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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스의 오른쪽 칼날이 일순간 번득인다. 불운한 희생자는 그 섬광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스러진다.
 
칼날은 아직 피를 갈구한다. 화염이 인다.
 
일리단 스톰레이지는 신속히 다음 목표를 향해 뛰어든다.
 
 
 
 
공성거인 한마리가 주먹만한 돌을 내던진다.
 
잠시후 또 하나의 희생양이 될 이 애처로운 용병은 계속해서 돌덩이를 던지기 위해 옆 가방에서 다음 탄환을 고른다.
 
그리고 적당한 돌을 골라 쥔 거인. 목표물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어딨지?
 
 
 
 
거인의 걸음으로 약 일곱걸음 정도. 그 너머에 있던 형체가 순식간에 접근한다.
 
형체는 눈이 미처 따라가기도 전에 거인의 뒤로 넘어간다. '푹' 하는 소리가 들리며 뒷덜미에 무언가를 박아넣는다.
 
 
 
 
어우우욱, 하는 단말마가 전장을 울린다.
 
거인은 자신이 여태 던지던 돌덩이처럼 암석이 되어 와르르 무너진다.
 
 
 
"하등한 것."
 
 
일리단 스톰레이지. 그가 시공의 폭풍에 떨어진지도 약 2주가 지났다.
 
그 열흘 약간 넘는 시간동안, 일리단은 마주치는 모든 적들을 아지노스의 쌍날검으로 무참히 도륙내었고
 
적의 요새를 파괴하며, 공포를 남기고 떠났다.
 
 
 
그는 이곳이 맘에 들었다.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곳.
 
군단의 졸개들도 이곳까지 쫒아오지는 못했는듯, 자신을 알아보는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일리단은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아지노스 전투검을 양손에 쥐고 전장을 헤집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무언가.
 
 
그리웠던 누군가가 느껴진다.
 
 
 
살게라스의 저주받은 환영 너머로, 달빛을 담은 화살이 이따금 감지되고 있다.
 
일리단은 별일이 다있나 싶어하며 그 화살이 쏘아진 곳으로 다가간다.
 
숨을 죽이고, 풀숲에 몸을 숨기고.
 
 
 
마치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한 그 사슴이 누군지 봐야겠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일리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수가..
 
 
어찌하여.. 여기에?
 
 
 
 
매끄러운 살결, 각선미. 포도빛으로 윤기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체.
 
원해 마지않던 사람.
 
 
엘룬의 대 여사제, 티란데 위스퍼윈드.
 
그녀였다.
 
 
 
 
 
일리단은 침을 꿀꺽 삼킨다. 전투검을 쥔 양손에 힘을 더한다.
 
..형은? 어디에?
 
 
 
 
기회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전세에서의 인연을 여기서 만날줄은 미처 몰랐다.
 
 
수라마르에서 부터 키워온 짝사랑, 마침내 우주 어딘가에 위치한 곳에서 만나게 될줄이야.
 
 
 
일리단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바라만 보아도 이성을 잃을듯한 자태.
 
그는 몸을 더 숙여 풀섶에 완전히 동화된다. 그럼에도 시선은 상대방에게서 거두지 않았다.
 
그녀와의 거리는 약 5미터.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다.
 
 
 
 
 
"...만년동안 응어리진.."
 
 
 
 
무언가를 눈치챈 여사제가 소리가 들린곳을 노려본다.
 
"..나와라!"
 
"증오를 보여주마!"
 
 
여사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리단은 풀섶에서 튀어나온다. 그와 동시에 달빛이 실린 묵직한 화살이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진다.
 
 
 
-퍼억!-
 
땅이 패이는 소리. 달빛은 보기좋게 일리단의 귀를 스치고 대지에 박힌다. 빗나갔다.
 
 
"이이익!"
 
 
이를 앙 다문 여사제는 화살을 시위에 걸고 난데없는 습격자의 미간을 조준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반쯤 탈태된 육체가 거칠고도 우악스럽게 그녀의 옆구리를 강타한다.
 
 
 
 
활은 부러지고, 방금까지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나이트엘프 여사제는 짧고 날카로운 비명을 울부짖으며 나가떨어진다.
 
 
 
"...커헉! 엘..룬이시여.."
 
"티란데!"
 
 
 
여사제가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들어 습격자를 쳐다본다. 낯 익은 얼굴. 그러나, 결코 달갑지 않은 자.
 
 
"...일리단!"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배신자!"
 
"배신자라니, 너를 위해 모든걸 다 바쳤던 내게."
 
"너를 위해서였겠지."
 
 
티란데 앞에 우뚝 서서 일리단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당당하고, 강했다. 그리고 그만큼 아름다웠던 티란데.
 
그녀가 지금 일리단 앞에 제압되어 있다.
 
머리는 그 찰나의 공격으로 헝클어져 있고, 사제복은 너덜너덜하다. 곳곳에 일격의 상해가 범벅되어 있다.
 
 
 
"널 풀어준 게 내 가장 큰 실수였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미 부러진 활대를 쥐어잡는다.
 
티란데는 독기 어린 눈으로 일리단을 노려본다.
 
 
 
 
"그리고 내 가장 큰 실수는 널 사랑한 거였지."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애정, 안타까움, 후회, 갈망, 질투.
 
그리고
 
 
 
그리움.
 
 
 
 
 
"..보고싶었어, 티란데."
 
"난 아냐."
 
 
"이곳에서라도 나와 함께 해줘. 난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너는 어느곳에서도 고통과 파괴를 몰고올거야."
 
 
"아니야!"
 
 
 
 
생애 끝까지 보답받지 못한 사랑, 빛바랜 배려.
 
뒤틀린 애정은 아제로스에서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왜지!
 
왜 내가 아니었던 거야! 티란데!
 
왜 그 드루이드 따위를 사랑하게 된거야!
 
 
 
어느 누구도 상관없었어, 오직 너뿐이.."
 
 
일리단은 그 예전, 칠흑같은 감옥에서 구원받았을 때의 기억을 더듬는다.
 
세상 단 하나의 빛. 그게 바로 티란데였다.
 
 
 
 
"바로 이것이. 너와 네 형의 차이지. 그게 내가 말퓨리온을 선택한 이유고."
 
"그만!"
 
 
이마에 핏줄을 내세우며 일리단이 소리친다. 그의 몸 전체가 분노와 질투로 몸서리친다.
 
 
 
"이제라도 널 갖겠다, 티란데."
 
"쉽지 않을거다."
 
 
"활도 부러지고, 네 그 단짝 호랑이도 보이지 않는데. 과연?"
 
"물론 아시알라는 함께 하지 못했지. 하지만."
 
"하지만?"
 
 
"도리투르가 남아있으니까!"
 
 
순간 티란데가 일리단에게 손을 뻗는다. 그녀의 손 끝에서 영혼 올빼미가 전방을 향해 빠르게 도약한다.
 
 
 
쇄액 달려드는 올빼미. 그러나 아지노스의 칼날은 결코 무디지 않았다.
 
올빼미는 칼부림 한번에 두조각이 되어 사라진다.
 
 
 
"이제 내 차례인가보군, 티란데."
 
 
"..엘룬이시여..."
 
 
앉아 뒷걸음질 치는 티란데. 눈빛에 절망이 가득차 그렁거린다.
 
"이제서야. 하나가 되는구나, 티란데.
 
널 미치도록 원했어."
 
 
일리단은 아지노스를 내려놓고 여사제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리곤 왼손으로 사제복의 너풀거리는 가리개를 들춰낸다.
 
완벽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대음순이 안대 너머에 입을 꼭 다문채 떨리고 있다.
 
 
 
 
전희따위는 필요없다. 그간 참아왔던 1만년의 세월이 보상받을 시간이다.
 
눈앞의 목표물. 그것은 일리단이 바라던 힘이 최종적으로 안착할 장소였던 것이다.
 
 
"널 갖기 위해 단련했고, 너에게 잘보이기 위해 힘을 쌓았어. 티란데."
 
"무슨 말이지?"
 
 
 
"이제 내 아지노스의 화염을 손수 맛보여줄거야."
 
 
 
앞섶을 끌르는 일리단. 말한대로 전희따위는 필요없다.
 
저항을 반쯤 포기한 티란데는 오랜 친구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일리단의 솟구치는 화염을 넋놓고 바라본다.
 
 
 
 
 
"이건.. 안들어가.. 안돼.."
 
"두고보자구, 티란데."
 
 
일렁이는 화염에 쌓인 일리단. 목표물을 향해 돌진한다.
 
"이제, 난 완전해 졌다!"
 
 
 
 
 
그 순간이었다.
 
사방에서 식물들이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나무뿌리들, 덩굴들. 일리단과 티란데를 둘러싼 주위의 자연 환경들이 무성하게 잎을 펴낸다.
 
 
 
"뭐냐!"
 
"토르 팔라 노르 도라!"
 
 
일리단과 티란데에게 역시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그의 상징이라도 되는듯한, 나무정령들.
 
말퓨리온 스톰레이지가 이곳에 와있다.
 
 
 
"나무정령!"
 
일리단이 기겁하며 외친다. 내려놓은 아지노스 전투검을 찾기위해 눈을 돌린다.
 
 
형이 여기에.. 있었어!
 
 
젠장! 왜 하필 지금!
 
 
 
저기 세걸음정도 밖에 아지노스가 놓여져 있다. 일리단은 가능한 빨리 손을 뻗었다.
 
"어딜 감히!"
 
어느새 생성된 나무정령 몇마리가 전투검을 차낸다. 차내진 전투검들은 성장한 나무뿌리가 강하게 엮어 멀어져간다.
 
 
 
"말퓨리온!"
 
환희에 쌓이는 티란데. 일어나 절뚝이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한다.
 
 
 
"내 사랑, 혼자 두어 미안하오."
 
"아니에요, 내 사랑."
 
금새 사랑을 속삭이는 그들, 극도로 분노한 일리단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게 없었다.
 
 
 
 
"형제여.. 또 다시 나를 가로막으려 드는군!"
 
"자연은 악을 증오한다, 일리단. 내 말을 새겨들어라."
 
 
일리단의 불청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안타까움이 담겨있었다.
 
 
"잘난 척 좀 그만 하시지.."
 
 
전신을 화염으로 태우기 시작하는 일리단. 이 순간 그의 감정은 증오로 뒤덮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말퓨리온이 손을 뻗는다. 그와 동시에 나무뿌리들이 급격하게 자라나 일리단을 속박하기에 이른다.
 
 
"이 따위로!"
 
"이 따위가 아니다, 일리단. 너의 1만년에 걸친 증오를 풀어줄 대 자연의 선물이다."
 
 
무슨 뜻이지? 일리단은 지금 상황에서도 비꼬는듯한 드루이드의 언행이 거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단은 말퓨리온의 뜻을 알아챈다.
 
 
나무 뿌리중 한 줄기가 일리단의 사타구니를 부드럽게 조이기 시작했다.
 
"으웁! 이런.."
 
"대 자연이 널 거두리라."
 
 
 
뿌리들은 결코 억세고 거칠지 않았다. 형제로서 나름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곧 이어 나무정령들이 일리단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일리단의 길쭉한 귀와, 유두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떨어져라! 네놈들을 다 태워버리겠다!"
 
 
말과는 반대로 일리단의 표정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전신에 들어간 힘도 풀린다.
 
"자연의 선물이다, 일리단."
 
 
 
 
 
 
 
 
몇분정도가 지났을까, 일리단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역겹고 한심한 눈초리로 흘기는 티란데, 안타까운 표정의 말퓨리온.
 
하지만, 그것따위는 전혀 상관없었다.
 
일리단의 음경은 계속해서 백탁액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자연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와 동시에, 항문으로 향하는 몇 줄기의 나무뿌리. 나체이며 아지노스조차 들지 못한 일리단이 나무정령들에게 대항할 방법은 전무했다.
 
 
 
 
 
 
한참이 지났다. 드디어 속박이 풀렸고, 일리단은 자리에 널부러졌다.
 
그러나 그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항문은 움찔대며 나무 수액을 뿜고 있다.
 
대지로 돌아가는 뿌리들은 곳곳에 액을 묻힌 채 줄어들고 있다.
 
나무정령들은 만족한 표정으로 쓰러졌다.
 
 
 
 
약 열걸음 남짓한 거리 너머에서, 말퓨리온은 한손으로 티란데를 감싼채 뒤로 돌아선다.
 
화염과 비탄의 형제, 일리단. 그를 시공의 폭풍에서 재회하게 되다니.
 
운명의 장난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미워하는 만큼, 하나뿐인 혈육으로서 아끼는 마음도 컸던 말퓨리온 이다.
 
 
그 옛날 검은 사원에서 전사한 일리단의 최후를 직접 지켜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남아있었다.
 
말퓨리온은 다시 만난 형제를 이번엔 놓치고 싶지 않다.
 
 
 
 
치욕인지 만족감인지 모를 경련이 이는 일리단. 말퓨리온은 티란데를 데리고 엎어져있는 일리단을 떠나 발걸음을 옮긴다.
 
 
 
 
 
 
 
 
아제로스에서는 비록 애증의 관계로 남게 된 스톰레이지 형제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다르다.
 
그를 아끼고 보듬어줄 수 있는 두번째 기회가 왔다.
 
 
말퓨리온은 멀어져가는 일리단을 보며 중얼거린다.
 
 
 
 
"안데토라스 에실. 내 형제여."
 
 
 
 
 






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