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은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전후 수많은 책임이 오가는 논쟁중 어느 음모론이 패전한 독일에 퍼지게 되었다.


"독일은 배후에서 유대인들이 전쟁 수행을 방해했기 때문에 졌다."



일명 배후중상설 혹은 등 뒤 찌르기 신화(Dolchstoßlegende)라 부르는 이 음모론은 소극적으론 유대인들이 병역기피를 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론 아예 음지의 권력을 쥐고 있는 부유한 유대인이 독일의 경제를 몰락시키며 전쟁 수행을 방해했다는 등 다양한 부류가 존재했다.


현대에도 배후중상설은 그 대상이 유대인에서 소수민족 혹은 이민자들로 바뀌었을 뿐 이들이 불법적으로 특혜를 누리거나 혹은 음지에서 사악한 계획을 저지른다는 식으로 혐오 정서를 재생산하는 식으로 비슷한 음모론들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배후중상설에 담겨있는 반유대주의를 염두하더라도 소극적인 가설인 '유대인의 병역 기피'는 어떤 근거가 있던 것은 아닐까? 과연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 독일계 유대인들은 병역기피를 했을까?


독일의 어머니들에게!

An die deutschen Mütter!

12,000명의 유대인 군인들이 조국을 위해 전장에서 명예롭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12.000 jüdische Soldaten sind für das Vaterland auf dem Felde der Ehre gefallen.

기독교인과 유대인 영웅들은 함께 싸웠으며 외국의 땅에서 함께 안식을 맞이했습니다. 12,000명의 유대인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Christliche und jüdische Helden haben gemeinsam gekämpft und ruhen gemeinsam in fremder Erde. 12.000 Juden fielen im Kampf! 

정당의 맹목적인 혐오는 죽은자의 무덤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Blindwütiger Parteihass macht vor den Gräbern der Toten nicht Halt. 

독일 여성들은 유대인들의 어머니가 고통속에서 조롱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Deutsche Frauen, duldet nicht, dass die jüdische Mutter in ihrem Schmerz verhöhnt wird.


제국 유대인 참전 용사 협회 / Reichsbund jüdischer Frontsoldaten


그러나 '쥐'를 비롯한 여러 창작물에서도 묘사되는 한 편 공식적인 문서 및 전후 독일계 및 독일 점령하의 유대인들이 남긴 회고록등을 통해 당시 독일계 유대인들은 병역기피는 커녕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후대의 나치가 선전하던 '순수한 아리아인'보다 적극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증거를 확보할수 있다. 이들은 징집되어 참전한 경우도 있지만 유대인이 사회적으로 비 유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 입대한 경우나 경제적인 이유 혹은 단순히 애국심으로서 참전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나 독일 지역의 경우 1871년 유대인 차별 금지령이 법적으로 선포되면서 자신은 독일인이란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들이 늘어난 것도 큰 이유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인 1880년에서 1910년 사이 비록 법적인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진급등의 절차에서 독일인들에 비해 차별을 받았으나 최대 30,000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프로이센군에 복무했으며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땐 12,000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징집 및 입대를 했으며 이후 1918년까지 총 10만명의 유대인이 독일 제국군에 복무했다. 1914년 당시 독일 제국군이 약 794,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단걸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이들이 독일을 위해 복무했음을 알수 있다.


이중 70,000명이 최전선에서 복무했으며 12,000명이 전사했다. 전쟁 중 약 18,000명의 독일계 유대인들에게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으며, 그 중 1,000명은 1급 훈장을 수훈받기도 했다. 빌헬름 2세의 개인적인 차별로 인한 인선이 있었지만 장교 또한 바이에른(제 6군)에 한정해서 예비역 장교로 복무할수 있었다. 이렇게 복무한 유대인 장교는 약 3,000명 정도 되었다.


프리츠 베크하르트 (Fritz Beckhardt)
빌헬름 프랭클 ( Wilhelm Frankl)


또한 프리츠 베크하르트, 빌헬름 프랭클 같은 전투기 조종사이자 에이스로서 뛰어난 전공을 쌓은 이들도 있었다. 이중 빌헬름 프랭클은 독일 제국에서 최고의 명예라 할수 있는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erite) 군사훈장을 수훈 받기도 했으며 유대인이란 출신에도 불구하고 황제였던 빌헬름 2세를 두번이나 만나 전공을 치하받는 명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1917년 전사했다. 프리츠 베크하르트는 전후에도 생존했는데 전간기와 나치당의 집권 이후 SS에 의해 공적이 말소되며 심지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그러나 프리츠의 전쟁영웅이란 업적 덕분인지 혹은 루머에 따르면 그의 전우였던 헤르만 괴링의 안배로 석방될수 있었고 이후 전쟁이 끝날때까지 영국으로 망명했고 1962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오토 하인리히 프랑크(Otto Heinrich Frank)

그 역시 1914년 징집되어 육군 예비역 중위로 전역한 복무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독일계 유대인들은 병역기피는 커녕 많은 수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으로서 혹은 제국의 신민으로서 목숨을 바쳤다. 그 동기가 애국심이었든 혹은 참전함으로서 제국내에서 소수민족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였든 12,000명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그 어떤 감사도 추모도 아닌 '만들어진 증오'였다. 유대인들의 참전 기록은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비롯해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던 군부에 의해 묵살되었고 그들의 전공은 부정되었다.


옛 전우들중 일부만이 이 선동에서 그들을 옹호하며 보호해줬고, 참전용사들도 제국 유대인 참전 용사 협회(Reichsbund jüdischer Frontsoldaten / RjF)를 만들며 극우세력의 흑색선전에 대항했지만 제국 유대인 참전 용사 협회도 1938년 나치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참전용사들은 수정의 밤때는 돌격대의 린치에 고통받았고 훗날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독일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준 자들에게 등 뒤에서 배신당해 희생되었던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들 '위대한 독일의 애국자들'(https://www.spiegel.de/geschichte/juedische-soldaten-im-ersten-weltkrieg-a-975473.html)