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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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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중학교를 졸업해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희철이는 철이 들었는지 이제 싸움을 걸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리고 예전에 너무 활기찼던 반동인지 기본적으로 조용한 성격을 가지게 됐다.

 

나는 소심하고 우중충했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희철이와 사귀며 열심히 노력했기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남자들은 점점 많아졌다.

 

 

"한경아, 나랑 사귀어 줄래?"

 

"미안, 나 남친 있어."

 

솔직히, 기분 나쁜 건 둘째치고 매우 귀찮다.

 

"아니, 너 남친 없는 거 알거든? 그런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싫.."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아! 희철이다!'

 

희철이는 벨소리를 다른 거로 해놨기 때문에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응! 희철아! 응? 물론이지! 지금 갈게♡"

 

"야, 아무리 그래도 무시하는 ㄱ...아아악!"

 

"야. 넌 뭔데 내 몸에 손대는 거야? 안 그래도 너 때문에 희철이랑 같이 나오지도 못했는데? 지금 니가 나랑 대화하는 것도 희철이 부탁이니까 하는 건데 알기나 해?"

 

"아아악!..윽...놔!"

 

"기분나빠..."

 

"완전 미친년이었잖아..."

 

흥.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덕분에 희철이랑 같이 있을 시간이 줄었잖아.

 

 

"한경아!"

 

"어? 희철아! 내가 간다고 했는데.."

 

"아 그렇지? 그냥, 무슨 얘기하나 싶어서"

 

"잃어버린 학생증 얘기였어, 내가 실수로 떨어뜨렸나 봐"

 

"아 그래? 다행이네, 가자"

 

"응!"

 

희철아.. 설마 방금 전화... 내가 고백받는 거 보고 질투한거야? 

 

으으~♡ 희철이 너무 귀여운거 아냐??

 

 

 

 

나에겐 오래된 친구가 있다.

 

초등학생 때는 빵을 받으면서 말문을 텄고, 중학생 때는 고백 비스무리한 걸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둘 다 고등학생이다.

 

처음엔 그냥 빵을 주는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부쩍 어른스러워지더니 나에게 고백 비슷한 걸 한 후로는 그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그녀는 주위 여자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예뻐졌다.

 

이때부터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는 나 이외의 사람과는 대화를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계속 우유부단하게 지내면 아무리 그녀라도 남자친구를 사귀고 지금 같은 관계는 깨지고 말 것이다.

 

좋아. 결심했어.

 

이번 주 주말, 내 모든 것을 부딪쳐 봐야겠다.

 

 

 

"올~ 그 희철이가 오랜만에 데이트하자고 하더니, 조사 좀 많이 했나 봐? 오늘 재밌었어"

 

"..."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봐봐."

 

그녀는 내 체온을 재려는 듯 오른손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대려 했다.

 

나는 그 손을 살포시 잡았다.

 

"..? 왜 그래 희철아?"

 

"한경아."

 

"..응"

 

"...좋아해."

 

너무 부끄러워서 밤새 준비한 고백 대사가 전부 날아갔다. 하지만 이렇게 직구로 승부를 보는 게 오히려 나에겐 어울릴 것이다.

 

"뭐야, 그런 말 하려고 뜸 들인 거야? 히히, 희철이도 부끄럼쟁인가 봐~"

 

...설마,

 

누가 내 심장을 밖으로 꺼냈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요동쳤다.

 

평소라면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도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부디 그 말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며 간절히 빌었다.

 

"나도 당연히 좋아하지, 너만한 친구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나온 건 사형 선고,

 

"으..응.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끝이었다.

 

 

 

 

 

꺄아악! 어떡해!!!

 

평소엔 애정표현도 않다가 폼 잡고 한다는 말이 '좋아해' 라니!!!

 

그래도 난 혹시나 해서 콘돔까지 챙겼는데... 희철이는 너무 쑥맥이라니까?

 

히히, 물론 그런 너도 좋아!

 

언제까지고 사랑해, 희철아♡

 

 

 

 

후... 어떡하냐...

 

솔직히 이 정도 했으면 내 마음을 알아줄 만도 했을 텐데, 한다는 말이 '친구' 라니...

 

할 자신은 없었지만, 친구 조언으로 콘돔까지 챙겼는데... 내가 병신이지.

 

하지만 그런 너라도 고마웠어, 그리고

 

그동안 사랑했어, 한경아.

 

 

 

 

 

 

수능 준비 덕에 바빠진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차인 시기가 적절해서 공부하긴 편했다.

 

 

 

대학에 와서 한경이하고만 다니던 전과 달리 주위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욱 넓혀 갔다.

 

이제 한경이 외에 당당하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애들은.. 하나, 둘, .. 세.. 명쯤 되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거의 10년 동안이나 인간관계를 포기했었는데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라고 큰 소리로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남자인 친구 외에 여자인 친구도 한 명 생겼다. 이름은 이수아.

 

수아와 친해지게 된 건 조별 과제로 같은 조가 되었을 때, 마치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감 있게 대해줬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수아가 워낙 친화력이 좋아서 그런지 남자인 친구들만큼 나랑 친하게 지내고 있다.

 

 

 

덥썩!

 

"야! 어디가! 같이 가자면서!“

 

누군가 내 뒤에서 태클을 걸듯 어깨동무를 했다.

 

"뭐야, 수아냐? 아니, 나 배고파서 한경이네나 가려고“

 

여자 면역이 없는 나한테 이런 신체접촉은 자제해줬으면 좋겠다. 당할 때마다 놀란다고..

 

"이야, 너도 대단하다. 또 거기서 먹으려고 가는 거야? 니가 받은 빵만 해도 체인점 하나는 세웠겠다."

 

"아니, 나도 받기만 하진 않지. 그리고 신기하게 한경이가 추천하는 빵들은 다 맛있더라고, 너도 갈래?"

 

"응? 아..아니.. 오늘은 빵이 별로 안 끌려."

 

"언제 한번 가보자니까? 걔네 빵집 진짜 괜찮아."

 

"음... 알았어. 언젠간?"

 

"쨌든, 난 가볼게. 낼 답사가야 하니까 준비할 거 체크도 할 겸 이따 밤에 카톡한다."

 

"알았어, 이따 보자!"

 

 

 

 

 

"아, 좀 늦었네. 수아한테 카톡한다 했었는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야야야

야야

야야야

아ㅋㅋ

미안미안

계속 카톡했는데 왜 안봐

죽을래?

아니 지금

돌아가는중이야

지금이 몇신데?

헤어진지 6시간은 된 거 같은데

얘기하다보니 그렇게 됐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봐

그래?

음...

됐다.

준비할건 너 빼고 나머지 애들이랑 다 맞춰놨어

ㄳㄳ

니가 넘 늦어서 할건 없고

밥이나 사

ㅇㅇ

미안ㅋㅋ

적당한 데로 부탁할게

ㅎㅎ

잘자

제발

너도 잘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

 

오기로 한 인원은 5명.

 

난 왔고, 수아도 왔고, 한 명은 감기, 한 명은 증조할머니 제사, 한 명은 큰아버지 장례식?

 

이게 대학의 조별 과제인가...

 

조별 과제 빠질 때 댈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다 댄 상황을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만나면 진짜 죽인다...'

 

"..."

 

원래 수아 성격이라면 화내고도 남을 일인데 오늘따라 수아가 조용하다.

 

"수아야, 오늘은 쫑난 것 같은데 그냥 집에 돌ㅇ.."

 

수아는 조용히 내 소맷자락을 잡았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난 당황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시 돌아다닐래?"

 

이제 보니 수아는 평소 상징이었던 청바지와 면티, 포니테일 차림이 아닌 묶은 머리는 길게 늘어뜨렸고,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순간, 나는 수아가 날 맘에 들어 하나 싶었지만, 예전에 이런 일로 다칠 뻔했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은 숨길 수 없었고, 수아 또한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

..

.

 

 

 

저녁이 될 때까지, 나는 수아와 돌아다녔다.

 

원래도 만나서 밥을 먹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밥을 먹고, 그 후엔 영화관에 가서 예약한 후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서 윈도우 쇼핑을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저녁은 간단하게 때운 뒤, 지금 우리는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다.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데이트잖아.

 

이거 진짠가? 수아가 설마 날? 아니 진짜로?? 언제부터??? 그럼 난..

 

"희철아."

 

"응.. 어? 어.."

 

"나 사실 예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응?"

 

"초등학생 때, 기억나?"

 

"첫인상은 최악이었지, 복도에서 부딪혔다고 난데없이 주먹을 날리더니, 싸우고 난 후에 쓰레기장에서 만났을 때도 어이없는 이유로 싸움을 걸었잖아."

 

"어..?"

 

"처음에 난데없이 너랑 싸웠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 해야 널 곤란하게 할지만 계속 생각했어."

 

"근데 참 신기한 게, 계속 네 생각을 하다가. 다시 널 보니까 복수해야겠단 생각이 안 들더라?"

 

"아이 같았던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조용했던 것도 맘에 들었고. 아니다, 그냥 내가 얼빠였나봐. 솔직히 말하면 네가 잘생겨서 반했어."

 

이것도.. 고백.. 인가? 근데 이 말만은 해야겠다.

 

"너 마조야?"

 

"죽는다."

 

"아. 넵."

 

"그리고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계속 널 눈으로 좇다 보니 더욱 좋아하게 되더라고."

 

"그럼.. 사귀자고 하지 그랬어..."

 

"난 네가 틀림없이 한경이랑 사귀는 줄 알았지."

 

아. 하긴 그랬다. 나도 내가 한경이랑 사귀는 줄 알았으니까.

 

 

 

"근데 봐버렸어, 네가 한경이한테 고백하는 장면을. 이야~ 멋지게도 차이던데?"

 

"?!.."

 

아아악... 가뜩이나 잊고 싶은 기억인데...

 

"그래서 그날부터 결심했어. 고등학생 때까지는 무리였지만 대학은 너와 같은 곳을 나와 너한테 고백하겠다고. 근데 너 공부 생각보다 잘하더라? 하마터면 재수할 뻔 했어ㅋㅋ“

 

"...응.“

 

"...“

 

 

 

"..."

 

"..."

 

"그래서, 대답은?"

 

"내가 고백하는 걸 봤다고 했지?"

 

"응."

 

"이것도 친구로서의 좋아한다야?"

 

"아니?"

 

갑자기 수아는 내 옷깃을 잡더니 얼굴을 가져다 댔다.

 

"으읍?!"

 

"츕... 츄릅..."

 

몇 초나, 아니 몇 분이 지났을까. 수아는 얼굴을 떼고 말했다.

 

"...푸하... 연인으로서의 좋아한다야."

 

...

..

.



 

우리가 고등학생이 된 후, 어느 날을 기점으로 희철이가 나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그야, 희철이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희철이가 대학생이 된 이후로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로 줄었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그야, 희철이는 쑥맥이라 나 이외의 여자는 모르는 걸.

 

 

 

희철이가 친구들이 생긴 후로, 나랑 있을 때도 즐거운 듯이 친구들 얘기를 했다.

 

나랑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든 건 아쉬웠다.

 

하지만 남자인 친구뿐인 데다, 희철이의 이런 즐거운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어제 희철이와의 대화 덕에 조별과제로 답사를 나간다는 걸 알게 됐다.

 

심부름하는 곳이 희철이가 가는 곳 근처길래 정말 우연히 희철이네 쪽으로 가게 됐다.

 

 

 

하지만 내가 본 광경은 여자와 데이트하고 있는 희철이의 모습이었다.

 

 

 

"희철아..?"

 

분명 여자인 친구는 없다고 했잖아.

 

분명 오늘 조별과제로 모인다고 했잖아.

 

분명 나만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제멋대로 가속하는 사고를 가까스로 멈춰, 조금만 더 따라가보기로 했다.

 

 

 

희철이는 착한 성격이니까, 길을 알려주는 걸 수도 있잖아?

 

저 둘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봤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희철이는 쑥맥이니까, 놀랐을 수도 있지.

 

붉은 얼굴로 길을 걷다 손 끝이 닿았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아무 관계도 아닌데 입을 맞추고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어째서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 둘을 따라갔다.

 

10년이 넘는 연애 동안 희철이는 내 반쪽. 아니 내 전부가 되었다.

 

그 길고 두꺼운 인연의 끈을 이렇게 끊을 순 없다.

 

 

 

그리고 그 둘이 들어간 곳은 모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댄다. 

 

 

 

둘을 지켜볼수록, 내가 가지고 있던 한 줌의 기대마저 공포로.

 

공포는 절망으로.

 

절망은 증오로 변해갔다.

 

 

 

 

 

나는 그 둘이 예약했던 옆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컵을 집어, 벽에 갖다 댔다.

 

 

 

 

 

들리는 건 젊은 두 남녀의 몸을 섞는 소리. 그것도 일방적인 교성이 아닌 두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한켠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외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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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드업 끝났다! 낼 주말이라 빨리 써왔음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