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40화 https://arca.live/b/monmusu/805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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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떨어져라.”

 

나는 내 가슴팍에 달라붙은 유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유노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버티려 했으나, 내 팔심에 못 이겨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글쎄?”

“하아.”

 

통화는 몰래 엿듣고, 갑자기 성질 부리고, 기분 나쁘게 달라붙고.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도 유노의 뻔뻔한 표정을 보면 한숨이 다 나온다. 그래, 지금껏 유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저 정도는 애교 수준이지.

 

나는 유노 때문에 엉망이 된 옷을 정리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움직이니 유노도 내 옆을 따라왔다. 내가 들러붙지 말라고 팔을 휘휘 저으니, 유노는 오히려 내 팔을 감아 팔짱을 끼었다. 나는 유노에게서 팔을 빼내며 말했다.

 

“그렇게 붙지 좀 마. 남들이 보겠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 그리고 남들이 좀 보면 어때. 오히려 아름다운 부장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자랑하라고.”

 

유노는 등을 쫙 피고 가슴에 손을 얻으며 말했다. 유노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같이 있는 걸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나는 유노를 무시하고 가려다, 문득 물어볼 게 떠올라 주머니에서 스마트 워치를 꺼냈다.

 

“그건 왜 꺼내? 벌써 전원 위치 까먹었어? 아니면 또 애완 흡혈귀가 보고 싶어진 거야?”

“후. 제발. 그게 아니라 질문할 게 있다.”

“뭔데? 말해봐. 아, 그리고 전원은 여기야.”

 

유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스마트 워치의 전원 버튼을 가리켰다. 이걸로 며칠이나 놀림 받으려나. 적어도 일주일은 갈 것 같은데.

 

“그건 알아.”

“그러시겠지. 다음에 또 전원 위치 까먹으면 얘 울리지 말고 이 누나한테 전화하렴.”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너한테 전화하는 일은 없을 거다. 장난 그만 치고 이걸로 전화하는 법 좀 알려줘.”

“전화? 전화는 네 핸드폰 1번 꾹 누르면 나한테 오잖아. 설마 그것도 까먹은 거야?”

“핸드폰으로 말고, 이 스마트 워치로.”

“아아. 진작 그렇게 말하지.”

 

유노는 내 손에 있던 스마트 워치를 휙 하고 채갔다. 나는 유노가 조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잘 봐. 이렇게 검은 화면을 한 번 터치하면 시간이 나와. 그리고 위로 슬라이드, 그러니까 아래에서 위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면 통화 아이콘이 바로 보여. 이걸 누르면 등록된 번호로 전화가 갈 거야. 여기 등록된 건 너뿐이니 너한테 가겠지. 이해했어?”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전화번호 추가 등록은 네 핸드폰 앱으로 하던가, 스마트 워치에서 아래로 내려서 설정 가서 하도록 해. 쓰다가 불편한 거 있으면 또 부장실로 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우리 길수는 프리 패스니까.”

 

유노는 설명이 끝나자 스마트 워치를 내게 던지고 부장실로 향했다. 나는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내 자리로 움직였다. 다시 지겨운 업무를 할 때가 되었다.

 

간단한 서류 정리와 몇몇 잔심부름을 끝내니 퇴근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회사를 나섰다. 역시 회사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은 퇴근 시간이다. 알리사의 차에 탑승한 나는 알리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번 하고, 신비에게 스마트 워치를 돌려주었다.

 

“와! 정말 다시 불 들어오네.”

“그래, 신비야. 거기 옆면 만져볼래? 튀어나온 게 두 개 있을 거야. 그래, 그거. 그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게 전원 버튼이야. 혹시나 다음에 또 안 켜지면 그거 꾹 눌러봐.”

“알았어.”

 

신비는 뒷좌석에서 전원 버튼을 꾹 누르며 시계를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래 봤자 나오는 건 로고뿐인데… 그게 재밌나? 내가 백미러로 신비를 곁눈질 동안 알리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참. 길수 씨. 몇 개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많이 하셔도 됩니다.”

 

알리사 씨가 나에게 질문이라. 어떤 질문을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혹시 수영할 줄 아세요?”

 

수영?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럭저럭 합니다.”

“생선이나 회에 거부감은 없으시죠?”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잘 됐네요.”

 

그걸로 알리사의 질문이 끝이 났다. 수영, 그리고 생선. 알리사의 의도가 어느 정도 보였다. 이번 주 주말에 알리사 씨와 친구분들과 만나기로 했었지. 나는 신비에게서 눈을 떼고 알리사에게 물었다.

 

“이번에 바닷가로 놀러 가기로 하셨습니까?”

“어디로 가는 지는 비밀이에요.”

 

알리사는 입꼬리를 조금 올리며 말했다. 알리사 씨도 은근히 장난기가 있다니까.

 

 

 

 

 

지긋지긋한 평일이 끝나고 주말 아침이 다가왔다. 예전에는 어떻게 버텼지. 이전과는 다르게 유노가 괴롭히는 수준도 놀리는 정도로 바뀌고, 점심에 신비와 전화해서 힘을 충전할 수 있어도 힘든데.

 

나는 침대 옆에서 짐을 싸는 신비에게 말했다.

 

“준비는 다 했니?”

“으응…. 잠시만….”

 

신비는 작은 캐리어를 앞에 두고 상어 인형과 곰 인형을 각각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다른 물건을 챙기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저 둘을 고르는 것에만 십 분 넘게 쓰고 있었다. 나는 고민하는 신비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냥 둘 다 넣지그래?”

“안 돼. 좁잖아. 꾸깃꾸깃해져.”

“그러면 하나는 넣고 하나는 신비가 들고 가면 되잖아.”

“맞아! 그러면 되는구나!”

 

신비는 상어 인형을 넣은 다음 캐리어를 닫고 일어났다. 드디어 출발할 수 있겠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신비는 다시 자리에 앉아 캐리어를 열었다. 그리고 상어와 곰의 위치를 계속해서 바꾸며 생각에 빠졌다.

 

“신비야. 슬슬 옷 갈아입어야지.”

“이것만 정하고.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해? 상어? 아니면 곰?”

“상어가 좋지 않을까?”

“으음…. 좋아. 아저씨가 상어라고 했으니까 상어로 할래.”

 

신비는 상어를 안에 넣고 다시 가방 문을 닫았다. 사실 상어를 들고 곰을 넣으라는 말이었는데, 뭐 어쨌든 결정됐다면 좋은 거지. 나는 괜히 시간을 지체하는 대신 준비가 끝난 캐리어를 들고 말했다.

 

“아저씨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옷 다 갈아입고 내려와.”

“응.”

 

내가 문을 나서니 방 안쪽에서 신비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옷을 입으려나. 어젯밤에 물어봤을 때는 비밀이라며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요즘 우리 집 여자들이 비밀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계단을 내려가 거실로 향했다. 비밀을 좋아하는 또 한 사람, 알리사는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이 출발 당일인데도 나는 아직 행선지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 예상은 가지만.

 

“신비는 옷 갈아입고 내려올 겁니다. 알리사 씨는 준비 끝나셨습니까?”

“네. 길수 씨도 옆에 앉아요.”

 

알리사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소파 옆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옆에 앉은 채 알리사를 보았다. 흰색 와이셔츠에 베이지 색 니트 베스트, 그리고 꼰 다리를 정강이까지 덮고 있는 갈색 주름치마. 잘 어울리시네. 굳이 책 읽는 알리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아꼈다.

 

알리사가 마시던 커피가 바닥을 보였을 때, 계단 쪽에서 쿵쿵하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만 들어도 신비가 신이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 품으로 옷을 갈아입은 신비가 뛰어들어 왔다.

 

“아저씨. 아저씨. 내 옷 어때?”

 

나는 신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비의 옷을 구경했다. 상의는 알리사처럼 니트를 입었다. 니트 베스트는 아니고, 니트 터틀넥. 그리고 아래에는 청바지를 입었다. 제대로 꼬리 구멍이 뚫려있는 청바지였다. 처음 보는 옷인데, 새로 산건가?

 

“귀엽네. 잘 어울려.”

“히힣.”

 

신비는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내 몸에 볼을 비볐다. 구멍 사이로 나와 있는 꼬리가 살랑거렸다.

 

“자 그럼 출발할까요?”

 

알리사의 말에 나는 신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알겠습니다. 자, 신비야. 가자.”

“응.”

 

신비는 일어서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곰 인형을 주웠다. 아까 나한테 안길 때 놓아둔 건가. 신비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데, 옆에서 알리사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내가 알리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알리사는 나에게 차 키를 넘겨주었다.

 

“저는 빠르게 설거지만 하고 갈게요. 먼저 차에 타 계세요. 여기 키요.”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서며 캐리어를 집고, 알리사는 잔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나와 신비는 함께 차고로 걸었다. 차고에 도착한 나는 먼저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고 조수석에 탑승했다. 나는 뒷좌석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신비에게 물었다.

 

“신비야. 혹시 알리사 씨한테 어디로 가는 지 들었어?”

“응!”

“아저씨한테 말해줄 수 있어?”

“안 돼. 의사선생님이 비밀이라고 했어.”

 

신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얼마나 굉장한 곳을 가려고 이렇게 꼭꼭 숨기는 걸까.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알리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알리사는 금방 차로 왔다. 나는 알리사에게 차키를 돌려주며 질문했다.

 

“어느 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차에 탔는데 아직도 비밀입니까?”

“음…. 한번 맞춰보실래요? 일단 저희는 인천으로 갈 거예요.”

 

알리사는 차에 시동을 걸며 답했다. 인천…, 인천이라. 거기에 뭐가 있더라.

 

“인천공항…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여권을 안 챙겼으니 말입니다.”

“맞아요. 공항은 아니에요. 덤으로 말해 드리자면 비행기도 안 타요. 원래는 스카이다이빙도 후보로 고려했었는데, 놀이공원에서 신비 양이 롤러코스터를 무서워하던 게 떠올라서 뺐어요.”

 

아, 그랬었지. 신비랑 같이 탔을 때, 신비가 놀란 나머지 내 손에 손톱을 꽉 눌러서 피가 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그게 신비의 잘못은 아니다. 미리 어떤 놀이기구인지 설명 안 한 내 잘못이지.

그러니까 뒤에서 저렇게 미안한 눈으로 날 안 봐도 되는데. 나는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신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공항은 아니고 비행기도 아니고. 그럼 어디일까. 후보에 스카이다이빙이 있던 걸 생각하면 단순히 인천 나들이는 아닐 것 같은데.

 

“그러면 배를 타는 겁니까?”

“거의 근접했어요.”

 

근접했다라. 나는 일단 핸드폰으로 인천에 있는 관광명소를 검색했다. 그리고 찾은 장소를 운전하고 있는 알리사에게 물었으나, 알리사는 다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게 잘 알려진 장소는 아니에요.”

“모르는 장소…. 사유지 같은 겁니까?”

“완전히 사유지라기엔 그렇지만… 비슷해요.”

 

항구에 도착해서 주차할 때까지, 나는 끝내 호기심을 해결하지 못했다. 내가 의문을 품고 차에서 내리니 익숙한 얼굴이 우리를 반겼다. 하얀 정장을 입고 있는 연수련이었다. 옆구리에 검의 모습을 한 고드 공을 차고 저렇게 있으니, 꼭 해군 장교 같았다.

 

“알리사!”

“수련이야? 레야는 어디서 뭐 하고?”

“준비할 게 남았다고 나보고 가라고 하더군. 나도 운전은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운전은 또 언제 배웠대.”

“우리 공화국의 수도 옆에는 운하가 흐르니까. 공작가 전용 배도 있으니, 시간 날 때 배워뒀지.”

 

운하? 배워? 설마 수련 씨가 운전하는 배를 타고 어디로 가는 건가.

내가 행선지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 수련이 다가와 내 손을 쥐고 흔들었다.

 

“길수 군도 반갑네. 그리고 우리 신비도 말이야.”

“반갑습니다. 수련 씨, 그리고 고드 공.”

“안녕! 안녕, 검 아저씨!”

“자, 따라오게.”

 

우리는 수련 부부를 뒤따라 정박장을 걸었다. 주위에는 거대한 화물선들이 아니라, 자그마한 요트들이 있었다. 자그맣다고는 해도 자동차보다는 훨씬 컸지만 말이다. 안쪽으로 이동하던 우리에게 수련이 한 요트를 가리켰다.

 

“저게 우리가 탈 배일세.”

 

주위에 있는 날카로운 디자인과는 대조되는 유선형의 요트였다. 돛은 없고, 전반적으로 둥글고 흰 디자인에, 앞쪽에 눈처럼 검은색 둥근 창문이 있는 게, 꼭 돌고래처럼 생겼다. 신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요트를 보며 말했다.

 

“고래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특히나 앞부분을 위로 올리면 꼭 돌고래가 먹이를 보채는 것 같지.”

“와! 저거 열리는 거야?”

“그럼. 바다 한가운데에서 앞부분을 열고 일광욕을 즐길 수 있지. 안에 들어가서 보여주마.”

 

수련은 신비의 손을 잡고 요트에 올랐다. 신비는 배가 열리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지 웃으며 배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수 씨. 저희도 들어가죠.”

“예. 알겠습니다.”

 

나는 알리사와 함께 배와 항구를 잇는 다리를 걸었다. 여행 시작부터 이런데… 끝은 어떨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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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항

37화 일요일 -> 주말


하루는 너무 짧은 것 같아서 1박 2일 여행으로 변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