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나는 수영을 하던 도중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눈을 의심했다.


비록 얕은 바다 이기는 하지만, 해저에 웬 드래스를 입은 귀부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늘하늘 걷고 있는 것 아닌가?

보통 사람이 물에 빠져있으면 당장 달려가서 구해주겠지만, 너무나 태연하게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걸어가는 그 자태에,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커녕 넋을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에 달린 토끼 귀 같은 더듬이가 쫑긋거리기 시작하더니 날 감지한 듯 갑자기 내가 있는 방향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기 시작했다.


잠깐, 언제부터 귀부인이 머리에 더듬이를 달고 다녔더라?


그제서야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말로만 듣던 트리토니아 라는 해양 마물의 일종이고, 저건 걸어가는게 아니라 기어가는 도중인 것일 테지.


요즘 세상에는 바다에 수영을 하러 나갔다가 해양 마물과 조우하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물론 덮쳐져서 끌려가 그 길로 남편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으니 나같은 어부들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어수단을 항상 구비하고 다닌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십자가가 어딨더라? 아, 찾았다. 이런 방어수단을 항상 철저히 하지 않으면 지난달 네레이드 뭐시기 한테 끌려가버린 내 친구 꼴이 나는 것이다. 불쌍한 녀석. 지금쯤 각종 고통 속에 비참한 삶을 살고 있겠지.


그런데 저 마물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가 않는다. 애초에 다가오는 속도도 느릿 느릿 이고, 외형도 딱 봐도 난폭하게 굴 성격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십자가까지 굳이 꺼내 들어야 하는걸까...?


아니지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리 온순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저건 사악한 마물이야. 마음이 흔들릴 뻔했군. 주신님이시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어서 사라져라 이 사악한 마물아!

...라고 멋지게 소리치며 십자가를 꺼내들 예정이었지만, 물 속이란 걸 깜빡했다. 내 입에서 거품만 부글부글 나오고 꼴사나운 모양새로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햇빛이 십자가에 반사되어 성스러운 광이 마물을 비춘다.


히..히얏....눈부셔요....


마물이 마치 갑자기 얼굴에 대고 손전등을 비춘 사람처럼 팔로 눈을 가리며 움추린다. 어째 내가 미안해지는걸...


그...그거 이제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차라리 흉악한 마수였으면 모를까, 사람 말도 할 줄 아는 마물이 저러고 있으니 도저히 미안해서 십자가를 내렸다.


그...별로 나쁜 뜻으로 접근한 건 아니였는데...갑자기 그런 걸 비추다니 너무해요....


 분명히 얼굴 대부분이 앞머리에 가려져 있음에도, 서러워 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미안...무심코 나도 놀라서...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고 했던가. 어느세 내가 사과를 하고 있다.


그..그래도 당신 정도면 양호한 편이에요...지난번에는 성수를 묻힌 작살도 집어던지려고 한 사람도 있었거든요...


느긋한 말투와 성격 처럼, 어느세 마물은 미소를 띄우고 있다. 남자라면 순간적으로 두근거리게 만들 만한 광경에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그래서 혹시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아...별거 아니에요 저희 트리토니아들은 별 생각 없이 그냥 인간 남성의 향기에 끌려 이동하고는 한답니다. 제 더듬이 보이시죠? 남성 감지에 특화되어 있는 거에요...


오...그럼 직접 만지면 어케되지?


호기심에 쿡쿡 찔러보았다.


히..히야앗?! 아..안돼요 남성이 만져버리면 민감해져 히이잇?! 요옷!


반응이 재밌어서 너무 오래 만지작 거린 듯 하다. 어느세 트리토니아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다.


우..우긋...너무해요...진짜....


미안, 너무 재밌어서 그만...


우으..그런거로 재밌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당신이라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느긋한 삶도 좋지만 가끔은 말상대가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 했거든요. 저는 언제나 여기 근처에 있을테니 가끔이라도 저를 보러 와 주실래요?


그래, 다음에 또 해산물 잡으러 나오면 얼굴이라도 비추고 갈께.


후후...고마워요, 그럼 안녕히 돌아가세요...


생각보다 마물들이 마냥 나쁜 존재들 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아앗 잠깐 내가 자꾸 무슨 생각을...주신님, 제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일주일차-


그동안 매일같이 트리토니아를 보러 바다로 나갔다. 심지어는 해산물 채집 할 일이 없는 날에도 오직 트리토니아를 만나기 위해서 바다로 나가는 날도 꽤 있었다. 주신교에 마물과 친해져서는 안된다고 교리에 못박아 둔 것 때문에 양심이 찔리기도 했지만, 

나긋나긋한 그녀의 성격 덕분에 대화만 하고 있어도 어느세 그런 양심의 가책 따위는 벗어두고 어딘가 치유받고 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어도 트리토니아는 전혀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기색이 없다보니, 나도 점점 경계심을 내리게 되었다.


너무 경계심을 내린 탓일까? 트리토니아와 만나기 시작한지 일주일 째 되는 날 오른팔에 달군 칼날로 누가 찌른 듯한

 날카로운 열기가 느껴졌다.


끄아아악!


고개를 돌려보니 머샤크가 오른팔을 물고 있었다. 나같은 베테랑 어부가 머샤크가 다가오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요즘 너무 마음을 내려놓은 탓인 듯하다. 반격을 하며 머샤크를 떼어놓으려고 해도, 물어뜯은 자리에 피가 나는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지만 머샤크가 물어뜯은 상처로 기력이 세어나가는게 느껴지며 점점 몸이 무거워진다. 육체적인 손상을 주지는 않되 마력을 벤다는 마물들의 능력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나...


후후, 네놈 꽤나 수영으로 단련된 몸을 하고 있구나. 우리끼리라면 관능적인 수중 교미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극상의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머샤크가 그 육감적인 몸을 점점 밀착시키며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지를 세워버리면, 여기서 교미를 해버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마물의 가차없는 애무 앞에 점점 자지는 단단해져 간다.


아..안돼...어머니..주신님...트리...토니아.....


왜일까, 그 순간에 그녀를 떠올려 버린 것은. 그 생각에 응답하듯 돌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장 그자를 놔주세요!


그 온순한 성격의 트리토니아가 소리치는 장면에 나 뿐만 아니라 머샤크도 놀라서 흠칫 돌아본다.


이봐, 민달팽이 친구...기껏 찾은 남편감을 채가려고 하는건 같은 마물로써 어떨까 싶은데?


만약 그자를 놓아주지 않으면, 당신도 내 독 점액의 맛을 보게 될 거에요! 그리고 그 남자는 내가 먼저 찜했단 말이에요!


쯧...확실히 민달팽이 마력 냄새도 좀 섞여있다 했더니... 좋아, 이번엔 넘어가도록 해주지. 지난번에 한번 독에 당한 이후로 두번째는 사양이야...


머샤크는 아쉬운 듯 돌아서서는,


그치만...언젠가 내 생각이 난다면 꼭 찾아와달라구?


그렇게 내 귓가에 속삭이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입맛을 다시며 떠나갔다.


다...당신 괜찮아요?


고마워...트리토니아...


다시 온순한 모드로 돌아온 트리토니아가 그 느린 몸으로 최대한 빠른 속도를 내려고 애쓰며 기어와서 부축해준다.


잠깐 움직이지 말아봐요..지금 즉시 처치를 해드릴 테니까...


그러더니 내 오른팔에 물린 자리에 미역을 붕대마냥 감기 시작한다.  그러자 신기하게 점점 정신이 돌아온다.


엥? 미역을 감았는데 마력의 상처가 나아?


아..이거 보통 미역이 아니라 켈프의 몸의 일부거든요...마물의 몸이니 마력 상처 정도는 간단히 틀어막을 수 있죠...


으와....누군가의 머리카락을 붕대로 감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소름돋는데...


후후...그치만 당신들도 켈프 잎으로 끓인 미역국은 별미라면서 먹잖아요?


하하...그건 또 그러네...


그렇게 트리토니아의 무릎베게? 하체베게? 를 받은 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나를 찜했다고 한 건...


히...히얏...잊어주세요! 그 상황에서 당신을 구하려면 달리 생각 나는 말이 없었단 말이에요!


하하하, 역시 그렇지?


 그렇지만....


음?


당신이 다른 마물에게 안겨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욱신거려와서 싫어요...왜일까요...


그렇게 고민에 잠겨있는 트리토니아의 얼굴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다가, 트리토니아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는 감촉에, 어느세 잠이 들고 말았다.





트리토니아 마망 이쁜데 은근히 언급 잘 안되는 마물인데

누가 트리토니아 마망 소설 보고싶다길래 소재 떠올라서 써봄

2편은 오늘 저녁~내일쯤 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