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한랭화 빈도가 가장 높다는 결론 : 1594-1677년 전지구적 기온 하강이 확인

몬더 극소기(Maunder Minimum)로 불리는 1645-1715년 동안 태양 흑점이 관측된 예가 드물었고 특히 1672-1702년 사이에 흑점은 단 한번 관측됨, 1630-1850년 사이에 16회의 대규모 화산 분화가 관찰되는 등 전세계적 화산 활동 증가가 소빙기를 야기한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

 

조선에서의 소빙기 영향

현종대 경신대기근(1670-71), 숙종대 을병대기근(1695-96)은 황충냉해가뭄홍수 등 이상기후가 불러온 피해로 말미암은 것이 무렵에는 한강도 더 오래 얼었고 동해까지 얼었음

 

조선 내 의식주 활동 변화

와 관련해 면화 재배 확대 → 조선 후기 이앙법 확산과 면화 등 특정 작물 재배와 긴밀한 연관 관계가 있음을 지적

이앙법을 택한 이유 → 제초 등 노동력 절감 및 아낀 일손을 담배나 면화 등 재배의 활용

면화는 무명천으로 가공되어 화폐로 사용되기도 하나대다수는 자급 목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추정

고려 말에 들어온 목화가 조선 후기에야 면화 재배가 본격화 되었다는 점은 여름철에도 동해가 얼어붙을 이상기후 현상을 그 후보에서 배제하기 어려움

 

과 관련해 해수 저온 현상과 어류 이동이 발생 → 명태대구청어 등 한류성 어종의 어획량을 증가

특히 명태는 조선 후기에 매우 흔한 생선으로 17세기 후반 소빙기가 절정에 달했을 시점에 명태 어업이 활발해 깊은 산골의 궁벽한 고을이라고 하더라도 물리도록 먹지 않는 곳이 없고’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마치 오강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음

이러한 해수 저온 현상으로 이들 물고리를 서해에서도 잡을 수 있었고 이러한 한류성 생선들은 소빙기의 풍요라는 역설을 가능케 함

 

의 변화상과 관련해 온돌 확산이 주목됨 그러나 온돌 보급 시점에 대한 이견이 존재할뿐더러 직접적 사료를 제시할 수 없는 까닭에 온돌 문화와 소빙기를 연관 지어 설명하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움

한반도에서 온돌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등장조선 전기에도 바닥을 데우고 좌식생활을 하는 모습이 등장하며 상류층은 15세기까지 침상이나 탁자를 사용하는 등 입식 생활을 주로 영위했으나 16세기 중엽 이후 사대부 계층은 물론 왕실도 온돌을 적극 도입, 17-18세기에는 궁궐 내부에 온돌이 확실히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

온돌은 이처럼 하층문화로 시작해 상층으로 올라가는 상향성을 보임온돌과 같이 하류층이 전위하던 것이 상층으로 올라가 보편화되는 것은 확실한 기점을 필요로 함 이는 이상 저온 현상이 주거 양식의 계층 간 차이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음

 

조선 후기 민간의 온돌 사용 실태

전국적인 온돌 사용은 대체로 17세기 이후이며 후기로 갈수록 구들 면적 확장고래 개수의 증가두 개 이상의 온돌방을 가진 건물이 늘어남

노비까지도 뜨끈한 구들에 몸을 뉠 수 있을 정도로 확산보급된 명확한 계기는 알 수 없으나 지속적인 이상 기후와 저온 현상이 점진적 확산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 사람들도 온돌 확산의 이유에 대해 의문이 있었음

온기를 넘어선 열기에 대한 욕구는 더 이상 말똥따위로 은근히 데우는 난방에 만족하지 않고 땔나무를 지속적으로 투입해 높은 화력을 만들어 구들에 데우기 시작함

지상식 가옥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움집 등 수혈식 주거지에도 온돌이 설치됨이는 변변한 흙벽조차 세울 여력이 없던 사회 하층민들이 온돌을 통해 이상저온 현상을 극복해내고자 했던온돌은 그들에게 최후의 생존 수단이었음 이때 온돌형 움집은 대부분 취사를 위한 부뚜막이 별도로 설치된 것을 보아 온돌 설비는 취사 겸용이 아닌 난방 전용이었음

 

조선에서 가장 뒤늦게 온돌을 일상화한 공간은 궁궐

명종대까지만 하더라도 임금의 처소에 침상이 있었고 그 아래 화로를 두어 온기를 전달함

궐내 온돌 증설을 둘러싼 논의는 인조 연간부터 실록에 등장하며 마루와 비교해 온돌이 난방에 쓰는 연료가 더 많다는 점은 이미 설치한 온돌을 줄여야 한다는 기록 등으로 당시 궁궐 건물에 온돌이 확대되던 시점의 여러 시선을 반영하고 있음

땔나무 수급에 부담을 느낀 시기에는 왕이 직접 온돌 규모를 줄이기도 했으나 숙종대 이후 온돌 축소를 주저하게 되고영조는 임금 스스로가 건강을 위해 온돌방을 즐겨 찾음

송시열은 평소 온돌 사용에 비판적이었고 자신도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을 고수때문에 궁중에서 유행하는 온돌방은 달가워 하지 않음그래서 온돌을 마루로 다시 바꾸자는 그의 요청은 숙종이 끝내 거부했으며 궐내의 온돌 사용은 이미 대세로 굳혀짐

인조 시절에 승정원이 직접 궐내 온돌 사용을 비판했다가 영조 시기에 의례 준비를 위해 세워진 가건물에 승정원 등에서 온돌까지 설치해 담당 승지를 파면시켰다는 기록도 있음

 

조선은 山林川澤 與民共之(산림천택 여민공지)를 표방해 숲을 민간에 개방하고 전국 주요 산지 일부만을 금산/봉산 등으로 설정해 출입을 제한함

개방된 숲에서는 자유롭게 임산물을 채취 가능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숲 이용을 위해 꾸준히 숲을 가꾸는 작업이 수반되었고조정은 경국대전 공전에 관련 조항을 마련해 도성과 지방 모두 나무를 심고 돌볼 것을 당부함

1785년 완성된 대전통편에는 지방 고을 사람이 사사로이 소나무 1천 그루를 심어 재목이 될 수 있게 기른 자는 해당 수령이 직접 살펴 관찰사에게 보고논의해 상을 준다” 명기함

오히려 위 같은 내용은 임산물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증

일례로 한성부는 도성의 四山에 소나무 심기를 주도하나 만인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고 거역하는 호수가 7-8할에 이르렀다고 함

대전통편 편찬 시절에도 달라지지 않아 정조는 1개의 도나 고을에서도 조정의 명을 받들어 시행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한탄함

 

초창기 온돌은 말똥 등을 태우며 미열을 가하는 정도로 활용

17세기 이후로 땔나무를 넣어 불길을 오래 지속시켜 구들을 데우기 시작 때문에 적정 온도 이상으로 유지하려면 많은 양의 연료를 필요로 함

이는 지역이나 계층 무관하게 온돌 사용이 땔감 소비량을 증가시켰음을 의미함

 

조선은 국초부터 경기 백성들로부터 숯과 땔감을 수취해 중앙 관사의 연료 소비에 충당함

전기의 땔나무는 주로 옷을 다리거나 누에를 기를 때 활용된 것으로 보임

아직 구들을 도입하기 전목재를 대량 소비하기 이전에도 서울 땔나무 값이 비싸다는 지적을 한 기록들이 있음

영조대는 수백 년 이래로 봉산과 사산을 막론하고 모두 민둥산이 되어 전보다 10배 이상 비싸졌으며” 정조 연간에는 근래 땔나무를 이어대는 것이 매우 어려워 옛날 8-9냥에 사던 것이 지금은 30-40냥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대목도 등장함

이미 16세기 초에는 도성 인근에 나무할 곳이 없어 급기야 연산군은 땔나무를 마련하려고 경국대전에서 벌목을 금하는 四山에서 소나무를 베어 올 것을 명하기도 함

 

17세기 이후 중앙의 주요 땔감 소비처는 단연 온돌임

중앙에서는 시탄을 조달하는 공인인 기인들에게 필요한 수량을 하달이에 대한 값을 치르는 방식으로 땔감 수요를 충당코자 함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기인에게 요구하는 수량이 늘어나는 반면지급하는 값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인근에서 마땅히 목재를 구할 길이 없어 기인들의 반발이 심해짐

온돌은 이미 궁궐 내 처소 곳곳은 물론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는 봉안소와 주요 관서에도 들어선 상태였음

선혜청정례에 따르면 왕이 거처하는 대궐에는 여러 종류의 땔감이 조달되었고 그 중 온돌용 땔나무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 1년 내내 3일 간격으로 대궐에 딸린 구들을 덥히는 데 쓸 소목이 올려졌는 데 그 양이 연간 16,074근에 달하였음 이는 수라간상고 등에서 조리용으로 사용되는 땔감을 모두 합해도 온돌용 소목에 견주지 못할 정도였다고 함

 

중앙의 땔감 소비가 늘어난 만큼한성부에 거주하는 민인들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땔나무 조달이 점차 어려워짐

사람들은 점차 四山에 설치된 금표를 넘어 몰래 나무를 벌목하거나 경복궁 담장 안에 쓰러져 있는 소나무를 훔쳐가기까지 함 이때 정조는 이웃에 사는 양반이나 천민들이 온돌을 데울 거리를 구할 때 궁장 안의 소나무가 아니면 어떻게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겠는가라며 용서해줄 것을 명함

17세기 한양에 처음 등장한 시목전은 당시 땔감 수요 증가 상황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됨

 

대개 온돌은 취사를 위한 아궁이를 포함하므로온돌이 보급된다하더라도 이것이 땔나무 소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음

그러나 17세기 이후 최소한 한성부에서는 한 집에 2개 이상의 온돌방을 놓는 사례가 늘어났고 이는 취사 겸용 이외의 난방용 땔감 소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표임

18세기 기록들에서도 온돌용 땔감과 취사용 땔감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음

일성록에서 구들을 데우는 데 쓰는 땔나무가 취사용 땔나무보다 훨씬 많았음

 

한성부를 둘러싼 四山에 심었던 나무들은 양란을 거치며 훼손되고 소빙기에 확대된 온돌 아궁이로 수없이 던져짐

재해와 기근을 피해 이주한 유이민 등을 수용하고자 산비탈이 개간되며 도성 인근의 산은 점점 더 헐벗기 시작함

더욱이 이상 저온 현상으로 수목 생장 자체가 제약을 받는 상황이었음

16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동해안 지역 잣나무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1700-30년대의 7-8월 평균기온이 특히 한랭해 나이테 너비가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으며이러한 기후 환경에서는 식목 활동의 효과도 기대하기 힘들어 오로지 남아있는 목재가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음

 

소빙기 특징은 단순 평균기온이 낮아지는 데 그치지 않고 불규칙한 기후 패턴을 보임

그 영향으로 16-18세기 조선은 잦은 자연 재해가 발생했고 특히 홍수 피해가 심각했음

같은 시기 중국 광둥 지역에서 잦은 태풍이 발생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17세기 이상기후 상황에서 중국으로 빈번하게 상륙한 태풍의 영향으로 다량의 수증기가 한반도에 유입홍수의 빈도와 크기를 증폭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음

황폐해진 산림에 대량의 폭우가 쏟아지면 필연적으로 토사유출이 발생함평시 토사 유출률은 모래인 곳에서 가장 높고 활엽수림침엽수림 순서로 낮아지며이러한 산림 유출 조절 기능은 비가 올 때 더 확연히 차이를 보임

1910년 기준 전체 산림의 79%가 치수 발생지와 무립목지로 구성될 정도로 산림황폐화는 심각했음

산에 식생이 소실되어 표토가 노출되며 강우가 직접 토양에 도달토양 공극을 빠르게 포화시켜 표면으로 물이 유출되므로 유량이 증가하게 됨 이 경우 홍수 및 산사태 피해 위험 노출이 커짐

산으로 에워싸인 한성부도 토사유출로 신음하며 모두 민둥산이 된 四山에서는 모래와 자갈이 흘러내렸고 이는 물길을 막았으며 특히 도성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에는 지속적으로 흙이 쌓여 개천으로서의 성격을 잃을 지경에 다다름

 

1492년 태종대 도성 내에 물길을 만들기로 하여 개천의 본류를 만들었음 이때 삼남지방에서 5만 명 이상의 백성을 동원해 종묘동 어귀부터 문소전과 창덕문 앞까지를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부터 수구문까지는 나무로 방축을 쌓았으며대광통소광통 등의 다리를 모두 돌로 쌓음

조선시대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대략 24개 정도였다고 함

경복궁 서북쪽 백운동에서 발원한 청풍계천을 본류로 도성 안 백악인왕남산매봉 등에서 흘러나온 지류가 모여들게 됨

당시 개천은 평소에는 유량이 많지 않아 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內四山에서 물이 흘러와 비로소 흐르게 됨

사방에서 모두 물이 흘러 모이므로 토사유출에 더욱 취약한 구조였음

청계천의 또다른 특징은 서출동류한다는 점이었음우리나라 하천이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데 비해 청계천은 거꾸로 흘렀는데 도성 내 동쪽이 서쪽보다 다소 낮았기 때문임

강우량과 수위 변동을 계산해 물길 방향이나 하상 깊이를 조절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비가 내릴 때 개천 수위가 훨씬 빠르게 높아졌고 퇴적된 토사와 빈번한 홍수는 자연히 하천의 범람을 야기했음

 

이에 18세기 영조대에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작업이 이루어짐

당시 도성은 사토가 개천을 막아 개천의 중심이나 연안이 모두 평평하여 크고 작은 다리도 10개 중 8-9개가 막히고 1-2개가 작은 도랑으로 겨우 물길이 통하였다

영조는 준천에 대한 의지를 밝히며 개천가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고 마음대로 경작하기 때문에 모래와 자갈이 흘러 개천에 쌓이기 때문이라 지적함

1760년 준천사업은 57일간 진행되어 한성부민 15만 명과 추가 역군 5만여명이 동원됨

준철사절목에는 四山 벌목을 금지하고 잘 보호하는 것이 근본과 결과를 동시에 다스리는 정책이라고 당부함

 

18세기 준천 당시 퍼낸 토사 양은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백만 석에 이르렀다고 함

그 결과 개천 근처에 커다란 가짜 산이 만들어짐

청계천 인근 토층 발굴 결과준천 당시 퍼올려진 토사 대부분은 개천 주변에 넓게 깔렸다고 함 그 결과 조선 전기 도로면에 비해 주변 지대가 1m 가까이 높아짐

 

이미 임계점을 넘은 도성 주변 산지 황폐화는 식생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

영조 스스로가 자신의 3대 치적 중 하나로 꼽았고 그 효과가 100년은 갈 것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청계천은 계속 막히고 범람해 고종대까지 꾸준히 준천 작업이 재개됨

20세기 초 통감부 관점에서 청계천은 불결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여겼고 상류 유역에 식재를 서두른 것은 도시 위생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었음

1906년 당시 청계천 발원지는 심하게 황폐해져 화강암질 미풍화토로 이뤄진 데다 식생이 거의 없는 민둥산은 늘 토사가 무너져 내리고 기암이 노출된 상황이었음

한국 최초의 사방복구조림사업대상지가 창의문 인근 산지로 지정된 사실은 조선 후기 도성을 둘러싼 四山의 황폐화가 얼마나 심각했는 지를 짐작케 함

 

1910년대 후반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음 청계천 바닥은 거의 지면 높이에 도달할 정도로 토사가 퇴적되어 있었음

일본인의 시각에서 조선의 산림 황폐화를 가져온 주요 원인은 온돌이었음

일본은 온돌이 문명과 근대화에 역행하는 문화이므로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고 푸르른 산림이 문명국가의 한 단상을 여겨졌던 시기이기에 황토빛 조선을 녹화시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일본 당국의 큰 과제였음

총독부는 조선 난방 연료 소비량을 조사이를 절약하면 산림 조림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함

이에 따라 당국은 온돌개조론을 주장한 掛場定吉의 글을 소책자로 찍어내 배포하고 실제로 분구개량사업을 실시하기도 함

그러나 온돌은 단순히 전근대사회의 유산이 아니었고 그것은 전세계적 소빙기 속 수 세기에 걸친 기후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음


출처 : 김소라, 2022 「불과 물 : 조선후기 이상저온 현상 속 한성부의 온돌 확산과 청계천 준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