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 링크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102186741?p=1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치고, 한반도는 조선이라는 사대부의 나라가 들어서게 되며,


그들은 명나라가 시행하던 해금령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금령은 이 땅에서 대양으로 나가던 이들이 길을 잃게 만드는 정책이었다.


대양으로 드나들던 이치를 아는 자들은 점점 연안으로, 강으로... 뭍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섬과 섬 사이를 지나고, 강을 지나고, 수로를 지나며 그들은 조운을, 때로는 어업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1592년. 한반도의 열린 창, 부산항으로 일본군이 상륙하며 임진왜란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양까지 함락 당하는 그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은 곳이 있다면 바다였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들의 배를 만드는 기술, 배를 조종하는 기술, 뱃사람들의 지혜는, 이순신이라는 전무후무한 제독이 지휘하자 그들의 바다를 지켜내는 것에 큰 일조를 했다.


그 이후에는 대륙세력에 의한 외침이 생기면서도, 바다에 대한 사대부의 고찰은 바뀌지 않았다. 대륙으로 갔던 사람들은 신기한 물건이라며 처음보는 물건들을 가져왔고, 그 수가 점 점 많아져 갈때쯤, 조선에는 불청객이 등장한다.


강화도 앞바다,처음 보는 형태가 바다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의 가운데에는 굴뚝이 있었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증기기관인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위 사진은 돛도 달려있어 범선으로도 쓸 수 있었고 증기기관으로 추진도 가능했던 배였다.)


이때가 1866년, 병인양요였다.


웃기지 않은가. 조선이 건국 100년을 기념하던 1492년, 콜럼버스는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들이 증기기관을 이용해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1772년에 조선에선 사도세자의 죽음 10주년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해양세력'과 마주쳐야 하는, 사대부 입장에선 불편한 일들이 생겨버렸다.


1866년 병인양요 이후에는 1871년에는 신미양요를 거치며 해양세력은 조선에게 확실한 각인을 새겼다.

이제 더 이상 이 땅에서 몇천년을 살아온 이들이 가진 해양에 관한 모든 기술은, 그들에게 밀린다는 사실.


계절에 따라서만 조운을 할 수 있던, 나무로만 배를 짓고, 노를 저어가며, 적재량도 많이는 못 싣고 가면서도, 뭍과 함께 다니는 연안항해라는 기술은 이제 옛것이고,


이제는 나침반, 육분의를 이용해 경위도를 재며 대양을 건너고, 파도와 바람에 관계없이 나아가며, 노는 필요도 없는, 그러면서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양을 적재하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기술이, 저 처음보는 해양세력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1875년. 우리와 가까우면서도, 섬나라이기에 해양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던 일본에서, 운요호를 앞세워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강화도 조약을 맺어 강제로 개항했다. 그리고, 외국문물이 조선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근현대 해운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바빠졌다.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꽂히기 시작한 문명의 산물은 그들을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손전등, 성냥, 가방, 시계, 노트... 그리고 전선, 전화, 가로등. 신기하고도 실용적인 이 물건들은 가격까지 싸게 들어오다 보니 이내 조선의 수공예 물품들은 자연스레 도태됐다. 가격이나, 질조차도 훨씬 나은 제품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물건들이 바다로, 해운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당시 다른것도 마찬가지지만, 해운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몇백년의 차이. 조계지와 개항항을 일본인이 장악하자 그들은 비개항항 또한 불법적으로 해운사업을 하며 이 땅의 근대 해운사업을 씨를 말리고 있던 것이다.


이에 조정은 개화정책을 추친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다. 통리기무아문은 외교업무와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기구가 됐고, 이들은 독일인을 외교고문으로 두며 정책을 진행했다. 아마도, 개화추진, 식산흥업에 목을 매던 당시의 관료들이 해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통리기무아문에서는 관영해운 정책을 실시했다. 영국계 해운회사 '이화양행'(중국회사다) 이라는 해운사에 부탁해 조선근처 수역을 지나는 상선들의 기항지 사이에 조선을 끼우는, 항로 연장 방식의 계약을 채결했다. 그러나 적자가 심해, 1년간 운행해보고 안되겠다 판단한 이화양행은 즉시 운항을 중단했고, 결손금을 조선 정부에 청구했다. 이를 해결하는데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들어가야 했다.

이후 통리기무아문은 독일계 기업인 '세창양행'(제물포를 기점으로 하는 무역회사다)에 300톤급 선박을 6개월간 용선(배를 빌림)하여 전라도의 조운을 담당하는 계약을 채결했으나... 재래 조운 종사자들의 심한 반발로 무마됐다.


통리기무아문은 좌절하지 않고 각 도의 조운을 담당하던 전운국에게 해운담당부서를 맡겨버린 것이다. 이에 전운국은 5척의 배를 구매, 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 사는 방법도, 관련된 방법도 전혀 모르니 그럴 수 밖에.

예를 들면 다섯척중 하나였던 해룡호는 연료손실이 곱창이 나있던 배라서 몇번 굴려보고는 처분을 결정 할 정도였다...


부족한 조정의 재정상황에서 외국차관을 끌어다가 배를 구매했는데, 경영상태가 좋지 않아서 소유권에 관한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선박 관리도 처음이라서 비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외국인 사관, 외국인 선원들을 쓰다보니 비용문제 또한 어마어마 했다. 심지어는 그 와중에도, 조선인들은 해운업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청나라의 권유로 관官이 감독하고, 민民이 운영하는 방식으로 조선 최초의 해운회사, '이운사'가 발족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이 나오는 한국 근대 해운사이지만 지금의 해운강국이 됐다는게 신기하지 않나?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음화는 안귀찮으면 써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