이다. 그보다 예지 언니야. 넉 달 동안 머했능교? 거 전역하고 나서 전찬영인가 먼가, 국회의원 선거캠프 드갔다 안캤으요? 그 의원양반 디지뿌고 나서 한 번도 연락이 안되가 내 얼마나 걱정했는데. 사람이 정 없이 그래, 넉 달이나, 살았는지 디짔는지도 모르구로. 전화 한 통 안 주는 게 말이 돼요? 예? 우리 사이가 그거 밖에 안되나? 말 좀 해보소. 아니 입 안에 꿀단지 옇어놨나, 왜 말이 없노.”

 “잠깐만, 잠깐만. 일단 순서대로 다 말해 줄게. 순서대로.”


 그렇게 대답하며 예지가 당황한듯 두 손을 저었다. 윤아는 그런 예지를 불신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예지는 그녀에게 꺼낼 말을 속으로 정리하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윤아를 설득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모양이었다.

 



 “…”


 전등이 켜지지 않은 베이스캠프는 어두컴컴했다.

 그 중앙에서, 바다 한 가운데 뜬 등대처럼 빛나는 모닥불.

 윤아는 그 옆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용건을 마친 예지는 이미 떠난 뒤였다. 원래 목적이었던 가미긴의 유물 한 점을 챙긴 채.

 원래대로라면 그러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거액의 성과급도 성과급이지만, 들고 간 예지의 소속이 문제였으니까.


 “서울연합…”


 윤아는 그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서울연합.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점거한 민병대 집단.

 실종된 줄 알았던 예지가 그곳에 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윤아가 놀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좀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전찬영 의원을 암살한 건 국정원 요원들이었어. 그날 나도 집에서 저격당했었고. 마스코트 덕분에 살았지만 말이야.’


 ‘뭐라꼬예? 저겨억? …전찬영 의원 죽인 거 언니 아님미꺼? 뉴스에서는 그래 떠들어 샅던데.’


 ‘내가 한 걸로 덮어 씌웠겠지. 마법소녀 특별법에 반대하던 몇 안되는 정치인 중 하나였는데, 내가 그 사람을 죽일 리가 없잖니. 애초에 그 사람 선거캠프에 들어간 이유도 그 이유 때문이었는 걸.’


 ‘혹시 모르지예. 전쟁때 맨치로, 말다툼하다가 승질난다고 탁 때렸더니 억 하고 디졌을지.’


 ‘…혜인이도 그렇고, 너흰 날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니? 아무튼, 부산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계속 쫓겼어. 의원 암살범이 국정원인 건 그때 추적해오던 요원들을 붙잡아서 알아낸 거고.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서울연합 말곤 갈 데가 없더라.’


 ‘하필 가도 거 가능교. 그래가, 결국 국정원이 그 의원을 와 죽였는데예?’


 ‘글쎄. 그 이유까진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 대통령하고 부산 정부가 뭔가 수작을 부린 것만은 확실해. 이건 믿어줘.’


 ‘…통 믿기진 않는 소리긴 한데, 예지 언니니까 내가 한 번은 속아줍니더.’


 ‘고마워. 요즘 부산 분위기는 좀 어때? 라디오 방수는 듣는데 국영방송이다 보니 분위기 파악이 어려워.’


 ‘뭐, 요새 분위기가 좀 꼬롬하긴 하지예. 저야 밖으로 나댕기니께 좀 낫지만. 안에서는 뭐 직접 건들진 몬해도, 신상 폭로니 마법소녀 때문에 집값 떨어진다느니 난리도 아님더. 협회도 하나-도 쓸모 엄꼬. 선희도 맘고생 심한갑더라고예. 일은 쌔빠지게 하는데 진급은 자꾸 미뤄지고 남친도 지 슬슬 피한다 그카고.’


 ‘혜인이는? 내 신세가 이렇다 보니 못 챙겨주는 게 자꾸 마음에 밟히네.’


 ‘갸 어무이 병원 입원했다 아임미꺼. 병원비가 오질라게 나와가꼬, 내하고 쪼가 돈 좀 빌리주고, 나머지는 우째우째 할부로 해가 갚고 있나보더라구에. 금마도 고생 많심더.’


 ‘…쪼? 조민우 중위 말하는 거야?’


 ‘맞는데예.’


 ‘그 인간… 아니지. 조민우 씨 지금 천안에 있는데?’


 ‘예? 갸가 와 거 있으요.’


 ‘원래부터 서울연합에서 그… 마약 밀수해서 부산에 유통하고 있었다더라. 예전부터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런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쪼가 그랬다꼬예? 언니, 그게 먼 소립니꺼?’


 ‘벌써 2년이 넘었다던데? 혹시 몰랐니?’


 ‘아니 그럼… 쪼 금마, 혜인이하고 만나기 전부터…’


 윤아의 상념은 거기에서 끊겼다. 막사 쪽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24인용 막사로 다가갔다.

 그녀의 분대원 중 한 명이 하품을 하면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어우 씨 잘 잤다. 개꿀. 근데 왜 이리 춥냐. …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괜히 심통이 난 윤아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억!”

 “마 느그는 대장 혼자 놔두고 즈그들끼리 퍼질러 자고 자-알들 하는 짓이다. 안 일나나? 어?”

 “악, 악! 그만 차십쇼 대장님! 야야 다들 일어나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SP시큐어의 직원들이 저마다 눈을 비비거나, 하품을 하면서 깨어났다.

 그들은 자신이 이런 곳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에 어떠한 의문도 없는 듯했다.

 윤아는 그 점에 의구심을 품지는 않았다. 마법소녀 페리도트의 마법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당했는지, 어떤 환각을 보았는지.

 모든 것을 깔끔하게 잊고, 그 결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방금 전 예지와 나눈 대화는 사실이었을까? 모종의 암시 같은 거라도 걸린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이 잠시 든 윤아였지만, 그녀는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

 변신을 푼 상태의 마법소녀는, 서로의 마력저항을 뚫기 쉽지 않다.

 만일 대화를 나누던 중 예지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었다 하더라도 분명히 위화감이 남았을 것이다.

 그때는 예지가 변신을 푼 상태였으니까.


 직원들은 저마다의 텐트로 돌아가거나, 발전기를 켜거나, 옷을 털고 총기류를 정비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떠돌던 풀벌레 소리는 순식간에 소음에 묻혀 사라졌다. 저녁의 폐허에 내린 땅거미는 곳곳에 켜진 형광등 빛에 놀라 물러났다.

 베이스캠프에 활력이 돌아오는 건 금방이었다.


 윤아는 아까 정강이를 걷어차인 분대원에게 말을 걸었다.


 “마, 승철이. 내 좀 보자.”

 “왜요, 대장.”


 아까 맞은 정강이가 아직도 아픈지, 그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대꾸했다.

 윤아는 갈색으로 염색한 단발을 긁적이며 그에게 물었다.


 “니 아까 수색할 때 뭐 목걸이 같은 거 하나 몬봤나? 이상한 까만 보석 박힌 거.”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못 봤습니다. 그런 희한한 게 있었으면 진작에 말씀드렸죠.”

 “…오야, 알겠다잉. 아까 쪼인트 깐 건 미안타.”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윤아는 자신의 텐트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텐트 입구를 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승철에게 물어본 목걸이. 아까 대화를 나눌 때 예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물건이었다.

 마신 가미긴의 마력이 담긴 것.

 예지는 부산 정부가 그 ‘유산’들을 회수하는 걸 최대한 막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했다.

 윤아는 이미 반지 하나를 본부로 보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었다.

 기밀엄수조항도 있었지만, 그때는 예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목적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안 예지가 어떻게 나올지도 몰랐고.


 윤아는 다시 회상에 잠겼다.


 ‘언니가 와 그걸 막는데예? 머 서울연합이 그러라 캅디꺼?’


 ‘정확히는 율이 언니가. 마스코트가 없어져서 예측이 좀 부정확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잘 맞는 편이니까. 부산 정부가 그걸로 안 좋은 연구를 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어.’


 ‘…무슨 연구예?’


 ‘여기서 가미긴을 어떻게 처치했는진 기억하고 있지?’


 ‘대충은예. 그때 금마가 세종시 전체에 이상한 기술을 써가, 변신하거나 마력 좀만 마이 써도 픽픽 쓰러져뿌따 아임미꺼. 그래가 우린 똘마니들만 잡고, 금마는 포병여단 다 지원와가 겨우 잡아꼬.’


 ‘정부는 그때 가미긴이 마법소녀의 변신을 막은 방법을 알고 싶은 것 같아. 그래서 그… 역류의 힘을 발휘한 이곳에서 단서를 찾고 있다고 생각해.’


 ‘…그라믄, 언니예. 금마들이 마력을 뭐 억제하고 그런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런 말입니꺼? 와예?’


 ‘굳이 가미긴의 유산을 찾는 이유는 그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고, 율이 언니도 그렇고. 연합측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우리가 머 그리 잘몬한 거라도 있습니꺼?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고, 법도 잘 지키고. 그 센텀시티에서 미친년 하나 지랄한 거 말고는 사고도 별로 안 쳤잖아예.‘


 ‘토사구팽이라는 말, 아니?’


 ‘알지예. 토깽이 잡으면 쓸데없이 밥 축내는 사냥개는 삶아묵는다, 머 그런 거 아님미꺼.’


 ‘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그 사냥개가 아닐까?’


 ‘예??’


 ‘이면세계 대전이라는 위기가 끝났으니, 마법소녀라는 사냥개는 마법이라는 이빨을 뽑거나, 아니면 없애야 한다. 굶주린 사냥개들이 더 많은 고기를, 더 많은 권력과 힘을 요구하기 전에. 그게 정치인들… 아니, 사람들의 생각인지도 몰라.’


 그때 예지가 지은 씁쓸한 표정을 떠올린 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서울연합은 지금의 부산 정부 입장에서는, 옛날로 치면 북한 같은 위치에 있다.

 일종의 반국가단체. 그런 서울연합에 몸을 담고 있는 예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예언의 힘을 가진 마법소녀 아쿠아마린, 하율이 그쪽에 있다고 해도.


 그러나 정부가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전쟁 이후 난민들로 인하여 극심해진 인구밀도와 취업난.

 자연스럽게 내려간 사람들의 생활수준. 그에 반비례하여 증가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

 때마침 터진 센텀시티 참사라는, 마법소녀에 의한 전대미문의 테러.

 전쟁 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부 마법소녀들의 강력범죄.

 군중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던지는 희생양으로는 적당할 터.


 윤아는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갑작스러운 예지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고민거리만을 안겨줬다.

 특히 예지가 마지막에 남긴 말.


 ‘너도 선희나 혜인이 데리고, 차라리 서울연합으로 오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여기는 최소한… 우릴 차별하진 않으니까.’


 이 말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끌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기에.

 윤아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쪽지에는 전화번호가 이니셜과 함께 몇 개 적혀 있었다.

 개중 제일 윗줄에 적혀 있는 이니셜은 ‘LYJ’. 예지의 비상연락망이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된다고, 예지가 억지로 떠넘긴 물건이었다.

 윤아는 그 번호를 외운 뒤, 쪽지를 불의 마법으로 태워 없앴다. 괜히 불필요한 꼬투리를 잡힐 물건을 남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새까맣게 탄 재가 날리는 모습을 본 윤아는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강렬히.

 





*

 





 [고객님의 통장 잔액은 \22,550,700 원 입니다.]


 “후흐흐…”


 정인은 실없이 웃으며 화면에 떠 있는 은행 앱을 바라봤다.

 원래 쓰던 통장과는 다른 차명계좌. 노숙자에게서 8만원에 산 명의로 개통한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액수보다 100배는 많은 잔고.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그러다가 휴대폰을 앞으로 휙 집어 던졌다.

 폰은 폐지로 도배된 벽에 텅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진다.

 이미 거미줄 같은 액정의 실금이 더 늘어났지만,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앞의 술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건배라도 하듯 위로 들어올렸다.


 “건배, 짠~”


 판잣집 안에 건배할 사람이라곤 없었다.

 정인은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전구의 불빛과 건배를 나눴다. 그리고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반쯤 남아있던 소주는 다시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녀는 술병을 내려놓고는, 바닥에 어질러진 육포를 집어 위로 휙 던졌다. 입으로 받아먹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만취한 상태였기에 속절없이 비틀거리기만 하는 몸.

 육포는 허망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배를 잡고 웃었다. 얼굴이 취기와 웃음기로 터질 듯이 새빨갰다.

 그러다가 정색하면서 “씨발 고기쪼가리까지 날 무시해!” 바닥을 손으로 후려쳤다.

 그리고는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언제나 같이 수금하러 가던 진영 홀딩스의 직원들. 지금쯤 그들은 망년회에 여념이 없을 시간이었다.

 정인은 제발 안 왔으면 좋겠다는 듯 자신을 초대하는 그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집으로 바로 왔다.

 가봐야 다들 자신의 눈치만 보느라, 망년회는커녕 초상집 분위기가 될 게 뻔했으니까. 


 부를 사람도 하나 없었다.

 선희는 이전에 사소한 일로 크게 싸운 이후 데면데면한 사이.

 민우와 예지는 잠적했고, 윤아는 아직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2030년을 마무리하는 연말, 집에서 홀로 만취해 있었다.

 연말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인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코를 훌쩍거리면서 소리쳤다.


 “나와라 다들~ 무릎 터진 황금태! 물고기 안중필! 동해 관광간 배재상! 어디 갔어! 이런 날 술 한 잔 해야지~ 제삿상 받으러 갔냐? 어? 니네 제삿상 나 말고 아무도 안 챙겨주니까 얼렁 와~~”


 이번 주에 ‘처리’한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채무를 갚을 능력도 없고, 벗겨 먹을 가족이나 지인도 없는 사람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도 아무런 뒤탈이 없는 채무자들.


 정인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법으로 물 덩어리를 만들었다.

 물 덩어리는 곧 다리가 없는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그녀는 물로 만든 사람을 향해 소주병을 흔들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자 황 쒸이~ 무릎에 물 채운 건 미안함다~! 나도 그게 풍선처럼 팡! 터질 줄 몰라써! 그러니 술 마시고 잊어어~ 건배에~”


 그러면서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소주를 그 사람 모양의 물덩어리에 부었다.

 술은 그대로 바닥에 쪼르르 엎어졌다.

 정인은 바닥 장판에 번지는 얼룩을 잠깐 쳐다보다가 울먹거렸다.


 “황 씨 이 개애쉐끼… 쪼-잔한 쌔끼… 맨날 사람 꿈에나 나오는 조까튼 새끼… 내 술은 못 받겠다 이거지이... 넌 씨이발 평~생 그리 살아라… 중필이 나와라 얍!”


 그러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물덩어리가 꾸물거리더니 다리 없는 사람에서,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정인이 기억하는 그 채무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바닥에 뻗은 채 분수처럼 입에서 물만 흘리던 시체.


 곧 물덩어리의 머리처럼 보이는 곳에서 물이 쪼르륵 흘러 떨어졌다. 엎드린 정인의 머리 위로.

 그녀는 허우적거리다가 벌러덩 뒹굴었다.

 흥건하게 젖기 시작한 바닥. 그 위에 드러누운 정인은 마법을 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헐거운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가 젖는 건 무시한 채.


 마법의 물이 다 쏟아질 때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는 젖어서 쭈글쭈글해진 꽁초에 몇 번이고 라이터를 튕겨 불을 붙였다.

 평소보다도 훨씬 매캐한 연기.

 그녀는 폐를 들어내듯 기침을 해가면서 담배를 피웠다.


 “콜록, 콜록, 히히… 씨발, 콜록.”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빈 소주병에 쑤셔 넣은 그녀는 일어나서 거실의 냉장고로 갔다.

 지난 달 새로 맞춘 의족 덕분에 걷는 건 문제가 없었다.

 냉장실 안에는 그릇에 대충 담긴 반찬거리 몇 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술병이었다.

 정인은 소주병 두 병을 더 꺼냈다. 찬물을 맞으니 취기가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술이 깨면 또 악몽을 꾼다.

 자신의 모습을 한 혜인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꿈을. 혜인의 모습을 한 자신이 목 졸리는 꿈을.

 그 모습을 자신이 ‘처리’한 사람들이 둘러싼 채 비웃는 미몽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지 않으면 언제나 그랬다.


 결국 소주 두 병을 더 비운 정인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기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인은 요양병원으로 갔다. 숙취와 근육통을 애써 참으면서.

 새로 바꾼 의족은 튼튼했지만 양 손에 하나 가득 짐을 든 채 걷는 건 아직 버거웠다.

 그녀는 양손에 든 비닐봉투의 내용물을 다시 확인했다.

 물티슈. 고급 과자. 그 외 간식거리나 잡다한 물건들.

 어머니를 위한 건 아니었다.


 정인은 병동 출입구의 초인종을 어깨로 눌렀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이순영 환자 보호자인데요. 면회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출입구 열려 있어요.]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인은 어깨로 기대듯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테이션 뒤에서 손톱을 손질하던 간호사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정인은 평소처럼 바로 어머니가 있는 병실로 가는 대신, 스테이션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


 정인은 말없이, 양 손에 든 비닐봉투를 스테이션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한동안 제가 사정이 안 좋아서… 우리 선생님들 신경 못 써드린 것 같아서요. 약소하지만…”


 정인은 주머니 속의 영수증을 생각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았다.

 사십만원이 넘게 찍힌 영수증.

 이 정도면 잘 봐 달라는 뇌물로서는 충분할 터.


 비닐봉투를 뒤지던 간호사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조무사로 보이는 두 명이 간호사의 뒤로 다가와서는 고개를 빼곰히 내밀었다. 그리고는 ‘어머나’ 하면서 놀랐다.


 “아유 뭐 이런 걸 다 들고 오세요. 부담스럽게 시리.”


 부담스럽기는. 정말 부담스러워 했으면 벌써부터 내용물을 뒤지고 있진 않았겠지.

 정인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에 보니까 욕창 또 생기셨던데…”

 “아유 저희가 더 철저히 신경 써드릴 게요. 걱정 놓으시고요.”

 “면회 가봐도 될까요?”
 “그럼요. 느긋-하게 얼굴 뵙고 오세요.”


 정신없이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는 그들을 뒤로 하고, 정인은 병실로 향했다.

 역겨웠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어쨌든 자신을 대신해서 어머니를 돌봐 주는 사람들이니까.

 굽실거리고 뇌물 바치는 정도로 어머니의 처우를 낫게 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병실은 여전히 시루떡 같았지만, 정인에게 낯익은 몇몇 노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갈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마 죽었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겼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자리에는 또다른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들이 들어 차 있었다.


 창가 자리에 있는 어머니는 옆으로 돌아 누워 있었다.

 목에 뚫린 기관절개관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유달리 심했다.

 정인은 보호자용 좌석에 앉아서 어머니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엄마, 나 왔어요.”


 햇빛을 받아 그런지 약간 따스했다. 미열일 수도 있었고.

 정인은 가슴이 살짝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의료원에 입원해 있을 때 폐렴으로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인은 병실 구석을 몰래 곁눈질했다.

 병원에 고용된 간병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의자에 앉아 휴대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어머니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방 하나에 환자를 열댓 명씩 넣어 놓는 데다가, 면회 와서 의사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간병인은 환자를 보는지 휴대폰을 보는지 모를 지경이고, 간호사는 보호자가 바치는 간식거리만 밝혀 댄다.

 이런 허술한 곳에 어머니를 계속 맡겨 둘 순 없었다.


 미리 알아본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입원비는 월 150만원 정도로 훨씬 비쌌지만 이제 금전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은의 밑에 들어가서 더러운 일을 처리한 지 어느덧 두 달.

 번 돈만 이미 2,500만원에 가깝다.

 쌓여 있던 악성 채무자들을 ‘처리’하거나 ‘설득’하면서 얻은 성과급이었다.

 요양병원 비용 뿐만 아니라, 집, 의족, 빚. 이 수입이면 언젠가는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정인은 한동안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이제 더 편한 곳으로 모셔 드리겠다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공허한 말이었다. 지금의 어머니는 그런 원초적인 감각조차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너무 늦은 성공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동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의롭게 산다는 허상을 쫓지만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그런 재주가 없음을 조금만 더 일찍 인정했더라면.

 그런 후회를 씹어 삼키면서 그녀는 일어났다.


 “저 갈게요. 엄마.”


 결국 정인이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던 말은 그 두 마디가 전부였다.


 병동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간호사와 조무사들이 웃는 낯으로 일어나서 배웅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보호자분!”
 “…네. 수고하세요.”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오늘은 VIP라도 배웅하는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정인은 출입구를 닫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전포동의 단골 슈퍼마켓에 들렀다. 그리고 10kg짜리 잡곡 포대와 라면, 감자와 가공육을 샀다.

 계산대 아주머니가 바코드를 찍다 말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새해 복 많이 받어. 그런데 요번에는 술담배 안 사나벼?”
 “집에 아직 많아요.”

 “아가씨 그러다가 일찍 죽어. 적당히 마시고 펴. 내가 아가씨 삐쩍 마른 거 볼 때마다 걱정돼가 하는 말이여.”

 “…”


 정인은 아주머니에게 말없이 웃어주고 카드를 내밀었다.

 의족과 마찬가지로, 지난 달에 개통한 카드였다. 진영 홀딩스에서 발급한 위장용 급여명세서 덕분이었다.

 아주머니가 뭐라고 더 떠들었지만, 정인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잡곡 포대와 봉투를 끌어안고 집에 돌아온 정인은 현관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아주머니의 말이 맞을 지도 몰랐다. 겨우 이 정도 무게를 들고 1킬로미터를 걸었다고 지치는 신세.

 추운 겨울이었지만 셔츠와 바지는 이미 땀에 푹 절어 있었다.


 정인은 거실에 짐을 내려놓고는 옷을 벗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땀에 절은 군용 내의를 벗어 던지고,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끌렀다.

 적당히 긴 머리카락은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했다.


 수도꼭지를 켜는 대신, 정인은 마법으로 물을 불러냈다.

 판자촌은 여전히 난방이 안 되었기에 찬물로 씻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그녀는 적당히 몸에 비누칠을 한 뒤 마법의 물로 몸을 몇 바퀴 휘감았다. 샤워라기 보다는 세탁에 가까웠다.

 머리도 똑같은 방법으로 감은 그녀는 남아있는 물을 증발시켰다.


 그러다가 거울을 본 정인은 무심코 자신의 옆구리를 만졌다.

 오돌토돌한 갈비뼈가 그대로 만져졌다.

 대전 시기에는 배와 이어져서 매끈한 라인을 그리던 몸. 지금은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서 보기 흉했다.


 거식증 환자나 다름없는 상태.

 아무리 마법소녀의 육신이 내구성이 좋다 한들 한계는 있었다.

 거의 반 년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 이렇게 되는 건 당연했다.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눈가를 비비면서, 정인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새 속옷과 실내용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녀는 밥을 준비했다.

 거의 석 달 만에 연 밥솥은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때이른 저녁을 먹고, 담배를 피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가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소주를 반 병 정도 마시고 드러누웠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목이 졸리는 느낌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어나면, 다시 술을 마셨다.

 쓰린 속을 붙든 채 밤 늦게까지. 그러다가 만취하면 쓰러져서 잠들었다.

 ‘늦었지만 나도 이젠 할 수 있어’ ‘너하고 난 달라’ ‘그러니까 그만 좀 나와, 씨발년아’

 이런 잠꼬대를 중얼거리면서.


 정인의 신년 첫 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

 





 [그래서 안되겠다, 이겁니까?]


 차명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냉정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폰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그러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 사람에게 꼭 맡겨야 할 이유가 있나요? 능력은 충분하다지만, 거동이 불편해서 단독 행동은 어려워요. 더군다나 국회의원을 암살하라니-“

 [쓸데없는 토를 다는 걸 보니, 누구 덕분에 당신 사업이 이렇게 컸는 지 잊으신 거 같군요. 사도닉스.]

 “…”

 [우리 출자금을 다 빼도 되고, 당신이 저질러온 행위를 언론에 까발려도 되고. 그 외에도 당신을 몰락시킬 방법은 많습니다. 아직은 의원님께 당신이 유용하니까 그러지 않는 것뿐이죠.]


 마치 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상대의 태도.

 나은은 패배감에 어깨를 떨었다.

 더욱 그녀를 화나게 하는 것은 상대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점이었다.

 진영 홀딩스는, 그리고 대부업자 주나은은 태생부터 존속까지 오갑용 의원의 뒷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오갑용 의원의 비서가 선고하듯이 말했다.


 [기한은 이 주일. 그 안에 희소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사도닉스.]


 나은은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소파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마른 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얽히는 게 아니었는데…”


 나은은 소파 위에 몸을 내던졌다.

 블라우스와 정장 치마가 구겨지든 말든, 그녀는 그대로 엎드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만 속절없이 식어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나은은 눈을 감은 채 자문했다.

 전쟁 후 자신의 능력으로 난민들을 치료해주다가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시점?

 아니면, 난생 처음 송사에 휘말려서 어쩔 줄 몰라할 때, 도움을 주겠다고 접촉해온 국회의원을 순진하게 믿은 것?

 자신도 몰랐던 사업 재주에 취해서는 오갑용 의원의 음험해지는 요구를 계속 받아들인 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혜인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걸 거절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고.


 나은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면서 쿠션을 끌어안았다.

 결국은 아무리 몸을 비틀어 봤자 자신은 권력자의 장기말에 불과했다.

 목줄을 쥔 건 오갑용 의원. 묶인 사냥개는 자신.


 이번에 그 사냥개가 물어뜯어야 할 대상은 다른 국회의원이었다.

 임철규. 신대한민국당 소속의 국회의원. 대표적인 마력 친화론자 중 한 명이었다.

 마력 사용자들을 무턱대고 규제하고 탄압할 게 아니라, 그들의 협조를 얻어서 마력이라는 신 에너지원을 적극적으로 연구,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

 몇 달 전 암살당한 전찬영 의원 또한 그의 파벌에 속해 있었다.


 그 임철규 의원을 암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법은 종류에 따라 멀리서도 총기류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탄피나 화약흔 같은 흔적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은이 알기로는, 아직 마력을 감지하거나 차단하는 기술은 없었다.


 “이상해…”


 그러나 나은의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오갑용 의원의 비서가 굳이 ‘라피스라줄리를 보내라’고 지정한 점.


 그녀가 여러 모로 악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걸 비서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변신을 못하기에 다른 마법소녀보다 낮은 마법의 출력, 불편한 다리 등.

 애초에 오갑용 의원과 그 비서는 그녀가 대출을 받으러 온 날부터,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날 온 전화에서 그녀를 ‘퇴물 마법소녀’라고 언급했던 것을 나은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방금 통화에서도,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여러 번 꺼낸 내용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굳이 그런 그녀를 암살자로 지정한 이유는 뭘까?

 그리고 왜 임철규 의원을 암살해야 하는 걸까?

 그를 암살해서 이득을 얻는 건 누굴까?


 나은은 몸을 일으켜서 비스듬하게 앉은 채,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불길한 예감만이 들었을 뿐.


 나은은 그 예감에 따르기로 했다.

 지금까지 어지간해선 빗나간 적이 없는 예감.

 오갑용의 ‘청소부’ 노릇을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소파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서 전화를 걸었다. 이어지는 긴 통화음.

 곧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와 함께, 기계적으로 변조된 음성이 들려왔다.


 [사도닉스. 먼저 연락 해오다니, 별 일이로군.]


 서울연합의 접선책이었다.

 나은은 긴장 속에서,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탈출할 땅굴을 미리 파 놓기 위해.

 



 오갑용 의원의 비서는 떨리는 손으로 도청 수신기를 내려놓았다.


 “이, 이제 다 끝났지요?”


 정장 차림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독사 같은 시선을 받은 비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정장 차림의 사내는 갑자기 씩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해 주셨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비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옆을 돌아봤다.

 의원 사무실 곳곳에서 서류철이나 책꽂이, 서랍, 바닥을 뒤지는 다른 요원들.

 비싼 서진이니 꽃병이니 하는 것들이 마구 치워지고 그 자리를 온갖 서류와 장부가 차지했다.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보던 중년의 사내는 얼마 남지 않은 숱을 쥐어뜯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그에게 다가가서 위로라도 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의원님?”


 오갑용 의원은 주먹에 뽑힌 머리털을 쥔 채 그를 노려봤다.

 돈세탁, 시민단체 방해, 암살.

 여러 방면에서 유용하던 주나은이, 사실 서울연합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것은 그에게도 약간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용가치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모든 건 써먹기 나름이었으니까.


 이 자들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그런 원망의 시선을 받은 국가정보원의 요원은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너무 걱정 마십쇼. 의원님한테 직접적으로 오는 피해는 없을 겁니다. 의원님 같은 ‘애국자’에게 그럴 순 없죠. 안 그렇습니까?”

 “…그 말이 맞네. 이적행위자를 가만히 놔둘 수야 없지. 아무리 유용한 사냥개라 해도 말일세.”


 이를 갈며 대답하는 오갑용 의원을, 요원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 유용한 존재를 가지고 기껏 하는 게 사리사욕을 채울 뿐인 자.

 어차피 직접 공작을 벌이지 않더라도, 곧 알아서 몰락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 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요. 퇴물이 된 마법소녀와 서울연합과 내통하는 마법소녀. 이빨 빠진 사냥개든, 주인에게 이를 드러낸 사냥개든, 모든 건 써먹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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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