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RT III 무덤의 구조. 본래는 안쪽의 본실에 프수센네스 1세와 그의 왕비인 무트네즈메트를 안치했고 대기실에 안케펜무트와 웬제바우엔제드가 안치되었다.>


워낙 엄청난 부장품들이 쏟아져나온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 부장품의 양 때문에 도굴을 안 당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무덤을 봉인한 후에 얼마 안 되어서 2번 도굴시도를 당했다. 첫번째 시도는 성공해서 도굴꾼들이 가져가기 쉬운 장신구와 연고 같은 걸 훔쳐갔고(그래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반지나 목걸이는 수가 좀 적다), 두번째 시도는 무덤 경비대한테 걸려서 실패했고 이 때 마야라는 이름의 관리가 사제들을 시켜 무덤을 정돈한 뒤 다시 재봉인했다. (그런데 신관들이 부장품을 다시 정리할 때 무신경하게 대충 있는대로 쳐박아 버려서 현대에 발굴할 때 개고생했다.)


진짜로 현대에 정식 발굴되기 전까지 한 번도 도굴을 당하지 않은 파라오의 무덤은 제21왕조의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이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존재감이 없는데 일단 부장품이 온전히 보존되기 쉬웠던 건조한 왕가의 계곡에 있던 투탕카멘과 달리,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나일강 하류 삼각주의 타니스(Tanis)에 있는데 수천년간 끊임없이 들어찼다가 빠지는 물 때문에 벽화의 색이 다 빠지고, 썩기 쉬운 목재 부장품들이 전부 손실되었다. 심지어는 미라마저도 환경이 워낙 안 좋아서 이 무덤을 발굴한 피에르 몽테(Pierre Monte)가 관을 열었더니 다 삭아버리고 남은 뼈와 부장품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두 번째로는 비록 이집트 제3중간기가 이집트의 국력이 흔히 말하는 막장을 찍은 건 아니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던 신왕국과 비교하면 당연히 밀릴 수 밖에 없다. 프수센네스 1세의 관을 예로 들자면 삼중관 중 가장 바깥쪽의 관은 람세스 2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의 관을 재활용했다. 새로 관을 팔 여력이 안되니 국가 주도로 선대 파라오의 무덤을 털어서 부장품을 재활용한 것이다. 그래도 프수센네스 1세는 황금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품질은 투탕카멘의 것보다 훨씬 못하다. 아래 사진들을 보자.


<프수센네스 1세의 황금마스크>


<말이 필요없는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마지막으로 무덤의 발견 시기가 영 좋지 않았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을 처음 발견할 때는 1939년이었고 이 시기 유럽은 미술학교 입학에 실패한 짝부랄 남자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피에르 몽테도 발굴을 완료 못하고 가족들을 챙기러 황급히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고 전쟁이 끝난 1946년에서야 돌아와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프수센네스 1세의 삼중관 중 가장 안쪽에 들어있던 순은으로 만든 관.>


그래도 프수센네스 1세는 양반인게 친아들로 추정되는 후임 파라오인 아메네모페는 통짜 석관이 아닌 목재 관에 금을 입힌 관을 썼고 통짜 황금으로 된 마스크가 아닌 또 목재에 금을 입힌 황금 마스크를 쓰고 묻혔다.  다른 부장품 중에는 아버지 이름이 남아있는 것도 있어서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여기에 본래 무덤이 심심하면 침수되는 최악의 장소여서 보다 못한 후대 파라오인 시아문이 그나마 양호한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이장해 본래 어머니를 안치하기 위한 방에 재안치되었다. 


그래도 이 무덤에서 섬세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 있다.



바로 무덤의 전실에 안치된 웬제바우엔제드라는 고위 관료의 부장품 중 하나인 금과 은을 세공해서 만든 3개의 넓은 접시 내지는 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