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해.

   

선생님은 왜 갑자기 자리를 바꾸자고 했을까? 자리를 바꾼 지 2주도 안 됐는데 말이야. 어쨌든 2학기가 시작되고 2주 만에 나는 복도 자리에서 창가 자리로 이동하게 됐어.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았지. 복도는 항상 시끄러웠고 창가는 그나마 조용했으니까 말이야. 고등학교 2학년이기도 하고 슬슬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기에 찾아온 이상한 행운이었지. 아이들은 투정부리면서도 곧잘 자리를 옮겼어. 내심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마음에 안 드는 짝을 만나게 됐다고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었지. 나도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던 터라 그 친구와 앉기를 바랐는데 이미 다른 여자애와 앉더라고. 남자가 아닌 게 어디야 생각하며 내 자리를 봤어.

   

거기에는 긴 생머리의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지. 별로 친하진 않은 아이였어. 내가 노는 무리의 친구들과도 접점이 없는 아이였지. 그런 친구들 있잖아. 내성적이어서 아주 소수의 무리들로만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딱 거기에 맞는 아이였지. 이름이 아마 ‘혜정’이었을 거야.

   

“혜정?”

   

내가 옆자리에 짐을 놓으며 어색하게 이름을 부르자 졸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동공이 커졌지. 쟤가 왜 여기 있지? 쟤가 왜 나를 부르지? 라는 표정으로. 나는 웃으며 짐정리를 했어. 혜정이는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내가 짐정리 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지.

   

“여기 자리 좋다. 그치?”

   

짐정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며 혜정이에게 말을 걸었어. 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하더라. 앞으로 어색하게 몇 달을 같이 보내야한다는 생각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나름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친구라 마냥 싫지는 않았어. 같이 앉다보면 그래도 친해질 거라는 낙천적인 생각도 들었고 말이야.

   

“다들 자리 바꿨으면 수업 시작하자.”

   

1교시가 담임 시간이라 우리는 자리를 바꾸고 바로 수업을 들어야 했어. 국어 수업이었지. 그런데 옆에서 혜정이가 자꾸 가방을 뒤적거리더라고. 나는 혜정이가 필통을 못 챙겼다는 걸 알아챘지.

   

“자, 여기.”

   

내가 4색 볼펜을 건네자 혜정이가 가방을 뒤적이다 말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라. 너무 빤히 봐서 나는 좀 당황했어. 내가 입모양으로 ‘왜?’를 만드니까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더라고. 볼펜을 가져가지 않아 조금 뻘쭘했지만 그래도 국어 책 위에 조용히 올려놨어. 목덜미가 빨개진 게 귀여웠지. 10분 정도 지나니까 조용히 고맙다고 하더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용히 4교시까지 보냈어.

   

점심시간이 됐고 친구들이 밥 먹자고 내 자리에 모였지. 2학년은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급식을 먹을 수 있어서 우리끼리 막 장난을 치고 있었어. 한 친구가 너 은희 언제까지 좋아할 거냐면서 나를 놀렸고 나는 그 친구 입을 막았지. 친구가 몸부림치다가 모르고 책상을 쳤는데 내가 혜정이에게 빌려준 4색 펜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어. 친구가 볼펜을 줍고 있을 때 알았어, 혜정이가 화장실에서 이미 돌아와 있었다는 걸. 그때 나는 생머리에 살짝 가려진 혜정이의 표정을 봤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직도 소름이 돋는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야 가자.”

   

“5분 남았자나 뭘 벌써가.”

   

눈치 없는 친구들은 내 말을 듣지 않다가 혜정이가 돌아와서 자리에 앉자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어. 나는 친구들과 교실을 나가면서 살짝 뒤돌아 내 자리를 봤지. 혜정이가 4색 볼펜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더라.

   

밥을 먹고 매점까지 갔다가 우리는 반에 돌아왔어. 그런데 자기 자리에 간 친구가 갑자기 “씨발, 씨발” 거리더라. 화난 것도 같았고 무서운 것도 같았어. 우리는 왜 그러냐면서 친구 자리에 갔어.

   

“이거 봐바, 씨발.”

   

친구는 자신의 국어책을 보여줬어. 표지에 있는 남자 아이의 두 눈은 빨간색이 칠해져있고 여자아이의 두 눈은 구멍이 뚫려있더라. 그리고 빨간 글씨로 ‘죽어’ 라고 적혀있었지. 친구들이 호들갑떨면서 무서워하고 있을 때 나는 무슨 이유인지 혜정이 자리를 쳐다봤어. 혜정이는 엎드려 자고 있었지. 옆에 놓인 4색 볼펜은 빨간색 노크만 내려가 있더라. 나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다시 친구의 국어 책을 봤어. 그런데 왜 내가 그 순간 혜정이를 보게 됐을까. 떨어진 4색 볼펜을 보던 혜정이의 붉게 충혈 되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무튼 내가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혜정이가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살짝 돌려서 나를 보더라. 그때 얼굴을 덮은 머리 사이로 약간의 미소가 보인 건, 아마 내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